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유중원
연락처 :
이메일 : rjo12@chol.com
홈페이지 :
주소 :
소개 :

이 포스트는 0명이 in+했습니다.

    목록이 없습니다.

    유중원님의 포스트

    [ 더보기 ]

    차라리 피고인이 되고 싶다

    0

    차라리 피고인이 되고 싶다

    姜信玉 변호사님 법정모욕 사건

    좀 오래전 일이지만,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전국 5대 도시에 근무하는 법관 357명을 상대로 ‘현직 판사들이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사법부 관련 사건’을 조사한 바 있었는데, 유신정권에서 나왔던 인민혁명당 사건 등 긴급조치 사건 판결들이 수치스러운 판결 제1위로 나타났다. 제2위는 행정부에 의한 법관의 인사 조치, 제3위는 1980년 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순서였다.
    그렇지만 70년대와 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이 사건은 아버지 때의 일이고, 90년대에 태어난 요즘의 젊은이들에게는 할아버지 때의 일이므로 멀고 먼 희미해진 역사적인 사건에 불과하다. 그들이 새삼스럽게 기억해야만 할 가치가 있을까? 결국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가 될 것이다.

    1. 1974년 4월 3일

    대통령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은 반국가단체

    박정희 정권은 1974년 4월 3일 밤 10시를 기해서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한다. 대통령 긴급조치 1호만 가지고는 국민의 반유신 항쟁을 막을 수 없게 되자 학생 세력을 일망타진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한 것이다.
    내용인즉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고무 찬양하는 일체의 행위를 최고 사형에까지 처하겠다는 것이었다. 비단 민청학련에 관련된 행위가 아니더라도 학생의 ‘정당한 사유 없는 결석이나 시험거부 행위’에 대해서도 5년 이상의 징역에 최고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노린 유신헌법, 이것을 반대하거나 개정만 주장해도 15년 징역에 처한다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
    그 황당무계한 초현실적인 조치로도 유신독재 반대의 불길은 잡을 수가 없었다. 이때 출현한 또 하나의 초강수가 바로 ‘긴급조치 4호’였다.
    긴급조치 4호가 나오기 직전(같은 날인 1974년 4월 3일 오전)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의 이름으로 된 ‘민중 · 민족 · 민주 선언’이 발표된다. 그 성명은 ‘바야흐로 민권 승리의 새 날이 밝아오고 있다. 공포와 착취, 결핍과 빈곤에 허덕이던 민중은 이제 절망과 압제의 사슬을 끊고 또다시 거리로 나섰다’로 시작된다. 그리고 ‘이에 우리는 반민주적 · 반민중적 · 반민족적 집단을 분쇄하기 위하여 숭고한 민족 · 민주 전열의 선두에 서서 우리의 육신을 바치려 한다’로 끝맺고 있다.

    유인태가 그 당시를 회상했다.
    4월 14일, 나와 이철은 여정남의 신설동 하숙집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때 정오 뉴스를 듣던 나는 숟가락을 놓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2백만 원이라니!”
    얼마 전까지 현상금이 50만 원인 줄 알고 있었는데 라디오에서 2백만원이라는 것이었다. 말이 2백만 원이지, 그 돈을 지금 시세로 환산하면 대충 4천만 원은 될 것이다.
    “셋(이철, 강구철, 나)이 합쳐 2백만 원이겠지! 간첩 현상금이 30만 원인데”
    이철이 대답했다.
    “아니야. 네가 잘못 들었어. 아무러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간첩 몇에 해당하는 현상금을 걸겠냐.”
    이 다툼은 1시 뉴스에서 해결되었다. 각각 2백만 원의 현상금이 붙었던 것이다. 이철은 나보다 태평한 것 같았다. 그는 어차피 잡힐 것이니까 아는 사람에게 신고케 해서 그 현상금의 절반만이라도 어려운 가정에 보탬이 되게 했으면 좋겠다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했다. 어쨌든 더욱 불안을 느낀 우리는 밖에 나간 여정남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밖에서 돌아온 여 선배는 숨찬 목소리로 대뜸 말을 꺼냈다.
    “우리 셋이 같이 있는 것은 자멸 행위인 것같소. 일단 헤어집시다.”
    “지금 이 마당에 갈 데가 막연한데요.”
    내가 불안스레 말햇으나 여 선배는 도저히 같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헤어지는 게 위험이 분산될 것이오. 잡히지 않으면 모레 저녁 6시 어린이 대공원 후문에서 만납시다.”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은 소위 ‘민청학련 사건’의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민청학련은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혁당 재건위와 재일 조총련계 및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 인사가 복합적으로 작용, 1974년 4월 3일을 기해 현정부를 전복하려 한 불순세력으로, 이들은 북괴의 통일전선 형성 공작과 동일한 4단계 혁명을 통해 노동자 · 농민에 의한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한 과도적 정치기구로 민족지도부의 결성을 획책하였다’고 했다.
    중앙정보부는 관련자 1,204명을 조사한 끝에 그중 745명을 훈방하고 253명을 비상군법회의에 송치하였으며, 군 검찰부는 그중 180명을 기소하였다.
    5월 27일 일본인 2명을 포함하여 민청학련 관련자 54명이 1차로 기소된 것을 비롯하여 모두 180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 주동이 된 국가 변란 기도 사건의 주모자급에 대한 수사를 마치고 우선 그중 54명에 대해 대통령 긴급조치 제4호, 제1호,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 음모, 내란 선동 죄명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구속 · 기소했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이후 이 조치 위반으로 수사한 인원은 모두 1,024명이며, 그중 자진 신고자가 266명, 검거자가 732명이며, 죄상이 무거운 253명을 군법회의에 송치했다.”고 발표했다.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비상군법회의 검찰부 발표문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민청학련 사건은 이철, 유인태 등 평소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몇몇 불순 학생이 핵심이 되어 작년 12월 경부터 폭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기 위한 전국적 봉기를 획책하여 오면서 그 과정에서 1) 서도원, 도예종 등을 중심으로 한 인민혁명당계 지하 공산세력, 2) 재일 조선인총연맹(조총련) 계열, 3) 과거 불순 학생운동으로 처벌받은 조영래 등 용공 불순세력, 4) 일부 종교인 등 국내의 반정부적 인사, 5) 기독교인 중 일부의 반정부세력 등 여러 세력과 결탁하여 이들과 반정부 연합전선을 형성한 후 국내외의 반정부 역량을 총집결, 전국에 걸친 유혈 폭력혁명으로 일거에 정부를 전복하고 임시, 과도의 연립정부를 거쳐 궁극적으로는 공산정권을 수립코자 했던 국가 변란 기도 사건이다.
    서도원, 도예종 등은 인민혁명당, 민주민족청년동맹 등 사건으로 피체되어 복역하고 출소한 뒤에도 1969년 경부터 지하에 흩어져 있는 인혁당 등의 잔재 세력을 규합, 인민혁명당을 재건하고, 경북대학교 여정남을 학원 담당책으로 하여 1973년 12월 하순 여정남에게 재경 각 대학교의 반정부 학생과 접선하여 이들에게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을 선동하고 그 방법을 교시하여 자금을 지원하는 등으로 전국적인 대학생 조직을 만들도록 지령했다. (중략) 이철, 유인태 등은 평소 현 사회체제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있으면서 이를 시정하는 길은 폭력혁명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노동자, 농민의 공산정권을 수립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오던 자들로서 1973년 11월 초부터 수십 차에 걸쳐 동년 10월 초의 학원 소요의 주동자이며,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의 지도부 요원이 된 황인성, 정문화, 김병곤, 나병식, 서중석, 정윤광, 이근성, 강구철 등과 수시로 회합하면서 각 대학이 개학을 하게 될 3~4월 중 유리한 시기를 틈타 일제 봉기할 수 있도록 각자가 임무를 분담하여 전국적 대학생 연합체의 조직에 착수, 폭력 봉기를 선동, 일제 봉기의 시기가 되면 전국적으로 행동을 통일키로 함으로써 폭력혁명 주체의 저변 조직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계획대로 폭동이 성공하여 정부가 전복된 후에는 임시 과도정부로서 ‘민족지도부’ ‘10인협의회’라는 연립정부를 세우고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 정권을 세워 북괴와 야합하여 적화통일할 것을 획책했음이 밝혀졌다.

