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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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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밤


    혁명가는 무덤 속에서만 평화를 발견한다.― L.A. 생쥐스트

    1979년 10월 26일 오후 5시 45분쯤 김계원 비서실장은 혼자 궁정동으로 갔다. 대통령의 공식행사에는 비서실장이 각하와 동승하지만 비공식 행사에는 경호실장만이 각하 차를 타는 게 관례였다.
    김 실장은 도착하자마자 본관 김재규 부장의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궁정동 안가는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도 비서를 대동하지 못하며 더구나 사무실이건 연회장이건 안내 없이 혼자서 갈 수 없는 이상한 관례가 있었다. 그래서 중정 요원의 안내를 받아 본관의 부장 사무실로 안내되었다.
    김 실장은 우선 김재규 부장을 위로했다. “김 부장, 나도 정보부장을 해봐서 알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정치라는 겁니다.” 김 부장이 최근 며칠간 야당 공작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실패한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김 부장이 얼마 전 박 대통령 앞에서 “신민당의 당직자 사퇴와 정운갑 대행 체제 출범 공작을 26일까지 마무리 짓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했고, 이날이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리 하는 이야기였다.
    김계원은 푸념하듯 말했다. “신민당에 대한 여러 가지 공작들은 중정에서 고생만 하고 공화당이 다 망쳐놨어.”
    김재규가 대꾸했다. “할 수 없지요. 앞으로 정운갑 대행 체제가 출범하게 되면 하나씩 붙여주는 노력을 하는 수밖에 없겠죠.”
    늦가을 황혼의 분홍색 해가 인왕산을 막 넘어가고 있었다.
    김 실장과 김 부장은 사무실을 나와 연회장 나동 앞 잔디밭을 거닐었다. 각하를 모시는 날에는 항상 둘이 앉아 기다리던 높이 60센티미터가량의 펑퍼짐한 넓은 돌 위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눴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훗날 공판정에서 김재규 피고인에게) 검찰관이 물었다.
    “그때 피고인은 뭐라고 했나요?”
    “오늘 해치워버릴까 했습니다.”
    “평상시 어조로 말했나요?”
    “약간 강경하게 말했습니다.”
    “그때 김계원의 반응은 어떠했나요?”
    “말씀은 없었고, 저의 느낌에는 긍정적인 표정이었습니다.”
    “그때 피고인이 ‘형님, 뒷일을 부탁합니다’라고 말한 일 있나요?”
    “기억이 안 납니다.”
    “그때 김계원이 불응했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나요?”
    “그 자리에서는 ‘농담이었소’하고 넘겼을 겁니다.”
    이러한 문답 내용은 검찰관의 김계원 심문 때와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치열한 논점으로 다시 등장한다. 김재규는 검찰관 조사 시에 김계원이 반발했다면 일단 ‘농담이오’라고 하고, 나중에 대통령 살해 장소에서 사살했을 거라고 진술했고, 법정에서도 “뚜렷이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면 저의 총에 맞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 50번지에 자리 잡은 중앙정보부 안가는 400여 평 대지에 바닥 면적 100평의 지하 1층 지상 2층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로 규모가 큰 일반 가정집과 다름없었다. 마당을 둘로 나누어 동쪽은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었고 서쪽은 주차장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물론 그 볼품없는 건물의 형태는 직사각형 굴뚝이 지붕 위로 높이 솟아 있지만 가정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기이했고 공용 건물로는 더욱 이상했다. (사건 발생 수개월 전에 신축되었던 흉가 건물은 김영삼 정부 당시 철거되어 지금은 사진만 남아있다.)
    궁정동의 중정 부장 공관을 겸한 대통령 개인 연회장인 안가는 원래 삼성그룹 소유였다. 김계원이 중정 부장으로 있던 1970년 대통령이 부르면 언제든지 가까이서 달려가겠다는 일편단심에서 당시 청와대 소유이던 성균관대 뒷산의 땅과 교환하여 중정 부장 비공식 사무실을 마련했다. 이어 이후락 정보부장 시절엔 주요 회의 장소 겸 안가 역할을 겸했으며 신직수 중정 부장 때 인근 땅을 사들여 대통령 연회장인 나동, 일명 한국관을 세웠다. (우리는 여기서 안가란 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특수 정보기관이 비밀리에 사용하는 극도로 보안이 유지되는 안전한 가옥. 그러나 여기 궁정동 안가는 대통령이 수많은 젊은 여자를 성적 대상으로 희롱할 때 이용하는 안전한 가옥을 의미했다.)
    이곳에선 사흘 걸러 하루꼴인 한 달에 10번 정도 만찬과 주연이 열렸다. 대통령과 경호실장, 비서실장 셋이서만 식사하는 것을 ‘소연회’라고 했고 중정 부장과 함께 대통령의 ‘술시중’을 드는 젊은 여자 2명이 대통령의 좌우에 참석하는 것을 대연회라고 불렀다. (그 두 명의 여자 중에서 그날 밤 대통령의 마음에 드는 여자가 안가의 이태리제 호화 가구로 장식된 비밀의 방에서 성적 노리개가 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오?” 김재규 부장의 첫마디는 퉁명스러웠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오후 4시쯤 직접 중정의 남산 사무실로 전화를 해서 말했다. “오늘 저녁 6시부터 궁정동에서 대행사가 열리오. 각하께서 김 부장도 참석하라는 명령이오.”
    차 실장으로부터 대연회를 통보받은 김 부장은 잠시 후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과 함께 남산 집무실을 나섰다. 궁정동에 도착한 것이 오후 4시 30분. 김 부장은 곧바로 서쪽에 위치한 본관 2층 자신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김 부장은 본관 2층 자신의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독일제 32구경 발터 권총을 꺼냈다. 이 권총은 손잡이를 잡은 손의 엄지손가락을 위로 펴서 안전장치를 올리고 사격을 하도록 되어 있다. 손잡이가 짧고 얇아서 손에 쥐었을 때 안정감이 있었다. 장군은 노리쇠를 뒤로 후퇴시키고 격발 시험을 한 뒤 탄창에다가 일곱 발을 우겨 넣은 다음 탄창을 끼웠다. 그리고 총신을 뒤로 잡아당겼다가 앞으로 탁 밀자 약실에 실탄이 채워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언제든지 방아쇠만 당기면 발사될 수 있도록 발사 준비를 마친 것이다. 총구에 입김을 한번 훅 불어 넣고 조준을 해보고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숨이 막힐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 김재규가 청와대에 도착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김계원, 차지철과 함께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새벽에 부산에 내려갔다고? 수고가 많군. 앉으시오.”
    “예, 각하.”
    박정희가 식사를 거의 다 끝내고 숭늉을 마시고 있을 때 김재규는 가방을 열고 준비해온 문서와 서류들을 박정희에게 건넸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보고서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박정희는 방금 먹은 저녁밥이 얹히기라도 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김재규 부장이 말했다.
    “각하! 이번 시위는 일종의 시민 봉기로 판단됩니다. 체제에 대한 저항과 정책에 대한 불신, 물가고와 조세 저항까지 겹쳐서 민란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합니다.”
    박정희는 화를 내며 김재규를 질책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신민당이 들쑤셔서 불순한 학생 놈들이나 식당 뽀이 같은 놈들이 데모하는 것을 초동 단계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이렇게 키운 거 아냐?”
    “아닙니다. 각하. 어제 160명을 연행했는데 학생은 16명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일반 시민입니다.”
    “그게 다 식당 뽀이나 똘마니 같은 놈들 아니냐 이 말이야. 신민당이 조종한게 아니면 그놈들이 선별 수리니 뭐니 어떻게 알아?”
    “각하, 제가 시위대 속에 직접 들어가서 시위대의 성분을 체크하고 왔습니다. 노동자도 있지만 사무직 종사자들도 있고 상인들도 있습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시위대가 밀리면 시민들이 음식을 날라다 주면서 격려하고, 쫓기면 숨겨줍니다. 시위대와 시민이 완전히 한 몸입니다.”
    그때 박정희의 눈치를 보고 있던 차지철이 끼어들었다.
    “제가 보기에는 김 부장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게 신민당 놈들이 사주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일 아닙니까? 문제는 미적지근하게 대응해서 불순분자들 기만 살려주었다 이겁니다.”
    박정희는 다시 김재규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 이 사태를 풀기 위해서 긴급조치를 완화하고 김영삼이를 구속하지 말고 그냥 놔둬라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이 시점에서 김영삼 구속, 신민당 의원들의 사퇴서 선별 수리, 이 두 가지는 국민 반감이 너무 큽니다.”
    차지철이 다시 끼어들었다.
    “데모한다고 자꾸 밀리면 앞으로 신민당 놈들하고 학생 놈들, 불순 세력이 손잡고 무슨 요구를 할지 모릅니다.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 됩니다.”
    박정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 부장, 유신에 반대하는 불순세력은 단호하게 처리해야 돼.”
    “강경 대응은 절대 안 됩니다. 중앙정보부의 판단으로는 며칠 안에 이 데모가 전국 5대 도시로 확산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가 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됩니다.”
    박정희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만약 4·19 때처럼 서울에서 데모가 크게 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어. 그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내렸으니까 총살됐지. 대통령인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리는데 누가 나를 총살시키겠어, 안 그래?”
    그때 차지철이 한술 더 떠서 말했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쏴 죽이고도 까딱없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폭동이 일어나면 한 100만 명이나 200만 명 처치하는 게 무슨 문제겠습니까? 각하께 불충하고 빨갱이들하고 똑같은 소리나 하는 놈들은 이 차지철이가 탱크로 다 밀어버리겠습니다.”
    박정희가 다시 말했다.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그렇게 물러서야 무슨 일을 제대로 하겠나?”

