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유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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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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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은총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신이다.
    ― 도스트엡스키

    어린 시절,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초여름에 마을 냇가에서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다가 넘어져서 왼쪽 무릎을 심하게 다쳤는데, 그 당시 두메산골 — 고향 동네 송정리는 면사무소에서도 10리를 더 들어간 바닷가 산골짝에 있다. — 에서 속수무책으로 방치하였다가 관절염이 심하게 악화된 것이다. 내 무릎은 주위가 빨갛게 되어 통통 부어오르고, 물이 차고 고름이 차고 나중에는 굽혔다 펼 수조차 없게 되면서 그 때문에 견딜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사람을 탈진하게 하는 신열과 오한, 피로감, 구역질 등에 시달려야 했다.
    온갖 민간요법과 떠돌이 한의사의 마구잡이식 침놓기, 이십 리쯤 떨어진 동네 도사 할머니의 신통한 주문과 비방도 소용이 없었다. 고흥 읍내의 한지의사는 여기서는 치료할 수 없으니 순천이나 광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쳤기 때문에 이제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기가 곤란한 지경이 된 것이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문전옥답 논을 팔아서 마련한 돈으로 광주의 큰 병원으로 가게 되었는데 의사는 희미하고 검고 회색의 엑스레이 사진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완치하기 위해서는 무릎 위부터 잘라야 하거나 아니면 무릎 수술을 해도 그 후유증으로 다리를 심하게 절 수밖에 없다고 냉정하게 선언하였다. (그때부터, 유년의 저 깊은 심연 속에 뿌리내린 냉혹한 공포감이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가끔 악몽을 꾸면 나는 무릎이 절단된 채로 목발을 짚고 걷다가 넘어지면 무릎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고 그러면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울다가 깨어났다. 그 악몽은 월남전 악몽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계속됐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색이 된 아버지는 몇 군데 병원을 전전하다가 어쨌거나 정형외과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나는 그 병실의 모습을 마치 한 장의 흑백사진처럼 선명히 기억한다. (하지만 배은망덕하게도 그 병원의 이름도 의사 선생님의 이름이나 얼굴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퇴원하던 날 의사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꼭 껴안아 주었다.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정말 운이 좋았지. 기적이 따로 없어…… 매우 어려운 수술이었단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나는 그때 가슴이 꽉 막혀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의사 선생님의 품에 안긴 채 엉엉 울었었다.
    그리고 오랜 물리 치료와 끝없이 길고 긴, 지루한 재활 훈련 끝에 기적처럼 완치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절 그 길고 긴 물리 치료와 재활 훈련이라는 게 무엇이었던가? 마을 뒷산을 오랫동안 오르내리면서 그때 자연적으로 재활 훈련이 되었고 완치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마을 뒷산은 천등산에서부터 해안 쪽으로 밋밋하게 뻗어 내려오면서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었다. 그 산허리의 편편하고 넓은 바위에 올라서면 멀리 은빛으로 빛나거나 혹은 회색 바다로 돌변하여 거칠게 포효하는 바다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 50여 가구의 초가집들을, 벼들이 무릎 높이까지 자란 온통 초록색 들판을, 여름에 홍수가 나면 도도한 강물처럼 흐르지만 겨울이면 아예 말라서 모래흙과 자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풍남항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큰 냇가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겨울밤이면 그 냇가에는 소록도에서 몰래 헤엄쳐 나와 동냥을 하는 문둥이 두세 명이 모닥불을 피우고 잠을 잤다.)
    여름이어서 내 얼굴빛은 햇빛에 빨갛게 익었다.
    나는 온종일 거친 풀과 가시덤불, 바위투성이인 뒷산의 경사면을 힘겹게 오르내리며 염소 떼를 몰고 다녔고, 녀석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을 때면 풀벌레와 나비, 벌집, 거미집, 뱀들을 찾아서 조심스럽게 풀섶을 헤쳤다. 나비들은 여기저기 풀잎과 꽃잎 위로 가볍게 날아오르기도 하고 맴돌기도 하였지만 앉지는 않고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때 풀섶에서 똬리를 뜬 채 낮잠을 자고 있던 작은 뱀이나 새끼손가락만한 푸른 도마뱀은 화들짝 놀라서 뛰쳐나와 구불구불 달아났다.
    별안간 산들바람이 한 줄기 불면서 나뭇가지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산속의 침묵을 깼다. 산새들이 놀라서 울음소리를 냈다.