    학생들이 4월 3일을 기해 동시에 시위를 전개하기로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신헌법의 폐지와 유신정권의 퇴진을 기대한 것이었지 주동 학생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졌거나 폭력혁명을 시도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유일한 증거는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뿐이었다.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라는 명칭도 시위에 사용될 전단을 아무 명의 없이 낼 수는 없어서 편의상 작명한 것일 뿐이다. 단체로 규정하는 데 반드시 적시해야 할 가입절차, 정관, 기구, 조직 규정 등이 없어 조직이라기보다 연락체계 수준이었다.
    이날 발표는 중간수사 발표와 달리 ‘조직도’에서 ‘인혁당 재건위’가 중심에 있었다. ‘민청학련’은 여정남이 지휘하는 그 하부 기관인 것처럼 묘사했다. 공소장 요약 발표문의 절반도 인혁당 관련자에 대한 것이었다. 이는 오로지 여정남이라는 한 인물을 매개로 이 두 단체를 억지로 연결짓고자 한 것이다.
    수사 당국은 사람들의 관심이 덜한 인혁당 관련자들을 완전히 공산주의자들로 날조한 뒤에 학생들도 마치 공산주의자인 것처럼 착각하도록 하는 술책을 사용한 것이다.
    민청학련 구성원의 활동에서는 어떠한 용공 · 반국가적 혐의를 입증할 만한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혁당 관련자 누구도 민청학련 관련자에게 직접 지시하거나 데모의 목적을 전달한 자가 없을뿐더러, 민청학련 관련자 누구도 인혁당 관련자와 사상 노선을 함께한 자가 없었다. 오로지 경북대 졸업생 여정남이 “인혁당 관련자에게 지시를 받았다”는 진술과, “이철과 유인태 2명에게 그 내용을 전달했다”는 허위 진술서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인혁당 재건위’라는 것조차도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실체 없는 인혁당
    인민혁명당, 이른바 인혁당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64년 8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인 인혁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하면서부터였다.
    1964년 박정희 정부가 굴욕적 한일회담을 체결하려 하자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은 일본의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이 없는 한일회담이라고 격렬히 반대했다. 반대 시위가 극에 달해 전국의 대학생들이 연일 거리로 나와 시위와 성토를 벌이던 6월 3일, 박정희 정부는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일체의 옥내외 집회 · 시위를 금지하고 언론 보도를 사전 검열하도록 했다. 계엄을 두 달 가까이 지속하면서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렸다. 무장군인들이 대학을 장악하고, 시민들에게는 밤 9시부터 통행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학생 168명, 민간인 173명, 언론인 7명을 구속하고 대학생 352명을 제적시켰다. 대통령에 당선된 지 1년도 안 되어 내린 이런 초강압적 진압 조치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는 잠재웠으나 국민들의 마음속 반대 의견까지 잠재우지는 못했다.
    박정희 정부는 반대 여론마저 잠재우기 위해 한일회담 반대를 주장하던 사람들의 동기에 불순한 의도가 있었다고 보여주기로 했다. 학생 시위의 배후에 공산주의 세력이 있고 이들이 정부 전복을 위해 학생들로 하여금 회담 반대 투쟁을 하도록 선동했음을 증명한다면 국민들을 조용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55일간의 계엄령이 해제된 지 보름 정도 지난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정보부장이 느닷없이 기자회견을 열어, “북괴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혁당’을 적발하여 관련자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한 것이다.(이것이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
    관련자들은 도예종, 이재문, 박중기, 박현채 등 혁신계 인사와 김중태, 김정강, 서정복, 현승일, 김정남, 김도현, 김승균 등 학생들이었다. 이들이 북괴 노동당 강령을 토대로 대한민국을 전복하고 공산정권을 수립하려고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배후 조종했음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 사건은 8월 18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 당시 신직수 검찰총장은 중정의 압력에 굴복하여 수사에 전혀 참여하지도 않았던 검사들에게 기소를 지시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검사들은 크게 반발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검사는 사건 관련자들이 중정의 조사 과정에서 전기고문, 물고문 등 심한 고문을 당했음을 밝혀내고, “증거가 없어 공소 유지가 불가능하며,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소를 거부하였다.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주장 말고는 간첩과 접선한 흔적이 없고 불온 단체를 조직했다거나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고 볼 증거를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은 관련자들을 기소하라는 상부의 압력이 계속되자 이에 항의하여 사표를 내고 말았다. 대한민국 검찰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이 사단장을 할 때 그 밑에서 법무참모를 했던 충복인 신직수 검찰총장은 당직 검사 정명래를 시켜 관련자 26명을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등의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하도록 지시했다. 이때의 검찰총장이 10년 뒤에는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제2차 인혁당 사건 조작을 지휘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다음 해 1965년 1월 선고 공판에서 도예종 등 2명에게 각각 징역 3년, 2년을 선고했을 뿐 나머지 10명에게는 전원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57명의 대규모 지하조직을 적발했다고 큰일 난 듯이 발표했는데, 결론은 2명만 북한 찬양죄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뿐, 국가 변란 혐의는 전원 무죄였다.
    이는 57명으로 구성된 공산계 대규모 지하조직, 즉 인혁당이 실체가 없음을 사법부가 입증한 것이었다.
    이 무렵은 시위 학생들의 영장을 기각한 데 불만을 품고 나중에 대통령 경호실장이 되는 차지철의 사주를 받은 공수특전단 군인 20여 명이 총과 칼로 무장하고 한밤중에 법원과 판사의 집에 난입하여 협박을 하던 때였다. 그런 야만적인 시대였는데도 이러한 판결이 나왔던 것은 인혁당 사건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조작이었는지를 말해준다. 이처럼 1964년 8월에 있었던 인혁당 사건은 완전히 사기극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인혁당을 재건’하려고 했다고 하는 발표는 언어도단이다. 인혁당은 아예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64년 9월 5일 오후, 중앙정보부 부장실.
    인혁당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제5국 대공과장 이용택이 숨가쁘게 말했다.
    “부장님! 이거 큰일 났습니다.”
    “뭐가 또 그리 큰일이오.”
    “인혁당 관계자들이 기소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건 웬일이오? 우리가 그들을 검찰로 넘겨준 게 언젠데. 구속 마감일이 가까워 오지 않았나?”
    “바로 오늘입니다. 저희가 지난달 18일에 검찰로 넘겨주었는데 그 뒤 만 18일을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행사하고 있어서요.”
    “담당 검사가 누구였더라?”
    “이용훈 부장검사 지휘 아래 최대현, 김병리, 장원찬 등 세 검사입니다.”
    “이거 봐요, 이 과장!”
    “네, 부장님”
    “당신 왜 그리 일을 덤비오. 학생들까지 잡아넣어 가지고 말이오. 검사들이 오죽했으면 기소를 못하겠다고 나왔겠느냐 말이야. 조사를 너무 엉성하게 했단 말이오!”
    “죄송합니다. 심증은 뚜렷하나 물증이 약하고, 또 그자들이 워낙 노회하여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게 틀렸다는 거요. 그들이 빨갱이라는 심증은 나에게도 있단 말이야. 허나 물적 증거가 없으면 일이 안 되는 거라고! 어떻게 심증만 가지고 처벌할 수가 있나. 당신은 증거 없이는 처벌하지 못하고, 심증은 증거로 채택될 수 없으며, 사색은 처벌받지 아니한다는 죄형법정주의도 모르고 있나?”
    “죄송합니다, 부장님.”
    “죄송하고 자시고 지금 와서 떠들면 무슨 소용이 있어? 당신들이 그따위로 일을 해서 나를 망신주려고 결심한 것 아니야?”
    “면목 없습니다. 부장님.”
    “잔소리 말고 최대현 검사에게 전화를 거시오. 내가 말할 테니까.”
    최대현은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나의 심복처럼 움직이던 젊고 유능한 검사였다.
    “안녕하십니까. 저 최대현입니다.”
    “최 검사.”
    “네, 말씁하십시오.”
    “당신 어떻게 사건을 처리하고 있는 거요? 중앙정보부를 그렇게 망신을 주어야만 되겠나?”
    “죄송합니다, 부장님. 저는 기소할 만한 요건이 충분하다고 계속 주장해왔습니다만 이용훈 부장검사께서 이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가 현재 이 사건에 있어서는 저희 세 검사들의 상급자임에는 분명하니까요.”
    “이용훈이는 무슨 마음을 먹고 그렇게 세게 나오지?”
    “반공도 좋고 빨갱이를 타도하는 것도 좋지만 증거가 부족하다는 겁니다. 검사의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김병리, 장원창 검사 등은 이용훈 부장검사의 뜻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사의를 표명하기까지 했습니다.”
    “사의를 표명하는 것만이 잘하는 일은 아니야.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 아니냐 말이야.”
    “알겠습니다.”
    “서울지검 검사장에게 내 말을 전하시오. 재판 결과야 어떻게 나든간에 단 한 명이라도 기소는 해야 할 것 아니오! 중앙정보부를 어떻게 보는 거요?”
    “알겠습니다, 부장님. 말씀을 단단히 전하겠습니다. 그러나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중정 측의 조사가 너무 소홀한 것 같았습니다.”
    “알겠소. 좋아. 그럼 수고하도록.”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는 끊어졌다.
    “이게 무슨 망신이람!”
    나는 옆에 있던 이용택에게 들으라는 듯이 투덜대며 전화기를 꽝하고 내려놓았다.

    하지만 1974년 4월 25일과 5월 27일 두 차례에 걸쳐 또 다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발표된다. 그 내용은 “민청학련의 배후에는 과거 공산주의 불법 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와 일본 공산당 등이 개입되어 있으며 (중략) 이들은 공산주의 비밀 지하조직을 결성하여 학생 데모를 조종하여 폭동을 야기하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민청학련의 배후 조종으로 조작 · 기소된 도예종 등 인혁당 관련자 22명은 대부분 사형이나 무기징역이란 중형을 받고 다음해 4월 8일 대법원에서 상고기각된 직후, 만 하루도 되기 전에 그중 8명에게 사형을 집행하였다.

    한승헌 변호사가 말했다.
    여정남은 인혁당과의 관련을 정면 부인했으나 결국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지 하루 만에 인혁당사건 피고인들과 함께 처형되고 말았다. 변호를 맡았던 피고인 중 유일하게 그가 사형을 당할 때, 나 역시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1975년 4월 9일 새벽 그가 형장으로 끌려가던 그 시각에 그의 변호인이던 나는 같은 감옥의 감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저지른 최악의 사법살인이었다.
    그런데 30년 뒤 공개된 한 문서에 의해 해괴망측한 일이 하나 더 밝혀졌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원회는 중앙정보부가 1964년 8월 20일 작성한 내부 문건 ‘김상한에 대한 북파 공작 상황 보고’를 공개하면서, 인혁당을 조직했다는 김영춘은 김상한이 본명이며 그는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이 아니라 중앙정보부에 소속된 북파 공작원이라고 밝힌 것이다.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인혁당 적발 기자회견에서 “북괴 간첩 김영춘이 인민혁명당의 조직 확대 공작을 도예종에 맡기고 월북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과거사위원회는 “인혁당 발표문에 나오는 김영춘과 중정이 내부 문건으로 작성한 ‘인혁당 조직체계’ 등의 문서에 나오는 김상한이 동일한 행적을 한 것으로 보아 김영춘과 김상한은 동일일”이라고 하면서, “김상한은 남파 간첩이 아니라 북파 공작원이 확실하므로 ‘인혁당’이 ‘북괴의 지령’에 의해 조직되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결론지었다.
    국정원 과거사위원회가 공개한 중앙정보부 작성, ‘김상한에 대한 북파공작 상황보고’ 문건 내용은 이러하다.
    김상한은 경남 고성 출신으로 1962년 육군 첩보부대의 북파 공작원으로 선발돼 훈련을 받은 후 북파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중앙정보부는 그를 남파 간첩으로 둔갑시키고 이름을 김영춘으로 바꾸어 인혁당을 조직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중정은 1974년 제2차 인혁당 재건위 사건 때에도 그를 등장시켰다.