    김 부장은 잠시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가 정승화 육군참모 총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정 총장의 수석 부관인 황원탁 대령이 전화를 받았다. 5시가 조금 안되었을 시각이었다. 수석 부관인 황 대령이 전화가 왔다고 정 총장에게 전해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정 총장. 오늘 저녁에 뭐 바쁜 일 있습니까?” 김 부장의 목소리는 다소 밝게 느껴졌다. 특별한 일이 없다고 대답하자 “저도 별일이 없습니다. 우리 저녁이나 같이 하면서 조용히 시국 이야기나 나눕시다.” 고 말했다. 정 총장이 대답했다. “그렇게 합시다.” 김 부장이 말했다. “궁정동에 전에 한 번 와보셨지요.”라고 말하면서 김 부장은 거듭 다짐을 했다.
    김 부장은 곧이어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인 김정섭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김 부장이 말했다. “6시 반까지 이리로 오시오.” 그가 궁정동으로 가서 현관에 막 도착했는데 정 총장이 앞서 들어가고 있었다. 박흥주가 나오면서 “부장님이 대통령 만찬장에 가면서 두 분이 먼저 식사를 하고 있으라고 했다”고 말했다.

    6시 5분.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4명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안가의 대문을 들어섰다. “각하, 어서 오십시오.” 대문 쪽에서 기다리던 김 실장과 김 부장은 함께 허리를 굽혔다.
    그때, 그들은 불과 1시간 30여 분 후에 일어날 자신들의 기막힌 운명을 예감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사나흘 간격으로 진행되는 그런 연회가 오늘도 다시 시작될 순간이었을 뿐이다. 그랬으니 붉은 벽돌집을 감싸고 도는 그 불길한 기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얼굴이 잔뜩 굳어 있는 그의 미세한 몸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육감으로나마 감지할 수 없었다.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안방은 6평 가량의 온돌방으로 밝은 회색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방 입구 오른쪽에는 텔레비전 세트가 놓인 높이 40센티미터가량의 문갑이 있고, 그 위에 대형 휴대용 녹음기와 녹음테이프가 있었다. 식탁 주변의 대통령 자리에는 등받이 의자가 있었고, 나머지 5명의 자리엔 자수방석이 있었다. 대통령 자리 뒷벽에는 십장생도가 그려진 8폭 병풍이 서 있었다. 그리고 문 앞에는 높이 1미터 80센티미터가량의 사방탁자가 놓여 있었다.
    방 한가운데는 직사각형 식탁이 놓여 있었는데 방바닥에서 발을 아래로 내려 뻗을 수 있도록 식탁 밑은 60센티미터 정도 패어있었다. 흰 종이가 씌워져 있는 식탁에는 이미 오곡부침, 송이구이, 생채, 편육, 나물, 마른안주 등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고 12년산 시바스 리갈 2병과 SUN 담배 2갑이 준비되어 있었다.
    방안은 술집 분위기를 풍기면서 조명이 어두웠다.
    대통령이 등받이 의자에 자리를 잡자 맞은편 오른쪽에 김계원 실장이 앉고 그의 왼쪽에 김재규가 앉았다. 차지철은 왼쪽 모서리에 다소 비켜 자리를 잡았다.
    차 실장이 양주병을 따서 주전자에 옮겨 부었다. 박 대통령이 평소 병에서 곧바로 술을 따라 마시는 것은 ‘정취가 없다’고 싫어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김 부장이 먼저 얼음을 채운 잔에 술을 따라 박 대통령에게 권했다. “이래 봬도 제가 칵테일은 좀 합니다.” 집주인으로서 분위기를 이끌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대통령이 김 실장을 보고 말했다. “삽교천이 좋은데 왜 텔레비전에 방송하지 않느냐.” 김 실장이 말했다. “곧 방송할 것입니다.”
    김재규는 처음에는 권총을 안 가지고 있었다. 만찬석에서 첫 번째는 화장실에 가느라고 자리를 떴고, 두 번째는 육군 참모총장과 중정 제2차장보가 와 있는 곳을 잠시 다녀오느라고 자리를 비웠다.
    김재규는 곧바로 50여 미터 떨어진 본관 자신의 집무실 쪽으로 갔다. 그리고 먼저 2층 식당으로 가서 식사 중인 정승화 참모총장과 김정섭 중정 제2차장보에게 들렀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각하께서 갑자기 만찬에 참석하라고 해서 조금 늦어지겠습니다. 곧 올테니 먼저 식사하고 있으세요.”라고 말한 뒤 옆방인 자신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웰터 권총을 집어들었다.

