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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투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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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 투 이 스 트
    TATTOOIST

    인생이란 산마루를 넘는 길과 같다.
    좌우 어느 측에도 미끄러운 비탈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방향을 택해도 미끄러진다.

    ─ L. 비트겐슈타인

    서울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에서 합정역 쪽으로 내려가면서 왼쪽으로 서교 호텔과 메리골드 호텔 중간쯤 한 허름한 삼층 건물 일층 입구에 입간판이 서 있다. 입간판에는 가슴 반영구 문신을 하기 전과 후를 비교하는 대형 브로마이드 사진과 함께 문신 시술 가격표가 기재되어 있다. 간단한 손등 문신은 10만원, 팔뚝 문신은 15만원에서 30만원, 허벅지 문신은 130만원, 등판에 하는 천수관음 보살은 300만원에서 500만원이다.
    음장선이 여자 직원 두 명을 데리고 운영하는 가게는 그 건물의 이층에 있다. 간판도 없고 물론 어디에도 전화 번호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20평 남짓의 실내는 각종 문신 모형이 들어있는 대형 포스터가 벽에 붙어 있고, 커피 포트, 사무실용 긴 소파와 잡지가 쌓여있는 낮은 사각형 탁자 등이 있는 대기실과 간이 침대와 문신사가 작업하면서 앉는 의자, 문신 기구인 미니 페달 디스플레이와 문신용 기계펜, 타투 카트리즈 바늘, 갖가지 색깔의 잉크 등이 놓여있는 바퀴 달린 작은 카트, 전신을 비춰볼 수 있는 대형 거울이 있는 세 개의 시술방으로 나뉘어 있다.
    그들은 의사처럼 하얀 가운을 입고 있다.
    그는 남자들의 전신 문신, 가슴과 등짝, 허벅지 문신을 담당하고 여자 직원은 여자들의 전신 문신, 남자의 팔뚝과 여자들의 입술과 귓불, 눈썹, 쇄골, 팔뚝, 발목 문신을 주로 담당한다.
    그는, 몸에 큰 상처로 인해 흉터가 남아있는 경우 그 흉터는 대부분 영구적이기 때문에 그걸 콤플렉스로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치유의 목적으로 하는 문신, 등판에 하는 불교식 탱화의 문양이나 용이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는 문신, 고난도의 기술을 요하는 인물의 초상화나 자화상을 새기는 포트레이트 (portrait), 고객이 원하는 필체로 아주 정교하게 글씨를 써넣는 레터링 (lettering)에 있어서는 전국에서 제일가는 장인이라 할 수 있고, 전문대 디자인학과를 졸업한 여자 직원들은 벌써 경력이 5년이 넘었는데 이름 있는 화가의 그림을 모작해서 실사에 가까운 세밀한 그림을 새기는 문신인 리얼리티 (reality)에 솜씨가 있다.
    하지만 그 가게에서는 나름 직업윤리가 있어서 조폭의 명칭이나 구성원임을 상징하는 암호, 특정한 사건번호, 악마의 뿔이나 기타 조폭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증표 같은 문신 또는 문신을 무기로 삼아 양아치 짓을 일삼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말인 문신충을 위한 문신은 절대로 거절했다.
    어떤 건장한 체격의 젊은 남자 고객이 들어와서 “오늘 문신 시술을 받을 수 있나요?” 직원에게 물었다. “오늘은 안 됩니다.”라고 했다. 직원은 달력을 훑어보더니 “모레 오후 5시가 유일하게 비어 있는데…… 그것도 예약 손님이 갑자기 일이 생겨서 취소가 되었거든요. 그 뒤로는 일주일 동안 예약이 다 찼습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내일도 불가능하다는 거죠?” “내일은 중국 여행객 5명이 예약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가게 내 한 시술방에서는 여자 손님이 가느다란 손목과 팔뚝에 문신 시술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대기실에선 예약 손님이 두 명이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이 가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또 다른 타투숍이 있다. 한 여성 손님이 문신 시술을 받기 위해 간이침대에 나른한 자세로 앉아 있다. 문신사는 그 젊은이가 묻지도 않았는데 “인터넷에 따로 광고를 하지 않지만 지나다가 들르는 손님만 하루에 10명 정도 됩니다. 지금 와 있는 손님도 예약 없이 갑자기 찾아온 분이죠.”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주인은 손님이 기다리는 간이침대 쪽으로 향한다.
    문신사의 영리목적 문신 시술은 불법이다. 의료법은 의료인이 아니면 의료행위를 할 수 없도록 돼 있다. 그런데 문신 시술은 의료행위에 해당한다. 그래서 관할 구청이나 경찰은 비의료인들의 문신 시술을 단속하고 있다. 물론 단속 나온 공무원들에게 이런저런 사정을 하면서 봉투를 찔러주면 눈감고 넘어가기도 한다.
    이 때문에 문신사들은 불안감 속에 영업하고 있다. 언제 단속에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마다 가게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 한자리에서 오래 영업하는 문신사는 거의 없다. 음장선은 몇 개월 전에도 손님에게 돈을 뜯겼다. 벌써 금년 들어 두 번째이다. 등짝에 용이 날아오르는 시술을 다 받은 손님이 계산할 때가 되자 갑자기 돌변해 돈을 주지 않으면 신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그 재수 없는 손님은 갑자기 험악한 인상을 쓰면서, “당신 이거 불법인거 알고 있지. 내가 신고하면 벌금 물고 가게 문도 닫아야 한다고……. 내가 당장 경찰에 전화를 하면 득달같이 달려온다고.” 겁을 줬다. 결국 그는 먹고살려고 이 짓을 하고 있으니 한 번만 봐 달라고 사정했지만 소용없음을 알고 결국 300만 원을 200만 원으로 깎아서 돈을 건넸다. 손님을 공갈범으로 신고할 수는 없다. 신고를 하면 자신의 불법 문신 시술도 단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문신사는 단속을 피하려고 포털사이트에 엉뚱한 주소를 올려놓기도 한다. 포털사이트에 등록돼 있는 주소는 신촌역 사거리 번화가에서 뒷골목으로 약간 들어가 있다. 그런데 해당 주소지에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 타투숍이 없다. 가게로 전화를 걸어 물어보면 곧바로 “100미터쯤 더 내려오면 이화빌딩이 보일 거예요. 그러면 다시 전화하세요”라는 문자와 함께 약도를 보내줬다. 약도에 나와 있는 이화빌딩 앞에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타투숍 주인은 “거기서 좀 더 내려오면 나오는 문창빌딩 지하 1층으로 오세요. 1층에는 편의점이 있으니까 찾기 쉬워요.”라고 안내한다.

