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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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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는……?

    지금, 우리는 하릴없이 여기 서 있지만…….
    길 잃은 양 떼.
    21세기는 벌써 5분의 1이 지나가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이고. 조만간 AI (Artificial Intelligence)가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문학사적으로는 포스트 모더니즘을 진즉 지나서 지금은 포스트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복제품이 현실이 되었다. 수많은 복제품이 끊임없이 증식하는 현실에서 원본이라는 것은 이미 그 유일무이한 의미를 상실했다. 특히 시각 예술에서는 복제품이 연속적으로 반복해서 복제품을 낳고 있으니 원본은 아무 데도 없다. 디지털 사진의 복제품은 원본과 차이점이 전혀 없으니 똑같이 원본이고 똑같이 복제품이다. 다만 예술가들은 법적 소송을 피하기 위해 교묘하게 변주하며 표현을 다시 해서 내놓는다. 소재를 다른 형식이나 장르로 가져가고, 확대하거나 축소시키면서 한 매체에서 다른 매체로 옮기는 것이다.
    데이비드 마크슨 (David Markson)의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This is Not a Novel」는 거의 전적으로 다른 작가들의 문장으로만 구성된 책이다. 출처를 밝힌 문장은 일부분에 불과하고 대부분은 의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며, 제멋대로 짜깁기한 문장도 많다. 그러면 윌리엄 버로스 (William Burroughs)의 컷업 기법 (Cut-up Technique)은 어떠한가? 그건 저자이건 독자이건 간에 텍스트를 제멋대로 잘라낸 뒤 재배치해서 시공간의 연관 없이 툭 끊어지는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로버트 쿠버가 주도한, 21세기 새로운 소설 양식인 하이퍼 픽션 (Hyper-Fiction)은 문자와 음향, 동영상 등을 결합하고 하나의 텍스트 안에 다양한 서사구조를 담는 양식으로, 일정한 시작도 끝도 전체를 아우르는 일관된 흐름도 없다.
    반소설 (anti novel)은 전통적인 소설의 개념을 부정하고 새로운 수법에 따른 소설 양식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특정한 줄거리가 없으므로 줄거리를 무시하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줄거리의 구성은 독자에게 맡겨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유명한 작가는 유능한 프로그래밍 능력을 갖춘 해커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작가는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기술에 숙달해서 그 기술을 활용하여 웹을 해체하고 재창조하면서 변주하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는 반세기도 전에 또는 그 무렵에 롤랑 바르트는 ‘저자는 죽었다’고 했고, 미셸 푸코는 ‘저자란 무엇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전통적인 저자의 개념 또는 저자의 통념에 대해서 이를 비판하였다. 또한 독자에 의한 텍스트의 수용을 중시하는 볼프강 이저 또는 스탠리 피쉬의 독자 반응 비평 (Reader-Response Criticism)은 저자보다는 독자를 중시하는 이론을 전개했다.
    그러므로 문학에서 전통적 의미의 장르 개념은 사라지고 있다. 사실과 진실 또는 기억과 경험이 상상력과 환상과 뒤섞이면서 콜라주 (Collage) 형식의 산문이 넘쳐나면서 고급예술과 대중문화의 경계도, 논픽션과 픽션의 경계도, 픽션과 에세이의 경계도 애매해졌다.
    특히 (대설도 아니고 중설도 아닌) 소설과 (원래부터 그 개념이 애매할 뿐만 아니라 범위도 무한정한) 에세이는 경계선도 한계도 애매할 뿐만 아니라 문학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까지 모두 포괄해서 무한한 유연성을 갖고 있다.
    미국 소설가 로버트 쿠버 (Robert Coover)는 대표작 『공개 화형 Public Burning』에서 닉슨 대통령이 뉴욕의 번화가인 타임 스퀘어에서 에설 로젠버그를 강간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제프 다이어 (Geoff Dyer)가 쓴,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장르를 규정하기 힘든 논픽션『조나 Zona』에는 분량이 본문에 맞먹는 방대한 각주가 달려있다.