    2. 중앙정보부 남산 지하실

    중앙정보부 제6국은 ‘특별국’으로 박정희 정권의 특명을 처리하는 특공대였다. 이용택 국장은 정보부장 신직수를 건너뛰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수사 상황을 보고했다. 그리고 제5국은 원래 간첩사건을 전담해서 조사하는 부서였다. 하지만 그 당시 제5국과 제6국은 모두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에 동원되어 지하실 방에서 수사를 하면서 온갖 종류의 고문을 자행하였다.
    야전침대에서 뺀 봉으로 사람을 두들겨 패는 몽둥이 찜질은 가장 기본적인 고문이었다. 고문을 하다가 피의자의 비명소리가 크게 나면 입에다 솜을 집어넣고 구타했다. 피의자들은 하도 심하게 맞아 온 몸이 시퍼렇게 변할 정도였다. 나중에는 피부가 새카맣게 탄 것 같았다.
    물고문은 이른바 통닭구이 고문과 병행되는 것이 보통이다. 우선 고문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철봉에 붕대를 감는다. 그러지 않으면 고문당한 사람 피부에 찰과상이 나서 고문 사실이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통닭처럼 대롱대롱 매달린다. 그리고는 물수건을 얼굴에 씌운 다음 고춧가루가 섞인 물을 주전자로 서서히 얼굴에 붓는다. 이 고문을 당하면 호흡이 매우 어렵고 숨을 쉰다 해도 고춧가루가 섞인 물이 들어와 폐가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
    전기고문은 엄지손가락이나 발가락에 코일을 붙인 다음 군인들이 사용하는 야전용 전화기에 달린 손잡이를 돌리는 방법을 쓴다. 고문을 당해본 사람에 따르면 이로 인한 고통은 마치 번갯불로 온몸을 지지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는다고 한다.
    전기고문은 보통 물고문이 끝난 후 하는데 경우에 따라 한 쪽 눈을 실명케 하고 발뒤꿈치가 사라지게하고 손톱과 발톱이 모두 뽑히고 또는 발가락을 영구히 마비시키거나 사람을 실신시켜 사망 직전에 이르게 하는데, 이때 살아나도 그 후유증 때문에 평생을 반신불수로 고생해야 한다.
    고문은 수사 초기 중정에서부터 검찰 조사를 받을 때까지 수시로 자행됐다. 수사관들이 고문을 가한 이유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객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고문을 할 필요가 없다. 이 사건의 경우에도 피의자들의 혐의점을 밝히기 위한 수사보다는 원하는 답변을 얻기 위한 고문이 중점적으로 자행됐다.

    유인태가 그 당시 고문 상황을 증언했다.
    3월 28일, 29일 등 최초로 검거된 학생들은 특히 많은 고문을 당해야 했다. 수배자들도 체포하고 배후도 만들기 위해서였다. 밤낮으로 신발을 벗겨 얼굴과 머리를 때리거나 몽둥이 찜질과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 끼우기, 몽둥이를 다리 사이에 끼우고 뭉개대는 고문을 해댔다. 몇날 며칠이고 잠을 못 자게 하고 흰 벽을 쳐다보게 하는 고문도 있었다.
    물론 물고문도 있었다. 발가벗긴 뒤 나무 사이에 묶어 대롱대롱 매달리게 한 다음 수건을 얼굴에 씌우고 주전자로 물을 붓는 것이었다. 숨이 콱콱 막혀 오두발광을 할 때면 “너 군대에 있을 때 북한에 갔다왔지?”하는 것이었다. 견디다 못해 그렇다고 끄덕이면 물붓기를 중단하고 진술서를 쓰라고 했다. 거부하면 또 물고문…….
    지하실에서 로프로 사정없이 등짝을 후려갈기기도 하고 사정없는 몽둥이 찜질에 손이 살갗에 조금만 닿아도 소스라칠 듯 아파 맞을 때보다 더 고통이었다. 며칠 지나면 친절하게 안티프라민 같은 것을 발라주고 위로도 해주었다.
    수사관들은 공포심을 불어넣기 위한 방법도 많이 썼다. 어떤 수사관은 소리를 엄청나게 크게 지르는 역할을 주로 맡은 것 같다. 밤새 내내 고문으로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실제 고문당하는 상황인지 녹음기 소리인지 구별이 어려웠다.
    이렇게 하루도 빠짐없이 고문당하던 몇몇이 4월 15일 경에야 서대문구치소에 넘겨졌을 때, 그래서 서대문구치소의 솜이 여기저기 삐져나온 푸르딩딩한 이불을 둘러쓰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을 때, 정말 천국이나 특급 호텔의 특실에 온 기분이었다는 것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03년 펴낸 ‘기억과 전망’ 봄호에는 ‘인민혁명당 사건을 통해서 본 인권의 문제’라는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데 당시 사건 관련자들이 얼마나 혹독한 고문을 받았는지 기술되어있다.
    고문은 주로 중정 6국 지하실에서 이뤄졌다. 수사관들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일삼았고, 지하실 사무실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몽둥이질을 했으며, 피의자들에게 일주일 이상 잠을 안 재우기도 했다. 하재완은 폐농양증에 걸려 입에서 피를 토했고, 장이 항문으로 빠져나와 똑바로 앉거나 걷지 못했다. 박중기는 전기고문을 받는 도중 실신했다. 이수병은 소나 돼지도 그렇게 맞으면 죽을 정도로 몽둥이질을 당했다고 한다. 당시 피의자들 대부분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으로 반 실신하는 경험을 했고, 몽둥이질 후유증으로 부축을 받으면서야 겨우 계단을 올라 다닐 수 있었다. 서울 구치소 안에서도 철창을 붙잡고 몸을 뒤척이면서 겨우 교도관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김지하 시인은 1975년 2월 ‘동아일보’에 제6국에서의 체험을 이렇게 쓰고 있다.
    저 기이한 빛깔의 방들, 악몽에서 막 깨어나 눈부신 흰 벽을 바라봤을 때의 그 기이한 느낌을 언제나 느끼고 있도록 만드는 저 음산하고 무뚝뚝한 빛깔의 방들. 그 어떤 감미로운 추억도, 빛 밝은 희망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 무서운 빛깔의 방들. 아득한 옛날 잔혹한 고문에 의해 입을 벌리고 죽은 메마른 시체가 그대로 벽에 걸린 채 수백 년을 부패해가고 있는 듯한 환각을 일으켜주는 그 소름끼치는 빛깔의 방들. 낮인지 밤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언제나 흐린 전등이 켜져 있는, 똑같은 크기로 된, 아무 장식도 없는 그 네모난 방들. 그 방들 속에 갇힌 채 우리는 열흘, 보름 그리고 한 달 동안을 내내 매순간 순간마다 끝없이 몸부림치며 생사를 결단하고 있었다.

    중정에서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법률적 관점에서 보면 아주 엉성하였다. 그래서 이 불완전한 피의자 조서를 완벽하게 만들어 기소하는 임무는 검사에게 넘겨졌다.
    이철은 그 당시를 회상하였다.
    (이철이 마지막으로 잡혀들어온 4월 24일에는 이미 민청학련 사건의 윤곽과 배후 세력이 제6국의 각본에 따라 확정돼 있었다.)
    그는 조사 엿새째 되는 날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런데 밤중에 갑자기 헌병들이 발로 차면서 깨웠다. 처음 보는 수사관과 헌병들이 양쪽에서 팔을 끼고 수사관이 앞장서서 다른 건물로 데려갔다. 숲길을 거쳐 들어간 건물 입구에서 지하로 한참을 내려갔다. 복도 입구에 철창이 있고, 벽과 천장은 모두 흰색 방음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철창 앞 경비병에게 수사관이 자신의 신분증을 내주었다 받으니 문이 열렸다. 그들은 그렇게 또 한참을 가다가 한 방으로 이철을 집어넣었다. 제법 넓은 방에 회의 테이블 같은 긴 철제 책상과 의자 몇 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바로 5국 지하실이었다. 5국은 진짜 간첩들을 고문하는 곳이라 그런지 공기부터 살벌했다.
    바닥에는 전기선이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이철은 ‘여기가 전기고문 하는 곳인가 보다. 아, 이제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잔뜩 긴장한 채 적막함 속에서 초조한 시간이 30여 분 흘렀을까. 갑자기 건장한 사내 서너 명이 우르르 몰려왔고 사람 하나 누울 만한 크기의 판자를 들고 들어왔다. 그중 한 사람이 외쳤다.
    “눕혀!”
    이제부터 소문으로만 들었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할 차례인데 그러면 죽었다 싶었다. 그때 다시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저놈 바로 보내란다.”
    “지금 막 시작하려는데 어떤 놈이 지랄이야!”
    “하여튼 빨리 보내래!”
    진짜 고문을 시작하려던 건지 겁주려고 쇼를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철은 다시 수갑을 차고 다른 방으로 끌려갔다. 좀 작은 방이었는데, 여기도 방음벽으로 사방이 가로막힌 채 철제 책상과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곳에 몸집이 작은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가 야비한 웃음을 띠면서 말했다.
    “너, 빨갱이로 죽게 됐으니 영광이지?”
    그 소리에 이철도 악이 받쳐 반말로 대꾸했다.
    “당신 누군지 내 모르겠는데. 전쟁 나면 당신 같은 놈들은 배 타고 다 도망가도 총 들고 싸우는 건 우리야!”
    그러자 그가 표정을 바꾸면서 말했다.
    “수갑 답답하지?”
    그가 수갑을 풀어주었다.
    “담배 한 대 피울래?”
    담배를 주면서 다시 말했다.
    “나 송종의 검사야.”
    그가 바로 송종의 검사였다. 기소를 위한 검찰 조서를 작성하는데 검찰로 부르지 않고 직접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출장을 나온 것이다. 이철은 이는 이전에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와 다른 말을 하지 못하도록 공포 분위기 속에서 조서를 완성하려는 술책임을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송종의는 나중에 김영삼 정부에서 검찰총장에 내정되었지만,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철 등 야당 의원들이 민청학련 고문 조작 사건의 주범이라고 결사 반대해서 낙마시켰다. 그 대신 법제처장이 되었다. 악랄한 고문 검사가 세상이 바뀌어도 법을 만드는 국가 기관인 법제처의 장관이 된 것이다. 아! 대한민국!)
    이철이 체포된 것은 이미 중앙정보부의 각본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억지 진술서를 써버린 뒤로 이철이 그것을 부인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 되어버린 터였다.
    송종의는 우선 이철과 유인태가 인터뷰한 일본인 기자 다치카와로부터 공산주의 폭력혁명을 지시받았다는 자백을 완벽히 받아내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다치카와가 공산혁명을 선동한 게 맞지?”
    “아무리 우리가 학생이고 사회를 모른다 해도 난생 처음 보는 일본 놈 기자가 와서 뭘 하란다고 덥썩 할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좀 하지 마시오.”
    “하야카와가 일본 공산당원인 건 알고 있었나? 아무 목적도 없이 너희를 만나 공작금을 주었겠나!”
    공작금이란 인터뷰가 끝난 뒤 취재비로 7,500원을 준 것을 말한다. 지금 돈으로 30~40만 원쯤 될 터인데. 무슨 혁명 공작금을 보내는데 3~4억도 아니고 30만 원인가.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공작금은 턱도 없는 소리고 인터뷰 사례비를 받은 것입니다. 하야카와는 정식으로 한국에 유학 와 서울대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인데, 공산주의 문제가 있는 인물이면 당신들 정보 당국의 책임이지 우리가 누가 누군 줄 어떻게 압니까? 누구도 그런 지시를 받거나 배후 조종을 받은 사람은 없어요.”
    5박 6일 동안 이철은 송종의 검사로부터, 유인태는 문호철 검사로부터 각각 이러한 자백을 강요받았다. 이들이 끝까지 버티자 검사들은 새로운 논법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유인태와 이철을 한방에 같이 놓고서 말도 안 되는 애국론까지 들먹이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일본 놈 둘을 구속했다고 일본에서 지금 난리다. 죄도 없는 자기네 국민을, 취재 활동 중인 기자를 잡아다 고문했다고 항의가 엄청나. 지금 저 두 놈이 죄가 없다고 되어버리면 말이야.
    우리는 완전히 골로 가는 거야. 일본 놈들 앞에서 앞으론 고개도 못 들어. 저자세로 가야 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공연히 일본 놈들한테 꿀리게 되는 것만은 막아야 되지 않겠어?
    내가 검사로서 약속하는데 이 부분은 외교적으로만 사용하고 국내 재판에는 사용하지 않을 거니까 대충 걔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그렇다고 써버려.
    너희도 한국 사람이고 애국자인 걸 믿으니까. 애국적 견지에서 일본의 공세는 막아야 하지 않겠냐?”
    이철은 두려웠다. 검사들의 달콤한 애국론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수사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부정해도 어차피 종국에는 그들의 요구대로 써줘야만 이 지옥 같은 수사가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거인처럼 덩치가 크고 눈이 왕방울만 한 문호철 검사도 같은 내용의 회유를 유인태에게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유인태와 이철은 진술서에 본의 아니게 서명하고 말았다. 이철은 이 회유를 이기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는 석방되자마자 기자회견에서 일본 기자들이 폭력혁명을 사주했다는 내용은 검사들의 강압으로 허위 자백한 것이며, 그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밝혔다.