    유년시절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무릎 바로 위에 둥글게 패인 지금은 희미해진 수술 자국은 그때의 고통과 상처를 지금도 상기시켜 주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면 내 영혼 속에 아로새겨진 그 시절의 아련한 풍경이 떠오른다. 내가 일일이 제멋대로 이름을 만들어주었던 작은 동물들과의 끊임없는 대화.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뿌리 깊게 박혀버린 회색 바다. 그 바다는 너무 심오해서 설명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릎을 절단하는 수술, 혹은 무릎 수술로 내가 심하게 다리를 절게 되었다면 내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우선 군대도 안 가고 월남전 전쟁터에도 안 끌려가고. 그러므로 내 인생은 지금과는 송두리째 달라졌을 것이다.
    나의 정체성마저 바뀌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누구였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심하게 좌절한 나머지 우울증과 폐쇄공포증에 시달리고, 매일같이 독한 술을 마시며 알코올에 의존해야 되었을 것이고, 그래서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평생을 고통받고 자포자기한 삶을 살았을 터였다. 그랬으니 결혼도 못했을 것이고 미구에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젊은 시절 삶의 고뇌에 허우적거리며 헤어나지 못할 때 존재론적 회의에 빠져서 몇 번씩이나 자살의 충동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돌이켜 보면, 순수한 농부였고 무척이나 인색했던 아버지가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겼던 문전옥답을 눈물을 삼키며 팔지 않았다면, 아버지가 의사에게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은 절대 안 된다고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면, 나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온전한 신체를 갖게 된 것은 틀림없이 행운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비장한 어조로 의사한테 “다리를 절단해서 병신이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라고 말했었다.)
    두 번의 경우 모두 내게는 커다란 행운이 뒤따랐다. 그렇지만 그들 행운은 내 자유의지와는 상관없이 결정된 것이다. 그것은 어떻든 오래전부터, 아마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운명처럼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그러니 내가 어떤 은총을 입은 게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내게 또다시 파랑새가 하늘 높이 비상하는 행운이 계속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건 공평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운명이 닥칠지라도 그것에 저항하지 말고 순종해야 하리라. 그렇지만 운명의 여신인 포르투나처럼 행운 역시 눈이 멀었다고 하였으니까, 누가 어떤 혜택을 입게 될지는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눈먼 행운.
    내가 물놀이에서 무릎을 다치고 회복된 일이나 열대지방의 정글에서 정체불명의 병에 걸리고 기적적으로 회복된 것은 아주 우연처럼 보이지만 그건 운명이었고 우연이란 막다른 운명의 다른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종착지에 이르기까지 구불구불한 길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을 결정짓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오로지 운명일 뿐이다. 인간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해독이 불가능한 운명.
    결국에 가서 이기는 쪽은 우리가 아니라 이 세상인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니체가 말한 철학적 용어인 운명애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운명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하면 운명은 팔자이니 운명에 맡기라는 것이다.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추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그때는 체념이나 단념이야말로 인간의 미덕이 된다. 그러니까 나의 인생행로가 뒤틀렸거나 순조로웠거나 상관없이 운명은 결국 내 삶의 순리인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적 운명론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웅대한 예정론에서는, 칼뱅의 예정설에서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렸으니, 그렇다면 운명이야말로 신적인 것이다. 그들이 말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알고 있으니 모든 걸 그분에게 맡겨라. 그분이 결정할 터이다.

    오래전 일이 아니다.
    강남역 부근에 있는 유명한 교회의 집사인 선배 ― 중대 고참 선임병이었다. 신병식 병장은 내가 102 야전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귀국하면서 격려의 편지를 보냈었다. 얼마나 감격하고 가슴이 뭉클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중대본부 서무병으로 근무했지만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우리는 중대 내에서 친하게 지냈다. 그가 날 막내 동생처럼 챙겨주었던 것이다.
    그가 말했다.
    “네가 지금 살아남은 것이 우연일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운명 따위는 없어. 오직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을 뿐이야. 신은 인간 삶의 모든 국면을 조종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내가 말했다.
    “저는 그쪽 신을 믿지 않거든요. 신앙심이 없는 제가 신의 은총을 입을 수가 있다고요……? 그렇다고 할 수 있나요……?”
    “네가 무슨 쓸모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의 구원이 일찍부터 예정되어 있었다니까.”
    “왜? 제가 말입니까?”
    “신의 의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어. 자네가 이 정도만 된 것도 천만다행인 거지. 신이 결국 자네를 지켜준 거야.”
    “선배님 말씀은 그게 행운 때문이 아니라 신의 의지라는 거죠.”
