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정승열
  • 법무사
  • 대전
  • 민사법
연락처 : 042)489- 2104~6
이메일 : chungsyl@paran.com
홈페이지 : www.apollo100.com
주소 : 대전 서구 둔산중로78번길 26,104호(둔산동, 민석타워)
소개 : [전문 영역] 부동산경매, 개인회생 및 파산, 가압류가처분, 법인등기

이 포스트는 0명이 in+했습니다.

    목록이 없습니다.

    정승열님의 포스트

    [ 더보기 ]

    삼일절을 다시 본다

    0

    올해는 삼일절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강탈된 지 만 10년이 되던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조선독립을 선언하는 비폭력 만세운동은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 혹은 3.1.운동이라고 말한다. 3.1운동은 동경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하고, 고종 독살설과 함께 고종의 인산일에 전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었으며, 일제의 무력 진압으로 외형상 실패했으나 한 달 뒤인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일제는 무단정치 대신 민족분열책인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는 것이 그동안 정설이었다. 더불어 중국의 5.4.운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했지만, 최근에는 다른 각도에서 분석하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제 삼일운동 1세기와 해방 74년을 맞이한 오늘 지금까지 감상적인 평가보다 냉정한 분석으로 국가발전과 민족통합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3.1 운동은 민족종교인 천도교 대표 손병희 등의 주도로 천도교, 기독교, 불교도 대표가 참여한 거사로서 독립운동의 이유와 필요성을 강조한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작성했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은 너무 어려운 한문 투인 데다가 내용이 온건하다며 다시 작성할 것을 요구하자 결국 최남선의 초안을 이광수가 교정하고, 만해 한용운이 공약 3장을 덧붙였다. 그런데, 거사 하루 전날인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유혈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거사장소인 탑골공원에 나가지 않고 중국음식점 태화관으로 변경했다.

    도대체 공개된 장소가 아닌 음식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들 어떤 효과가 있다고 믿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이들을 민족대표 33인이라고 한다. 하지만, 정작 3월 1일 오후 2시에 태화관에 모이기로 했던 이들은 오후 3시가 지나도록 29인뿐이었다. 이들만이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때가 오후 4시경이었는데, 정오부터 탑골공원에 모여서 민족대표 들을 기다리던 민중들은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鄭在鎔: 1886~1976)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정재용은 민족대표들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대신 낭독하라는 어떤 지시나 언질도 받지 못한 상태였는데, 그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1000여명의 학생들은 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나섰다. 그리고 행인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한편. 민족대표들은 총독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리면서 자신들이 태화관에 있음을 알리자 이내 60여 명의 헌병과 순사들이 들이닥쳐 그들을 연행해갔다. 태화관에 불참했던 길선주 등 4인도 뒤늦게 경찰서에 자진 출두했다. 여기에서 오후 2시부터 오후 4시까지 탑골공원에서 지척인 태화관에 있던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에 모였던 군중들이 거리로 나와서 시위하는 함성을 듣지 못했을까? 정재용은 그해 8월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서 2년 6월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에도 의용단(義勇團)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했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는데, 나는 이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수천 명의 군중을 선도한 그가 3.1운동의 실질적인 지도자라고 생각한다.

    둘째, 삼일운동 이후 독립 운동가들은 힘을 모아 상해임시정부를 수립했으며, 일제는 3·1 운동을 계기로 일제는 기존의 강압적인 무단통치 정책을 회유하는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었다. 학계에서는 3.1운동이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주었으며, 인도의 반영운동, 그 밖에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말하고 있는데, 중국의 5·4 운동에 참여한 일부 지식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의 5.4 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으며, 인도 등 동남아의 독립운동은 러시아혁명을 일으킨 볼셰비키주의의 영향을 받은 민중의 폭력적 시위가 강조된다는 점에서 부인되고 있다.

    특히 삼일운동의 아이콘으로 인식하고 있는 유관순의 행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해방된 이듬해 1946년 이화여고교장 신봉조와 이화학당 출신인 박인덕에 의해서였다. 이화여고 교장이던 신봉조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조선인을 전쟁터에 내보내는데 앞장선 친일파였으며, 이화학당 출신으로서 대표적인 신여성이었던 박인덕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박인덕, 전영택 등 이화여전 출신 친일파들은 자신의 전력을 덮고, 또 사회주의 계열이 아닌 개신교 계열인 이화학당 출신의 애국자를 발굴할 의도에서 유관순을 한국판 잔 다르크로 부각시켰다는 것이다.

    사실 3월 1일부터 4월 말까지의 두 달 동안에 전국적으로 1,214회의 만세운동이 벌어졌으며, 106만 명이 참가하면서 진압과정에서 사망 7,509명, 구속 4만 7천여 명이라고 했는데, 전국 각지에서 비폭력 독립운동에 앞장선 인물이 하나 둘일까? 당시 유관순의 재판기록을 보아도 아우내장터 시위의 실질적인 주동자는 당시 마을 이장이었던 54세의 조인원(趙仁元)이었다. 그는 미 군정청 경무부장과 민주당 당수 등을 거쳐 민주당 대통령후보였다가 사망한 조병옥의 부친으로서 시위 중에 총탄을 맞고 장기간 입원했다가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우리국민 중 유관순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북한에서는 3.1 운동은 평양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그 중심에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이라고 가르치고 있어서 유관순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다.

    셋째,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1919년 1월 전후 뒤처리를 위하여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안한 민족자결 14개 원칙이 채택되자, 여운형과 신규식 등은 파리 강화회의가 조선 독립의 달성 여부를 떠나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불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파리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파리로 출국하기 전에 김규식은 당원들에게 세계인들이 조선을 잘 알지 못하고 있으므로 파리 강화회의에서 우리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는 소요사태를 크게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결과 조선에 장덕수를 보내고, 여운형은 중국 동북부 길림성에서 1919년 2월 1일 조소앙, 신채호 선생 등 만주와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가 39명이 무오독립선언을 했다. 3.1절 100주년을 앞둔 K-TV 역사 저널에서도 김규식의 소요 요청, 무오독립선언과 재일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2·8 독립선언, 이 한데 뭉쳐서 고종의 독살설과 함께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네째, 건국훈장의 훈격은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 건국포장→ 대통령표창 순서이며, 대한민국장은 정부수립이후 30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아우내장터에서 시위를 주도했던 조인원은 1990년에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는데, 당시 17세의 여학생이던 유관순은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생가를 복원하여 1991년 사적 제230호로 지정하고 탄신 100주년을 맞아 2003년 유관순열사기념관을 개관했다. 그런데도 훈격이 너무 낮다는 비판 속에서 정부는 2019년 삼일절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다시 추서했다. 54세의 마을이장으로서 시위를 주도했던 조인원은 그보다 훈격이 4단계나 낮은 애족장 추서에 그쳤으며, 또 한 사람에게 거듭해서 건국훈장을 줄 수 없다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감성이 더 많이 개재된 것 같아서 아쉽다.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