    우리가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현대 문화와 공존할 수밖에 없다. 결론은 간단하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시대가 변했으니 소설의 전통적인 관습을 과감히 내던지고 콜라주 기법이건 컷업 기법이건, 픽션과 에세이를 마구 뒤섞든, 실험 소설이든, 메타 픽션 (meta-fiction)이든 자기 스타일로 제멋대로 쓰라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콜라주나 메타 픽션에 관심이 많지만 (장편소설 「광화문 광장」이 그런 식으로 쓰여졌다.) 아직 익숙하지는 않다. 요즘에는 이미 반세기도 전에 트루먼 커포티나 노먼 메일러 등이 개척해서 지금까지 미국에서 유행하고 있는 뉴저널리즘 (new journalism)이라는 하이브리드 문학 장르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논픽션에 소설적 기법을 결합한 것이다.
    심층적인 뉴스 기사나 다큐멘터리에서 다루는 큰 사건이나 또는 그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작가(또는 기자)가 1인칭 혹은 3인칭 시점으로 인물들의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므로 몰입 저널리즘 (immersive journalism)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게 저널리즘인지 논픽션 소설인지 또는 그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구분하기는 애매한 것이다. (중편소설 ‘차라리 피고인이 되고 싶다’, ‘2019 즐거운 사라’, 단편소설 ‘그날 밤’, ‘자백과 고문’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문학계는 지금 말할 수 없이 지리멸렬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옛날보다는 문학으로부터 훨씬 멀어진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문학에 대해 아예 관심이 없거나 문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들의 사회적 지위는 밑바닥으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
    종이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우리는 종이의 질감에 향수를 느끼고 있지만 말이다. 시대가 변해도 너무 변했으니 전통적인 종이는 새로운 종류의 스크린 (컴퓨터, 스마트폰, TV, 영화관의 스크린)과는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것이다. 종이 신문은 쇠락하고 있고 종이 문학 잡지는 거의 궤멸 상태에 있다. 그저 「현대문학」만이 든든한 재정적 배경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럭저럭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품을 투고 받아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별해 개재하는「Newyorker」같은 순수한 문학 잡지는 애초부터 없었지만 사라진 셈이다. 지금 매월 나오는 「한국소설」,「월간문학」,「한국 문학인」,「PEN 문학」,「내일을 여는 작가」 등은 무슨 협회의 존속을 위해 불가피하게 혹은 형식상 발행하는 동인지에 불과하다.
    출판사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하므로 철저하게 상업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불가피한 사정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조금씩 팔리는 얄팍한 것 외에는 안 팔리는 무거운 소설은 안중에도 없다. 메이저 출판사는 자기들이 키운 자기 식구 챙기기도 버거운 실정이다.
    그렇다면 소위 말하는 베스트셀러 사정이 어떠한가. 소설의 경우 온갖 가능한 방법을 동원해서 몇만 권 팔린다면, 인문사회의 경우 몇천 권만 팔리게 되면 베스트셀러에 진입하게 된다. 그렇다고 잘 팔린 책들을 독자들이 열심히 읽기나 할까? 요즘 발달된 통계기술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베스트셀러의 완독률은 몇 프로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책을 사면 반드시 혹은 꼭 읽어보는가? 보통 사놓고 뒤로 미루다가 결국에는 잊어버린다.
    그런데 베스트셀러의 작품들은 문학성이라는 측면에서 작품의 질은 어떠할까? 닳고 닳은 관습적인 방식의 진부한 소설, 인과관계를 벗어난 엉뚱한 이야기, 클리셰 (Cliché)여야 하고 그러므로 예술적 감수성 혹은 진지한 문학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들 작품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바로 절판이 되고 더욱이 작가 사후에는 아주 빠르게 잊혀질 뿐만 아니라 문학 비평계에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우리는 전업 작가이기를 포기한 지 오래되었다.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모두 겸업을 하지 않으면 생계를 꾸릴 수 없게 된다.
