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유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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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 對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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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화 對話

    인간 관계에 있어서 상대방은
    그 상대방의 고독의 핵심 속으로 뚫고 들어가
    거기서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 B. A. W. 러셀

    그 무렵 심학무는 국정원의 높은 분인 북한 담당 모 국장과 면담하게 되었다. 그 국장은 50대 초중반으로 보였는데 165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키에 머리칼은 점점 빠지고 있었으며 귀 뿌리 주위 촘촘한 머리는 희끗희끗했다. 닳고 닳은 아주 노련한 조사관 출신처럼 보였지만 권위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장 차림이 아니라 청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평상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아늑한 응접실 소파에 앉아서 잡담하는 식으로 대화를 나눴다. 그 국장은 사나이끼리 터놓고 이야기하는 데는 커피보다는 술이 좋다고 하면서 21년산 발렌타인 양주와 얼음 조각이 든 얼음통, 술안주를 내놓았다. 그는 술잔에 술을 따른 다음 얼음을 채워서 건배를 하였다.
    그 국장이 말했다. “이거 북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술이야. 정찰총국장도 어디서 겨우 한두 번 얻어 마셨을 거야. 우리끼리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고. 술을 마시면 혀가 풀리니까 술에 취했을 때 진심을 털어놓는 경우가 많은 거야.
    하지만 이건 수사하는 게 아니야. 조서를 작성하는 게 아니니까 우리 자유스럽게 대화를 하자고……. 피차간에 궁금한 게 많을 거 아닌가.
    대부분의 남자들은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못하면서 많이 마시는 것처럼 자랑을 하는데 그러나 술을 마셔보면 금방 들통이 나고 말아.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자연스럽게 마시자고.
    우리 편안하게 이야기하자고. 친구처럼…… 20살 이상 차이가 나니까 그건 그렇고. 그러니까 편리하도록 사회에서 만난 형님처럼 생각하라고. 그래서 말인데 내 말이 오락가락하면서 옆길로 샐 수도 있어.”
    심학무는 어리둥절했지만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런 고급 술은…… 처음 구경하지요.”
    “하나원에서는 마음 놓고 담배 피우기도 어려웠을 거야. 규칙이 그러니까. 담배는 원기를 북돋아 주니까 기분을 좋아지게 하지. 이거 한 번 피워 보지. 미제 말보로 골드인데 이게 조금 순하긴 하지만 맛은 일품일걸. 북쪽 담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걸.
    스파이들은 대개 골초야. 환경이 그렇거든. 오랫동안…… 긴 시간을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단 말이지. 기다리는 게 우리의 운명이야. 긴장을 풀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야 하니까 그때는 담배가 최고야. 담배는 진정제 역할을 톡톡히 하지. 남쪽에서는 건강 운운하면서 국가적으로 금연 운동을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지.”
    “그렇습니다. 저는 담배 없이는 못살 거 같습니다. 탈북하면서 버스나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담배부터 피웠거든요.”
    “그래 뭐니 뭐니해도 담배는 마약이라고 할 수 있지. 한번 중독되면 빠져나오기가 어려워.
    지친 기색이야. 더운 여름에 조사받으면서 얼마나 초조하고 불안했겠어. 그렇지 않은가. 지금 정신이 산만해서 제정신이 아닐 거야. 이 술로 잠시나마 그런 것들을 해소하라고. 그런데 밤에 마셔야 제맛이 나거든. 술은 진정제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거든. 뱃속을 편안하게 해줄 거라고.”
    “이미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말이야…… 나는 고향이 전라남도 고흥이야. 아주 남쪽이지. 면사무소에서도 십 리를 더 들어가는 바닷가인데 지독한 산골이거든. 정말 너무 가난한 동네였어. 모두가 가난했다니까. 나는 학교 다니면서 점심을 먹어본 적이 없어.
    당신 역시 산골 중의 산골인 함경도 갑산 출신이던데……?”
    “지금은 양강도 갑산군입니다. 억지로 쪼개서 함경남도와 함경북도 사이에 양강도를 만들었어요. 그래서 갑산은 함경북도 길주와 붙어 있어요.”
    “언제부터 갑산에 살았지?”
    “저는 증조부 때 일은 잘 몰라요. 할아버지 때부터…… 제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한테서 들었습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해방이 됐을 때 얼마쯤 되었을까.”
    “아마 40대 초반쯤 되었을 거예요. 할머니가 두 살인가 세 살 위인데 할머니는 길주 출신이에요. 할아버지는 아마 글을 읽을 줄 몰랐을 겁니다. 그래도 가난한 농민 출신이니까 의식이 있어서 일제 강점기 때부터 좌익 사상에 빠져 농민조합에 가입하였답니다. 그 때문에 경찰서에 들어가 며칠 동안 매를 맞고 나서 풀려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글자를 읽을 수 없었는데 공산주의 이론을 깊이 있게 알았을 리는……”
    “그렇다면 해방이 되고 나서 김일성의 토지개혁령에 의해 상당한 혜택을 받았을 거 아닌가?”
    “1946년인가,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 하에 토지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때 토지개혁을 진행하면서 농민을 네 가지 계층으로 분류했는데 5정보 이상의 땅을 소유한 사람은 지주, 그 다음은 부농, 중농, 빈농 순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당연히 빈농에 속했습니다. 빈농이고 부양가족 수도 많았으니까 좋은 농토가 할당되었습니다. 그때 북한 정권은 모든 빈농에게 땅을 주면서 공산당에 입당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할아버지는 공산주의 이념 같은 것은 잘 몰라도 갑자기 농토가 공짜로 생기니까 너무 좋아서 마을에서 제일 먼저 공산당에 입당해가지고 열심히 활동을 했습니다. 그때 김일성 장군은 농민을 계급적으로 철저히 분류해서 통치의 기반을 조성한 것입니다.”
    “그러면 1950년 6·25 전쟁이 났을 때 집안 사정은……?”
    “아버지는 1949년 갑산고급중학교를 막 졸업했는데 바로 인민군에 징집되어 들어갔어요. 그때 신병 훈련을 받으면서 중학교 동기 동창인 지주의 아들과 다시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 지주 집안은 좋은 땅을 빼앗겼으니까 우리 집안에는 감정이 좋았을 리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니었습니까?
    그렇지만 아버지는 지주 아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함께 징집되어 훈련을 받고 나서 인민군 15사단에 배치되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낙동강의 다부동 전선에서 인민군이 패퇴할 때 포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6·25전쟁은 김일성이가 오판한 거야. 미군이 개입하지 않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었거든. 그래서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내려오니까 8월 15일까지는 부산을 점령해서 통일을 하라고 특명을 내렸지.