    성형외과나 피부과 등 병원에서 시술하는 문신사도 있다. 병원이 고용한 이들이다. 하지만 병원에서 문신 시술을 하더라도 의사가 아닌 문신사의 시술은 불법이다. 의사는 의대를 나와서 다시 4년간 전문의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어려운 의학지식을 적용해서 고난도 수술을 한다. 그런 의사들이 무엇 때문에 시시한 손기술을 익혀서 문신 시술을 하겠는가. 그건 의사로서 권위와 체면에 관계된 문제이다. 신촌이나 홍대 앞 거리에 있는 성형외과에서 반영구 문신 시술을 하는 건 거의 전부 문신사가 하는 걸로 보면 된다.
    의사가 아닌 사람이 문신 시술을 하는 건 불법이지만 문신 시술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용학원에서는 네일, 헤어, 메이크업 관련 수업뿐만 아니라 문신 시술 관련 수업을 함께 진행하는 곳도 많다. 고용노동부가 2015년 발표한 ‘신직업 추진 현황 및 육성계획’을 보면 17개 신직업 중에는 문신사가 포함되어 있다.
    서울 홍대 앞에 있는 한 미용학원에서는 한 달에 30명이 넘는 수강생이 ‘반영구 문신술’ 수업을 듣는다. 학원에서는 의사가 아니어도 문신 시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건 합법이지만 시술은 불법이라 수강생들에게 편법을 알려줄 수밖에 없다. 메이크업 자격증을 따서 미용실을 차린 후 Shop In Shop (큰 매장 안에 작은 매장을 여는 것) 형태로 반영구 문신 시술 영업을 하라고 권고한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문신사법’을 만들어 비의료인의 문신 시술도 합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단속과 신고 때문에 하루하루 가슴 졸이며 일하는 문신사가 전국에 오천 명이 넘는다. 하지만 뜨내기 보따리 문신사까지 하면 이만 명은 될 거라고 한다. 그래서 2019년 10월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문신사법 제정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대한문신사중앙회 회원 등 500여 명이 집회에 참가했다. (음장선 역시 집회가 열릴 때마다 중앙회에서 연락이 오면 빠짐없이 참여한다.)
    그들은 목청껏 외친다. ‘문신사법을 제정하라’ ‘국회는 각성하라’ ‘생존권 투쟁’ 등의 팻말을 들고 회장이 무리의 앞에서 선창하면 따라서 외치거나 ‘옳소’를 외쳤다.
    그 이전인 2007년에는 문신사법을 제정하지 않는 것은 국회의 직무유기라는 취지의 헌법소원 심판청구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헌재는 그 심판청구를 각하했다. (2007.11.29. 선고 2006헌마876 결정)