    검찰관이 심문했다.
    “세 번째로 자리를 뜬 것이 19시경인가요?”
    “예.”
    “그때 2층 집무실에 가서 권총을 바지 라이터 주머니에 넣고 왔나요?”
    “예.”
    “그 주머니에 권총이 들어가나요?”
    “저는 담배를 안 피우기 때문에 평소 그 주머니를 크게 만들어서 언제든지 권총이 들어가도록 권총 주머니로 이용해왔습니다.”
    “박선호와 박홍주는 어떻게 범행에 가담시켰나요?”
    “총장과 제2차장보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중간에 있는 건물에 박선호와 박흥주를 세워놓고 오늘 저녁 결행한다고 말하고, 나를 따라 행동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김 부장이 돌아와서 자리에 앉자마자 박 대통령이 김 부장에게 다그치듯이 물었다. “임자, 신민당 공작은 어찌 됐어?”
    김 부장이 말했다. “공화당이 신민당 의원들의 일괄사퇴서를 선별 수리하니 어쩌니 하는 바람에 조금 차질이 생기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당분간……”
    차지철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탱크로 싹 깔아뭉개 버려야 해”
    박 대통령이 다시 힐책하듯 불만을 표시했다. “삽교천은 참 좋던데 신민당은 맨날 왜 그 모양이야.”
    김 부장이 말했다. “지금 김영삼 중심의 주류가 강경론을 펴고 있는데 정 대행은 비주류와 친해서 수습이 잘 안됩니다.”라고 변명 했다.
    (그 당시 주류는 당권을 잡고 있었던 김영삼 계열이고, 비주류는 5월 30일 전당대회에서 총재 경선에 패한 이철승과 신도환 등 반 김영삼 계열이었다. 중정의 정치공작으로 야당 지도부를 인위적으로 바꾸어놓았다 하더라도 새 지도부를 국민들이 사이비나 가짜로 보기 때문에 진짜 야당 정치인이라고 보는 주류의 협력이 아니고는 신민당을 이끌기 어렵다는게 김재규의 진단이었다.)
    차 실장이 또다시 말을 잘랐다. 그는 대통령의 말에 요령껏 맞장구를 치면서 은근 즐기고 있었다. “신민당 놈들 국회의원 하기 싫은 놈 한 놈도 없어요. 언론과 반체제를 의식하느라고 그렇지.”
    박 대통령이 말했다. “차 실장 말이 옳아. 김영삼이도 구속기소했어야 하는데 유혁인(당시 정무수석비서관)이가 말려서 그만뒀더니…”
    김 부장이 말했다. “김영삼은 이미 국회에서 제명됐기 때문에 또 구속하면 국민들은 두 번 처벌하는 걸로 생각합니다.”
    박 대통령이 말했다.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비행조서만 쥐고 있으면 뭘 해. 부장이 저러니 정보부가 약하다는 소리를 듣지.”
    차 실장이 다시 나섰다. “맞습니다. (정보부가) 좀 잘해야겠습니다. (데모가) 지나치면 탱크라도 동원해서 눌러야 합니다.”
    김 실장은 화제를 돌려보려고 “충청도 경치가 아름답지”라고 말했다. 그때 여자아이 둘이 들어왔다. 그러면서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졌다. 박 대통령은 오른쪽에 앉은 신재순 양(당시 한양대 연극영화과 3년)을 바라보며 “예쁘게 생겼군. 이름이 뭐지? 나이는?”라고 물었다. 이어서 왼쪽에 앉은 가수 심수봉에게는 “본이 어디지?”라고 물었다. (‘그때 그 사람’이라는 히트곡으로 인기 절정에 있었던 심수봉은 그 전에도 대연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고 이날도 박 대통령이 대령시키라고 특별히 지시할 정도였다.)
    기분이 다소 좋아진 대통령은 계속 술잔을 비웠고 빈 술잔을 주로 김 실장에게 주었다. 김 부장과 차 실장은 원래 술이 약했으므로 형식적으로만 술잔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김재규는 소주 한 잔 정도를 물로 희석해서 마시는 정도였다. 더욱이 그 당시는 주치의로부터 중증 간경화라는 진단을 받은 지가 3년이 넘었다. (그 당시 주치의는 치료 방법으로 도저히 실행이 불가능한 방법을 내놓았다. 주치의는 항상 마음을 편하게 먹고 푹 쉬어야 상태가 호전된다고 말했다.)
    김 부장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듯했다. 다시 앉기가 무섭게 차 실장이 한 마디 쏘아붙였다. “요즘 중앙정보부는 도대체 뭘하는지 모르겠어. 부산사태만 해도 그렇지요. 정보수집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김재규는 다짜고짜 쏟아지는 막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온몸이 굳고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었다. 하지만 온갖 상념과 긴장, 불안, 강박의 감정을, 몹시 불편한 기분을 억누르고 냉정하게 자신을 유지했다. 초조한 기색을 내비치면 안 되었다.
    김 실장이 얼른 말꼬리를 돌렸다. “뉴스 시간이 됐을 텐데…….”
    차 실장이 시계를 보더니 TV를 켰고 곧바로 7시 뉴스가 시작됐다. 최후의 만찬장에 모였던 6사람은 TV 화면에 아스라이 펼쳐진 삽교천 방조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후의 만찬장은 모두 상의를 벗고 주연이 무르익고 있었다. 시바스 리갈 2병 중 한 병은 약 5분의 4가 남았고 하나는 8분의 1이 깔려 있었다. 주전자는 하나는 완전히 비고 한 주전자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술잔 7개가 나왔는데 대통령과 김 실장이 5분의 4 정도를 마셨다. 대통령의 평소 주량은 시바스 리갈 반병 정도였다.
    심수봉은 처음엔 ‘그때 그 사람’을 불렀고, 대통령은 기분이 썩 좋아진 듯 “도승지, 한잔하게”하며 김 실장에게 술을 권했고 “포도대장, 한잔 받아” 하며 김 부장에게도 술을 주었다. 대통령은 기분이 좋을 때면 김 실장과 김 부장을 ‘도승지’ 또는 ‘포도 대장’이라고 불렀다.
    심수봉의 처음 노래가 끝나자 대통령이 하나 더 하라고 하면서 흘러간 노래를 듣자고 해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렀고, 다음 노래 부를 사람을 지명하라고 했으나 당시 김 부장과 김 실장은 표정이 굳어 있어서 차 실장을 지명했다.

    ♬ 두만강 푸른 물에 / 노 젓는 뱃사공 / 흘러간 그 옛날에 / 내 님을 싣고 / 떠나간 그 배는 / 어데로 갔소 / 그리운 내 님이여 / 그리운 내 님이여 / 언제나 오려나

    평소 술자리서나 어디에서나 차 실장이 노래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그날따라 기분이 좋았는지 순순히 노래를 불렀다. 그는 처음에는 ‘도라지’를 부른 뒤 박수와 함께 ‘앙코르’ 소리가 나오자 아무 스스럼 없이 ‘나그네 설움’을 잇달아 불렀다. 분위기가 아주 익어갔다. 김 실장이 “차 실장이 그런 노래도 다 합니까”하고 분위기를 맞춰주자 “뭐…… 국민학교 다니는 제 딸이 노래 선생입니다.”라고 멋쩍어했다.
    한참 노래도 부르며 주흥이 무르익을 때 식당 담당 남효주 사무관으로부터 박선호가 뵙자고 한다는 전갈이 왔다. 박선호를 만나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때가 7시 40분 쯤이었다. 김 부장이 세 번째로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는 신재순이 노래를 부를 차례였다. 차 실장이 신재순을 지명해서 ‘사랑해 당신을’을 불렀는데, 그때 대통령이 따라 부르자 차지철이 “각하도 그 노래 아십니까?”라고 말했고 대통령이 그 노래를 같이 부르면서 심수봉의 기타 반주가 안 맞아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 사랑해 당신을 / 사랑해 당신을 / 사랑해 당신을 / 사랑해 당신을 / 사랑해 우리는 서로 사랑해 / 온세상이 어두워져도 행복한 마음 / 밝아오는 아침해 같이 사랑은 아름다워라 / 사랑해 당신을 / 사랑해 당신을 / 사랑해 당신을 /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우리는 서로 사랑해

    신재순의 노래가 초반쯤 지났을 때 김 실장의 왼쪽에 앉아 있던 김 부장이 권총을 꺼내 들고 외쳤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김계원 실장을 손으로 치면서 “각하를 똑똑히 모십시오.” 하였고, “이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외치면서 차 경호실장을 쏜 뒤 바로 대통령을 쏘았다. 차 경호실장과 대통령을 쏜 시간적 간격은 5초 정도였다.
    김재규가 권총을 뽑아 들었을 때 순간 만찬장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차지철은 권총을 방어하려는 듯 무력하게 오른팔을 휘둘렀으나 그와 동시에 김재규는 차지철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총탄은 차지철의 오른손 팔목을 꿰뚫었다.
    차지철이 놀라서 외쳤다.
    “김 부장, 왜 이래…… 왜 이래……”
    술기운에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던 대통령이 말했다.
    “이거 무슨 짓들이야!”
    탕!! 차지철과 대통령의 고함 소리는 곧이어 터진 또 한 번의 총성에 묻혀버렸다. 김재규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서면서 쏜 총탄은 박 대통령의 오른쪽 가슴 윗부분을 뚫고 들어가 허파를 지나 등 아래쪽 부위를 관통했다.
    “경호원…… 경호원 어디 있어!”
    차지철은 피가 흐르는 오른 팔목을 붙잡고 일어나서 방안 뒤쪽 실내 화장실 쪽으로 달아나며 소리쳤다. 김재규는 차지철의 등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그러나 방아쇠가 꿈쩍도 않았다. 거듭 집게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노리쇠가 움직이지 않았다. 실탄 장전조차 안되고 있었다.
    차지철이 황망히 화장실로 몸을 피하는 것과 때를 같이해 김재규는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때 안가의 불이 꺼졌다.
    “불 켜, 불 켜라!” 김계원 비서실장은 문밖으로 나오며 복도 벽을 더듬었다. 스위치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순간 옆 대기실과 식당 쪽에서 10여 발의 총성이 콩 볶듯이 울려왔다. (지하실에 있던 보일러공이 총소리가 나자 합선 스파크 소리인 줄로 잘못 알고 전원을 껐다가 20여 초 후 다시 전원을 켰음이 뒤에 확인됐다.)
    나동 정원까지 뛰어나간 김재규는 식당에서 경호원 3명에게 총을 쏘고 나오던 수행비서 박흥주와 부딪쳤다. 김재규는 자신의 권총을 내던졌다.
    “그 총 이리 내.”
    “실탄을 다 쏘아 버렸는데요.”
    김재규는 다시 만찬장 쪽으로 들어왔다. 입구 복도에서 이번엔 대기실에서 경호원 2명을 사살하고 나오던 중정 의전과장 박선호를 만났다. 박선호의 표정을 단숨에 읽은 김 부장은 “잘 했어…. 그 총 이리 내.” 38구경 리벌버 권총을 나꿔챘다.