    그런데 미군이 개입하면서 낙동강 전선에서 당한 거지. 전투에서는 강이란게 지형상 굉장히 중요하거든. 그게 방어막 구실을 하는데 그 당시 인민군은 허겁지겁 내려오면서 강을 건너는 장비가 없었어. 게다가 보급선이 너무 길어서 중간에서 끊겼거든. 그리고 맥아더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어.”
    “그러니까 남조선에서는 맥아더 장군은 영웅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냉정히 평가해야만 하지. 맥아더는 중공군의 개입 가능성을 무시했어. 그 역시 오판한 거지. 그는 한국군이건 중공군이건 동양인을 우습게 보았어. 백인 우월주의자로 거만한 인간이었거든.
    그건 그렇고 아버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지?”
    “아버지와 지주 아들은 함께 포로가 된 후 처음에는 부산의 임시 포로수용소로 갔다가 나중에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가 지옥이었다고 합니다. 전선과 비교하면 식사도 제대로 나오고 잠자리도 그런대로 편했다고 하지요. 전선과 멀리 떨어진 후방인데다가 미군과 한국 헌병이 경비를 철저히 하고 있으니까 죽을 염려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공포로와 반공포로의 목숨을 건 투쟁 때문에 포로들이 수없이 당하고 죽어갔습니다.”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지.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지금은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그 자리에는 유적공원이 만들어졌지. 나도 몇 년 전에 갔다 왔어.”
    “1953년 포로 교환 당시 아버지는 당연히 북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지주 아들은 끝까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에서야 결국 반공포로가 되어 남쪽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그때 마지막 만났을 때 울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남조선을 택했다. 남쪽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앞날이 막막하지만 북으로 갈 수는 없지 않느냐…… 돌아가면 착취 계급인 지주 출신이라고 온갖 핍박을 받을 거니까…… 우리 집에 가거든 부모님께 잘 말씀드려야…… 내가 막심한 불효자식이니까.’
    아버지는 1953년 9월 초순 다른 포로들과 함께 북으로 돌아왔고 얼마 후 지주 집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이미 인민군에 의해 가족이 전부 총살당했고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 지주 아들은 지금쯤 남한에서 사업에 성공해서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을 거야. 함경도 사람들은 생활력이 강하기로 소문이 났으니까. 아니면 한 밑천 장만해서 편안하게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민을 갔을 수도 있어.”
    “그건 제가 알 수 없지요.”
    “아버지는 언제쯤……”
    “아버지는 인민군에서 10년을 복무한 후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우리 형제들을 낳은 거지요.”
    “당신은 아직도 김일성의 주장대로 6·25가 북침인 거로 알고 있는가?”
    “그건 아니지요.”
    “우리 가족은 남쪽 끝에 살았으니까 다행히 전쟁의 피해는 당하지 않고 무사히 넘어간 거지. 너무 외떨어진 시골이니까 인민군도 안 들어온 거야.”
    “그렇군요…….”
    “그러니까 북한은 남한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철저한 계급사회야. 이조 시대 양반과 상놈의 사회보다 훨씬 더 하지.
    당신 가족은 출신 성분이건 사회 성분이건 간에 흠잡을 데가 없으니까 핵심 계층이라고 할 수 있겠군. 다시 말하면 할아버지는 빈농 출신으로 열렬한 코뮤니스트였고 아버지는 인민군 전사로 제대했으니까. 가까운 친척 중에 전쟁 전이건 전쟁 중이건 간에 월남한 사람은 없었겠지?”
    “그렇습니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당연히 핵심 계층에서 기본 계층이나 그 밑으로 떨어졌겠지요.”
    “그래서 당신은 군관으로 선발되는 과정에서 신분상의 불이익은 없었단 말이지. 하지만 거기까지야. 결혼을 잘 해서 든든한 배경이 있으면 모를까. 그렇지 않나?”
    “그럴 겁니다. 저의 경우 뒷배경이 든든한 처가를 둔다면 그나마 괜찮겠지요. 그러나 저의 운명을 생각해보면 경솔하게 결혼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동안 조사받느라고 고생 많았어. 지금까지는 예비조사에 불과하고 본격적인 조사는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만약 조사관들이 조금 거칠게 굴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하겠어. 조사란 그런 거니까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이해해 주게. 우리가 끝까지 추적했어.
    당신은 완전히 노출됐다고. 당신은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촘촘한 그물을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했어.
    풀어주고 싶은데……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그걸 남쪽에서는 기브 앤드 테이크라고 하지.”
    “무슨 말씀인지……?”
    “그놈들은 계속 우릴 엿먹이고 있어. 아직까지도 정확한 실체를 확인할 수 없으니까 체포하는 데 몇 번이나 실패했지.”
    “저더러 배신을 하라고…… 저에게 아무리 혹독한 고문을 가해도 그건 소용없어요.”
    “우린 고문 같은 거 하지 않아. 설득하지 못하면 그뿐이야. 이건 자발적 협조가 필요하니까 고문으로 될 일이 아니야. 우리도 고문이라면 이골이 난 사람들이야. 그러나 그거 사람이 할 짓이 아니지.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인간 혐오증에 빠지게 되는 거야.”
    “모진 고문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감사합니다.”
    “잘 생각해보라고. 북한은 이미 끝났어. 어떻게 남한과 비교할 수 있겠어. 남과 북을 나란히 놓을 순 없단 말이지. 북한에서 인민은 모두가 노예가 되었고 당신은 살인의 도구로 이용된 거지.
    오죽했으면 황장엽 선생이 내려왔겠어. 한때는 권력 서열 10위 안에 들었는데 말이야.
    당신은 철학자이거나 역사학자가 되고 싶어 했으니까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거야. 북한은 진정한 공산주의가 아닌 거지. 죽도 밥도 아닌 거야.
    자본주의이건 민주주의이건 여기에도 뿌리 깊은 문제는 있는 걸 부인할 수는 없어. 남한에도 우리만의 문제가 있고. 하지만 그쪽과는 비교할 수 없지. 그건 김씨 왕조야. 공산주의는 낡은 봉건체제를 혁파하는 것인데 거꾸로 지독한 김씨 왕조가 성립된 거지. 무슨 주체사상을 들먹이면서 말이야. 시대착오인 거야. 당신은 환멸을 느꼈을 거라고. 그리고 내심 분노했겠지. 그렇지 않나?”
    “제가 말입니까……? 아직 그렇게 판단하기는 이르다고 봅니다. 제 자신을 추스르고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남쪽 역시 너무 타락하고 부패한 게 아닌가요.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걸 알라고…… 북에서는 성경을 마약이라고 하지만 주체사상은 성경과 아주 비슷하지. 주체사상을 뼈저리게 공부했으니까 이해가 빠를 거야.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이란 이름 대신 김일성을 집어넣은 게 주체사상이니까. 황장엽 선생은 성경에서 주체사상을 끄집어냈을 거야.”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외웠으니까요.”
    “그리고 역사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북쪽 역사책은 온통 김일성 일색이야. 우리나라 독립도 김일성 덕분이라고 하고. 김일성의 동상이 북한에 몇만 개나 세워져 있는지 알고 있겠지.