    해외에서는 의사가 아니어도 위생이나 안전, 감염 관련 교육을 받으면 문신사 자격을 주고 이들의 시술 행위를 합법화한 나라들이 있다. 원래 기독교 국가에서는 ‘너희 몸에 먹물로 글자를 새기지 말라’는 구약성서 레위기의 성경 말씀에 따라 오랫동안 문신을 이단적인 행위로 간주하여 엄격히 금지했다.
    영국은 정부가 정한 위생, 안전 관련 교육과정을 거치면 문신사 자격을 준다. 미국도 일부 주에서는 위생교육과 혈액매개 감염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 문신 시술 면허를 발급해준다. 미국에서는 뉴욕시가 1997년에 처음으로 유효기간 2년짜리 타투 면허증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처럼 비의료인의 문신 시술을 불법으로 간주했던 일본에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문신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인 한국보다 문신에 대해 훨씬 엄격한 나라인 일본의 경우, 오사카고등법원은 의사 면허증 없이 문신 시술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문신사에게 무죄 판결을 선고했다.
    우리나라 의사들은 시술 과정에서 감염 우려 등을 이유로 비의료인의 문신 시술을 무조건 반대하는 입장이다.
    대한의사협회는 “문신 시술은 피부 손상을 유발할 수 있고 감염 등의 부작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비의료인의 시술은 위험하다. 건강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인데 비의료인인 문신사에게 국가자격증까지 주면서 이들의 시술을 합법화하는 것은 우려스럽고 위험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대한피부과학회와 대한피부과의사회도 “문신사를 양성화하는 법안이 시도된 것은 10년이 넘는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입법되지 못한 이유는 침습적인 행위라서 의료인만이 시행할 수 있는 의료행위이기 때문이다. 피부과 전문의는 문신의 피해를 잘 알고 있다. 문신 시술로 간염, 에이즈, 헤르페스 등 감염 가능성이 높고 알레르기, 흉터 사례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 문신을 지우기 위한 경제적 손실과 폐해를 지적한다. “문신을 지우게 될 경우 레이저 수술을 해야 하는데 문신을 하기 전처럼 깨끗하게 지워지지도 않고 통증도 심한 것을 알아야 한다. 문신을 만드는 비용은 수십만 원이지만 제거를 위해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이 든다.
    문신의 합법화는 저품질의 지저분한 문신 양산을 쉽게 예상할 수 있고 그 피해는 청소년 등 젊은 층에 집중될 것이다.”고 꼬집으면서 그 법의 제정을 적극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어불성설인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유교적 전통 때문에 입묵 (入墨), 자문 (刺文)이라고도 부르는 문신 (文身)을 오랫동안 터부시했다. 그러나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문신에 대한 거부감이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는 추세이다. 다른 사람들의 문신에 대해서 거부감보다는 개성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프리카에서 주로 성행하는 살갗을 끄집어 올려서 칼집을 낸 다음 숯, 재 등을 비벼 넣어 흠집을 부풀게 해서 멋진 부조 모양의 문신을 하는 반흔 문신보다는 색채 문신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에 미용을 위해서건 또는 예술적 목적을 위해서건, 자기 과시를 위해서건, 여자를 유혹하는 수단이건 유명 스포츠 선수들이나 연예인들의 문신을 따라하고 싶어서건, 주술적 의미이건 종교적 목적을 위해서건 문신 수요가 폭발하고 있는데, 의사들은 체면상 문신 시술을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문신사들이 문신 시술을 하는 것은 극구 반대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신 시술이 그렇게 위험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의학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의사들의 과격한 주장이 과연 타당할까. 그렇게까지 위험하단 말인가. 과장이 심해도 너무한 것이 아닐까.
    Tattoo는 바늘 등을 사용해 사람의 피부나 피하 조직에 상처를 내고 인체에 독성이 없는 색소로 물감을 들여 지워지지 않게 글씨, 그림, 무늬 등 여러 가지 모양을 새겨 넣는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 * *