    한편 김재규와 김계원 실장이 밖으로 나간 뒤 화장실에 피해 있던 차지철은 한 차례의 총성이 멎자 문을 빼꼼히 밀었다.
    “각하, 괜찮습니까?”
    “나는 괜…… 찮…… 아…….”
    당시 박 대통령의 왼쪽에 앉았다가 박 대통령의 ‘나는 괜찮아’라는 마지막 말을 생생히 전했던 심민경 (가수 심수봉의 본명)의 법정에서의 증언.
    함께 왔던 신재순이 노래를 부를 차례가 되어서 기타 반주를 시작했다. 신재순은 ‘사랑해 당신을’을 부르고 있었다. 노래가 채 끝나기도 전이었는데 무슨 고함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총소리가 났다. 얼떨결에 기타를 팽개치고 일어섰다. 그때 박 대통령은 정좌를 한 채 눈을 감고 있었던 것 같았다. 잠시 후 대통령이 내가 앉았던 자리 쪽으로 스르르 넘어졌다. 내가 옆에 다시 앉아 각하를 부축해 일으키자 신재순이 다가와서 각하의 등 위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았다.
    그때 차 실장이 화장실에서 괜찮으냐고 물으니까 “나는 괜찮아”라고 조그맣게 대답했다. 걱정이 돼서 내가 다시 물었다. “각하, 진짜 괜찮습니까?”라고. 그런데 아무 대답이 없이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그 순간 문 쪽으로 머리를 돌리다 총을 들고 다시 들어오는 김 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김재규가 방문에 들어설 때 차지철은 화장실에서 나와 방 밖으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첫 번째 총격으로 오른손 팔목 관통상을 입은 차지철은 계속 “경호원, 경호원”이라고 소리쳤다. (이때 식당과 대기실에 있던 청와대 경호원들은 박흥주, 박선호가 이끄는 중정 경비병들의 기습 사격으로 죽었기 때문에 잠잠해진 뒤였다.) 김재규와 마주친 차지철은 순간 방안 오른쪽 구석에 세워진 장식장 옆으로 뒷걸음을 쳤다. 그가 외쳤다. “김 부장, 김 부장!”
    김재규는 지체 없이 차지철의 복부를 향해 권총을 쏘았다. 차지철은 자신이 움켜쥐었던 장식장과 함께 쓰러졌다.
    김재규는 쓰려져 있는 차지철을 넘어 식탁을 돌아 성큼성큼 박정희 쪽으로 다가갔다.
    심민경이 공판정에서 증언했다.
    김 부장이 내가 부축하고 있는 각하의 머리 뒤쪽에 바짝 권총을 갖다 댔다. 총소리는 들은 것 같지 않고 총에서 불이 번쩍 나는 것만 기억에 남아 있다. 너무도 놀라서 방을 뛰쳐나가는데 나동 관리인인 남효주 사무관이 “저 방에 들어가 있어”라며 부속실로 안내해 주었다. 조금 있으니 남 사무관의 안내로 신재순도 들어왔다. “꼼짝 말고 있으라”는 남 사무관의 지시에 문을 잠그고 있었다. 총소리(차 실장 및 경호원들에 대한 중정 경비원들의 확인 사살)가 나고 한참 후 “다 죽었어?”라고 자기들끼리 묻는 소리도 들렸다.
    당시 차 실장은 탄환이 손에 맞았지만 치명상이 아니었다. 김 부장은 다시 발사하려는데 권총의 작동이 잘 안 되고 탄피가 나오지 않았다. 방 밖으로 나와 처음엔 박홍주에게 총을 달라고 하였으나 탄환이 다 소모된 상태라 박선호 과장의 리볼버 권총을 받아 들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리고 문갑을 잡고 방어하던 차 실장의 가슴을 향해 쏘았다. 차 실장이 쓰러지자 테이블 왼쪽으로 돌아가서 약 50센티미터 거리를 두고 박 대통령의 뒤통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확인 사살을 한 것이다.
    탕!! 탕!!