    학생들이 감동할만한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가르치지 않는다고. 그래서 각 가정과 직장에서는 가장 넓고 깨끗한 방에 의무적으로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을 걸도록 하지 않겠어.
    그렇단 말이지…….”
    “저도 양심이 있는 인간인데 그런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진짜 역사와 철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었던 거지요.”
    “북한에서는 그게 불가능하지. 아마 깊이 들어갈수록…… 그래서 황 선생이 망명을 결심한 거 아니겠어.”
    “그래도 혼자서 몰래 하는 연구는 가능하겠지요. 무엇보다도 제 자신이 알고 깨닫는 게 중요하니까요.”
    “당신이 수감되어 있었던 정치범수용소 이야기를 해 보자고…… 아마 기억하기도 싫을 거야.”
    “그렇긴 합니다.”
    “거길 순전히 김상빈의 경력을 만들기 위해서 스스로 들어갔는데 그게 들통이 나고 말았어. 이를 어째……”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무슨 일이건 과잉은 좋지 않아…… 당신은 지나치게 열성을 다한 거야.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말이야.”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우리 처지에는 어쩔 수 없어요.”
    “어쨌거나 수용소 생활을 했으니까 그곳 실상을 속속들이 알았을 거 아냐?”
    “어느 정도는……”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나치의 아우슈비츠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구 소련의 강제 수용소를 연상시키기도 하지.
    북한 형법에는 정치범을 ‘반국가적 범죄 또는 국가 주권의 적대에 관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 이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그건 헛소리고 아무나 정치범이란 이름으로 마구잡이로 수감하고 있지.”
    “저도 알고 있어요. 거의 비슷한 수준의 수용소라고 할 수 있겠지요. 특별한 이유가 필요 없어요.”
    “알아서 다행이구만. 북한이 그걸 애써 숨기고 있지만 어림없는 일이야. 지금도 북한은 대외적으로 억지 소리를 하고 있어. 그런 게 없다는 거지.
    나치 SS장교들이 똑같이 그랬어. 그들은 유대인 수용자들에게 자신만만했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존재와 진실이 외부에 절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했고 설혹 알려진다 해도 누가 그걸 믿겠냐고 했어. 그러면서 득의만만했지.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이긴 것은 나치 자신들이라는 거야.
    다시 말하면, 너희들 중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그래서 누구도 증언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어. 설령 누군가 살아남게 될지라도 세상의 누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누군가는 약간 의심하고 범죄 수사관들이나 역사가들의 조사가 있을 것이지만 확실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희들과 함께 증거들도 모두 없애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했었지.
    그런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보라고. 나도 두 번이나 갔다 왔다니까. 내 눈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지.
    그 건물에는 희생자들의 온갖 자료가 남아 있는 거야. 지하 징벌방 같은 곳들에서 나치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어. 북의 수용소 지하 징벌방도 똑같은 거 아니겠어.”
    “정치범수용소를 아우슈비츠와 비교하는 것은 좀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잔혹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나 지하 징벌방에 관해서는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남이나 북이나 똑같이 아우슈비츠를 아전인수 격으로 우려먹고 있단 말이지요.”
    “무슨 염치로…… 북이 아우슈비츠를 들먹인단 말인가.”
    “제가 황해남도 강령군 쌍교리 해안에서 몇 달 동안 해상 침투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때 가까이에 있던 ‘미제 신천 양민학살 기념박물관’을 방문했었습니다.
    박물관 담당자가 설명했습니다.
    ‘조국해방전쟁 당시 미제 침략자들은 조선에서 인류 역사상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적인 인간 살육이라는 만행을 감행하였다. 그건 20세기 식인종으로서 야수적 본성을 세계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내놓은 것이다. 미제 침략자들은 신천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잿가루 속에 파묻으라고 명령하면서 52일 동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5,383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하였다. 흡혈귀라 할 수 있는 신천군 주둔 미군 사령관 해리슨 놈의 명령에 따라 진행된 신천 대학살은 그 야수성과 잔인성에 있어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일당들이 감행한 아우슈비츠의 유혈적 참화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게르니카’를 그린 피카소는 신천 학살을 주제로 하여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그림을 그려서 국제사회에 고발하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신천의 우익 치안대가 미군의 묵인 방관과 무기와 탄약의 지원을 받아 실행한 대학살이었습니다.”
    “전쟁 당시 우익과 좌익의 서로에 대한 증오와 원한은 대단했지. 그 당시 한반도 도처에서 서로 간에 끔찍한 학살이 자행된 거야. 그랬으니까 어느 한쪽이 잘했다고 하거나 다른 쪽이 잘못되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는 거야. 둘 다 똑같았다니까.”
    “고문 문제도 그래요. 우리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요. 중정의 남산 분실이나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보안사 서빙고 분실은 모두 악독한 고문의 산실 아닙니까. 거기서 생사람이 죽고 완전히 병신이 되고 그랬지 않았습니까.
    북조선이 공산주의 체제이니까 우리 쪽에서만 악랄한 고문을 한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왜 북쪽만 탓하십니까. 남쪽은 떳떳하다고 할 수 있나요.”
    “부끄러운 과거 역사이지만 옛날 일이야. 지금은 아니라니까…… 우리는 환골탈태에 가까우리만큼 완전히 바뀌었어. 변명은 아니야. 그래도 남쪽은 틀린 걸 바꿀 줄 안다니까. 그게 북과는 완전히 다른 점이야.”
    “시대가 바뀌면 다시 부활하겠죠. 역사는 반복하니까요. 아우슈비츠는 북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아직도 세계 도처에 숨어있을 거라고요.”
    “그래도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는 단 3년 동안만 운영되었던 데 반해 북한의 수용소는 50년째 운영되고 있단 말이지. 정권이 망할 때까지 존속하겠지. 북한의 수용소는 구 소련의 굴라크를 빼다 박은 거야. 또 굴라크는 짜르 시대의 시베리아 유형을 모방한 거지만 더욱 정교하고 가혹하게 만들었지.
    레닌은 ‘어떻게 사회주의적 경향을 조직할 것인가’라는 선언을 통해 소련 땅에서 모든 해충을 완전히 일소할 것을 주창했어.
    그런데 그 해충의 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한 거야. 다시 말하면 혁명 정권을 위태롭게 할 잠재적 가능성을 지닌 모든 계급, 계층, 직업, 지식인, 종교인, 소수민족들이 모두 혁명을 위협하는 해충이 될 수 있었다는 거지.
    솔제니친의 소설 ‘아르히펠라크 굴라크’는 그냥 Gulag라고 하는데 그게 ‘집단 노동수용소 중앙관리 본부’의 약칭이라고.