    음장선은 오랫동안 눈치껏 문신사를 하면서 상당한 돈을 벌었고 마포에 25평 아파트도 있고 은행에 예금도 있다. 다른 일을 해서 충분히 먹고 살만 하니까 그 지겨운 직업을 때려치운 것이다.
    그는 시골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공부를 잘 한 것은 아니지만 미술과 손재주에는 재능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집안 형편상 미술대학에 진학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처음에는 도제 수업을 받으면서 극장 간판에 대형 포스터를 그리는 일부터 시작했다. 신성일이 흰 와이셔츠 차림으로 빨간 드레스를 입은 엄앵란의 허리를 안고 있고 신성일을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엄앵란의 얼굴에서 루즈를 짙게 바른 입술이 키스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그 영화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후 가게의 간판 제작과 현수막 제작 일을 했고 문신이 꽤 짭짤한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기술을 어깨너머로 배우고 나서 20년이 훨씬 넘게 문신사로 일했다.
    옛날에 비하면 무척 부자가 된 셈이지만 오랫동안 홀로 살면서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매일 직장으로 출근하면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그만두니까 허전함과 외로움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그 연령대에는 남성 호르몬이 떨어질 시기이다. 그렇지만 남자들마다 각기 경우가 다르고 또한 성은 호르몬으로만 설명할 수도 없다. 그게 얼마나 복잡하고 오묘한 것인가.
    인생이란 게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아무튼 많은 일이 일어난다. 이제는 굶을 걱정 안 하고 살게 되니까 좋았지만 또 다른 고민이 생긴 것이다. 좋은 일이 생기면 나쁜 일도 일어나는 게 인간의 운명이다. 아마도 그는 푸근한 여자와 함께 살면서 상실감을 그렇게 풀어가려 했던 거 같다.
    50대 중반에 동거할 여인이 생기니 좋았다. 일반적으로 늦은 나이에 재혼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필요하다고 느끼고 행복해질 수 있다면 재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두운 면도 틀림없이 존재하지만 어떤 면에서 점차 재혼이 느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재혼은 초혼보다 더욱 어렵기에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남들이 좋다고 무조건 따라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재혼한 지 일 년쯤 지나자 여자는 온갖 애교를 떨면서 보채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 날이 얼마나 많이 남아있는데…… 지금은 백세 시대라고요. 이렇게 도배 일이나 하면서 푼돈을 버는 것보다는 무언가 다른 일을 해야 되지 않겠어요. 지금 춘천 닭갈비가 한참 유행인데 이걸 한번 해보자고요. 그건 점심 식사도 되지만 밤에 술도 팔 수 있다니까요. 제가 이미 자리를 봐두었어요.”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아파트를 담보로 하여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그 모든 절차는 여자가 그의 인감도장과 인감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 위임장 등 모든 서류를 챙겨서 스스로 진행했다. 그는 딱 한 번 자필서명을 하기 위해서 은행에 간 일이 있다. 그리고 대출금이 그녀의 통장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며칠 후 잠적을 해버린 것이다.
    그렇게 믿고 의존했던 사람이 사라지면 정신적으로 너무 크게 상처를 입고 무너진다. 결국 그녀가 떠났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모진 고통이 엄습했다. 그녀가 괘씸하긴 했지만 이제와서 그녀 탓만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 역시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지 않았겠는가. 한때 살을 부비고 살았던 아내였던 여자를 경찰에 가출신고를 하고 고소하고 싶진 않다.
    과연 내 삶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 제일 힘든 것은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갔으니까 당장 살아갈 집이 없어서 막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분간 희망과 미래를 모두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나를 가슴 아프게 한 것은 남이 아니라 바로 자신 때문이란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동의했기 때문이다.

