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정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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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개석은 왜 패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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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개석은 왜 패하였는가’는 현대 중국학의 권위자인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의 로이드.E.이스트만 교수(Eastman Lloyd: 1929~1963)의 원저 “파멸의 씨앗: 전쟁과 혁명속의 국민당 지배, 중국 1937~1949(Seeds of destruction ; Nationalist China in war and revolution 1937~ 1949)를 서울대 민두기 교수가 번역하여 출간하면서 붙인 책 제목이다. 이 책은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국민당정부가 압도적인 무력과 자원, 그리고 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뚱의 공산당에게 패하여 대만으로 쫓겨 가게 된 원인을 분야별로 나눠서 분석했다. 특히 책의 뒤표지는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선포식에서 파안대소하고 있는 마오쩌뚱(毛澤東: 1893~1976)과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장제스를 ‘승자’와 ‘패자’의 모습으로 잘 대비시켰다. 중국현대사에 대한 비판서들이 많지만, 반세기에 걸친 국공내전에서 승자와 패자로 갈라선 두 사람의 이야기를 분석한 이 책은 GNP 26배(3,678.7만원/142.8만원), 무역액 53배(1조1400억/401억)의 엄청난 국력 차이를 보이고 있는 남북관계에서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을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영국의 아편 밀무역으로 시작된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은 서서히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1842년 난징조약(南京條約)으로 홍콩이 할양되고, 상하이, 광둥, 푸저우, 닝보, 샤먼이 잇달아 개항되면서 외세의 침략이 가속화 되자 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때 1911년 5월 쑨원(孫文: 1866~1925)이 멸만흥한(滅滿興漢), 외세배격을 내걸고 신해혁명을 일으키면서 광둥에 중화민국을 세웠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쑨원은 하와이에서 고교를 마친 뒤 홍콩에서 의대를 졸업한 후 마카오, 광저우 등에서 잠시 의사로 활동했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대륙의 청이 섬나라 일본에 패하고, 서구열강의 침탈이 가속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혁명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1895년 10월 광저우, 1900년 일본에서 2차 무장봉기를 계획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도쿄에서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1911년 10월 10일 우창(武昌)에서 신해혁명을 일으키고 중화민국을 수립했다. 한편, 절강성에서 소금장수의 아들로 태어난 장제스는 바오딩(保定) 군관학교에 입학했다가 일본육사생도가 되었다. 1911년 그는 조국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쑨원을 찾으니, 쑨원은 그를 황푸군관학교 교장으로 임명했다.  1919년 5월 4일, 북경대학생들이 벌인 5·4 운동을 지켜본 쑨원은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칭했는데, 5·4운동은 공산당의 성립 계기도 되어서 1921년 상하이에서 마오쩌뚱이 중국공산당을 창설했다. 1924년 쑨원은 대륙을 침략한 일제를 격퇴하기 위하여 공산당과 국공합작을 했으나, 이듬해 북경 국민대표회의에 가던 중 간암으로 죽었다. 쑨원을 계승한 장제스는 혁명군총사령관으로 북벌에 나서 1928년 북벌을 끝내고, 난징(南京)에 국민당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장제스는 일본군 격퇴와 공산당 척결이라는 두 목표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1936년 12월 12일 만주군벌 장쉐량이 그를 체포하여 먼저 항일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자 장제스는 연금된 지 열 사흘 만에 국공합작을 승낙하고 풀려난다. 이것이 서안사건(西安事件)인데, 이로서 국부군의 포위공격으로 전멸 위기에 놓였던 공산당은 궁지에서 기사회생하여 시간을 벌고, 마침내 중국 대륙을 차지할 수 있었다. 시안사변이 없었다면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은 태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 후 다시 내전상태에 돌입한 중국은 1947년 초까지는 국민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 그해 5월부터 공산당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949년 국민당정부는 대만으로 쫓겨 가고, 마침내 대륙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쑨원의 삼민주의는 대만정부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에도 큰 영향을 끼쳐서 중국정부는 삼민주의를 계승하고, 건국기념일에는 천안문광장에 쑨원의 초상화를 내걸고 있다.

    국공내전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데, 이스트만 교수는 중앙정부와 지방정권의 관계, 항일전쟁기 농민과 징세 및 국민당의 지배구조, 정권 내부에서의 파벌싸움인 ‘삼민주의청년단’과 ‘혁신운동’ 문제, 그리고 항일전쟁시기 국부군의 구조와 일반병사의 처우문제, 마지막으로 대륙에서의 패배가 임박한 시기의 통화개혁책 등을 통해서 국민당정부가 압도적인 우위에도 불구하고 민주성 결여와 무능, 부패에 의한 붕괴임을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장제스가 대만에 쫓겨 갈 당시 국민당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대한 통렬한 비난과 반성 글도 소개하고 있다. 장제스도 패전원인을 분석하면서 공산당을 칭찬했는데, 그 중 하나는 장교가 취해야 할 자세로 ‘병사와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것을 입고, 병사들의 막사에서 기거하는 일’이었다. 마오쩌뚱의 홍군(공산군)은 상해를 점령했을 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길바닥에서 잠을 잤지만, 국부군들은 처우로 보면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망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했다.

    흔히 장제스와 마오쩌뚱의 국공내전을 2000년 전 항우와 유방의 싸움과 비교한다. 가난한 농민 출신인 유방은 병사 한 명, 창 칼 하나 없는 신세였으나 친구들에게 신의를 쌓고, 백성들에게는 관대하여 인심을 얻었다. 이에 비해 초(楚)라고 하는 강대국의 귀족 자제로서 초패왕이 되어 압도적인 세력을 보유하고 있던 항우는 병사에게 혹독하고,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 결국 유방에게 패하게 된다. 마오쩌뚱은 군과 인민은 ‘물과 물고기의 관계(水魚之交)‘라며, 병사들이 민가에서 닭 한 마리라도 훔치면 즉각 사형을 시킬 정도였다. 또, 농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전투 중에도 틈틈이 노력봉사를 아끼지 않음으로서 열렬한 환호를 받았고, 농지개혁에도 적극적이어서 농민들의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국부군은 압도적인 무력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규율은 엉망이고, 민폐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농민들의 지지를 상실했다. 부대 이동 시에는 후미에 위안부들을 데리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농민들은 민주주의와 공산당의 이념보다는 어느 쪽이 자신에게 유리한지를 스스로 판단하여 오늘의 중국을 만들었다. 저자는 국민당정부 최대의 적은 공산당과 그 추종세력이 아니라 스스로의 부패와 무능, 비민주성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민중은 물론 나라를 지키는 군대가 부정부패에 빠지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이것은 월맹과 싸우던 자유월남의 패망사례에서도 잘 드러났으며. 극도로 혼탁한 우리사회에도 훌륭한 반면교사가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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