    12월 17일 오후 4시 15분경, 두 여인은 감색 제미니 승용차를 타고 보통군법회의 8회 공판이 열린 군사법정에 도착했다. 이들은 이날 재판부와 검찰관, 변호인 그리고 보도진 4명과 기관원 등으로 방청이 제한된 별관의 소법정에서 수 시간에 걸쳐 각각 따로 증인신문에 답변했다.
    10·26 사건 당일 밤 박 대통령의 양옆에 앉았던 두 여인이 증인으로 출두하는 날 합수부는 이들의 신원이 노출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크게 신경을 썼다. 하지만 시중에는 이미 ‘손금자’라는 가명으로 발표된 가수가 누군지 알리는 정확한 ‘유비통신’이 나돌았고, 모 대학 연극영화과 재학생이며 모델 노릇도 한다는 ‘정혜선’ 양의 신원도 언론보도만 막는다고 해서 감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신재순 : 처음 총소리가 난 후 화장실로 피신했는데 조금 있다가 또 총소리가 났습니다.
    검찰관 : 그때 대통령 각하는 어떻게 하고 계셨습니까?
    신재순 : 쓰러져 있었는데 식탁 옆으로 몸이 기울어 있었습니다.
    검찰관 : 총소리가 난 후 불이 나갔나요?
    신재순 : 불이 꺼진 뒤 심민경과 둘이서 각하를 부축했습니다. 그때 차지철 경호실장은 “경호원, 경호원”하고 소리치며 화장실에서 나와 문갑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때 변호인단이 유도신문을 하지 말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증인의 답변이 합수부의 수사기록대로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찰관 : 당시 상황을 기억나는 대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신재순 : 식탁에 엎드린 각하를 일으켜 부축했는데 그때 김재규 부장이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각하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 나도 이제 죽었구나 하고 겁이 나서 실내 화장실로 뛰어들어 갔습니다. 잠시 후 조금 조용해지는 것 같아 나와보니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각하를 업고 나갔습니다.
    검찰관 : 차 실장을 본 일이 있습니까?
    신재순 : 방에서 빠져나가려는데 차 실장이 문가에 쓰러진 채 살아있어서 누군지 모르는 사람과 함께 부축하면서 일어나라고 했더니 “나는 못 일어날 것 같애” 하기에 그냥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옆 사람이 안내해줘 어느 방으로 들어가 기다리고 있는데 신음소리도 났고 조금 후 총소리가 계속해서 일곱 발 정도 났습니다. 그 방에 전화가 몇 번 왔는데 무조건 모른다고 했어요.
    (이어 변호인 신문이 시작됐다. 김재규의 국선 변호인으로 선임된 안동일, 신호양, 이병용 변호사 등이 물었다.)
    변호인 : 검찰관이 신문할 때처럼 그냥 “네, 네” 하지 말고 아는 대로 대답해 주세요. 궁정동에 도착해서 바로 방에 들어갔습니까?
    신재순 : 6시 30분에서 40분 사이에 도착해서 잠깐 대기했습니다.
    변호인 : 방에 들어갔을 때 대화가 계속되고 있었나요?
    신재순 : 대화가 계속되고 있는 상태에서 들어가 인사하고 앉았습니다.
    변호인 : 대화 중 언성이 높아진 적이 있습니까?
    신재순 : 없습니다.
    변호인 : 대화 중 차 실장과 김재규 부장 사이에 언성이 높았습니까?
    신재순 : 그런 느낌은 못 받았습니다.
    변호인 : 합동수사본부에 몇 번이나 갔지요?
    신재순 : 한 번 갔습니다.
    (이때 검찰관이 “본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질문은 삼가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자 변호인은 “검찰신문의 신빙력에 관한 질문”이라고 응수했다.)
    변호인 : 그날 김계원 실장이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었다는 것은 높은 어른 앞이라 그런 것인가요, 아니면 무슨 꾸지람이나 죄책감이 있어서였나요?
    신재순 : 뭔가 초조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
    변호인 : 증인은 관상학을 공부한 일이 없지요? 그 날 김 실장을 처음 보았고 조명도 흐렸지요?
    신재순 : 조명은 말하기 곤란합니다.
    변호인 : 조명이 어두웠나요, 밝았나요?
    신재순 : 조명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조명에 대한 질문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은 실내가 밝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시중의 룸살롱처럼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권력자 그리고 술과 여자가 함께 있었다. 이어 심민경이 증인석에 앉았다.)
    검찰관 : 그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대통령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던가요?
    심민경 : 조금 높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검찰관 : 만찬장에 들어간 뒤 대통령 각하께서 총에 맞을 때까지 생각나는 대로 얘기해보세요.
    심민경 : 처음 들어가니 각하께서 차 실장에게 “TV에서 삽교천 행사를 방영하지 않느냐”고 물었고 차 실장은 “시간이 되면 제가 켜드리겠습니다” 하면서 시계를 봤습니다. 이때 저도 시계를 보았는데 7시 10분 전쯤이었어요. 삽교천에 대한 말씀이 계속됐고 심부름하는 사람이 들어와 김 부장의 귀에 대고 “과장님이 뵙자는데요” 하자 바로 나갔습니다. 그 후에 나갔던 김 부장이 언제 들어왔는지 곧 총소리가 났어요.
    검찰관 : 그때 상호 간에 주고받은 얘기가 없었습니까?
    심민경 : ‘이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고함 소리만 들었습니다.
    검찰관 : 김재규 피고인이 두 번째 들어올 때 눈이 마주쳤다고 했는데…….
    심민경 : 총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굉장히 당황했어요. 설마 했으나 각하 머리에 총을 갖다 대는 걸 보고 밖으로 뛰쳐나갔는데 남효주 사무관이 부속실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처음 두 발의 권총 소리는 초저녁 궁정동의 적막을 깼다. 간발의 차이를 두고 십수 발의 총성이 콩 볶듯 뒤를 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5분, 박 대통령은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의 두 번째 총탄에 완전히 쓰러졌다. 박 대통령 절대 통치 18년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그때 나는 외환은행 서소문 지점에서 은행 대리로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면 고단한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만원 버스에 피로한 몸을 싣고 퇴근하고 있었거나, 술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몇몇 동료들과 함께 뒷골목 허름한 술집에서 돼지고기가 익는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막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순간 소주잔을 들고 부딪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김재규는 재판장에서 확인 사살을 한 이유에 대해서 ‘인간적으로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쏜 총알은 딱 두 발이었다. 첫 발은 가슴을 관통했으나 치명타는 아니었다. 이 확인 사살에 의해 유신독재체제는 마침내 종막을 고했고 김재규는 혁명을 완수한 것이다. 김재규는 법정 진술에서 ‘저는 10월 26일 저녁 7시 45분 민주회복을 위한 국민 혁명을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인물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1926년 경북 구미 출생. 육군대학 부총장, 3군단장, 제9대 국회의원, 제13대 건설부 장관 등을 역임했고, 1976년 12월부터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근무했다. 10·26 주동자로 1980년 5월 24일 교수형.
    [1980년 5월 20일 화창한 늦은 봄날 아침인데 벌써 후텁지근한 공기가 초여름을 방불케 했다. 그날은 10·26 사건에 대한 사법부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었다. 재판장 이영섭 대법원장은 오전 10시 8분, 개정 선언을 했다. “사건 번호 80도 306호 김재규 피고인 등 7명에 대한 내란목적살인, 내란수괴미수,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 증거은닉, 살인 사건에 대해 판결을 선고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이영섭 대법원장, 주심 유태흥 대법원 판사)는 10·26 사건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 원심 형량대로 확정했다.
    그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원장을 포함한 14명의 대법원 판사가 참여하였는데 그중 6명의 대법원 판사들이 반대 의견을 냈다. 소수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는 민문기, 양병호, 임향준, 김윤행, 정태원, 서윤홍 등이다. 그들은 그 야만의 시대에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불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그 혁명적 사건은 신중하게 재판이 진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군사작전처럼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10·26 사건이 발생한 지 29일이 되는 1979년 12월 4일 육군본부 대법정에서 보통군법회의 제1차 공판이 열렸고, 2주일 후인 12월 18일 제9차 공판을 끝으로 결심되었으며 20일 판결 선고가 있었다. 그리고 1980년 1월 22일 시작된 고등군법회의의 항소심 공판은 1980년 1월 23일, 24일 등 세 차례밖에 열리지 않았고, 1월 28일 물론 항소기각 판결이 선고되었다.
    5월 24일 새벽 3시 남한산성의 육군교도소를 출발한 호송 차량은 4시 서대문 영천의 서울구치소에 도착하여 지하실 독방으로 김재규를 이감했다. 김재규의 수형 번호는 101번이었다. 그로부터 3시간 후 아침 7시 정각, 김재규는 사형 집행실로 향했다.
    장군은 160센티미터 남짓한 작은 체구였으나 너무나 당당했다. 간경화로 얼굴색은 흑인처럼 새카맸다. 수사 과정에서 전기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피부가 벌겠고, 너무 맞아서 오른쪽 귀는 잘 들리지 않았다.
    집행관이 유언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여전히 묵주를 손에 들고 굵은 단주를 굴리며 말했다. “나는 국민을 위해 할 일을 하고 갑니다. 나의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 김재규의 흑빛 얼굴에 자루를 씌우고 밧줄을 두른 후 교수대의 손잡이를 작동시킨 집행관이 누구였는지는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자신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한 그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그 역시 죽을 때까지 악몽을 꾸면서 그 장면을 어찌 잊을 수가 있었겠는가.
    집행 당시에도 두 손은 수갑과 포승에 묶여 있었는데 복숭아씨로 만든 염주를 꼭 쥐고 끝까지 놓지 않았다.
    당시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5·18 광주항쟁을 총칼로 진압하고 살상 진압하고 있을 때였다. 신군부는 5월 27일 전남도청을 점령함으로써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이 혼란기에 신군부는 김재규를 신속하게 처형하여 그가 정치범으로 감형될 기회를 아예 없애버린 것이다.]

    10·26을 두고 김재규 자신은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유신의 심장인 박정희를 제거하면 전 국민이 자신을 혁명가로 추앙하고 미국도 지지할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계엄사 군사재판에서 ‘민주회복 혁명’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당시 군사법정은 그를 혁명을 일으킨 정치범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란목적살인’죄로 사형을 선고했다. 김재규는 “다수의 희생을 막기 위해 국민이 갈구하는 민주회복 혁명을 했다.”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포로가 된 장군의 심정”이라고 군사법정을 비판했다.
    10·26과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다시 따져보아야 할 중대한 법적 문제는 김재규를 민간법정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세운 것이다. 또 과도하게 신속한 사형집행도 상례를 현저하게 벗어난 것으로 정치범에게 흔히 적용되는 감형이나 사면의 기회를 박탈해버렸다는 점이다. (김재홍 지음,「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56~57쪽 참조)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총을 쏜 10월 26일 당일 서울은 계엄령 상태가 아니었다. 부산, 마산만 계엄령 발동 상태였으며 전국적으로 평시상태였다. 계엄령이 전국에 발동된 것은 10·26이 일어난 다음날이다. 따라서 평시에 발생한 10·26 사건의 연루자들은 헌법상 민간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를 계엄사 군사법정에 세운 것은 소급적용으로 위헌이었다. (이는 소수 의견을 낸 대법원 판사들의 견해였다.) 10·26 사건 연루자들 중 군사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로 현역 대령인 박흥주 한 사람뿐이었다.