    3. 1974년 6월 15일

    비상군법회의 제1심판부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

    재판장 중장 박희동, 심판관 소장 신현두, 심판관 부장검사 김태원, 심판관 부장판사 박천식, 법무사 중령 김영범.
    검찰관 송종의, 최명부, 강철선, 문호철, 이규명.

    민청학련 사건의 재판은 사건 관련자를 공동심리하지 않고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분리 심리했다. 민청학련 사건은 제1심판부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제2심판부(재판장 육군 중장 박현식)가, 일본인 기자들은 제3심판부에서 별도로 비공개 심리를 거쳤다. 다만 인혁당 관련자들 중 여정남은 민청학련 피고인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배후 세력으로 분류된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현 선생 등도 별도 재판을 받았다.
    피고인들이 워낙 방대한 숫자이기도 했지만 서로 진행 과정을 알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기들이 억지로 짜맞춘 각본이 탄로날까봐 검찰관들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법정 출입문 부근에는 헌병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살풍경한 풍경이었다.
    피고인들은 손과 허리를 밧줄에 칭칭 동여매인 채 굴비 엮이듯 엮여 한 줄로 길게 늘어선 채 법정으로 들어갔다. 넓지도 않은 법정은 말 그대로 초만원이었다.
    6월 15일, 국방부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에 끌려나온 학생운동 지도자급 34명 중에는 이철, 유인태, 여정남, 황인성, 나병식, 윤한봉, 안재웅, 나상기, 서경석 등과 함께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총무인 이직형의 얼굴도 보였다.
    가건물로 된 군사법정 안은 찌는 듯한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선풍기 혜택을 받는 법대 위 심판관들이나 손 부채에 의지하는 방청객들, 그리고 장승처럼 늘어서서 방청석 구석구석을 살피고 있는 헌병들 모두 후줄근히 젖은 모습이었다.
    비상보통군법회의 법정은 서울 삼각지 국방부 청사 뒤에 설치되어 있었다. 재판석 가운데 재판장 박희동 육군 중장이 정복을 하고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양옆으로는 신현수 육군 소장, 박천식 부장판사, 김태원 부장검사와 법무사인 김영범 대령이 앉았다.
    방청은 엄격히 제한되었다. 일반인의 방청은 금지되었고, 가족도 피고인 1인당 직계존비속 1명에게만 출입비표를 제공했다. 가족이 한 명도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연락이 안 되거나 정문에서 신원 확인에 문제가 있으면 차단했기 때문이다.
    언론사 기자도 소수로 제한했을 뿐 아니라 취재한 것을 보도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수첩에 메모하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긴급조치 위반 행위를 보도하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재판 뒤 군법회의에서 배부하는 보도자료를 그대로 베낄 뿐이었다.
    그 당시 재판은 심지어 피고인들의 수갑도 풀지 않은 채 인정신문이 시작되었는 데도 심판관 중에 끼여 있는 현직 판사조차 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변호인석에서 “법대로 수갑을 풀고 재판해달라”고 요구하면 그때서야 마지 못해 수갑을 풀어주었다.
    32명의 피고인에 대한 공소장 549쪽을 읽는 데만 하루 종일 걸렸다. 찌는 듯한 무더운 날씨에 송종의 검사는 몇 번이나 읽기를 멈추고 연신 땀을 닦아가며 냉수를 들이키고는 다시 읽기를 계속하였다.
    검찰이 제시한 증거물이라곤 선언문, 유인물, 김지하의 시 ‘오적’, 일본어 서적, 그리고 트랜지스터 라디오 몇 개와 피의자신문조서뿐이었다. 그러므로 조서를 빼면 결정적인 증거라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재판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제시한 증거 외에는 어떠한 증인이나 증거도 채택하지 않았다. 피고인들은 모두 수사기관과 검찰에서 자백과 진술은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검찰이 제시한 피의자신문조서를 모두 증거로 채택했다.
    종전 제3공화국 헌법에서는 ‘피고인의 자백이 유일한 증거’이거나 ‘피고인의 자백이 자의로 진술된 것’이 아닐 때는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미증유의 유신독재헌법은 이 조항 전체를 아예 삭제해버렸다. 과거 같으면 증거로 인정받지 못할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고, 무죄가 되어야 할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검찰 신문에서 피고인들은 시위 사실 자체는 인정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폭력혁명 운운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극력 부인했다.
    피고인들은 “자신들은 평화적인 데모를 위하여 서로 연락만 했을 뿐 반국가단체를 구성한 사실도 없고 폭력에 의하여 정부를 전복하거나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꾀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진술하였지만, 조사 과정에서 검찰관들이 “자신들의 답변을 전혀 무시하고 그들 마음대로 적어 넣은 뒤 무인을 강요하여 날인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피고인들은 한발 더 나아가 유신체제의 부당성을 당당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학생들은 검찰이 묻는 대로 ‘예, 아니오’라고 수동적으로 대답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펼쳐나갔다. 재판장은 유신헌법 비판을 금지한 긴급조치 1호를 위반하는 행위가 법정에서 발생하자 당황했다. 중단하라는 고함과 함께 퇴장시키겠다고 협박했으나 학생들은 따르지 않았다. 법정은 시간이 갈수록 소란스러워졌다. 재판은 경고, 발언 저지, 퇴정 명령, 항의와 휴정으로 얼룩졌다.
    전체적인 재판 진행은 일괄해서 중앙정보부가 통제했다. 중간중간 정장을 입은 중정 요원이 단상 뒤 재판부 출입문을 통해 들락날락하면서 재판장에게 은밀하게 쪽지를 전달하거나 귓속말을 하는 모습이 빈번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긴급조치 제2호 제10항에서 “중앙정보부장은 비상군법회의 관할 사건의 정보, 수사 및 보안 업무를 조정·감독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비단 ‘수사 및 보안 업무의 조정·감독’만이 아니라 실은 재판 전체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것이 민간재판이 아닌 군사재판을 택한 이유였다. 중앙정보부는 국가 정보기관이 아니라 정권 보위를 위한 컨트롤 타워였으며 공작 본부였다.
    인혁당 관련자 재판은 민청학련 관련자 재판보다 이틀 늦은 6월 17일부터 서울 필동 헌병사령부 법정에서 시작되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인혁당 관련자 공판에서는 피고들이 “아니오”라고 한 대답을 “예”로 바꾸어 제멋대로 기록했다.

