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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 배신과 배은망덕, 관용과 용서 혹은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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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 배신과 배은망덕, 관용과 용서 혹은 복수

    이들 소설은 실화소설이고 역사소설 (단편소설 ‘그날 밤’과 장편소설 ‘증언’ 등을 말한다)이다. 그래서 역사적 실재를 증언한다. 그러나 나는 증언을 통해서 공산주의의 폭력성과 잔혹함을 고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역사상 모든 독재정권의 본질적 속성이었으니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정희 유신체제도 전두환의 군사정권도 똑같았다.
    오히려 인간의 본질적 속성인 배신과 배은망덕, 관용과 용서 혹은 복수에 대해서 성찰하고자 한다. 배신은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이기 때문에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다. 소포클레스는 ‘기만하고 배반하는 것이 인간 본래의 마음이다’라고 했다. 카이사르는 23군데 자상을 입고 죽어가면서 ‘브루투스, 너조차!’라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기독교 교의는 용서를 강조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복음 6 : 27~28)’ 그러나 이해타산이 없는 순수한 용서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용서는 자기 기만이고 가식이고 위선일지 모른다.
    배신을 당하면 분노, 증오, 응징의 욕구가 일어나는 것은 인간의 본성상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용서보다는 복수가 먼저이고 당연한 것이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출애굽기 21 : 24~25)’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에서 지고지순한 원칙으로 내세우는 ‘죄형법정주의’란 다름 아닌 인류 역사에서 면면히 내려온 복수의 관념을 법적으로 제도화한 것에 불과하다.
    신곡을 쓴 알리기에리 단테는 중세를 기준으로 해서 역사상 가장 비겁한 배신자로 예수를 밀고해서 배신한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가롯 (그리스어로는 이스카리옷) 유다와 카이사르를 배신한 (그의 양자 혹은 심복이었던)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를 지목했다.
    예수는 최후의 만찬을 들던 날 밤에 ‘내가 이 세상 끝날 때까지 항상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했지만 유다의 배신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예수는 죽은 후 예수 그리스도가 되었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실패한 혁명가였다. 그는 로마 공화정을 부정하고 독재의 길로 가고 있는 카이사르를 제거해서 꺼져가는 공화정의 불씨를 살리려고 했지만 카이사르의 정식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 (나중에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타도되어 복수를 당했고 결국 공화정은 무너지고 로마제국은 세습 왕조 체제가 된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사망한 지 2년 후 원로원에 의해 신 (神) 율리우스 ― 디부스 율리우스 (Divus Julius) ― 로 추대되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1997년 2월 북경의 한국 영사관으로 들어와 망명 신청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그해 4월 필리핀을 거쳐서 서울로 들어왔다. 김영삼 정권의 말기쯤이었다. 그는 북한에서 김씨 왕조의 통치 이념인 주체사상을 확립한 인물로 지금까지 탈북이건 망명이건 간에 남으로 내려온 최고위층 인물이었다. 그래서 남북한은 물론이고 국제적으로도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김재규 장군은 1979년 10월 26일 초저녁 궁정동 안가에서 유신독재체제의 심장인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고 그가 죽자마자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유신체제는 순식간에 종말을 고했다.
    두 사건은 17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나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그들은 자신을 애지중지 키워준 신성 불가침의 존재인 최고 지도자를 배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배신을 할 충분한 이유와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감행할 만한 대의명분이 있었다.
    황장엽 선생은 북한의 김씨 봉건 왕조 체제를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남북한이 하루빨리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민족 분단의 비극을 제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한 몸을 던지기로 한 것이다. 물론 그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실패했고 2010년 10월 사망했다. 그리고 김정일은 2011년 12월 사망했다.
    하지만 김재규 장군은 위대한 혁명을 성취했다.
    바람 없는 천지엔 꽃이 필 수 없고, 이슬 내리지 않는 곳엔 열매도 없다. (無風天地無花開 無露天地無結實)
    그에 의해 스탈린 체제처럼 지독했던 유신독재는 붕괴되고 제6공화국 체제가 성립하는 단초를 마련했던 것이다. 물론 그 중간에 전두환 쿠데타 세력의 집권이라는 과도기가 있기는 했다. 1987년 6월 혁명은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날 밤 김재규 장군이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그때 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우리 역사는 온갖 혼란과 비극적 상황 속에서 몇십 년을 후퇴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을 배신한 것이 아닐까. 그걸 배신이라고 말하기는 뭐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가족을 희생시킨 것이다. 황장엽 선생의 가족들은 (망명 당시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망명한 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부인은 자살했고 자녀들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대부분 숙청되었다고 한다. 너무나 가혹한 결과인 것이다. 김재규 장군의 경우 그의 가족들은 전두환 도당에 의해 일부 재산이 몰수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죄 없는 남은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희생과 상처를 남긴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해진 온갖 비난 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은망덕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들은 배은망덕과 대의명분 사이에서 말 못 할 고뇌를 겪었다. 그들은 민족적 운명이 걸린 대의명분 앞에서 그 하찮은 옛날 봉건 왕조 시대의 잔재인 천륜을 저버렸다는 배은망덕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것은 가혹한 운명이었다.