    그 소설은 스탈린 체제하에서 가혹한 탄압과 피의 숙청을 고발한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만 자신이 경험한 한계를 뛰어넘은 거야. 소비에트 체제 아래서 자행됐던 온갖 불법적인 탄압의 모든 자료를 망라한 거대한 자료 집적물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거지.
    북한에서 탈출한 강철환의 ‘수용소의 노래’, 신동혁의 ‘세상 밖으로 나오다’, 안명철의 ‘완전통제구역’ 등이 2000년대 중반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증언을 했으니까 정치범수용소의 실체가 백일하에 드러난 거지.
    강철환은, ‘600만명의 유대인들이 수용소의 독가스실에서 무참히 죽어가면서도 나치 독일에 반항하지 못했던 이유와 오늘의 북한 현실은 너무나 똑같다’고 말했어.
    그리고 인민군 중령 출신으로 18호 수용소를 탈출했던 김용이나 김혜숙 등이 수용소의 비참한 실정을 낱낱이 증언한 거야.
    그뿐만이 아니야…… 정찰용 인공위성이 촬영해서 구글지도에도 나오니까 더 이상 빼도 박도 못하게 만천하에 드러난 거지.
    그래서 온 세계가 수용소의 실체를 알게 된 거지. 수용소의 실체가 낱낱이 드러난 이상 이제는 변명할 수도 없어. 북한이 그걸 부정하면 손으로 하늘 가리기야.”
    “북조선은 수용소 없이는 체제를 유지할 수 없어요. 인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사불란한 통치가 불가능하니까요. 거기에 지금 20만 명이 수용되어 있다구요. 인간 도살장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요.”
    “그렇다면…… 용기와 의지가 필요하겠지만…… 전향해서 북한 인권 운동가로 활약하는 게 어때?”
    “저에게 그런 용기가 있다고 보십니까?”
    “그게 진정으로 조국을 위한 일이 아닐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다고 할 수 있겠지. 더 이상 미련을 버리라고. 악마들을 위해서 귀중한 목숨을 버릴 건가? 그렇게 멍청한 거야? 우리에게 협력하라고. 협력하지 않으면 젊은 청춘을 감옥에서 썩어야 할걸. 물론 우리 감옥은 수용소보다는 백 배는 대우가 좋겠지만 말이야.
    수용소에 대해서는 이만하자고…… 남쪽이라고 떳떳한 건 아니란 걸 인정해야겠지……
    이제부터라도 사람답게 살라고. 인간은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단 말이지. 배가 고파서 쥐를 잡아먹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인간으로서 자유 의지와 존엄을 지키라는 말일세.
    우리가 그걸 보장해줄 수 있지. 집도 마련해줄 수 있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도 시켜줄 거야. 그리고 의식주 같은 거는 걱정하지 않도록 모든 걸 해결해줄 거야.”
    “인간답게 살라고 말씀하시니까 국장님은 어느 쪽인가요. 다시 말씀드리면 진보적인가요 아니면 보수 반동적인가요.”
    “갑자기…… 정보부 쪽에서 일하면 당연히 보수 반동적이지 않겠어. 당신도 마찬가지이고…… 그렇지만 진보 쪽에서만 인간 운운하는 게 아니야. 이건 인간의 본성에 관한 문제인 거지.”
    “공작원이건 간첩이건 간에 인간다운 삶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 솔직하게 툭 터놓고 이야기하자고. 현장에서 뛰는 요원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위험천만한 이중생활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거지. 모든 게 두려워.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렇고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들어도. 그리고 임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어떻고. 나의 경우도 그랬지. 그래서 현장을 떠나는 걸 내심 원하게 되지. 그리고 은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은퇴해봤자 막막하지만 말이야. 당신은 지금부터라도 사람답게 살아보라니까.”
    “그게 가능할까요……? 저는 여전히 의심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난 지금 퇴직 직전이지. 정년을 기다리면서 쓸데없이 버티고 있는 셈이지. 세월이란 게 참 빠르지 않나.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니까.”
    “별 탈 없이 무난히 은퇴하신다고 하니까 정말 부럽군요.”
    “이건 당신이 북에서 정상적으로 근무한 경우를 가정한 건데, 40대 중반이 넘으면 그때부터 뒤로 물러나야 할 거야. 한마디로 말해서 상황 판단을 잘 해야 하는데 당신은 그걸 못할 거라고.
    후선에 있으면서 공작부서를 지휘해야만 출세길이 열리고 아니면 감찰부서를 가야 하는데 거기는 최고위층의 직계 라인이거든. 당신은 서류나 정리하는 별 볼 일 없는 한직인 행정부서로 떨어지겠지.
    그리고 말이야…… 본부에서 은퇴하고 나면 연금이 나오겠지만 그 연금이 쥐꼬리만 해서 도저히 먹고 살 수 없으니까 결국 장마당으로 내몰리겠지. 그게 바로 거지 생활 아니겠어. 당신 장마당 사정을 잘 알고 있을 거야.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는 고지식하다고 되어있어. 그런데 그런 성격은 공작원에 어울리지도 않고 조직 내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정치싸움에서 성공할 수 없는 거야. 당신은 신체 건강하고 공부를 잘했으니까 뽑혔겠지만 본부에서 사람을 잘못 뽑은 거지.”
    “북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뽑아주면 영광으로 생각해야지요.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지요.”
    “우리가 그걸 알고 있지. 이런 건 북이나 남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옛날 KGB는 물론이고 CIA도 마찬가지인데 비밀 정보부는 분위기가 지나치게 경직되어 있고 금욕적이거든. 따라서 거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굳어있어서 웃을 줄을 모르거든.
    그걸 숨길 수 없으니까 만나보면 딱 표시가 나는 거야. 전문 스파이라면 그걸 넘어서야 하는데 당신은 아니었어.”
    “그렇게 연습을 했는데도…… 어쩔 수 없었어요.”
    “연습 갖고 되는 게 아니야. 나이가 들어야 하지. 삶의 여정을 잘 살펴보면 나이가 사십은 넘어야 될걸. 그리고 여자를 알아야만 되지. 여자의 은밀한 마음과 함께 음탕한 육체를 알아야 한단 말이지. 그러면 인간으로서 성숙해지는 거야. 여자에게 내 거시기가 잘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면 여자를 정복할 수 없어. 그때는 정신과에 가봐야겠지.”
    “국장님도 지나치시군요. 저를 우습게 보고 깔아뭉개고 있어요. 저도 남자 구실을 톡톡히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본부에서 출세하려면 3층 서기실의 빽 정도는 있어야 하는데 옛날 함경북도 갑산 산골 촌놈 출신이야. 오죽했으면 삼수갑산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그런데 안타까운 일이야. 갑산파가 한때 득세했거든. 1937년 6월 김일성 부대가 함경북도 혜산군 보천보에서 진공 작전을 벌였을 때 거기에 적극 호응한 게 갑산군의 공산주의자들이었어. 그게 갑산파가 된 거지. 갑산파가 계속 살아남았으면 당신도 갑산군 출신이니까 분명히 출세줄을 잡았겠지.