    검찰의 사실 심리가 시작되면서 유인태는 일본인 기자와 인터뷰에서 폭력혁명을 교시받은 사실을 추궁당했다.
    검사가 신문했다.
    “1973년 12월 26일부터 2회에 걸쳐 일본인 기자 다치카와와 인터뷰라는 명문으로 만나서 그로부터 공작자금을 받고 폭력혁명 방법을 교시받은 사실이 있지요?”
    유인태가 진술했다.
    “인터뷰만 했을 뿐 폭력혁명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에 서명 날인한 사실은 있지요? 그때 검사로부터 폭행이나 협박을 당한 사실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폭행은 없었지만, 문호철 검사가 ‘너희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은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일본과 외교 문제가 걸려 있으니 국가적 이익을 위해 일본인 관계는 공소대로 시인해달라.
    이건 외교 관계에서만 쓰고 재판에는 쓰지 않는다고 검사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다’고 해놓고 인간적 배신을 했습니다.
    공소 항목마다 국가 변란, 정부 전복 같은 말이 끼어 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번 데모도 작년 10·2 데모와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유신 당국의 각성과 시정을 촉구하는 학생운동이었을 뿐입니다.”
    황인성은 민청학련이란 명칭은 유인물의 주체로 썼을 뿐 조직이 아니라고 진술했다.
    “민청학련이라는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 조직을 통해 폭력혁명을 기도했다는 것도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유인물에 민청학련이라는 명칭을 쓴 것뿐인데 그것은 3월 말경 유인물을 만들 때 아무 단체도 쓰지 않고 백지로 낸다는 것이 학생운동 통례상 없었던 일이라 그 당시 즉석에서 제가 구상, 제안한 겁니다.
    그것이 학생의 입장에서 가장 학구적이고 민주적이라고 판단되어 결정된 것이라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도 유인물이 나온 후에야 비로소 안 사람들도 있고 중정에서 조사받을 때 처음 안 사람도 많습니다.”
    정문화도 정부 전복이란 표현은 수사기관에서 처음 들었다고 진술했다.
    “중정 수사 과정에서 ‘너희들이 반정부 데모를 벌여 정부를 전복하고 궁극에 가서 노동정권을 수립하려 했으니 인정하라’고 강요를 받았으나 그런 사실이 전혀 없어 부인했으며, 검찰에서도 강력하게 부인했음에도 도대체 그런 말이 왜 자꾸 나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검사가 김효순을 추궁했다.
    “피고인은 1974년 3월 23일 18시경 주거지에서 상 피고인 이근성과 투쟁 정신을 불러일으키고 시민과 노동자, 농민을 선동시킬 수 있는 노래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를 쾌히 수락하여 피고인이 평소 애창하고, 혁명 정신으로 피의 항쟁을 고취하고 노동자의 투쟁을 선동하는 북괴의 ‘혁명가’와 ‘우리들은 노동한다’ ‘학원수호가’ ‘탄아탄아’ ‘붉은 태양 솟아오르는’ ‘스텐카라친’ 등 별지 제6호의 내용과 같은 도합 13곡의 가사를 대학 노트 2매에 수록, 제공한 적이 있지요?”
    김효순이 진술했다.
    “검사님이 북괴의 혁명가라고 하는 ‘날아가는 까마귀야’라는 노래는 북괴의 혁명가가 아니라 3·1 운동 무렵 만주 독립군들이 항일운동을 하면서 부르던 독립군가입니다. 이는 ‘사상계’ 1970년 3월호 ‘회상의 항하’라는 글에도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스텐카라친’은 러시아 농민들의 민요이고, ‘학원수요가’나 ‘탄아탄아, 우리들은 뿌리파다’ 같은 것은 대학 데모때 늘 부르던 노래일 뿐입니다.
    이제 와서 갑자기 북괴의 노래로 둔갑시킨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검사는 이근성에게 북한 대남방송을 들은 사실을 추궁했다.
    “피고인은 12월 27일 21시경 주거지에서 피고인들이 결성한 조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정부 전복을 위한 활동 상황에 대한 북괴의 평가와 국내 불순 세력의 동향을 확인하기 위하여 라디오로 북괴의 위장 대남방송인 ‘통일혁명당’ 목소리 방송을 통하여 ‘남반부 주부 여러분, 물가고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라는 제목의 선동 방송을 청취한 적이 있지요?”
    이근성이 진술했다.
    “저는 북한 대남방송을 들은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중정에 가기전부터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구타를 당해 그 후 온전한 정신상태에서 정상적으로 진술할 수가 없었습니다. 중정에서 이북방송을 들은 것으로 하라고 하도 강요하기에 내가 12월 말경 서울 집에서 들은 것으로 했는데. 사실 그때는 서울에 있지도 않았고 시골에 내려가 있었습니다. 확인해 보시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나병식은 검찰관이 조사 과정에서 “농민·노동자를 사랑하지 않느냐?”는 식의 질문을 해서 “그렇다”고 대답했을 뿐인데 나중에 이를 구실로 공소장에 “노농정권 수립을 획책했다”는 식으로 억지를 썼다고 주장했다.
    이현배에게는 공산주의 계열 불온서적을 소지한 사실이 있느냐고 추궁했다.
    “저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입니다. 군인은 총으로 국가를 지키고 학자는 학문으로 국가를 지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게 학자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공과 관계되는 자료를 넓게 구하여 읽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불법으로 구한 자료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 책도 문화공보부 장관의 승인을 받은 종로1가 유명 해외서적 센터에서 정식으로 수입 허가를 받아 판매하는 책을 구입한 것입니다.
    이게 불온서적이라면 그런 책을 살 수 있게 수입 허가를 내준 당국의 책임이지 모르고 산 저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검사가 말했다.
    “피고인, 설사 당국이 실수로 불온서적 수입을 허가했더라도 불온서적을 발견하면 신고하는 게 당연하겠지요? 피고는 북괴의 불온 삐라를 습득하면 이걸 막지 못한 당국 탓만 하고 신고 안 합니까?”
    이현배가 말했다.
    “불온서적을 입수하고도 신고 안 한 것도 죄라 하는데, 공산주의 선전 유인물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저 자신도 신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정식 수입하여 판매한 것인데 어떻게 불온서적인 줄 알겠습니까?
    그런 책을 살 수 있게 한 것은 수입 허가를 내준 당국의 책임이지 모르고 산 저의 책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이현배가 반공법 4조 1항에 걸린 이유였다. 학생 신분이 아니면서 반공법에 걸린 자는 석방에서 제외되는 바람에 그는 이 책 한 권으로 징역을 3년 6개월 더 살게 되었다.
    사정이야 어떻든 사람들이 꽉 들어찬 여름의 재판정은 한마디로 찜통 속을 방불케 했다. 헌병의 호위로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는 피고인들뿐만 아니라 모두가 땀을 비오듯 흘렸다.
    6월 중순의 초여름 날씨는 재판정의 열띤 설전과 공방으로 한여름의 폭염으로 변해갔다. 공판이 진행될수록 학생들의 투쟁에 대한 정당성 주장과 검찰관의 유신정권 옹호론이 서로 충돌하여 점입가경이었다.
    검사가 질문을 하였다.
    “학생들에게 극한 투쟁을 하라고 선동한 사실이 있느냐?”
    김지하가 대답했다.
    “학생 운동은 사회를 위한 학생들의 순수한 기여 방법입니다. 데모는 학생 운동의 전부는 아니고 학생 운동의 한 방법일 뿐입니다. 학생 운동 모두를 철없는, 불순한 행동으로 매도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하는 극한 투쟁이란 정부를 전복시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학생 데모로 정부가 전복된다고 학생들도 생각하지 않고,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우리가 잡혀 와 모여 앉아 있는 이것이 우리의 운동 방법이고 우리의 극한 투쟁입니다. 이 점 잘 이해해두시기 바랍니다.”
    학생들은 법정에서 자신들의 정당한 이론을 당당하게 역설했다. 불꽃 튀는 설전과 공방전으로 검사가 오히려 궁지에 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재판 자체는 그들의 의도에 따라 빠르고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군사정권이 잘 사용하던 ‘속전속결’이라는 구호를 그대로 실천하는 듯했다.
    그런가 하면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곽성문은 검찰이 신청한 증인으로 나와서 송종의 검사의 질문에 답변했다.
    “국사학과 선배 황인범과 4·19 직후 통일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황인범이 북한의 대남 적화와 통일전략에 찬동하는 말을 하는 걸 들은 사실이 있지요?”
    “네, 있습니다.”
    곽성문은 이런 식으로 검찰의 질문에 대해서 모두 시인했다.
    담당 경찰관이 말했었다.
    “바보 같은 소리 작작하게! 네 친구들도 속 차릴 놈은 다 차리더라. 학생회장이라는 녀석과 친구들이 지들은 살겠다고 다 불고 갔는데. 걔네들이 정보부에서 자기들을 쭉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걱정이 돼서. 그 애들 중에 5국장과 친척되는 친구가 있다데. 5국장한테 제 발로 찾아와서 다 불고 갔다는 거야. 걔들이 불어서 한강 절두산 밑에 가서 한 놈 잡아 오기도 했는데 뭘.”

    통방
    김지하 시인이 말했다.
    감방의 뒤편 변기 바깥쪽 창문으로 다른 감방의 벗들과 소통하는 것이 통방이다. 감방에서의 유일한 낙은 면회, 즉 접견과 통방일 터이다. 아직 선고가 나오지 않았을 때, 왼쪽으로 한 방 건너 지금은 목사님이 된 서울대 법대의 김경남 아우, 그곁에 기독교사회운동의 맹장 황인성 아우, 오른쪽으로 한 방 건너 한때 지하철노조위원장을 하다 지금은 녹색교통을 시작한 정윤광 아우, 그곁에 지금 국회의원인 장영달 아우, 아래층 왼쪽으로 두 방 건너 지금 ‘조선일보’ 주필인 유근일 선배, 오른쪽으로 두 방 건너 인혁당 하재완 씨 등이 살고 있어 좋은 통방 이웃을 이루었으니 매일같이 통방, 통방, 통방이었다.
    혹간 가다 구치소 간부에게라도 걸리면 다시는 안하겠다고 약속한 뒤 돌아서자 마자 그일을 가지고 또 통방! 그렇다. 통방으로 해가 떠서 통방으로 해가 지는 통방 징역이었다.
    통방! 그것은 유신시절의 매스컴이었던 ‘유비통신’(유언비어를 그렇게 불렀다)처럼 우리의 ‘서대문통신’이었다. 각자의 집안 소식, 친구 소식에서부터 정세 분석과 철학 강좌까지 별의별 섹션이 다 갖추어진 거의 완벽한 매스컴이었으니 누가 이것을 녹음이라도 했다가 풀어 CD로 내거나 출판했다면 틀림없는 떼돈감이었다.
    그러나 그 통방도 사형을 선고받자 마자 그날로 잡범들과 합방시켜버려 자취를 감췄다. 1.75평의 좁은 공간, 더운 초여름 날씨에 8명씩 들어앉아 있자니 그보다 더한 지옥은 없는 성싶었다.
    내 생전 ‘생태학적 필요공간’이라는 말을 처음 실감했을 때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전선줄에 늘어앉은 참새와 참새 사이보다 더 좁아서 맨살이라도 살짝 닿는 날이면 “개새끼! 소새끼!”하며 말싸움이 벌어지기 일쑤고, 서로 눈길이 마주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씹할 놈아! 뼉할 놈아!”하고 대판 주먹질이 오가기 십상이었다.
    나는 어엿한 감방장으로서 치국평천하의 책임을 져야 했다. 참으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 하도 안 풀려 천하태평의 도를 공모했다. 세 사람 입에서 한 마디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강아지!”
    그렇다. 강아지만이 태평의 도였다. 강아지란 담배의 은어이다. 나는 그 날로 청소 담당 기결수와 담배거래를 시작했다. 내 영치금에서 그 값을 빼내가는 순 왕도둑 장사, 엄청나게 비싼 장사였다. 그러나 강아지가 한 모금씩 돌고 나면 8명의 나팔들이 일시에 빙긋이 미소지으며 눈을 게슴츠레하니 뜨고 일대 평화와 정적의 낙원으로 들어갔던 것이니, 범법임을 뻔히 알면서도 강아지 거래를 끊을 수 없었다.
    그러다 한번은 간부에게 걸려 보안과까지 가서 시말서를 썼다. 그러나 돌아오자 마자 계속되었으니 아아! 평화란 얼마나 값지고 고귀한 것인가! 체호프의 ‘담배의 해독에 관하여’를 압도하는 ‘담배의 미덕에 관하여’를 언젠가는 집필하리라는 꿈마저도 꿀 정도였다.

