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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미도르 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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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는 1830년, 1848년 등 수많은 혁명을 겪었지만, 구체제(Ancient Regime)를 변혁시킨 1789년의 혁명을 다른 혁명과 구별하여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한다. 절대주의 루이 16세 시대에 벌어진 프랑스 대혁명은 사치와 낭비로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루이 16세가 소집한 삼부회(三部會)에서 비롯하는데, 삼부회는 귀족계급과 시민계급의 대립에서 시민계급이 주도권을 가졌으나 시민계급은 다시 유산계급과과 무산계급이 대립했다. 주도권을 쥔 무산계급은 다시 급진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다가 마침내 급진좌파가 온건파에게 숙청된 테미도르 반동(Thermidorian Reaction)으로 끝났다. 테미도르 반동이란 프랑스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熱의 달)에 급진좌파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하여 혁명광장(파리 콩코드광장)에서 단두대로 처형으로 사태가 역전된 것을 말한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궁전을 웅장하게 짓고, 루이 14세에 이은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매일 밤 파티로 농민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 게다가 적대국인 영국에서 독립하려는 미국의 독립전쟁에 20억 루브르를 지원했다. 이 액수는 프랑스 국민 700만 명의 식량을 해결할 수 있는 큰돈이었으며, 1789년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45억 루블에 달했다. 당시 연간 재정수입이 약 5억 루블 정도였으니, 국가채무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루이 16세는 귀족계급에 증세안을 제시하였지만 거부되자, 1614년 이래 소집된 적이 없는 삼부회를 소집했다. 당시 신흥 상공업자들은 부를 축적했지만, 그에 걸맞은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얻지 못했다. 반면에 전체 인구의 5%에 불과한 귀족은 농경지의 80%를 독점하고, 고위 관직을 독점하여 시민들의 불만이 컸다.

    이런 상황에 1789년 봄 선거에서 제3신분 600명, 귀족 대표 300명 및 성직자 대표 300명을 선출했는데, 5월 5일 베르사유궁전에 소집된 삼부회는 의결 방법부터 신분제별로 가중치를 둘 것인지 머릿수로 결정할 것인지부터 대립했다. 제3신분 대표들은 회의가 열리지 않자 6월 20일 성직자 대표와어 새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단결한다는 테니스코트의 서약을 맺었다. 그러자 루이 16세는 귀족과 성직자 대표에게 국민의회에 참가할 것을 지시하니, 삼부회는 사라지고 국민의회(國民議會)가 등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국왕은 진심으로 개혁을 바란 것은 아니어서 즉각 베르사유궁에 3만 명의 군대를 소집했다. 위험을 느낀 시민대표들과 파리 시민들은 무력 탄압으로부터 국민의회를 지켜야 한다며, 7월 14일 국왕의 폭정을 상징하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결국 루이 16세는 삼색 모표를 달고 파리에 나타나고, 국민의회는 ‘봉건제 폐지’와 앙시앵 레짐의 모순과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불가침, 압제에 저항할 권리 등을 천명하는 ‘인권선언’을 채택하니, 이것이 프랑스 대혁명이다.

    그러나 루이 16세와 귀족 세력은 이 의결을 모두 거부하니, 10월 5일 파리 시민들은 빵을 요구하며 베르사유로 행진하고 루이 16세의 거처를 파리로 옮겨왔다. 파리 시민들이 국왕을 감시하고, 국민의회를 보호하는 상태에서 국민의회는 수도원을 해체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모든 성직자를 선출제로 바뀌었다. 또, 길드를 폐지하여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추진하고, 행정과 사법제도 등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자 1791년 6월, 위기를 느낀 루이 16세와 왕비가 오스트리아로 탈출하다가 바렌에서 체포되어 파리로 송환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치지 않는 반혁명에 대한 처벌은 점차 과격해졌다.

