글쓴이 : 정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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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나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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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방을 소홀히 하면 나라가 패망하게 된다. 5대 혼란을 수습한 절도사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웠지만, 전쟁의 폐해를 실감하여 문치주의를 편 결과 국방은 크게 쇠약해졌다. 야만족이라고 깔보던 여진족의 침략을 받고 강남으로 쫓겨가면서 형제 관계를 맺고 조공하다가 몽골이 여진을 멸망시키자 다시 몽골에 복속되어 휘종과 흠종 황제가 포로가 되고 남송마저 멸망했다. 태조 왕건도 후삼국 시대의 패권정치를 혐오하여 문치주의를 내걸고 무신을 천시하더니, 정중부 등의 정변으로 약 100년 동안 고려는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다.

    무신의난은 고려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분수령이 되기도 하는데, 이때 대륙을 통일한 몽골은 고려에 왔던 사신 저고여가 귀국하던 도중에 살해당한 것을 트집 잡고 고려를 쳐들어왔다. 몽골군이 개경까지 쳐들어오자 고려가 강화를 요청하여 몽골은 개경과 평안도 일대에 다루가치 72명을 배치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몽골과의 강화는 본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려는 항전태세를 갖추고 강화로 천도하니, 몽골은 7개월 만에 다시 쳐들어왔다. 이렇게 전후 일곱 차례 몽골의 침략으로 국토는 전쟁터로 변하고, 부인사 판 대장경과 황룡사 9층 목탑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강화로 파천했던 고려는 무신정권의 마지막 실력자 최의가 김준에게 피살되면서 1270년 원종이 개경 환도를 단행하니, 28년간의 몽골과의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고려는 1170년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무신정변을 일으킨 지 100년 만에 몽골의 식민지가 되었다.

    말이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이지 개경에 다루가치가 내정을 간섭하는 속국이었다. 왕은 조종(祖宗)의 시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원에 충성한다는 의미에서 충(忠)을 붙이고 왕(王)이라고 호칭하게 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왕이 사용하는 용어도 크게 격이 낮아졌고, 관제도 원의 지방 관제가 되어서 중서문하성은 첨의부, 추밀원은 밀직사, 어사대는 감찰사, 6부는 4사로 관직이 격하되었다. 관리들은 전부 몽고풍으로 변발하고, 몽골식 이름을 사용해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원나라 공주가 낳은 아들로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고, 왕자는 연경에서 살다가 부왕이 죽으면 귀국하여 왕이 되었으니, 고려 풍습을 익힐 기회가 없이 몽골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한편, 고려는 매년 처녀들을 공녀로 뽑아서 보내고, 매사냥을 즐기는 몽골인을 위하여 매(海東靑)를 잡는 관청 응방(鷹坊)을 설치하는 등 인간 이하의 만행을 강요당했다.

    그런데, 1272년 원종은 3년여에 걸친 삼별초난을 진압해준 몽골에 사례하러 원의 수도를 찾아갔을 때, 몽골의 신임을 확실하게 보장받으려고 세자 왕심(王諶)과 원 황실과의 혼인을 요청했다. 결국 세자 왕심과 황제 쿠빌라이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가 혼인하게 되었지만, 세자는 고려에 부인과 1남 2녀의 자녀가 있는 39살의 중년이었다. 또, 제국대장공주는 불과 16세이었으니, 정략결혼이었음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원종이 고려로 돌아온 이듬해 죽자 연경에 있던 세자 왕심이 귀국하여 장례를 치른 뒤 임금이 되니, 충렬왕이다.

    충렬왕에게는 세자 시절에 혼인한 왕비와 자식이 있었지만, 연경에서 혼인한 18세의 제국대장공주가 정비가 되었다.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을 깔보고 임금의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또, 몽골인 수행원을 많이 데리고 입국했는데, 이들은 공주의 배경을 믿고 횡포를 부렸다. 또, 일상 회화도 몽골어로 해서 고려에 몽골어와 몽골 풍습이 크게 전파되었다. 이들을 겁령구(怯怜口)라고 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쿠릴타이(忽刺歹)였다가 연안이씨 시조가 된 이인후(李印侯)와 아라비아인이었다가 몽골에 귀화하여 삼가(三哥)라고 했다가 다시 덕수장씨 시조가 장순룡(張舜龍)이었다. 또, 티베트의 하서국(河西國)인 식독아(式篤兒)는 노영(盧英)이라고 했는데, 이들은 모두 충렬왕으로부터 벼슬과 토지를 받고 성도 하사받았다.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장(璋)이 3살 때 세자로 봉해지고, 연경에서 살다가 계국대장공주와 혼인했다. 그런데,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세자의 혼인식에 참석하러 연경에 갔다가 귀국했는데, 귀국후 보름 만에 39세의 제국대장공주가 죽었다. 모후의 죽음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한 세자는 아버지 충렬왕이 후궁 무비(無比)를 편애한 탓이라며, 무비와 무비가 총애하던 40여 명을 죽였다. 그리고 젊은 과부 숙창원비를 충렬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제국대장공주와 무비를 잃은 충렬왕은 실의에 빠져 원의 세조에게 양위를 요청하여 세자가 즉위하니, 몽골계 첫 혼혈아 임금 충선왕(忠宣王)이다.