    잿빛 하늘 나직이 비 뿌리는 어느 날 누군가 가래 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나는 삥끼통(감방 속의 변소)으로 들어가 창에 붙어서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큰 소리로 물었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하재완입니더.”
    “하재완이 누굽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인혁당입니더”하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아항, 그래요!”
    4상 15방에 있던 나와 4하 17방에 있던 하재완 씨 사이의 ‘통방’이 시작되었죠. “인혁당 그것 진짜입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물론 가짜입니더”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하고 나는 물었죠. “고문 때문이지러”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하고 나는 물었죠.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버리고 부서져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저런 쯧쯧”하고 내가 혀를 차는데, “즈그들도 나보고 정치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달라고 합디더”하고 하씨는 덧붙이더군요.
    “아항, 그래요!”
    그 뒤 7월 언젠가 ‘진찰’(구치소내의 의무과 의사가 재소자들을 감방에서 꺼내어 줄줄이 관구실 앞에 앉혀놓고 진찰하는 일과) 받으러 나가 차례를 기다리며 쭈그리고 앉았는데, 근처 딴 줄에 앉아 있던 키가 작고 양 다리 사이가 벌어지고, 약간 고수머리에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고, 왕년에 주먹께나 썼을 것같은 사람이 나를 툭 치며 “김지하 씨지예”하고 묻더군요. “그렇소만 댁은 뉘시유”하고 내가 묻자. 그 사람은 “지가 하재완입니더”하고 오른손 엄지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지 않겠어요.
    “아항, 그래요!”
    이렇게 해서 잠깐 만난 실물 하재완 씨는 지난번 통방 때와 똑같은 내용의 얘기를 교도관 눈치 열심히 보아가며 낮고 빠른 소리로 내게 말해주더군요.
    마치 지옥에서 백년지기를 만난 듯 내 어깨를 꽉 끌어안고. 그러나 내귀에는 마치 한이 맺힌 귀곡성처럼 무시무시하게 들리는 그 가래 끓는 숨소리와 함께 열심히, 열심히.
    또 그 무렵 어느날인가 출정하다 한 사람이 나에게 “김지하씨지요”하고 묻더군요. “네. 그렇습니다만…”하고 대답하자 “나 이수병이오”하고 말합디다.
    “아하, 그 ‘만적론’을 쓰신 이수병 씨요?”
    “네.”
    “어떻게 된 겁니까.”
    “정말 창피하군요. 이거 아무 일도 나라 위해 해보지도 못한 채 이리 끌려들어와 슬기로운 학생운동 똥칠하는 데 어거지 부역이나 하고 있으니…. 정말 미안합니다.”
    “아항, 그래요!”
    나는 법정에서 경북대학교 학생 이강철의 그 또릿또릿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나는 인혁당의 ‘인’자도 들어보지 못했는데 그것을 잘 아는 것으로 시인하지 않는다고 검사 입회하에 전기고문을 수 차례나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소위 인혁당이라는 것이 조작극이며 고문으로 이루어지는 저들의 전가비도傳家秘刀의 결과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죠.
    그뒤 어느날, 나는 감방벽에 기대 앉았어요. 한없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어요. 끝없는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어요.

    내 피를 부른다
    거절하라고
    그 어떤 거짓도 거절하라고.

    거절하라고? 그래요. 거절이죠. 어둠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빛 속에 드러내라고? 거짓을 거절하라고? 그래요. 힐덜린의 시에 있어서의 그 빛의 수수께끼. 그것은 바로 이 거절이었어요. 정말 그래요.

    김지하는 계속 도망다니다가 1974년 4월 25일 흑산도의 예리 여관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흑산 파출소 소속 경찰을 따라 배에 올랐다. 수갑에 묶인 그의 손은 목포에 도착한 내내 선장실 쇠창살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상경하여 끌려간 곳은 그 무시무시하다는 중앙정보부 제6국 지하실이였다.
    긴급조치 4호 선포 며칠 뒤인 4월 19일 맏아들이 태어났지만 그는 이 소식을 뒤늦게 감옥에서 들었다.

    4. 1974년 7월 9일, 결심 공판

    첫 공판을 시작한 지 24일 만인 7월 9일, 이철, 유인태 등 32명에 대한 결심 공판이 열렸다.
    듣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죄였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적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법규는 모조리 갖다붙인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형량이 무거운 조항만 골라 적용시켰다. 그때 김일성을 잡아다 재판을 했다고 해도 그 이상의 죄목은 더 달지 못했으리라.
    검사가 구형을 하였다.
    “피고인들은 4월 3일 전국 각 대학과 연합하여 일시 다발적으로 봉기하여, 유혈사태를 유발하여 폭동화시킨 후 폭력혁명을 하기로 모의하는 등 국헌을 문란케 하고 국가 변란을 기도했으므로
    비록 대부분이 학업 도상에 있는 자들이나 죄질이 극악하므로 엄중히 처벌하고, 특히 그중 수괴에 종사한 자들에 대해서는 극형에 처하여 자유 민주 사회에서 영구히 제거하는 게 마땅하다고 사료되는 바입니다.
    피고인 이철, 유인태, 동 여정남, 동 김영일, 동 김병곤, 동 나병식, 동 이현배를 사형에 처해주십시오.”
    잠시 법정 안은 시간이 영원히 정지한 듯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정적만이 흘렀다.
    “피고인 정문화, 황인성, 서중석, 안양로, 이근성, 김효순, 유근일을 무기징역형에, 피고인 정윤광, 강구철, 이강철, 정화영, 임규영, 김영준, 송무호, 정상복, 이직형, 나상기, 서경석, 이광일을 징역 20년 자격정지 15년형에, 피고인 구충서, 김정길, 이강, 윤한봉, 김수길, 안재웅을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에 처해주십시오.”
    검사의 입에서 사형, 무기징역 등 무시무시한 말이 떨어지자 예상했다는 듯이 담담한 학생도 있었고, 설마 했다가 충격을 받은 학생도 있었다. 피식하고 웃는 학생도 있었다.
    사형 구형에 가장 어이없어했던 것은 김지하와 이현배였다. 실제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한 일이 거의 없는 데다가 후배들 몇 번 만난 게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본인들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놀랐다. 아마도 민청학련의 배후 조종 세력으로 4·19세대와 6·3세대를 상징하는 두 사람을 사형 명단에 넣어 구색을 갖추려는 정권의 무리한 시도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이미 그 전날 같은 시각 필동의 제2심판부 법정에서는 제2차 인혁당 사건의 판결 선고가 있었다. 검찰관이 구형한 그대로, 사건 관련자 21명 중 서도원, 도예종 등 8명에게는 사형을, 김한덕 등 7명에게는 무기징역을, 나머지 피고인 6명에게는 징역 20년을 선고하였다. 이 천인공노할 판결은 그 후 바뀌지 않았고, 당사자들은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학생들이 예상보다 엄청난 구형을 받자 이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변호인들은 피고인보다 더 당황하고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들은 충격을 가라앉히고 피고인들을 구하고자 있는 힘을 다해 발언했다. 황인철 변호사는 끝까지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최후 변론을 했다. 홍성우 변호사의 목소리는 점차 격앙되어 떨렸다.
    세 번째로 변론을 시작한 강신옥 변호사는 먼저 피고인들이 고문을 당한 사실을 확인하고 피고인들의 진술서가 고문에 의해 강요된 것이니 증거로 채택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지금 검찰관들은 나라 일을 걱정하는 애국학생들을 내란죄나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을 걸어서 빨갱이로 몰아치고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중형을 구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 건 공소사실에 대하여는 증거가 있다면 검찰관이 작성한 각 피고인들에 대한 신문조서나 참고인 등에 대한 진술조서들과 같이 형식적 증거능력이 있는 것뿐인데 피고인들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등은 피고인들 전부가 당 법정에서 그들의 자의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수사기관의 강요에 의하여 작성된 신문조서와 의견서를 근거로 검찰이 일방적으로 작성하여 무인을 강요하므로 어쩔 수 없이 무인하였다고 항변하고 있고 동 피고인들은 전부가 대학 재학생이든지 기독교인들로서 법정에서 그들의 태도는 진실하였고 거짓이라고는 전연 보이지 않을뿐더러 변호인 각자가 맡은 피고인들 이외의 피고인신문조서에 대하여는 반대신문을 경유하지 않은 조서들이어서 증거능력마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참고인 진술조서 역시 위 재판 과정을 설명할 때 말한 대로 반대신문을 허용치 않아서 이것 역시 증거능력이 없는 것이며 더욱 검사의 피고인들에 대한 신문조서 작성은 접견까지 금지된 상태에서 한 것으로서 그 신빙성이 더욱 의심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여정남에 대하여 신청한 증인신문은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이 법정에서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서 재판받고 있는 피고인들인데도 이들에 대한 변호인의 증인 신청을 모조리 기각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결국 이렇게 되면 피고인 등에 대한 재판은 피고인신문만을 마친 실정뿐이어서 형식만 재판일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소송법상 소위 적법절차의 보장은 전연 무시한 것으로서 이와 같은 형식적인 절차로 피고인 등에 대해 사형까지 구형한다면 이것은 우리들의 기초적인 법 감정인 정의 이념에 너무나 동떨어진 재판이어서 결과적으로 검찰은 피고인을 형식적 재판을 통하여 법의 이름으로 처단하려는 사법살인의 비난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변호인”
    순간 법무사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강신옥의 변론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그는 잠시 숨을 몰아 쉰 뒤 변론을 계속했다.
    “기성 세대가 무기력하여 민주헌정으로의 회복을 위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어 학생들이 이와 같은 과감한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닌가. 왜 학생들이 공부도 못하고 이런 일을 하고 있는가.”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신음소리와 함께 탄성이 터져 나오고 나른한 상태에서 졸고 있던 헌병들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드는 듯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사법을 빙자한 살인행위라는 주장은 무서운 말이었다. 재판장 박희동 중장이 강 변호사의 말을 제지했다.
    “변론 중지하시오!”
    그러나 강신옥 변호사는 계속했다. 법정에 있던 사람들은 이러다 강 변호사가 무사할 수 있을까 아연 긴장했다.
    “극악무도한 일제 치하에서도 3·1 운동 당시 정말 내란죄에 해당하는 경우에도 일본인들은 심판하면서 최고 12년에 머물렀습니다. 지금 법이라는 게 정치나 권력의 시녀가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게 합니다.
    본 변호인은 기성 세대이기 때문에, 그리고 직업상 이 자리에서 변호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하여 피고인석에 앉고 싶은 심정이올시다.
    악법은 지키지 않아도 좋으며 악법과 정당하지 못한 법에 대하여는 저항할 수 있고 투쟁할 수 있는 것이므로 학생들은 악법에 저항하여 일어난 것이니 이러한 애국학생들인 피고인들에게 그 악법을 적용하여 다루는 것은 역사적으로 후일에 문제가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치정권 하에서 처가 남편과 이혼할 목적으로 남편이 나치에 저항하는 말을 했다고 당국에 허위로 고발해 형을 살게 한 일이 있었지만 정권이 무너진 후 남편이 풀려 나와 악법 하에서 자신을 고발했던 처를 고발해 처벌받게 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적 심판’에 해당됩니다.”
    방청석이 왁자지껄해지면서 여기저기에서 또 다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저런 사연으로 군사법정에 들어와 앉은 후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 뭉클한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4시가 넘고 있었지만 길고 긴 여름 해는 아직 중천에 머물고 있었다. 선배 변호사 이세중, 박승서가 다가와 저 치들 뜨끔했을 거라면서 이젠 수위를 좀 낮추라고 격려 겸 충고를 하고 갔다.
    ‘나도 차라리 피고인석에 앉고 싶다’는 말은 긴급조치 위반자들에 동조한다고 해석될 만한 표현이었다. 그 한마디로 법정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재판장의 얼굴색이 붉으락푸르락 불안정하게 변화했다. 그러자 뒤편 출입문에서 쪽지를 들고 들락거리던 중정요원이 다시 재판장의 뒤에 나타나 귓속말을 했다.
    “중지하시오! 정리, 중지시키세요!”
    “계속하게 둬!”
    “변론을 막지 마라!”
    “변호인들은 피고인에 동조하는 발언은 긴급조치 4호 위반이란 사실을 명심하시오! 휴정합니다.”
    재판장은, 법무사가 몇 번씩 제지를 해도 강신옥 변호사가 계속 변론을 해나가자 강 변호사의 변론을 강제 중지시키고 휴정을 선언했다. 30여분이 지나 공판이 속개됐을 때, 강신옥은 “오적시를 쓴 김지하 피고인은 민족시인으로서 훌륭한 시인이며, 외국에서도 오적시는 훌륭한 시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언급을 한뒤 자리에 앉았다.