    박정희
    (대한민국 제 5 · 6 · 7 · 8 · 9대 대통령)
    1917년 경북 구미 출생. 1961년 5·16 쿠데타를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군정 실시, 1962년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았다. 1963년 제3공화국의 대통령에 취임, 1967년 재선된 후 1969년 3선개헌 및 1972년 유신 독재 헌법 선포 등을 통해 17년간 대통령으로 장기 집권했다. 1979년 10월 26일 최후의 만찬장에서 김재규가 쏜 총에 죽었다.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1934년생. 1961년 제1공수특전단 중대장(대위)의 신분으로 5·16 쿠데타에 가담,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경호차장, 민주공화당 국회의원, 유신정우회 의원 등을 역임했고, 1974년부터 대통령 경호실장으로 있다가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와 함께 죽었다.
    그는 자기도취적이었고 과시적이었고 앞뒤가 꽉 막힌 고집불통이었다. 대통령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나 항상 거친 목소리로 무례하게 말을 했다. 우리에게 남겨진 몇 장의 사진들에서 검은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겨 빗고 입을 굳게 다문 거만한 표정을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다. 그의 거친 성격이나 말투, 몸짓을 박정희는 좋아했다. 그래서 박정희는 그를 애지중지했다. 그리고 몇 초간의 간격으로 함께 죽은 것이다.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
    1923년 경북 영주 출생. 육군참모총장, 중앙정보부장, 주중대사 등을 역임했고, 1978년 12월 22일부터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근무했다. 김재규가 육군대학 부총장으로 있을 당시 김계원이 총장으로 부임하게 되어 처음 만났다.
    10·26 가담자로 무기징역 감형, 1982년 5월 형 집행 정지로 석방, 1988년 특별사면 복권, 2016년 사망.
    김계원은 박정희가 총을 맞고 왼쪽으로 스르르 쓰러지는 것까지 보고 마루로 뛰어나갔다. 김계원은 1심 공판정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싸우는데 각하가 옆으로 피하는 줄 알았다”, “‘각하 앞에서 무슨 짓이야’라고 소리치고 바로 왼쪽에 있던 김재규를 밀었다” 고 진술했다.
    그러나 신재순은, “김계원 씨가 김재규를 말리는 행동을 본 일은 없고 일어서는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김 실장은 아마 전깃불이 나가 제가 볼 수 없을 때 일어나 마루로 나간 것 같습니다.” 라고 진술했다.


    전두환

    최후의 만찬장 살인 사건 발생 8일 전인 10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은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고 이틀 후에는 다시 마산과 창원지역에까지 위수령을 내렸다. 박 대통령 재임 중 네 번째 계엄령이었다.
    그날은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였지만 믿을 수 없는 무수한 사건들이 일어난 아주 긴 다른 하루였다.
    그 시각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연희동 집을 나와 용산구 서빙고동에 있는 보안사령부 수사 분실로 며칠째 비상근무 중인 (윽박지르고 몽둥이로 때리고 정강이를 걷어차고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온갖 고문을 자행하는) 수사 요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피아트 132형 승용차를 타고 이동 중에 있었다. 앞자리에는 전속부관 손삼수 중위가, 뒷자리에는 전두환 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는 불과 48일 후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휘어잡았다. 자신에게 거저 굴러 들어온 기회를 솔개처럼 날쌔게 잡아챈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그의「전두환 회고록」1권에 나름대로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 서빙고 분실과 중정의 남산 분실,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은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이 자행하는 악랄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은 3대 분실이었으니 김재규 장군과 가담자들 역시 1979년 겨울 동안 서빙고 분실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당시, 1979년 10월 말경 서빙고 분실에서는 남민전 (남조선민족민주전선) 사건의 군부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다른 민간인 관련자들은 치안본부 남영동 분실에서 수사 중이었다. 그때 남민전 사건 관계자들인 이재문, 신향식, 최석진 등 이런 사람들은 무지막지하게 고문을 당했다. 그랬으니 1980년대 대표적 고문 사건인 김근태 전 의원에 대한 수사 당시 수사관들이 남영동 분실에서 김근태를 조사하면서 이재문을 들먹인다. “이재문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고문당해서 속이 다 부서져 죽었다. 너도 한번 당해 볼테냐 ……”
    실제 이재문은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고문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옥중에서 죽었다.

    박정희와 김재규, 나는 개인적 기억에서 비롯된 그날 밤 일어났던 일을 사회적 집단 기억의 차원에서 일깨우려고 한다. 우리는 그 시대의 침묵에 담긴 목소리와 절규, 외침, 소음을 들어야 한다. 그 혁명적 사건이 흘러간 옛날의 에피소드 또는 가십거리로 전락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8년간 통치한 이른바 ‘박정희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아주 민감한 부분이다. 지금은 문재인 정권하에서 박정희 시대의 독재 정치나 유신체제를 옹호하거나 찬양하는 사람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박정희의 큰딸이다. 그녀가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는가. 전적으로 박정희의 후광 때문이었다. 그녀가 재임 시절 정치를 잘 했더라면 박정희의 죄과는 묻히면서 그의 공적은 더욱 빛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국민의 역적이 되어 차가운 감옥에 가지 않았는가.)
    어쨌거나 박정희 시대의 전체적 평가에 관해서는 진보 성향과 보수 성향의 사람들 사이에 너무나 뚜렷한 시각차를 보인다. 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박정희의 가장 큰 업적인 경제 정책에 관해서도 이는 장기 집권을 합리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폄하한다. [유종일 엮음,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라는 부제가 붙은)「박정희의 맨 얼굴」참조]
    김재규에 대한 평가 또한 엇갈린다. 10·26 사태로 유신독재체제가 종식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민주화에 기여한 인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김재규의 행위는 한낱 권력 투쟁의 소산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맞서는 것이다. 민주화 관련자로 볼 수 없다는 주장에는 살인자이자 패륜아이며 대역 죄인, 은혜를 원수로 갚은 개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강신욱 변호사나 함세웅 신부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과 비견할 만한 거사라고 주장한다. 박정희 제거는 나라와 겨레를 위해 누군가 반드시 결행해야 할 일이었고, 김재규는 사심 없이 그 일을 스스로 떠맡은 것이라는 점에서 안중근 의사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그리고 7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장군은 박정희를 저격했다. 나는 김재규 장군을 언제든지 장군을 부르고 싶다. 그는 명예와 자존심을 중시하는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대통령을 죽인 죄인이지만 유신의 공포 정치를 타파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사람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김재규 장군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것이다. (안동일 지음,「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 420~426쪽 참조)