    “그렇다니까. 학교 선생님은 철저한 무신론자이던지 아니면 불가지론자이겠지. 그렇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고. 설마 그걸 학생들에게 가르치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고 있는데 신의 의지를 들먹이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리겠지.”
    “전, …… 솔직히 말씀드려서 잘 모르겠어요. 특히 인격신에 대해서는 말이죠. 구체적으로 다가오지 않아요. 그저 추상적인 개념에 불과한 거죠.”
    “나 역시 전에는 신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 월남전 이후 확실하게 알게 되었네. 인간들이 서로 죽이려고 총을 겨누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 하나님께서 분노하실 일이었어.
    그래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극단적인 냉소주의에 빠져버렸지.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처럼 ‘언제든지 부정하는 정신의 소유자’가 되었다네. 다시 말하자면 너무 젊은 나이였을 때부터 벌써 인간에게 회의를 느꼈고, 슬픔과 분노를 느꼈던 거지.
    결국 신에 귀의할 수밖에 없었어.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으면서 자신과도 화해할 수 있었지. 그때부터 신을 굳게 믿으며 신이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살고 있지. 그래서 말인데 …… 신의 의지에 반해서 살고 싶지는 않다네.”
    “저는 전투에 직접 참여했습니다. 전쟁에서는 누구도 선한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누구라도 손에 무기를 쥐면 악인이 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사람은 정말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지요. 사람이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니. 신앙심이 두터운 선배님이 부럽습니다. 그렇게 확고하시니 말입니다. 저에게는 몇 번의 행운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게 운명인지, 아니면 우연으로 생각된단 말입니다.”
    “전쟁 이야기는 그만두자고. 지나간 일이야. 나는 오직 하느님과 믿음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네. 그런데 내가 지금 귀머거리와 이야기하는 기분이 들지. 자넬 하느님께 인도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야.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거지. 자넨 너무 일찍 고통을 받을 만큼 받았으니까 그걸 어루만져 줄 하느님의 부드러운 손길이 필요하다고 믿었거든.
    젊은 시절 한때 자네는 끔찍이도 술을 마시면서 무척 방황했었지 않나. 술을 마신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그러니까 가장 하느님이 필요한 때였지.”
    “그땐 정말 엉망진창이었지요. 제가 더 이상 미치지 않은데 천만다행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과음하고 만취가 되면 알코올을 통해 제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시기가 되니까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지금은 아주 많이 줄였어요. 그렇다고 완전히 끊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우린 가끔 만나서 적당히 마시지. 그래도 미심쩍기는 하지.”
    “선배님은 하느님을 열렬히 믿으면서 …… 하느님이 싫어할 것 같은데요.”
    “술은 하느님과는 관계가 없다네. 하느님이 그런 것까지 상관할 만큼 한가하진 않다네.”
    “교회는 술을 마시는 것을 신성 모독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그걸 알게나. 아버지 요셉도 아들 예수도 직업이 목수였고 공사판의 일꾼이었어.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프롤레타리아였어. 프롤레타리아는 생활이 너무 고달프니까 그걸 잊기 위해서는 술 없이는 살 수가 없어. 그래서 예수님도 술을 꽤 마셨을 거라고 보네.
    그래서 말인데 최후의 심판의 날 내 선행과 악행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엄정한 평가를 내릴 때 내가 마신 술 때문에 평가가 내려가지는 않을 걸세.”
    “선배님은 제가 102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알게 된 영현병이었던 김재수 하사님을 모르실 거예요. 그는 영현부대의 화장터에서 시체를 태우는 일을 담당했었죠.
    그의 허무주의적 인생관이 영향을 준 것 같아요. 저에게 너무 큰 충격을 주었거든요. 그래서 이 세상이 너무 허무했어요. 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거죠.”
    “모르긴! 전에도 가끔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네.”
    “그렇겠지요. 전 잊을 수가 없으니까요. 늘 호기심을 자극하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죠. 그래도 휴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가끔 눈앞에서 어른거려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생각해보면 큰형님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고향 선배이고 인생 선배였으니까요. 군대는 엄연히 계급이 있으니까 형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너무 일찍부터 인생을 너무 달관했습니다.”
    “자네 말을 들으면 그럴 수밖에…… 그런 특수한 환경에 처해있었으니 나라도 그랬을 거야. 나도 가슴이 먹먹하다네. 그러니까 그가 자살했다고 해서 위선의 삶을 살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걸세.