    연경에서 태어나 연경에서 자란 혼혈아 충선왕은 고려왕이 되었지만, 허울만 고려 임금일 뿐 고려 언어와 풍습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또, 계국대장공주와 금슬도 좋지 않아서 불화가 잦더니, 결국 계국대장공주의 탄원을 들은 원의 세조가 충선왕을 즉위한 지 7개월 만에 물러나게 했다. 충선왕은 연경으로 돌아가고, 아버지 충렬왕이 다시 왕이 되었다. 한편, 원에 머물던 충선왕은 원의 무종(武宗)이 즉위하는 데 공을 세운 대가로 심양왕이 되었다. 고려에서 아버지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다시 왕에 복위하니 홍복원의 손자들은 원의 조정에 충선왕이 고려왕과 심양왕을 겸하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고려에 행성(行省)을 세우자고 했다. 그러나 고려에서 행성 설치에 맹렬한 반대가 일어나자 원의 인종은 행성 논의를 금하는 조서를 내렸다.

    당시 요동 지방은 고려의 유민과 전쟁포로들이 많이 살던 지역으로서 몽골 침략 때 평안도에서 몽골군의 앞잡이가 된 민족 반역자 홍복원 후손들이 요양(遼陽)을, 고려 왕족인 왕준(王綧)과 그 후손들이 심주(瀋州)를 각각 통치하다가 충선왕이 심양왕이 되니 갈등이 커졌다. 사실 원나라는 왕족· 부마들을 제왕(諸王)으로 봉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심양왕은 제왕 서열이 39위로서 41위인 고려왕보다 상위에 있었다.심양왕과 고려왕을 겸한 충선왕은 고려로 돌아가기 싫어서 1398년 7월부터 1313년 3월까지 5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오지 않은 채 연경에서 전지(傳旨: 신하들에게 내리는 명령)만을 보내며 고려를 다스렸다. 신하들이 수차 귀국을 간청하고, 원 조정에서도 귀국을 명하였으나 그대로 머물러 있었으니, 이것이 어찌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도리이며 행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몽골의 피를 이어받은 충선왕은 몽골 출신 왕비 이외에 여러 후궁을 거느렸지만, 대호군 정자우(鄭子羽)의 아내 최씨를 불러 동침하기도 하고, 종친과 결혼했던 과부를 후궁으로 맞는 등 난행은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부왕에게 후궁으로 보냈던 숙창원비 김씨를 숙비로 삼기도 했다. 1313년 6월 일시 귀국한 충선왕은 둘째 아들 강릉대군 왕도(江陵大君 王燾: 충숙왕)에게 양위하고 다시 원나라로 갔다. 그리고 연경의 저택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운 뒤 많은 서적을 수집하고, 조맹부 등 원의 문인들과 교유했다. 고려에서 이제현을 불러 조맹부의 글씨체와 서법이 이제현을 통해서 고려에 널리 퍼졌다. 충선왕은 심양왕의 자리를 조카에게 물려주고 연경에서 죽었는데, 사후에 개성 서쪽 덕릉(德陵)에 묻혔다. 그가 과연 고려 임금이었을까 몽골족의 후예였을까?

    한편, 충숙왕은 심양왕 고(暠)의 참소로 즉위한 이듬해 원에 불려가 국왕인을 빼앗기고 억류되었다가 원나라 영종이 살해되고 태정제(泰定帝: 晉宗)가 즉위하자, 국왕인을 돌려받고 귀국했다. 충숙왕이 죽자 또다시 심양왕과 충숙왕의 아들 충혜왕과 대립했는데, 이때는 무력 충돌을 일으킬 만큼 치열했다. 1345년 심양왕 고가 죽자 심양왕 직위는 공석으로 있다가 9년 뒤 그의 손자 독타불화(篤朶不花: 脫脫不化)가 물려받았다. 공민왕이 후사없이 죽자 원나라는 심양왕을 고려왕으로 봉했지만, 원나라 세력이 쇠퇴하던 시기라서 성사되지는 않았다. 이게 나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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