    강신옥 변호사가 말했다.
    74년 4월 3일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해 20여 명의 학생, 청년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에, 나와 홍성우 변호사 등 몇 명이 이 사건의 변론을 맡게 됐는데, 당시 나는 김지하, 정상복, 여정남, 나병식 등 11명의 변론을 맡았다. 하지만 당시 정황이 연이어 긴급조치가 발동되는 등 워낙 분위기가 살벌해 대부분이 이 사건을 맡으려 하질 않았다. 게다가 사안이 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하는 데다가, 군법회의하에서 재판을 해야하는 탓에 결과도 뻔한 만큼 더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이 사건이 학생들의 데모를 잠재우기 위한 충격요법의 일환으로 정부가 만들어낸 조작극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변론을 맡게 되었다.
    민청학련사건 피고인 중 경북대학생 여정남 군은 인혁당사건과의 ‘연결고리’로 꾸며져 기소되었다. 그의 변호를 맡고 있던 변호사가 도중에 나더러 대신 좀 맡아달라고 간청해서 나는 뒤늦게 그의 변호에 나서게 되었다.
    그날이 그러니깐, 74년 7월 9일이었다. 그날 나는 변론을 해야 할 줄 전혀 몰랐다. 이는 증거신청 등을 해놨던 까닭에 그날 결심을 하리라곤 전혀 예견치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전에 변론요지를 준비해가지 못해 즉석변론을 해야만 했는데 평소의 소신대로 의견은 개진했다.
    이같이 변론하자 몇 차례 발언을 제지당했으나 그래도 계속하자 끝내 휴정을 했다. 그리고 휴정 중에 재판부에서 사람을 보내 이제 할 만큼 했으니 그만 해달라고 해서 그 뜻을 받아들였다. 당시만 해도 변론 내용이 문제가 되리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다. 다소 분위기가 삭막하긴 했으나 법에 정해진 변론의 면책특권이 보장되리라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개정을 해 들어가 다른 변호사들의 변론을 다 듣고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을 듣기 바로 직전이었다. 갑자기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들이닥쳐 나와 홍성우 변호사를 연행해 갔다. 모두가 아연실색해 하는 가운데 말이다. 우리들은 웬 으슥한 방으로 끌려가 변론요지 및 그 동기 등을 조사받았는데 그날은 3시간 정도 하더니 돌려보내주었다.

    다시 휴정이 선언되었는데 중앙정보부 요원인 듯한 청년 두 명이 다가왔다.
    “이것, 변호사님 것이지요?”
    그중 한 명이 강신옥의 가방을 집어들었다. 또 한 명의 요원은 홍성우 앞으로 다가갔다. 그 역시 강신옥보다 먼저 한 변론에서 군사법정의 탈법 절차를 강력히 규탄하여 법무사의 주의를 받은 바 있었다. 막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신옥, 홍성우 두 변호인이 연행되고 나서 재판장은 공판을 속개했다.
    재판장이 말했다.
    “피고인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진술하시오!”
    이철이 먼저 일어났다.
    “내 목숨을 바치는 것은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나는 유신체제는 끝까지 반대할 것입니다. 반민족적인 유신체제의 철폐를 위해서는 언제까지라도 싸우겠습니다. 하지만 반유신을 이유로 나에게 빨갱이라는 누명을 씌우지는 마십시오. 만약에 공산주의자로 터무니없이 몰아붙이지만 않는다면 나는 떳떳하게 죽음을 맞겠습니다. 반국가단체를 조직했다고 하나 단체의 구성 요건이 하나도 충족되어있지 않고 우리는 단체를 만든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반정부는 했을지언정 반국가를 한 적은 없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학생 데모가 일어나고 있으나 어디에서도 이를 국가 변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활동하다가 죽는 것은 좋으나 공산주의자라는 누명은 씌우지 말기 바랍니다.”
    그러나 여정남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사형집행을 예상했는지 아주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의 주장을 피력했다. 길고도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미처 정리되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 재판장이 중간에 연거푸 발언을 막는 바람에 여정남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도 못했다. 정부가 인혁당 관련자들을 기어이 사형에 처하리라는 것을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여정남이 말했다.
    “솜사탕처럼 확대된 것에 불과합니다. 경북대에서 3·21 데모 때 사용한 구국선언문은 정화영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수사 과정에서 과장된 것입니다.”
    정문화가 말했다.
    “역사가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나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우다가 이 법정에 선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국가 전복이나 폭력혁명을 하려고 한 바 없고 애국적인 표현으로 데모를 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힘으로 누르려 하지 말고 민주적으로 요구를 받아들여서 해결하기를 바랍니다.”
    김병곤이 말했다.
    “검찰관님,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저에게까지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사형을 내려주겠다니 영광입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이 땅의 민생들에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늘 부끄러운 마음뿐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을 위해 이 젊은 목숨이라도 바칠 기회를 주시니 감사한 마음 이를 데가 없습니다. 사형을 구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윤광이 말했다.
    “개인적 사정으로 힘껏 뛰지 못해서 이 법정에서 사형을 구형받지 못한 것이 부끄럽습니다. 후배들에게 부끄럽습니다.”
    강구철이 말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합니다.”
    정화영이 말했다.
    “여정남 선배에게 미안하고 죄송스럽습니다. 유신헌법 반대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정화영은 기결수가 되었을 때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독방에 수감되었다. 독방에 혼자 있으면 늘 공상이 가득해져 그는 머릿속으로 기와집을 지웠다가 부셨다가 또 지었다.

    나는 포악한 박정희를 수십 번이나 죽였다. 나는 억울하게 죽은 여정남과 인혁당 선배들을 생각하면 울분을 참을 수 없었다. 몸을 땅에 파묻고 목만 내어놓은 상태에서 칼로 목을 치기도 하고 권총으로 머리를 두드려 죽이기도 했다. 어떻게 하면 저 잔인하고 야비한 인간 말종 박정희를 죽일 수 있을까……. 그 고문하던 놈들, 저 중앙정보부를 폭파시키는 방법이 뭘까…….

    김효순이 말했다.
    “학생운동은 국민 총화를 위해 더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선배들에게 상을 주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살 만큼 살았고, 감옥도 이번에 처음이 아니니, 나를 죽인다니 할 말이나 실컷 해불고 죽고 싶소. 절대 내 말을 끊지 마시오, 재판장님. 자고로 이 땅에 생명이 생겨나고부터…….”
    김지하는 나머지 피고인 전부를 합친 것보다 더 길게, 생명사상에서 시작해서 동서고금 역사를 넘나들며 최후진술을 했지만 재판장은 제지하지 못하고 끝날 때까지 그대로 두었다. 그는 이렇게 끝맺었다.
    “학생들이 다 폭력혁명이 아니고, 민주화운동을 한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비판을 받기 싫으면 세금도 쓰지 말아야 된다고 봅니다. 국민이 걷어준 세금과 잠시 맡겨둔 권력을 쓰면서 거꾸로 국민에게 가르치고 명령하려니 문제가 생깁니다. 비판하고 반대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의무이며 올바른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현 정권은 두 번 말할 것도 없이 철저한 독재정권입니다. 죽을지언정 굴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입니다.”
    나상기가 말했다.
    “존경하는 친구들의 신념에 탄복했습니다. 역사의 움직임의 내용을 하나님이 보실 때 흠 없는 것이 되기 바랍니다.
    역사에 오점 없는 판단을 바랍니다”
    한 학생이 말했다. “한때 수사 과정에서 겁이 나서 유신 반대를 부인했던 것을 참회합니다. 나는 유신에 분명히 반대합니다”