    배신에 대한 대가는 용서 또는 관용인가, 아니면 복수인가.
    호메로스는 ‘복수는 흘러내리는 꿀보다 훨씬 더 달콤하다’라고 했지만. 김재규 장군의 경우 헌정 질서를 파괴한 쿠데타 세력인 전두환 도당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잔인한 고문과 모욕과 폭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명백한 단순 살인이 아닌 그보다 죄질과 형량이 훨씬 무거운 내란목적살인죄를 적용했고, 그 당시 전국적인 비상계엄체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급해서 민간법정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세워서 무슨 군사작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속전속결로 재판을 진행하고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자마자 서둘러 3일 만에 사형집행을 하였다.
    그래서 대법원 재판 과정에서 단순 살인이라는 소수 의견을 낸 대법관들을 서빙고 분실로 데려가 고문을 했다. (최근 김재규 장군의 유족들은 이를 문제 삼아 재심 신청을 하였다.)
    김재규 장군의 재판은 민간법정에서 3심을 거쳐 충분히 심의해서 단순 살인인지 여부를 가려야 했고 사형집행은 시간을 두고 국민들의 도덕적 평가와 법 감정에 의한 정당한 심판을 거친 후에 집행 여부가 결정되었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김형욱 전 정보부장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가 박정희 대통령을 배신한 행위는 어떠한 대의명분도 없는 순전히 자신의 일신을 도모하기 위한 아주 전형적인 배신이었다. 그래서 그의 망명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망명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는 부정축재한 많은 돈과 가족을 챙겨서 미국으로 도망간 비겁한 도망자일 뿐이다.
    박정희는 그 독한 성격대로 당연히 복수를 택했고 사적인 복수를 위해서 국가 기관을 동원해 집요하게 그를 추적해서 마침내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김형욱은 박정희의 심복으로 독재정권을 유지하는 데 앞장선 충실한 문지기이고 일등 공신이었다. 김형욱은 박정희를 배신했고 박정희는 복수했다. 박정희는 그때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후련했을까. 그러나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고 했다. 복수는 악순환을 낳는다. 그 자신이 20일 후 총을 맞고 죽었지 않은가. 이번에는 김형욱이 지하에서 복수를 한 셈이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원수 갚을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고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어떠한 고난도 참고 견디면서 장작 위에서 잠자고 쓸개를 맛본다는 와신상담 (臥薪嘗膽)을 선택했다. 그들은 2010년 봄 인민무력부 정찰총국의 기획 지휘하에 황장엽 선생을 살해하기 위해서 두 팀을 각기 따로 남한으로 파견했지만 그들은 국정원이 운영하는 하나원의 심사에서 통과되지 못하고 적발되었다. 그때는 황장엽 선생이 87세의 고령으로 자연사를 앞두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연사하기 전에 살해하여 복수를 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황 선생은 그해 10월 기거했던 논현동 주택에서 죽었다. 남파 공작원들은 모두 대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10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어 확정되었다.

    나는 작가로서 미학적 관점에서 소설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서 작가적 추론과 상상력을 발휘했다. 역사적 사건의 원형을 훼손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극히 미미한 (합리적 추론이 가능한) 일부분을 제외한다면 거의 전부가 명백한 역사적 실재이다. 나는 그들 사건을, 10·26 사건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김형욱의 회고록, 황장엽 선생의 회고록, 남파 공작원들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 등 주로 공적 자료에 근거해서 증언을 기록했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가명을 사용하였는데 남파된 테러리스트들의 경우 아직 실명을 밝힐 단계는 아니고 또한 작가로서 소설적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가명 사용이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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