    그런데 제일 먼저 박헌영의 남로당 계열이 숙청되고 뒤이어서 연안독립동맹 계열, 소련 계열이 숙청된 후 마지막으로 갑산파가 제거된 거야. 그 이유는 뻔한 거지. 김일성의 유일 지도체계를 해체하고 지방주의를 조장한다는 죄목으로 숙청된 거지.”
    “그건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사건들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1960년대 일이니까. 지금 당신에게는 아무리 찾아봐도 연길에서 중국집 하는 아저씨밖에 없어. 그 양반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무슨 힘이 있겠어. 우리가 알아보니까 당신 아저씨는 술 좋아하고 원만한 사람이지만 그뿐이지. 그저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는 거야. 남한에 여러 번 왔다 갔는데 조사해보니 용의점은 없었어. 만약 상황이 좋으면 남한으로 아예 오고 싶겠지.”
    “아저씨는 저에게 잘해주었습니다. 핏줄이 무엇인지……”
    “당신은 이번 임무에서 이미 완전히 실패했어. 그러니까 가령 여기를 탈출해서 북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결국 정치범수용소가 기다리고 있겠지. 왜, 자결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돌아왔냐고 하면서 배신자 취급을 할 거라고. 당신은 수용소에서 몇 달 동안 생활했으니까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겠지. 다시는 거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을 거야.
    또 다시 가정을 해 보자고. 당신이 이번 임무에서 성공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금의환향한다고 가정해 보자고. 당신이 영웅 취급을 받을 수 있을까. 내가 생생한 실례를 들을 수 있어.
    이 사건은 아마 본부에서 쉬쉬했으니까 교육 과정에서 틀림없이 빼놓았을 거야. 공작원들이 알면 사기가 떨어지니까. 철석같이 믿었던 고첩은 진즉 전향했고 그를 데리러 간 공작원 역시 전향해서 남쪽에서 잘 살고 있으니까, 그걸 어떻게 까발려서 교육할 수 있었겠어. 그러나 그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지. 북에서 하는 일이 늘 그렇지 않은가.”
    “무슨 말씀인가요?”
    “김동식이라는 남파간첩이 있었지. 물론 가명이야, 나는 본명을 모르고 있는데 알 필요도 없고. 그런데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남쪽에서는 공개된 비밀이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은 무슨 대단한 비밀을 털어놓는 게 아니란 말이지. 우리 쪽은 완전히 개방사회니까 쉬쉬할 수 없는 거지. 그는 여기서 결혼하여 애를 둘이나 낳았지. 1999년 4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국군 기무사령부 분석관을 역임했고 2008년 10월부터는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2010년 3월에는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 들어갔어. 3년쯤 지나면 북한학 박사학위를 받을 거라고.
    그때가 1990년이니까 당신이 13살 때 일이야.
    김동식은 다른 공작원과 함께 1990년 5월 26일 남포에서 중국 어선을 가장한 공작선을 탔는데 그 배에는 이들을 침투 지점까지 안내할 전투원 20여명이 탑승하고 있었지. 공작선은 중국 산둥반도에서 하루 정박해 물과 부식, 기름을 보급받은 뒤 남쪽 공해로 천천히 내려오면서 이동한 거야. 나흘 만에 제주도 남단에 도착한 뒤 반잠수정으로 옮겨 타고 자정쯤 서귀포 보목동 해안에 상륙한 거야. 그들은 그때 동행한 안내조에게 잠수복을 넘겨주고 헤어진 거지. 한밤중이었지만 서귀포 KAL호텔을 향해 걸어가면서 한라산 중턱 산골짜기 아래 묘지 주위에 단파 무전기 2대, 벨기에산 브라우닝 권총 2정과 수십 발의 실탄, 수류탄 4발, 야간 투시경 1개, 다른 공작조에게 넘겨줄 5만 달러 등을 묻었다고 해.
    그 당시에는 산속에는 식별이 가능한 특징적인 기준점이 없었기 때문에 공작원들은 접선이나 장비 은닉 장소로 묘지를 많이 사용한 거야. 그런데 그가 잡히면서 이런 사실이 남쪽 정보 당국에 알려진 거지. 그 후부터 공작원들은 그렇게 안 했어. 남쪽에서 이미 알고 있으니까 절대로 묘지를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 거야.
    어쨌건 간에 그는 서울로 올라와서 거물 고정간첩인 이선실과 접선하는 데 성공했어. 그때 이선실은 정치국 후보 위원으로 당 권력 서열이 22위였지. 1979년 일본에서 공작선을 타고 월북하여 김일성을 만난 뒤 조총련 모국 방문 당시 위장해서 국내에 들어온 인물이었어. 일본을 통해 영주권을 얻어 합법적으로 잠입했으니 북한 대남공작에서는 상징적인 존재가 된 거야. 하지만 그 여자는 고등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당시에는 75세 노인이었어. 말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아주 형편없는 무식한 여자였어. 권력 서열 22위라고 했지만 어떤 핵심적인 역할을 한 건 아니야. 당신도 알다시피 권력 서열과 실질적인 역할은 상관없지. 이선실은 민한당과 민가협, 민중당에 들락날락하면서 관계를 구축하는 임무가 주어졌는데 이건 친북 인사들을 미리서 점찍어두자는 수작이었지만 그 여자가 한 역할은 아주 미미했었지. 어쨌거나 재일교포 출신이었으니까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은 채 장기 잠복할 수는 있었어.
    그러나 1987년쯤 대남 전술이 적극적인 포섭으로 바뀌면서 그녀의 대동 월북을 시도한 거야. 김동식 조보다 먼저 1개 공작조가 그녀를 만나러 내려왔어. 공작조가 그녀를 만나자 ‘그동안 찍어둔 인사들을 입당시키라는 지령이 내려왔습니다. 빨리 접촉해서 포섭하라는 지령입니다.’라고 말했을 때, 이선실은 ‘김일성 동지로부터 직접 그런 말을 듣지 못했고 나는 준비되지 않았다’며 펄쩍 뛰면서 못가겠다고 거부한 거야.
    김동식은 1990년 5월 첫 침투에서 이선실과 1980년 사북 사태 주동자인 H를 대동해서 복귀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지. 복귀를 위한 접선 장소는 강화도 해안이었는데 1990년 10월 17일, 그는 아침과 저녁 시간에 평양방송에서 내 고향 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지 확인했지. 만약 그 노래가 나오면 접선할 수 없다는 신호가 되는 거지. 그날 밤 11시쯤 북에서 내려온 안내조와 서로 돌멩이를 두드리는 걸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암호를 확인하고 묘지에서 접선했지. 그들은 공작선을 타고 황해도 해주로 올라갔어. H는 노동당 입당과 무전기 사용, 암호 해독 등을 배우고 일주일 뒤 같은 루트로 내려왔는데 당시 그에게는 ‘남조선 혁명가들과 인민들에게 신심과 용기를 줄 수 있게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께서 배를 타고 인천을 통해 서울을 다녀갔다는 소문을 퍼뜨려라’는 북의 지시가 내려졌었지.