    그는 죽음을 자기의 것으로 내면화한 것뿐이야. 나도 옛날 한때는 자살 충동에 시달렸거든.”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얼굴은 단호하면서도 풍부한 표정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한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훌륭한 조각가였거든요. 그 재능이 영원히 사라진 게 안타깝습니다.”
    “무슨 조각을 했다는 건가. 조각 이야기는 처음이야.”
    “시간이 날 때마다 숲속에서 숫돌에 갈아서 날을 세운 날카로운 칼을 이용해서 매끈하게 다듬어진 나무의 앞면에는 꽃과 나비, 벌 들을 조각하고 뒷면에는 수수께끼 같은 기하학적 문양을 솜씨 좋게 조각했습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만큼 심각한 얼굴로 작업에 열중할 때는 너무 열중한 나머지 무슨 말이라도 걸면 무척 화를 내면서 짜증을 냈습니다. 집중을 방해한다고 하면서…… 그가 짜증을 내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인데 말입니다.”
    “김 하사 일은 안타까운 일이야. 그러나 까마득한 옛날 일 아닌가. 지금…… 여기…… 우리 이야기를 하자고.”
    나는 더 이상 김 하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술잔을 목구멍 속으로 연거푸 털어 넣었지만 애달픈 추억의 순간을 지울 순 없었다. 그가 황혼 녘 검은 숲속에서 뒤돌아서서 화장터를 향해 운명처럼 집요하고도 과묵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떠오른다.
    “내 말을 들으라고. 지금이라도 늦은 게 아니야. 하느님을 믿는데 늦은 법은 없으니까.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했지 않은가.
    신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너무 따지지는 말게. 의심하면 안 되는 거라네. 그냥 믿으라고. 그러면 신이 자네한테 거짓말처럼 나타나실 거니까. 내가 자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네. 그렇지만 돌밭에 떨어진 씨앗만큼이나 결실이 없었어.”
    “제가 청소년 시절에는 인간과 세계에 대해 무한한 호기심을 갖고서 온갖 의문을 품고 있었지요. 제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갖게 되는 자아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의문이 들었구요. 자신을 존중할 수도 자신을 신뢰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문들이 도저히 풀리지 않으니까 자연스럽게 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만이 그런 의문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런데 월남전이 모든 걸 망가뜨리고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어요. 전쟁은 저의 젊은 시절도…… 끝없는 상상력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 등 모든 걸 깡그리 파괴했어요.
    너무 죄송해요. 제가 완전한 무신론자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신에 관한 문제는 자신이 없지요. 더 철이 들어야 될 거 같아요.”
    “자넨 소총수로 그런 험악한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네. 세월이 흘렀어.
    또다시 다음으로 미루어야 한단 말이지. 언제쯤…… ? 선배님 대신 가볍게 형님이라고 해도 될 거 같은데…… 함께 늙어가고 있지 않은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참 빠르지. 그렇지 않은가?”
    “그래도 선뜻…… 그게 목구멍에 걸려요. 저한테 선배님은 너무 어렵지요. 저는 월남에서 선배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야전병원으로 보내주신 격려의 편지는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대본부로 보내 주셨어요. 소총수와는 비교할 수 없이 편하고 좋았어요. 남아있는 사람에게는 심한 죄의식을 느꼈지만 말입니다. 제가 어찌 선배님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날 밤 우리는 선배가 잘 아는 선릉역 부근 술집에서 시작했지만 몇 차례나 자리를 옮겨가며 거나하게 술을 마셨다. 더 이상 월남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사실 우리끼리 만나 술을 마실 때는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월남 이야기를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경우에는 절대로 하지 않는다. 누가 그런 고리타분한 옛날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겠는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쯤으로 여길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건강 문제 (선배는 매일 밤 서너번씩 화장실에 가는 거 빼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했다), 마누라의 잔소리가 점점 더 늘어가지만 그건 자장가쯤으로 알고 넘어간다는 이야기, 자식들의 결혼 문제로 넘어갔다.
    선배는 큰딸이 삼십 대 중반을 넘었는데도 결혼은커녕 남자와 사귀지도 않는 기미여서 혹시 레즈비언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큰딸이 그 지경인데 아들마저 도대체 결혼은 생각하지도 않아서 큰일이라고 했다. 그러니 손주 보기는 애시당초 글렀다고 한탄을 했다.
    선배가 말했다.
    “성경에 의하면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했다네.
    그런 사소한 문제로 하느님께 기도할 수는 없지. 무슨 염치로…… 그런 것까지……”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정년 후의 인생에 대해 아무런 대책이 서 있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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