    그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40년이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외환은행에 다니는 초급 은행원이었다. (나는 처음 TV에서 그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고 나중에 동아일보의 호외와 속보, 특집을 통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을 알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의 놀라움을 잊을 수가 없다. 계속 내 귀와 눈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 옛날 옛적 궁중 모반 사건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 환상적인 사건의 전모, 무언가 감추고 있는 이면, 음모,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권력층 내부의 암투 등등이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 되었다.)
    그날 밤 우리 역사에서 혹은 현대사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전무후무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극적이긴 하지만 비극적인 사건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논자에 따라 역사적 평가는 제각각 다르겠지만 권총 한 자루에 의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혁명적 사건이었다.
    나는 지금 논픽션 소설을 쓰면서 그날 밤 최후의 만찬장 모습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정확하게 재현하고자 시도한다.
    물론 문학 (여기서 문학은 소설을 말한다)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고 하지만, 나는 그날 밤 최후의 만찬장이라는 무대에서 연출된 그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면서 그 자초지종이 수사 과정이나 재판 과정에서의 김재규, 김계원의 진술, 그 밖에 가담자들의 진술, 두 젊은 여인들의 진술, 현장검증 등에 의해서 아주 정확하게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것들에 의존했다.
    시간이 그만큼 흘렀으니, 벌써 40여 년이 흘렀으니 우리 모두 역사의 방관자가 되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어찌하여 우리는 지금 그 영구불변의 날인 10·26을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순전히 개인적으로 인간의 정서라는 관점에서 그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박정희와 김재규를 냉정하게 평가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인간적으로 실패한 초라한 패배자에 불과하다.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를 위한,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의 체제였다. 그 체제를 유지하고 지탱하는 핵심 기관인 중정의 부장 (평소 친동생처럼 여겼던) 김재규는 분노에 차서 직접 총을 쏘았다. 확인 사살을 위해서 두 번째로 총을 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심복 중의 심복으로) 정권의 제2인자였던 과대망상증 환자 차지철로부터는 철저한 배신을 당하였다. 우리는 그날 밤 차지철의 행동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한다. 그는 박정희를 등에 업고 온갖 권력을 휘두른 경호실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제 혼자 살기 바빠서 총에 맞은 대통령을 내팽개치고 화장실로 도망가 숨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죽는 순간 단말마의 고통 속에서 뼈아프게 생각했으리라. 이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는 거야. 경호실장이란 놈 보라고. 제가 먼저 살겠다고 나를 버려두고 화장실로 도망갔지 않은가. 저 자식을! 경호실장이 총도 휴대하지 않고! 도망가는 꼴이라니! 버러지보다 못하지!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던 거야. 뒤늦은 후회는 소용 없어. 이미 늦었거든.
    재규야! 내 사랑하는 아우야! 넌 나를 두려워하고! 그러나 날 너무 사랑했어! 넌 나의 절망과 고독, 불안을 알고 있었던거지. 그러니까 날 쏠 수 있었던 거야! 날 구원해주기 위해서. 철저하게 타락했던 인간을 구원해주려고. 혁명 법정에서 나의 치부가 낱낱이 공개되었다면 나의 명예는 어떻게 되었을까. 너 말고 누가 감히 나에게! 하지만 이건 역설이라고.
    그러나 확인 사살이 필요할거야. 내가 만약 살아난다면 무서운 복수를 할거니까. 나는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안 돼. 나는 절대로 그냥 물러나지 않을거야. 긴급 조치가 아니라 계엄령을 선포하고 모두 잡아들일거야. 그러므로 나는 살아나면 안되겠지.
    운명이었어. 운명이 우리를 만나게 했고, 운명이 우리를 이렇게 한 거지. 어쩌면 너와 나 사이를 운명이라든가 숙명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거야. 이미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신비한 차원인 거지. 재규가 ‘나는 쏠 수 없어요. 각하께서 직접 쏘시오’ 하며 권총을 건냈더라면 나는 내 가슴을 직접 쏠 수 있었을까. 나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말하진 않겠다. 내가 널 피로 만들어낸 자식보다 더 아꼈거늘. 그런거야…… 그래서 총을 들었겠지. 널 지킬 건…… 믿을 수 있는 건…… 총 밖에 없는 거지.
    나는 저희들끼리 원한에 사무쳐 싸우는 줄 알았다. 둘 사이가 좋을리 없으니까. 그걸 왜 모르겠어. 내가 바보가 아닌데. 그러나 재규의 핏발이 선 눈빛에서 날 정조준 했음을 알았다. 그는 살기등등했다. 내가 바로 목표물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상황을 제대로 파악했다. 그 상황에서 나는 수치심을 느꼈고 그 상황 자체에 대해서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물론 분노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재규야! 넌 이제 어떻게 할거야. 혁명을 할거야. 넌, 네 머리로는 안돼. 혁명이 그렇게 쉬운게 아니야. 목에 밧줄을 거는 것보다는 스스로 총으로 해결해야 할거야. 총이야! 총이라고!
    권력은 광기에 불과해. 권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권력자를 부패시키는 거야. 권력의 오만함이란. 권력은 거품에 불과한 거지. 언젠가는 반드시 꺼지게 되어 있으니까. 나는 그 공포를 잊으려고…… 나는 모든 사람을 깔보고 증오하고 경멸하였던 거야.
    나는 지금 죽을 때가 아니야. 마무리가 안 되었거든. 장차 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없는데…… 그러나 이까짓 거 권력 같은 거 진즉 던져버렸더라면. 이런 험한 꼴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내 나이가 지금 몇 살이지? 죽을 때가 된건가? 이제야 생각나는군. 총을 맞은 순간 얼마나 아팠을까! 우리 인간은 반드시 알아야 돼. 인간은 불완전한 거야. 사악하고 나약하고. 그러니 결국 총이 끝장을 내는 거지.
    젊은 여자의 몸에서 향수가 나는군. 이름이 뭐였더라. 그녀가 날 지금 안고 있는 거야.
    그 순간 삶과 죽음, 인간의 흥망성쇠, 삶의 기쁨과 슬픔, 침묵과 고독,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증오하고 미워했던 사람들이 가슴과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김재규의 부하들은 모두 김재규를 인간적으로 신뢰하고 존경하였기 때문에 그의 지시에 따라, 그러니까 대통령을 시해하는 그 엄청난 사건에서 그를 배반하지 않고, 밀고자가 되지도 않고 일사불란하게 헌신하며 명령을 수행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저 세계에서 틀림없이 다시 만났을 것이고 지금도 친형제들처럼 오순도순 화목하게 잘 지내리라.)
    그는 고독한 혁명가였고 과대망상자였으며 모순투성이 인간이었다. 하지만 위대한 장군은 거의 불굴의 의지와 용기에 의해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던 유신독재체제를 붕괴시킨 혁명을 완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그럭저럭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장군도 한없이 연약한 인간이기에 어찌 그 엄청난 사건을 행동으로 옮길 때는 고뇌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마침내 오늘이야. 얼마나 기다렸던가. 내 충성스러운 부하들이 걱정되지만 그들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유신체제는 오직 박 대통령을 위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비교해보자. 이 대통령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지만, 박 대통령의 성격은 절대로 물러설 줄 모른다. 유신 이후 7년이 경과 되었다. 영구 집권이 보장되어 있는데 앞으로 이 체제는 20년인지 25년인지 유지될 것이다. 박정희와 자유 민주주의 회복은 어쩔 수 없이 숙명적인 관계다. 자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는 한쪽을 희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국민과 정부 사이에 반드시 큰 공방전이 벌어지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고 부상 당할 것이 틀림없다. 그가 살아 있는 한, 자유 민주주의는 회복이 불가능하다. 더 큰 불행을 막고 또 그 불행으로 끝나면 좋겠는데…….
    혁명이란 기존 질서를 뒤엎고 신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무혈혁명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무혈혁명으로는 혁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는 부득이하게 최소한의 희생이 불가피한 것이다.
    내 나이는 실제로 55세이다. 그러니 한 10년이나 20년 끊어 바치더라도 상관없는 일 아니겠는가. 자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장군은 인간적 의리와 민족의 운명 사이에서 갈등 하면서 수없이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고뇌를 하였을 것이다. 그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하는 복수, 그 어떤 형체를 알 수 없는 복수의 욕망은 없었지만 말이다.
    왜 그리 결단을 내릴 수가 없단 말인가. 죽음을 각오하고 있으면서. 민족 앞에 개인적 의리가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아니야. 어찌 인간적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그건 배은망덕이야. 천륜을 어겼다고 할 것 아닌가. 내가 배신자 소리를 들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는 옹졸하고 비열한 인간이다. 그의 정신은 지금 점점 썩어가고 있다. 그 무식한 돼지 같은 놈이 그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이런 하찮은 이유 때문에 총을 쏠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나는 그 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이 없다. 어떻게 살인을 하고 나서 나만 살겠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철회하면 그만이다. 자살은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그건 아주 비겁한 일이 될 것이다. 나의 대의명분을 국민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것이 명예를 지키는 일이다. 나는 명예와 자존심을 생명보다 중히 여기는 참다운 군인이다. 유신체제의 핵심 권력자가 유신을 부정하면 이것은 역설이고 자기 모순이 아닌가. 단말마의 비명 소리! 양자택일의 문제인가! 나는 무난하게 내 인생을 마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심의 가책! 스탈린 체제와 유사한 독재 체제! 경찰국가! 민족의 이름으로 거행할 수 있는 복수! 사리 분별을 너무 많이 생각하면 구국의 결심은 약해지고 결국 나는 겁쟁이가 될 것이다. 사나이 대장부가 눈물을 흘려선 안되는 거야. 침착해야지! 감정이 폭발해서는 일을 그르치게 될거라고! 운명에 맡겨야 되는 거지! 망령에 압도당해선 안되는 거야! 그가 작금의 비극적 상황에 대해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국민이 원하는 합리적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그때는 총을 거둬야 할 것이다. 광기에 사로잡혀서도 안된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아야 한다. 내가 분노할 용기와 능력이 있는 것인가!?
    바람 없는 천지엔 꽃이 필 수 없고, 이슬 내리지 않는 곳엔 열매도 없다. (無風天地無花開 無露天地無結實)

