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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거법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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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총선을 앞두고 국회는 이른바 패스트트랙이라는 기상천외한 절차를 통해서 선거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지난 4월부터 정부와 여당이 시도한 이른바 개혁 법안들이 정기국회에서 무산되자 임시국회를 소집했으나, 제l야당은 필리버스터(Filibuster)를 벌이며 법안 통과를 저지했다. 하지만, 임시회기가 종료되자 다시 소집된 임시국회에서 첫 안건으로 통과시킨 것이다. 이로서 선거연령이 현재 19세에서 18세로 낮아짐으로서 진보좌파적인 현 정부에 유리하고, 또 연동형 비례제로 치러짐으로서 소수 정당에 유리하다는 평가가 많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대표를 뽑는 제도이다. 그러나 소수 선거구제도가 많은 사표(死票)를 만들어 민의를 반영하기 위한 대책으로 고안된 것이 비례대표제이지만, 그 방식은 정당별, 비례대표후보자명부별 등 다양하다. 하지만, 이번 개정 선거법은 일반 국민은커녕 수학자들조차 이해가 어려울 정도로 꼼수투성이다. 여당으로서는 정권 재창출을 위하여 총선에서 우호적인 진보좌파 당에게 의석수를 확보해주려는 의도가 있겠지만, 개정 선거법이 과연 민주주의의 근간을 보장하는 제도인지는 의문이다. 이런 무리한 시도는 해외 토픽감이 되고, 또 국민들의 거센 저항을 받아 총선에서 제2당으로 전락하는 부메랑이 될지도 모르겠다.

    12월 27일 임시국회의 진행을 위하여 입장하는 국회의장을 육탄 저지한 제일야당의 행태도 비판받아야 하겠지만, 대화와 타협이라는 국회의 본질적 기능을 포기하고 오로지 다수결로 밀어붙이는 여당과 국회의장의 처신은 두고두고 논란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를 언급할 자격도 없는 정부와 여당은 부끄러움도 잊은 채 또다시 공수처법안 등도 같은 방식으로 통과시키려고 또다시 임시국회를 소집했으니, 부끄러운 작태는 반복되면서 이런 수치는 하나의 선례가 되어 우리의 민주주의는 퇴보하게 될 것이다. 이런 작태를 바라보면서 문득 100년 전 주권을 일본에 빼앗긴 경술국치에 비분강개하여 자결한 매천 황현(梅泉 黃玹; 1855~1910)처럼 혹은 조국에 실망하여 이민을 떠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전라도 광양 출신인 매천은 1888년(고종 25) 생원시에서 장원급제하였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뒤 정권을 잡은 민씨 일파의 부정부패로 비참한 사회현실을 개탄하면서 낙향했다. 그는 고향에 서재를 짓고 3,000권이 넘는 많은 책에 파묻혀 독서와 학문에 열중했지만, 나라에 대한 관심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당시 중국에 있던 김택영(金澤榮)과 국권회복운동을 하려고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또, 의병장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대마도로 끌려간 뒤 단식 끝에 순국하여 그의 유해가 환국하는 부산 동래까지 마중가더니, 충청도 예산까지 만장(輓章)을 들고 상여의 앞장을 선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열엿새 뒤에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한 움큼의 아편을 술에 타 마시고 자결하니, 그의 나이 56세였다.

    그가 남긴 매천야록(梅泉野錄)은 고종이 즉위한 1864년부터 경술국치로 국권 피탈된 1910년까지 47년 동안의 일기체 기록으로서 1864년부터 1894년 갑오경장까지는 30년 동안인데도 비교적 간락해서 6권 7책 중 1권반에 그쳤지만, 갑오개혁 이후 경술국치까지는 17년간인데도 5권반이나 되도록 상세하다. 여기에서 그는 대원군의 10년간 독재정치와 안동김씨의 몰락, 민비와 대원군과의 알력, 그리고 민비를 비롯한 그 일족의 부정부패를 소상하게 고발하는 한편, 조선이 대국으로 섬겼던 청나라의 행태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는 등 합리주의적 사관을 보여주고 있다. 또, 그는 동학운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사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그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며 동학교도를 동비(東匪)로 표현하고, 어윤중(魚允中)이 장계에서 동학교도를 비도(匪徒)라 하지 않고 민당(民黨)이라 한 것을 비판하는 등 유학자의 소신을 말하기도 했다.

    ​ 그의 기록은 직접 보고들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해한 부분도 있고, 경술국치 후 매천이 자결할 때까지 16일 간의 행적은 그의 문인 고용주(高墉柱: 1865~1930)가 기록했다고 하지만, 실록이나 사서 등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구한말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그가 자결하기 전에 남긴 절명시가 여운을 남겨주고 있다. 그는 “나는 조정에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하지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도 나라가 망하는 국난을 당하여도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겠는가? 나는 위로 황천에서 받은 올바른 마음씨를 저버린 적이 없고, 아래로는 평생 읽던 좋은 글을 저버리지 아니하려 한다. 길이 잠들려 하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너희들은 내가 죽는 것을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고 했다. 혹자는 독립이나 계몽과 같은 실질적 행동에 나서지 않고 소극적인 행동이라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대적 관점이라고 할 것이다. 당시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유학자인 매천의 자결은 개인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한 지식으로서의 책임 의식이었다고 할 것인데, 그가 다시 태어나서 오늘을 지켜본다면 과연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표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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