    1791년 9월 국민의회는 입헌군주제 헌법을 제정하고, 새 헌법에 따라서 입법의회(立法議會)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새 헌법은 종래 국왕과 귀족계급에서 세금 납부에 따른 유산시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여 정도여서 무산시민을 기반으로 하는 자코뱅파의 불만을 샀다. 그러자 입법의회는 왕권을 정지시키고 보통선거에 의한 국민공회(國民公會) 소집을 결의했다. 이때 가난한 시민을 대변하는 변호사로 인기를 얻었던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de Robespierre: 1758 ~1794)가 등장한다. 그는 1789년 3월 아라스에서 제3신분 대표 8명 중 5번째로 뽑힌 그는 삼부회에서는 아무런 직책도 얻지 못했지만, 1791년 6월 4일 무산계급의 참정권을 규정한 국민공회에서 30세의 젊은 변호사 로베스피에르는 220표 중 216표의 지지로 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민공회가 공화정을 선포하고 다음 해 1월 루이 16세를 처형시키니, 프랑스의 혁명에 무관심했던 유럽의 군주들은 프랑스혁명의 영향이 자국에 전파될 것을 두려워하여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제 프랑스는 국내의 반혁명분자를 처단하는 이외에 외국과의 전쟁에 휩싸이게 되어 1792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하니, 전국 각지에서 의용군이 모여들었다. 한편, 공안위원회는 모든 시민에게 반혁명 분자를 고발하고 치안판사에게 데려오는 권한을 줌으로써 기소. 고발 절차가 간소화되고, 심증만으로 유죄 처벌을 할 수 있었다. 또, 프랑스혁명에 동참하지 않은 성당을 폐쇄하고, 징집령에 불응한 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했다. 이러한 공포정치를 정당화하는 공포정치법으로 처형된 사람은 반혁명파, 왕당파, 귀족뿐만 아니라 노동자, 소작인, 상공계층 등 다양한 신분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반대하는 귀족, 사제, 부르주아 등 이른바 반혁명 분자들은 외국으로 망명했다. 자코뱅당 당수이자 국민공회 의장인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파 단체와 자경단을 동원하여 반혁명 세력 척결에 노력했지만, 그에게는 많은 적이 생겼다. 반혁명 세력들은 로베스피에르의 평등주의 사상을 비난했고, 민중은 그가 과감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자코뱅당 내부에서도 당통은 가혹한 사형을 중지하자고 했지만, 로베스피에르는 그를 반역자라며 단두대에서 처형했다. 루이 16세를 처형한 지 1년 만에 17,000명을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리옹에서는 25만 명이 처형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그가 실각하게 된 7월 27일까지 1개월 반 동안 사형된 자만도 1,376명에 육박했다. ​마침내 혁명력 2년 테르미도르(熱의 달) 9일에 온건파는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하고, 다음날인 7월 28일 동료 생쥐스트, 쿠통, 오귀스탱 등 108명과 함께 지금의 콩코드광장인 혁명광장에서 처형했다. 이것이 테미도르 반동(反動)이다.

    로베스피에르 처형 이후 혁명재판소는 해산되고, 공안위원회의 권한도 극도로 축소되었다. 1795년에 제정된 새 헌법은 유산계급을 중심으로 하는 5명의 총재가 주도하는 총재정부(總裁政府)가 출범했지만, 총재정부는 대외전쟁과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렸다. 국민은 총재정부에 실망하고 강력하고 군사 지도자를 기대하는 여론에 편승하여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총재정부가 무너지고 나폴레옹의 독재정치가 시작되었다. 프랑스혁명은 유럽 사회에 자유와 평등사상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시민계급이 정치 권력을 장악한 전형적인 시민 혁명이다. 2017년 봄 촛불집회로 구정권을 무너뜨린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로 출범한 현 정부는 무주택자들에게 내 집 마련을 위한 부동산정책의 잇단 실패와 청와대 참모를 비롯한 고위층의 부정과 비리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적폐청산인지 급진좌파적 행동인지 모르겠지만, 새해에는 더 이상의 혼란이 없이 시민 평등의 사회가 열렸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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