    우리 정보 당국은 이선실이 북으로 완전히 복귀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그 존재를 알게 되었어. 우리는 깜깜했었지. 우리가 실수했다기보다는 멍청했던 거지. 그것도 1992년 함께 입북했던 H가 연루된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알게 된 거야.
    김동식은 1차 침투에서 이선실을 대동 월북한 공로로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지. 그러나 ‘젊은 놈이 영웅 칭호를 받다니 출세 생각만 한다. 사상이 변질됐다.’라는 뒷담화를 들었어.
    당신네 본부 상층부는 든든한 빽만 믿고 뱃속에 자만심만 가득 들어있는 작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거야. 공작에 무지하고 오만방자하니까 조금도 쓸모없는 작자들이라고. 그런데 김동식이 공을 세우자 시기 질투하면서 그렇게 험담을 늘어놓은 거라고.
    그들은 겁쟁이이고 비겁하니까 남의 뒷말이나 하는 게 최고의 기분 전환 거리가 되는 거야. 물론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을 제일 미워하긴 하지.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이용가치가 없으면 잘근 잘근 씹어서 뱉어버리는 거지. 그걸 모르겠어. 내가 얼마든지 예를 들 수가 있지.
    그래서 김동식은 ‘내가 실력을 증명해 보일 방법은 다시 내려갔다 오는 것밖에 없다’고 하면서 다시 남파됐는데 그때는 승려로 위장한 고정간첩 ‘봉화 1호’를 복귀시키고 다른 인사들을 포섭하는 게 임무였어. 그런데 말이야 1980년 봄에 남파된 그 고첩은 언젠가 우리에게 넘어왔어. 그렇지만 북에서는 모르고 있었지. 북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농락당한 것이지. 그런데 그해 겨울에 그가 ‘중대한 정보를 입수했다. 나를 빨리 북으로 데려가 달라’는 무전을 친 거야. 당연히 우리가 사주를 한 건데 그를 복귀시키기 위해 김동식이 다시 내려온 거지. 그쪽 상층부는 변절에 대해서 반신반의했고 혹시 역공작에 걸리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김동식을 내려보낸 거지. 그는 희생양이었어.
    그가 봉화 1호와 접선을 시도하려고 천신만고 끝에 충남 부여의 한 사찰로 찾아갔다가 완전히 노출돼 버린 거지. 이미 정보기관과 경찰이 내려올 줄 알고 잠복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그는 왼쪽 다리에 한 발 맞고 쓰러졌고, 다른 공작원은 숨졌어.”
    “그렇습니다. 차마 공개할 수 없었겠죠. 그래서 교육 과정에서 빠져 있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걸 무슨 낯짝으로 교육 자료로 내놓을 수 있었겠습니까. 공작원들이 동요할 텐데요.”
    “그들도 그 지독한 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안간힘을 다해야 하니까…… 그건 인정해야겠지. 이번에 황장엽을 살해하여 성과를 내서 지도자 동지에게 점수를 따려고 했지만 두 번이나 실패했으니 코가 납작해졌겠지. 지도자 동지가 ‘그 영감탱이가 너무 나불댄단 말이지’라고 한마디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지도자 동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겠습니다.’라고 장담했을 거 아닌가.”
    “본부 상층부는 사고방식이 그 모양입니다. 우리도 알고 있어요. 다 죽어가는 노인네를 새삼스럽게 죽인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냔 말이지요. 북에서는 일의 순서를 가리지 않고 그냥 빨리 빨리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걸 문제 삼을 순 없습니다. 무조건 임무를 수행해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명령 불복종으로 그냥 가는 거죠.”
    “본부의 총국장은 우리가 옛날부터 예의주시하고 있었지. 아주 강경파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는 과묵하고 마음이 순수한 여린 사람이야. 어쩔 수 없었을 거야. 대외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강경한 발언을 쏟아내야 할 때가 있으니까. 그게 남한의 언론을 향한 일종의 심리전 아니겠어. 북한은 가진 게 없으니까 말이 무기일 수밖에 없는 거야. 총국장은 아주 순종적인 사람이지. 오직 지극한 충성심 하나로 버텨낸 거라고. 지도자 동지가 원하는 건 그런 충성심이거든. 업무 능력은 그다음이야.
    그 과정에서 당신은 하수인으로 이용당한 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그런데 일이란 너무 서두르면 될 일도 안 되는 거야. 첩보전은 인내와의 싸움이지.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끈질기게 기다려야만 하는 거야. 모자이크의 조각들을 빈틈없이 짜 맞추기 위해서 말이야. 그래도 실수가 있기 마련인데. 우리도 조급하게 굴어가지고 수없이 실패한 경험이 있지.
    결론은 그거야. 당신이 임무 수행에 성공해서 돌아가도 결국 팽 당한다는 거지. 김동식처럼 말이야. 빽이 없으면 그렇다고. 이쪽도 빽이 중요하긴 하지만 거기처럼 그렇게 심하진 않거든. 자신이 성실하고 똑똑하면 얼마든 치고 올라갈 수 있어. 북은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라 더 지독한 계급사회인 거지.”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남한 사회도 그럴 거라고 봅니다. 어느 사회나 계급과 계급 차별은 있을 겁니다.”
    “그래도 우리는 다르다고. 그걸 알아야지. 그렇게까지 비인간적인 건 아니야. 내가 지금부터 1983년 아웅산 테러 사건을 이야기해 주겠어. 1983년이면 당신은 몇 살이었을까?”
    “여섯 살 꼬마였고 유치원에 다닐 때입니다. 북에서는 쉬쉬했기 때문에 그 사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3층 서기실 사람들이나 알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 사람들은 기억력이 나쁘니까 지금쯤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을 겁니다.”

    1983년 10월 9일
    1983년 12월 9일 버마의 수도 랑군 지구 사법재판소 특별재판부는 두 명의 북한 테러범에게 형을 선고하였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부총리와 그가 이끄는 선발대가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5분 아웅산 묘역에 도착하는 대한민국 전두환 대통령을 영접하려고 자리를 잡았을 때 폭탄이 터진 것과 관련된 것이다.
    폭발의 결과 대한민국 측에서는 대표자인 대한민국 부총리 등 17명의 귀빈과 버마 측에서는 4명이 사망하였으며, 14명의 한국 측 귀빈, 32명의 버마인이 부상당하여 총 21명이 사망하고 46명이 부상을 당했다.