    나는 논픽션 소설인 ‘그날 밤’을 순전히 참고자료에 의지해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1979년 10월 26일은 음력 9월 6일로 어여쁜 초승달이 청명한 하늘에 황금색 나막신을 깎아놓은 듯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쾌청한 날씨였다. 그 역사적인 날에 어울리게 그날 맹렬하게 비가 내렸다면 어땠을까. 비가 마치 관 뚜껑에 못질하듯이 그렇게 맹렬하게 곧바로 내려 퍼부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하늘은 순수하고 청명했으니.
    가장 중요한 자료는, 1차 원천자료라고 할 수 있는 공판조서에 기재된 재판과정, 또 재판기록 메모를 중심으로 정리한 안동일 지음, (170일간의 재판 기록으로 밝힌 10·26의 진실)이라는 부제가 붙은「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김영사, 2017년 6월 12일 발행)와 정치부 기자들이 발로 뛰면서 직접 취재하여 생생하게 쓴 (박정희 살해사건 비공개진술 全녹음) 부제가 붙은 김재홍 저,「운명의 술 시바스 (상권)」,「대통령의 밤과 여자 (하권)」(동아일보사 1994년 5월 1일 발행), (동아일보 연재 인기 비화, 정치장교와 폭탄주) 부제가 붙은「군 ➊」, (핵 개발 극비작전) 부제가 붙은 「군 ➋」(동아일보사 1994년 7월 20일 발행), 정병진 저, (한국일보 정치비사 발굴 시리즈, 실록 청와대)라는 부제가 붙은「궁정동 총소리」(한국일보 1992년 12월 1일 발행)를 주로 참고하였다.
    하지만 김재홍 지음「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책으로보는세상 2012년 1월 4일 발행), 조갑제 실록「박정희의 마지막 하루」(월간조선사 2005년 2월 18일 발행), 유종일 엮음「박정희의 맨얼굴」(참언론 시사IN북 2011년 10월 19일 발행), 문영심 지음 김재규 평전「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참언론 시사IN북 2013년 10월 25일 발행), 김충식 지음「남산의 부장들」, 허문명 지음「김지하와 그의 시대」등등은 2차 자료에 불과하여 자료로서 중요성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궁정동 총소리」는 내가 알기로는 최초의 책이었다. 엄혹한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이런 책을 감히 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6공화국이 들어선 후 노태우 정권에서 처음 햇빛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김재규의 변호인이었다」는 가장 최근에 나온 것으로 저자는 국선 변호인으로 그 재판에 시종일관 참여하였으므로 확실한 재판 기록에 근거하여 공정한 법적 관점에서 저술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신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운명의 술 시바스」과「대통령의 밤과 여자」는 그 자극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녹음된 비공개 진술을 풀어쓴 것이므로 가장 충실한 원천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는 저자가 박정희의 비열한 인간적 면모를 폭로하면서 그를 격렬하게 성토했고, (박정희를 초인 또는 영웅으로 추모한)「박정희의 마지막 하루」는 극히 보수적인 저자의 편향된 시각으로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박정희의 천인공노할 비행은 일체 숨겼다. 하지만 ‘박정희 신봉자’라는 말까지 듣던 저자는, ‘김재규는 박정희의 시의적절한 죽음에 기여했다. 만약 김재규의 결행이 늦었다면 박정희는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저승에서 박정희가 김재규를 만났다면 ‘고맙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재규 평전「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는 비교적 공정하지만 당연히 평가의 방향이 김재규 쪽으로 편향되어 있다. 저자는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계획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엉성하고, 우발적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치밀하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나온 평전들은 대상 인물에 대해 일방적으로 칭찬 일색이거나 호의적으로 기술한다. 과장과 미화. 대개는 철저한 자료 조사 없이 그렇게 한다. (특히 유족이나 후손들로부터 거액의 돈을 받고 대필 작가들이 쓴 평전들이 그렇다.) 그렇다면 그런 게 어떻게 평전이라 할 수 있겠는가. 평전이라면 충실한 팩트를 기반으로 해서 가감없이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그렇지만 중요한 참고자료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썽 많은 회고록에 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코난 도일은, ‘영국인의 자서전치고 정직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문학 형태 중에서 그것은 이 나라의 진정한 천재에게 거의 채택된 적이 없었다.’ 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전두환은 여전히 살아 있다. 2019년 3월 현재 88세이다.「전두환 회고록」3권을 2017년 4월 발간했다. 회고록에는 ‘5·18 광주 사태의 발단에서 종결까지 과정에 직접 관여한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헬기 사격과 무차별적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북한군이 개입했다.’ 등 69곳에 5·18을 왜곡하고 비하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회고록은 5·18을 왜곡한 표현을 삭제하지 않고서는 출판 및 배포를 금지하라는 법원의 결정에 따라 5·18 부분이 포함된 회고록 1권의 배포 · 판매가 중단된 상태다. (나는 운좋게도 법원의 결정이 나오기 전에 서점에서 이 회고록 전부를 사서 보관 중이다.)
    이와는 별도로 회고록에서 조비오 신부를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표현해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고 그래서 기소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1919년 3월 11일은 전두환에게는 아주 긴 하루였다. 1997년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내란목적살인 등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이후 22년 만에 형사법정에 섰다. 사자명예훼손죄로 기소된 지 10개월 만에 처음 법정에 나온 것이다. 그는 재판 내내 눈을 감고 졸았다. 1차 재판이 끝나고 법정을 나왔을 때 빗속에 운집한 500여명의 광주 시민들 중 일부는 그를 향해 ‘살인마 전두환’, ‘내 남편 살려내라’고 울부짖었다.
    그는 2013년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아 지금까지 의료진이 처방한 약을 복용하고 있는 바, 최근 인지능력이 현저히 저하돼 방금 전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이라고 하면서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 몇 번이나 불출석했었다.
    이 회고록 1권의 차례는 다음과 같다.
    제1장 10·26 박정희 시대의 종언은 ‘궁정동 안가에서 울린 총성’, ‘비상사태를 맞은 국가지도부’,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 체포 작전’, ‘계엄령 선포와 합동수사본부 설치’ 등의 순서로, 제2장 12·12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은 ‘승자의 12·12와 패자의 12·12’, ‘정승화 총장의 드러나는 공모 혐의’, ‘10·26 사건 전모 발표와 남겨진 의문들’, ‘10·26 사건을 왜곡시키려는 움직임’, ‘정승화를 연행하기로 결심하다’, ‘정승화 연행 작전’, ‘정승화 추종세력의 반란’, ‘보안사의 반란 진압’ 등의 순서로 기술하고 있고, 그리고 제3장 5·17 위기 수습을 위한 최 대통령의 결단, 제4장 5·18 신화의 자리를 차지한 역사, 제5장 최규하 대통령의 하야 등의 순서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 회고록은 그가 직접 집필한 게 아니고 대필 작가에 의해서 집필한 게 틀림없다. 2013년부터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나는 대필한 자서전 또는 회고록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 회고록에는 과장과 미화, 자기방어적인 자기 변명이 들어있겠지만 역사적 사건에 대한 많은 진실도 함께 담겨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읽어야 할 가치는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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