    * * *

    영구 임대아파트 단지 내 나란히 놓인 벤치에 노인 한 무리만 조용히 앉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떠나지 않았다. 재밌는 얘깃거리가 오가는 것도 아닌 채 오후 반나절이 지났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이동하거나 지팡이 역할을 하는 유모차가 없으면 움직이기 힘든 이들이다.
    평균적으로 약 12평쯤 되는 그 아파트는 저소득층 불평등 문제가 압축된 공간이다. 부모의 빈곤은 단절되지 못하고 다음 세대로 전해지고 있다. 그나마 집이 있으니까 가족이 해체되진 않지만. 하지만 집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영구 임대에 입주하기 전에는 주로 변두리에서 사글세를 살았다. 음장선처럼 가족 없이 홀로 들어온 이들도 있었지만 삼대가 함께 들어와 5~7명이 복작이며 생활하는 이들도 많다.
    주거가 그런대로 안정됐지만 가족들 입에 풀칠하고 나면 자식 교육비는 여전히 부족했다.
    옛날 도시 빈민층의 상징이었던 판자촌은 가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사람들은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이들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눈으로 직접 보고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구 임대는 가난의 모습을 완전히 감춘다. 회색으로 깨끗하게 도색된 아파트의 외벽은 주변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아파트 단지 내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들의 가난은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없다.
    밑바닥 저소득층의 상황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열악해진다.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진다.
    음장선은 자신의 처지에 이 정도 집이라도 감지덕지라고 여겼다. 무슨 불만을 표시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교통이 편리하고 큰 병원과 가깝다. 물이 새거나 하면 집을 잘 고쳐줘서 좋다.
    어떤 가족이 이 아파트에 살다가 국민임대로 갔는데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서 집을 다른 사람한테 넘기고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재혼한 아내가 떠난 후 여전히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몇 년 전부터 페인트공으로 일한다. 요즘은 한 달에 열 번쯤 일거리가 생기고 일당은 20만원 쯤 된다.

    * * *

    약 30년 전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혼한 뒤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가 30대 초반쯤 되었고 아직 미혼이었을 때이다.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면서 본인이 원해서 어머니와 이혼했다. 차라리 이혼이 나았다. 맨날 백수건달 생활을 하면서 술만 마시고 가족 돌보기를 등한시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내용증명우편을 보낸 것이다.

    나는 가족을 버린 것을 지금에 와서 후회하지 않는다.
    네 어머니가 평생 고생고생하다가 진즉 죽은 것을 알고 있지만 그걸 내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인생이 있는 법이다.
    그 여자는 나의 정체를 알고 난 후 도망을 갔고 지금까지 죽지 못해서 혼자 살아왔다.
    너는 잘 살고 있으니까 돈을 벌 수 없는 나에게 부양료를 줘야 한다. 내가 알아보니까 법에 자식은 부모에 대한 부양 의무를 지고 있다.
    아버지로부터 그 어떤 경제적 도움도 받은 적이 없는데 이제와서 돈을 달라고 하니까 주고 싶은 마음이 없겠지.
    자식 된 도리를 다 해라.
    만약 돈을 보내지 않으면 부양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알고 있어라.

    * * *

    그가 죽을 때까지 지탱해줄 재산은 가장 안전한 은행 예금이다. 그것만은 아무에게도 안 알리고 쉬쉬하면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은행원이 느닷없이 전화를 했다.
    “인생은 고객님이 선배시지만 금융 문제는 제가 전문가이잖아요. 이건 고객님을 위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저를 믿고 한번 바꿔 보시죠. 제 말을 들어서 손해를 본 일은 없다니까요.
    은행 이자가 연 2퍼센트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거기다 세금 떼면 남는 게 없어요. 적극적인 투자를 해서라도 노후자금을 불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선물, 옵션 파생상품은 ‘제로섬 게임’이라고 부른다. 한쪽이 수익을 얻으면 그 금액만큼 다른 쪽이 손실을 본다. 누군가는 투자자가 잃은 원금 전액을 고스란히 수익으로 얻게 된다.
    높은 제시 수익률은 곧 높은 위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수익률만 보고 투자하기보다 높은 위험성을 이해하고 투자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 파생상품의 제시 수익률은 일정 조건이 충족돼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인데 조건이 충족될지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불완전 판매는 금융 상품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이나 투자 위험성에 대해 알리지 않고 상품을 파는 행위이다. 수수료 수익에 눈이 먼 금융 회사들이 금융 지식이 부족한 고령층을 위험한 투자로 내몰면서 그나마 남아있는 노후자금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했다. “제가 아버지에게 긴급히 송금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일부를 찾아야될 것 같아요.”
    은행원이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그게 워낙 위험한 상품이다 보니까…… 모든 걸 손님께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투자 설명서를 꼼꼼히 읽고 스스로 도장을 찍었지 않습니까.”
    아무리 은행원의 설명을 들어도 상품을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깨알같이 쓰여진 투자 설명서의 내용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수익률이 압도적이라는 그의 말만 믿고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도장을 찍었다. 그가 왜 이렇게 복잡하고 위험한 상품을 추천했는지 모르겠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힘없는 발걸음으로 은행 문을 나섰다. 하늘에서 초겨울의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첫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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