    수사기관의 조사 과정에서 그 한인은 자기의 이름은 강민철인데 나이는 28세이고 아버지는 강석준, 어머니는 김옥순이며 군번 9970번 북한군 대위라고 진술했다. 그의 일행에는 대위 신기철과 소좌 진모가 있었으며, 진모가 조장이었다. 그의 소속부대는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로서 그 기지는 북한의 개성시에 있다고 진술하면서 강민철 등 3명은 북한의 특수부대 사령관으로부터 대통령이 양곤에 있는 순교자 묘역에 도착할 때 폭탄을 폭파시키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진술했다.
    재판부는 살인죄, 살인미수죄, 불법무기소지죄로 기소된 범인들에게 유죄 인정 여부에 대해 질문하였는바, 강민철은 범죄사실을 인정하였으나 진모는 수사 과정에서는 물론이고 재판 과정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였다.
    생존자들과 목격자들의 진술과 피고인들이 소지하고 있던 북한제 의약품, 배터리, 송·수신기, 수신기에 사용된 전자회로와 콘덴서 조각, 살상용 만년필, 금속탄알, 수류탄 안전핀과 손잡이 등 각종 증거물에 의해 범죄 사실은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피고인 진모는 유죄로 인정되므로 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강민철은 유죄로 인정되므로 사형에 처한다.
    그들은 곧 버마 최고법정인 인민사법회의에 상고했지만, 다음 해 1월 11일과 2월 9일에 열린 두 차례의 재판에서 상고가 기각되었다. 버마 최고법정은 두 사람의 상고를 기각하고 사형을 확정했다.
    그 후 5월 2일 버마 국가평의회에 국선 변호인들이 마지막으로 테러리스트들의 구명을 청원했으나 다음 해 3월 진모에 대한 탄원은 기각되고 강민철의 경우는 형 집행이 보류되었다.
    진모는 그 후 사형에 처해졌다. 불교국가인 버마에서 사형이 집행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버마에는 법적으로 사형제도가 있지만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는 일은 거의 없었다.
    1983년 10월 9일, 그날 북한의 테러리스트들은 호신용으로 북한제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수류탄은 5초 신간이어서 던지는 것과 동시에 안전핀을 놓으면 5초 후에 폭발하는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강민철이 안전핀을 제거하자마자 그의 손에서 바로 터지는 바람에 팔 하나를 잃어버렸고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십자가가 달린 묵주도 함께 날아가 버렸다. 다시 말하면 수류탄에서 안전핀을 뺐지만 안전장치는 쥐고 있었으므로 정상적인 상태라면 수류탄을 던지고 난 후에나 폭발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핀을 뽑자마자 수류탄이 터진 것이다. 그 순간 강민철은 놀라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강민철은 스스로 죽도록 특수하게 수류탄을 제조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강민철은 북한 당국과 정찰국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고 인간적 비애 때문에 절망하였다.
    버마 당국은 그 당시 진모라고 알려진 김진수는 선고대로 사형을 집행했지만 강민철에게는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는데 그가 모든 것을 자백하고 북한의 비인간적인 테러리즘을 고발했기 때문이다.
    1989년 6월 18일 버마에서 미얀마로 국호가 변경되었다.
    1983년 당시 버마와 북한은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 돈독한 우애를 쌓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버마는 북한에 단교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7년 4월 버마와 북한은 국교를 재개했고 2008년 5월 18일 강민철은 그가 수감되어 있었던 버마의 인세인형무소에서 혼자 외롭게 죽었다. 버마 당국은 강민철이 간암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심학무가 말했다.
    “우리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이에요. 우린 맨날 목숨 걸고 군사분계선을 넘었어요. 그게 도무지 쓸데없는 침투 작전인데 여러 번 실패해서 몰살당했거든요. 그래도 명령이 내려옵니다. 우리는 빼도 박도 못한단 말입니다.”
    국장이 말했다.
    “당신은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는 거야. 강민철 선배를 생각해 보라고……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자신을 하수인으로 이용한 그들에게 복수하라니까. 복수가 필요하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복수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이니까 어쩔 수 없어. 죄와 벌이라는 것이 무엇이야?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 한단 말이지.
    그러니까 하느님이라도 자신이 인간을 창조했지만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는 거지. 진실을 말하면 우리 인간들이 왜 신을 만들어 냈겠어. 그건 신의 이름으로 징벌과 보복을 내리기 위해서 그런 거라네.”
    “복수하란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심사숙고하란 말이지. 다시 말하면 인간답게 살라고……”
    “그럼 무슨 조건이 있을 거 아닙니까?”
    “글쎄 말이야…… 너무 서두르지 말라고.
    당신도 전향서를 쓰고 나서 우릴 도와주면 대학은 물론 대학원 진학까지 도와줄 수 있어. 그러면 얼마든지 역사 공부와 순수 공산주의 이론에 관해 연구해서 박사까지 딸 수 있다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되는 거지. 간단하지 않겠어. 북에서 교육받은 대로만 하면 되니까. 당신이 여길 나가면 서로 연결이 될 것이고 접선 장소에 나가게 될 거야. 그러면 은밀하게 무기를 건네주고 동선을 알려주면서 장소와 시간 등을 지시할 게 아니겠어. 하지만 뒷 일은 우리가 잘 처리할 거니까 조금도 염려할 게 없는 거야. 그렇게 해주면 더 이상 수사도 진행하지 않고 구속영장도 신청하지 않을 거네. 그걸 보장해줄 수 있어.”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봉화 1호’처럼 배신해서 이중간첩이 되라는 것이지요.”
    “글쎄…… 배신이니…… 이중간첩이라고 하기에는…… 어감이 좋지 않아.”
    “그게 바로 ‘독 안에 든 쥐 작전’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 작전에 대해서 뭘 알고 있나?”
    “우리는 ‘독 안에 든 쥐 사건’에 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정찰총국의 수치였지요. 깜빡 속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배신자에 대해 누누이 교육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단단히 복수를 했지요. 그런데 김동식 사건도 들어보니까 결국 그런 종류 아니겠습니까. 북한이 제일 싫어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게 배신 아니겠습니까.”
    “봉화 1호는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니까. 잠깐 동안이나마 자유를 맛보았으니까. 언젠가 지옥 같은 북으로 돌아가 살 수는 없었어.
    그래서 공을 세우고 공소 보류 처분을 받아서 자유를 찾고 싶었던 거야. 생각해보라고. 매일 긴장의 연속인 고첩 생활은 그 정신적 긴장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그러니까 처음부터 돈에 매수된 부패한 사람은 아니었어. 그냥 제 발로 걸어들어온 거지. 그걸 배신이라고 하기는 뭐 하지.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른 거였어.
    잘 생각해보라니까. 기회가 다시 오는 건 아니야. 한창 젊은데. 당신의 인생, 미래를 생각해보라고. 귀중한 인생을 허무하게 소비하는 게 아니야. 왜 그래야 돼?”