    맹자는 양혜왕 편에서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고 했다.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 경제적 이익도 없고 내 명예를 드높이는 것도 아니고 권력으로 가는 길도 아닌데 말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문학에서 돈, 명성, 존경, 구원을 얻고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내 소설이 우리가 사는 사회에 어떠한 변화를 불러올 거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내 소설을 확대 해석하거나 과대 평가하지 않는다. 나는 작가로서 조금도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한심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소설은 독자들에게 단지 심심풀이로 읽을거리를 제공할 뿐인가. 독자가 현대의 변덕스러운 소비자처럼 입맛대로 소설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독자는 그런 종류의 소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문학은 타락한 문학이다. 나는 작중 인물이 누구이건 간에 단순한 소설적 장치가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들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나는 작가와 작품 속 인물들과 진정으로 소통할 능력이 있는 소수의 독자를 원한다. 나는 그런 진지한 독자를 위하여 엄숙하게 소설을 쓴다.
    나는 절실하게 무언가 쓰고 싶으니까 쓰는 것이다. 그리고 글쓰기는 정신적으로 꼭 필요한 활동이다. 가슴 속에 쌓여 있는 감당하기 버거운 분노라는 감정이 폭발하지 않도록 감정을 조절하는 데는 이게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 고통 속에서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치겠는가.
    어떤 화가는 끝도 없이 덧칠하고, 연거푸 물감을 긁어내고, 또다시 캔버스가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반복해서 칠하고 긁어낸다.
    인간의 삶에는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필수불가결하다. 이는 동서고금을 통하여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이는 이야기와는 불가분의 관계여서 계속적으로 쇠락하지만 완전히 소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쓰는가? 예술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 삶을 재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예술가는 반동분자여야 한다. 시대의 주류적 풍조에 저항해야 하고 휩쓸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도덕적이거나 교훈적인 소설을 쓰는 게 아니라 정치적 성향의 소설, 사회소설 또는 (내가 스스로 붙인 명칭이지만) 법률소설을 지향한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우리가 안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 사회적 모순과 우리의 분단 상황과 엄혹한 시절의 시대 상황에 관심이 많다.
    누군가가 그를 평가했다. 알렉상드르 솔제니친은 실패한 예술가지만 아주 성공한 도덕주의자이기도 하고, 그의 소설은 허세 가득한 쓰레기지만 그가 쓴 정치적인 글, 예를 들어 『수용소 군도』는 소비에트의 실상을 고발한 귀중한 걸작이라는 것이다. 그는 굉장히 도덕적인 목적으로 소설이라는 수단을 통해 말 그대로 세상을 바꿔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70년대 유신독재 체제와 80년대 군사독재 체제는 소비에트 정부만큼 엄혹한 체제였으니 나는 그 시대의 상황을 여실하게 고발하고 시대의 초상이 될 작품을 남기고 싶다.
    그때는 뭐하고 이제사……? 나는 그 시절 먹고 사는데 바빠서 어떤 종류의 소설이건 소설을 읽은 적이 없고 그랬으니 소설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논픽션 역사 소설은 일정한 시간, 예컨대 최소한 20년이건 한 세대건 지나서 진실이 거의 다 밝혀지고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가 끝났을 때 비로소 쓰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은 책은 알맞은 독자가 우연히 나타날 때까지 읽히지 않은 채 천 년이라도 기다릴 수 있다고 말했다. 책은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장이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천 년이라니!? 천 년은 아니고 몇십 년은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나는 200편이건 300편이건 작품을 써서 남기면 내가 죽은 후 몇 편만이라도 살아남기를 바란다. 그래서 21세기 우리 문학계에서 사회소설 또는 법률소설을 본격적으로 써서 정착시킨 작가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 불가피하게 종이를 외면한다. 내가 외면하는 게 아니라 종이가 나를 외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컴퓨터와 인터넷, SNS (Social Network Service), 블로그 (Blog), 이메일 시대에 나는 이들을 문명의 이기로 활용한다. 얼마나 편리한가. 글을 써서 올리고 때로는 내린다. 지면의 제한이 없으니 얼마든지 수정한다. 확대하고 축소한다. 그리고 이메일은 어떠한가. 작가에게는 대외적으로 어느 정도는 공개된 삶이 있고 (종이 책으로 책을 출간하면 그렇다) 다른 하나는 은밀해서 알려지지 않고 비밀리에 진행되는 삶이 있다. 이메일은 주고받는 사람끼리만 아는 은밀한 장소이다. 얼마든지 익명으로 처리할 수도 있다. 나는 이메일도 유선 전화처럼 선이 연결되어 있고 그 끝에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상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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