    “저에게도 미래가…… 저는 낯선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조사를 받다 보니까 지쳐있습니다. 그래서 신경이 극히 예민합니다.”
    “아직 젊었어. 30대 초반 아닌가.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북에 무슨 미련이 남아있는 거야. 당신 진짜 멍텅구리 아니야.”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알고 있다고. 내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그걸 모르겠어. 잘 알 거 아닌가. 북한은 당신같이 신체 건강하고 똑똑한 청년들을 골라서 위험한 공작에 몰아넣고 있어. 그렇지만 죽든지 살든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단 말이지.
    그런데 높은 분들은 자기 자식은 귀중하니까 절대로 공작원은 안 만들지. 그렇지 않은가. 내 말이 틀렸어? 처음 공작원으로 선발되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 사지로 내몰리는데 말이야. 그러나 그 분위기에서 내색할 수는 없었겠지.
    그리고 볼모로 잡기 위해서 은근히 결혼을 강요했어. 그렇지만 당신은 현명하니까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뒤로 미루고 내려왔지. 그건 잘한 거야. 공작원의 아내는 공작원이 남에서 체포되면 그걸 견디지 못하고 대개 자살했거든. 여자 입장에서는 도저히 억압적인 환경을 견딜 수 없는 거야.”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여자가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한 번 결심하면 절대로 흔들리지 않아요’라고 말했거든요.”
    “내 경험에 의하면 여자란 완전히 믿을 건 아니야. 여자의 예쁜 얼굴도 그렇지 않은가. 일 년이나 이 년쯤 지나고 나면 아무리 좋아봐야 그게 그거라고.”
    “여자를 믿을 수 없단 말씀인가요. 그러면 이 세상에서 누굴 믿어야 하는 거죠.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거 아닌가요.”
    “당신은…… 여자라고 다 그렇진 않다고 말하고 싶겠지. 연길에서 처음 만나 함께 탈북하면서 하룻밤 풋사랑을 했던 그 여자도 모든 걸 털어놓았다니까. 그 여자는 영리했으니까 당신이 아무리 숨겨도 뭔가 냄새를 맡았던 거야. 여자의 직감은 예리하거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을 거야.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게. 남자란 여자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단 말이지.”
    “지금 이 지경에 뭐가 확실한 게 있겠습니까?”
    “이건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그런 개인적인 것은 아니야. 다시 말하면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문제인 거야. 그리고 불의를 타파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일이지.
    당신이 거절하면 우리도 어쩔 수 없어. 법원은 사형을 때리지는 않겠지만 살인 미수가 겹치니까 무기징역을 때릴 수도 있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무기징역이라니. 감옥은 감옥이야. 평생을 그 안에서 썩는다고 생각해보라고.
    그러면 정신도 육체도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겠지. 또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거기서 자살할 수도 있어. 무기수 중에 정신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죽는 사람이 많다구.”
    “저의 이용가치는 딱 한 번 뿐이겠네요. 접선 장소에서 고정간첩을 잡고 그를 족쳐서 고첩의 연결망을 일망타진하면 본부는 제가 배신한 걸 알게 될 거 아닙니까. 그 후에는 저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겠지요. 그리고 부담스러워 하겠지요.”
    “우리는 북과는 다르지. 쓰고나서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고.
    그걸 알라고. 김동식은 말이야 불행하게도 접선하다가 총을 맞고 체포되었지만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 건 별거 없어. 그래도 우리는 그가 재기하도록 도와주었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완치되게 해주었고 결혼해서 애를 둘이나 낳았어. 그리고 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단 말이지.”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결정을 내리기가……”
    “그걸 알게나. 시간이 없어. 우리가 당신을 오래 붙들고 있으면 본부에서는 어떤 낌새를 챌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작전을 포기할 거라고……”
    “저는 두렵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과 접선하려는 그 고첩은 하수인에 불과할 수도 있고 거물일 수도 있지. 만약 하수인이라면 그 뒤에는 전문 스파이인 거물이 있을 수도 있어. 그 거물은 오랫동안 우리들이 추적하고 있지만 아직 잡지 못한 인물일 수도 있어.”
    “북한은 남한과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어요. 여기는 풍족하고 자유가 넘쳐나지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이에요. 북한을 생각하면 부끄럽고 비참하지요.
    저더러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되라고 하시는군요. 황장엽 선생이 배신자인데 그 배신자를 응징하려고 내려온 제가 또 다시 배신자가 되면……”
    “당신 입에서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니까 너무 반갑군. 여기 살면서 하느님을 믿어보라고. 그러면 신의 뜻과 의지를 알 수 있을 거야. 당신은 지금까지 너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까 하느님의 품에 안겨서 위로를 받아야만 되지.
    그러나 이건 알아야지. 우리가 당신에게 그걸 강요할 수는 없어. 자기가 알아서 결심을 해야만 되는 거야.”

    짧은 여름밤이 꽤 깊어진 것 같다. 강남에 있는 국정원의 대공상담실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어서 아주 조용했다. 술병은 완전히 비어있다. 국장은 마지막 담배를 피우면서 담배 연기를 천천히 내뿜는다. 그는 처음부터 심학무를 설득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들은 원래 지독한 확신범이니까. 그는 웃는 얼굴로 조사실로 들어와서 그 공작원을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두려웠던 것이다.
    국장은 심학무의 태도를 예의주시하고 말의 효과를 가늠하면서 대화를 주도하고 이런저런 말을 두서없이 많이 했지만 내심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아무리 담배를 많이 피워대고 술을 연거푸 마셔 얼큰한 기분에 얼굴이 붉게 물들어도 그 긴장을 완전히 해소시키지는 못했다. 술과 담배는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국장은 자신이 상대방의 의중이나 반응도 살피지 않은 채 목적도 두서도 없이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게 글이었다면 문장들 위에 박박 줄을 그어 지워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말은 한 번 내뱉으면 어쩔 수 없다. 심학무는 내내 그의 비위를 건드리고 신경을 미묘하게 긁었다. 결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사람처럼.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이지 못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남과 북의 견고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마침내 수세에 몰렸고 심학무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국장은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이런…… 정말 단단한 인간이야. 짧게 짧게 대답했지만 그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걸 빠짐없이 말했단 말이지. 내가 너무 많이 지껄인 것인가. 그러나 어쩔 수 없었지. 대화를 이끌고 나가야 했으니까. 그를 설득하려면 사무적이어서도 안되고 조용하고 감정 없는 음성으로 말을 이어갈 수도 없었던 거야. 내가 너무 많이…… 가식적이었던가…… 위선적이었던가……’
    국장이 마무리하려는 듯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래……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끝난 것 같구먼.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수사를 잘 받으라고. 당신은 역사적 증언대에 서 있는 셈이야.
    그러니까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끝까지 버티는 것은 피차간에 피곤한 일이야. 그러지 않도록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당신의 운명을 쥐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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