    5. 1974년 7월 13일

    징역형 총 선고 형량, 1,650년에 달해

    1974년 7월 13일.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 속 비상보통군법회의 제1심판부 공판정. 민청학련 관련자 32명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번쩍이는 헌병들의 혁대 버클, 무거워 보이는 견장들이 죽 늘어서 있는 삼엄한 분위기 속에 공개재판의 흉내라도 내기위해서 피고인 가족을 한 명씩만 방청시켰다.
    재판장 중장 박희동, 심판관 소장 신현두, 법무사 중령 김영범, 심판관 부장검사 김태원, 심판관 부장판사 박천식, 그 왼편의 검찰관석에는 검찰관 송종의, 최명부, 강철선, 문호철, 이규명 등이 앉아 있었다.
    재판장 박희동의 판결문 낭독소리가 굳어버린 공판정의 공기를 뚫고 낮게 깔렸다.
    재판장 박희동 중장은 판결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판결문이 423쪽이었는데 간단히 요약한 것만 떠듬떠듬 읽은 것이다)
    “이철, 유인태 등은 평소 공산주의 서적을 탐독하면서 자본주의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폭력에 의한 혁명을 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이론에 공감하고 있던 바 국민 총화의 유신체제가 정비되자 현 정부는 기본권을 말살하고 자본주의 병폐를 가중시킨다고 망상하고 노동계급에 의한 신정부 수립을 열망하던 중 3, 4월 위기설에 편승하여 (중략) 동료 대학생들과 수십 차례 회합을 가진 끝에 4월 3일 전국 각 대학과 연합하여 일시 다발적으로 봉기하여, 유혈사태를 유발하여 폭동화시킨 후 정부기관을 장악하여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려고 폭력혁명을 하기로 모의하는 등 국헌을 문란케 하고 국가 변란을 기도했으므로, 비록 대부분이 학업 도상에 있는 자들이나 국가 내란음모, 선동, 국가보안법, 반공법, 긴급조치 1호 · 4호 위반죄를 적용하여 엄벌에 처함이 마땅할 것이다.”
    판결 이유 낭독에 이어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
    이철, 유인태, 여정남, 김병곤, 나병식, 김영일, 이현배 7명에게 사형을, 정문화, 황인성, 서중석, 안양로, 이근성, 김효순, 유근일 등 7명에게 무기징역을, 정윤광, 강구철, 이강철, 정화영, 임규영, 김영준, 송무호, 정상복, 이직형, 나상기, 서경석, 이광일 등 12명에게 징역 20년 자격정지 15년을, 구충서, 김정길, 이강, 윤한봉, 김수길, 안재웅 등 6명에게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했다.
    판결문의 선고 이유와 형량은 군법회의 검찰관이 낸 공소장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 그러니까 중앙정보부가 정한 형량대로 검찰이 구형하고 법원에서는 이와 한 치의 오차없이 판결했다. 그랬으니 심지어 공소장에 있는 오자가 그대로 판결문에 나오기도 했다. 판결문은 국화빵처럼 공소장을 글자 하나 틀리지 않게 옮겨놓았으며 구형한 그대로 형량이 선고되는 ‘정찰제 판결’이 계속 나왔다.
    삼각지 언덕배기 군용 콘셋 내에서 열린 군법회의는 한낱 요식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맨 앞줄은 사형, 그 다음 줄은 무기, 셋째 줄은 20년, 마지막 줄 15년…….” 이렇게 앉은 순서(줄)에 따라 형이 정해진다고 비아냥거릴 정도의 각본 놀음이었다.

    이리와 양
    시냇가에서 새끼 양 한 마리가 물을 마시고 있는데 이리가 다가와 공연한 트집을 잡았다.
    “너는 어째서 내가 마시려는 물을 흐려놓고 있느냐? 이놈!”
    새끼 양은 겁에 질려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말씁입니까요? 저는 나리보다 훨씬 아래쪽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어떻게 나리가 마실 물을 제가 흐려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넌 작년 이맘때에 내 욕을 한 일이 있지?”
    새끼 양은 또 한 번 가슴이 뛰고 두근거렸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또렷하게 대꾸했다.
    “그때는 아직 제가 이 세상에 나오지도 않았는걸요. 전 지금 생후 여섯 달밖에 안 되었으니까요.”
    “생후 6개월이라고? 그럼 내 욕을 한 놈은 네 형이었던 게로군!”
    “형이라구요? 저는 형이 없는데요.”
    새끼 양은 이제 터무니없는 혐의가 벗겨졌다고 안심을 했다.
    그러나 이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그건 너의 아비였을 거야. 좌우간 너의 식구들을 잡아먹히게 되어있어. 자, 따라와야 한다니깐.”
    이렇게 해서 새끼 양은 이리의 식욕의 제물이 되고 만다.

    사형 선고를 받은 이들은 겉으로는 “못 죽인다. 겁주는 거다”, “농담도 흉측하게 하고 있네”라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했지만 속으로는 “죽일지도 몰라”, “그래도 설마 죽이기야 하겠나”라면서 불안해했다. 그러다가 구치소에서 감방 안에서까지 수갑을 채우는 등 감시가 사형수와 같은 수준으로 강화되자 “이제 진짜 죽이려나 보다” 하고 사형 선고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주일 뒤인 7월 20일 군법회의 관할관인 서종철 국방부장관의 확인서가 이들에게 도착했다. 확인 과정에서 사형 선고자 7명 중 이철, 유인태, 김병곤, 나병식, 김지하, 이현배 등 6명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여정남은 사형 그대로여서 불길한 감을 더욱 지울 수 없었다.

    그날, 돌아오는 호송차 안, 피고인 일행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면서도 오히려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유인태, 김병곤, 여정남, 김지한 시인 등이 한 차를 타고 쭉 둘러앉아 있었다.
    누군가 말문을 열었다.
    “이 자식들 재수없이 흉측한 농담을 하고 있네. 형편없는 놈들이야.”
    이철이 말을 받았다.
    “사형이라니, 농담이 지나쳐도 아주 지나쳐.”
    모두들 픽픽 웃으며 사형선고를 화제 삼아 몇 마디씩 우스갯소리를 주고 받았다. 민청학련 사건에 관련돼 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총형량은 사형 9명과 무기징역 21명을 제외하고도 140명의 피고인들에게 선고된 징역 형량은 1,650년에 이르는 엄청난 형량이었다.
    김지하 시인도 한마디 했다.
    “내가 나가서 ‘속 오적’을 쓸 때 저자들도 한 자리씩 끼워줘야겠어.”
    그러자 웃음이 더 크게 일었다.
    그러나 (자신을 옥죄고 있는 불길한 운명을 예감하고 있던) 여정남은 웃지 않고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막다른 상황으로 몰려가고 있다는 것을 더욱 절감하는 듯 했다. 여정남은 결국 풀려나지 못하고 다른 인혁당 관련자들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어처구니없는 죽음이었다.
    그 무렵 구치소에서 마주친 유인태가 “아무리 독살스런 사람들이지만 설마 사형시키기야 하겠느냐”고 위로했다.
    그러자 여정남은 “아냐. 박정희는 지금 몇 명을 죽이려고 하는 것 같아”하고 대답했다.
    실제 박 대통령은 1974년 4월 5일 군포 야산에서 식목일을 기념하는 오동나무를 심으면서, “민청학련 대학생 놈들은 보고를 들어보니 순 빨갱이들이야. 잡히기만 하면 모두 총살이야”라고 공언했다. 그 자리에는 그 당시 경기도 도지사와 수행 기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모두 들었다. 모두가 들으란 듯이 말한 것인지, 아니면 무심코 나온 말인지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청와대 보도 관제에 따라 보도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사형수들은 사형 집행장에서 목에 굵은 밧줄이 걸려 죽었다. 정작 박 대통령 자신은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에 의해 죽었다. 육영수 여사는 문세광이 쏜 탕! 탕! 두발의 총알에 의해서, 박 대통령은 장군이 쏜 탕! 탕! 두발의 총알에 의해.
    그때 장군은 처음 한 발을 쏜 후 나중에 확인 사살을 위해 한 발을 더 쏘았다. 장군은 확인 사살을 한 이유에 대해서 “인간적 환멸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들은 장군의 그 말에 동의할 수 있다. 그동안 검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대통령의 추악한 행적이 어느 정도는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런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들은 통방을 통해 재일 한국인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 소식을 들었다. 그 놀라운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 남산 국립극장에서 광복 29주년 기념일 행사가 열렸다. 육영수 여사는 그때 박 대통령 대신 죽은 것이다. 문세광은 무대 쪽으로 뛰어가면서 두 발의 총알을 대통령을 향해 쏘았지만 대통령이 연설대 뒤로 몸을 숙였고 그러자 그는 연단 왼쪽에 꼿꼿이 앉아 있던 육 여사를 향해 두 발을 쏘았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개인에게 서서히 불행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일종의 전주곡이었다.
    그는 5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 초저녁 이른 시간 궁정동 안가에서 역시 분노에 찬 장군의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을 가슴에 맞고 죽었다. 그는 권총의 차가운 금속성 촉감을 느끼면서 증오심과 함께 살기가 북받쳐 올라왔던 것이다.
    그날 오후 4시 30분경 장군은 본관 2층 자신의 집무실 금고에 보관 중이던 독일제 32구경 발터 권총을 꺼냈다. 노리쇠를 뒤로 후퇴시키고 격발 시험을 한 뒤 탄창에다가 일곱 발을 우겨 넣은 다음 탄창을 끼웠다. 그리고 총신을 뒤로 잡아당겼다가 앞으로 탁 밀자 약실에 실탄이 채워지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언제든지 방아쇠만 당기면 발사될 수 있도록 발사 준비를 마친 것이다.
    장군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말했을 때 유신의 심장은 박정희의 심장을 말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유신독재체제는 박정희 그 자체였다. 그가 홀연히 사라지자 그 체제도 바로 무너졌다. 모든 권력은 붕괴한다.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붕괴한다.
    (그런데 70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민족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을 쏘았다. 장군이 그때 그날을 기억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평소 안중근 의사를 숭앙했었다. 안중근 의사처럼 똑같이 촛불처럼 깜빡이는 민족의 운명 앞에서 분노했고 그래서 목숨을 걸고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막다른 골목에서 양심의 명령에 따라 자신을 희생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도무지 항거할 수 없는 숙명이 그를 불시에 찾아오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현대에서도 독재는 여전히 일반적 현상이긴 하지만 독재는 극히 비정상적인 것으로 비꼬이고 뒤틀린 현상이다. 그러므로 독재의 주재자인 독재자는 정신적 도착자인 것이다. (비열하고 교활하며 잔꾀가 많은) 독재자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권력을 추구하고, 권력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억압하고 피를 흘리게 하면서 거기에서 말할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는 서서히 인격이 파탄나면서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스탈린 체제 만큼 가혹했던 유신독재체제는 그 무렵 절체절명의 한계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절망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이럴 경우 인간은 동물적이고 육체적인 생존 욕구만 꿈틀거리게 된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인데 그때는 이미 늦었다. 단말마의 운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생애에 걸친 오랜 인연과 만남은 운명적이었고 몇 달 간격으로 진행된 비극적 죽음 역시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 어떤 섭리에 의해 숙명적으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장군은 혁명가의 열정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숙명으로 받아들였고 총알이 발사된 후에는 자신이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되는 엑스타시의 상태에서 자신을 무화無化시켰던 것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뫼비우스의 띠 같은 운명의 순환.
    운명은 수레바퀴와 같이 돌고 돈다.
    운명의 여신은 장님이다.
    (박 대통령은 훗날 술에 만취하면 울면서 사형집행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기획과 집행은 박 대통령의 지휘, 감독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그가 최종 책임자임을, 우리는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그 불행한 사건 이후 쓰디쓴 원한을 품고 복수의 일념에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다.
    그는 암흑의 미로 속에서 불안했고 고독했으며 자기연민에 빠졌다. 숨가쁘게 밀려드는 긴장 속에서 일시적이긴 하지만 유일한 도피처는 더욱더 관능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육체적 향락에는 수많은 희생양이 필요했다.
    과연 그가 울었고 후회했을까. 믿을 수도 있고 못 믿을 수도 있다. 일말의 양심 때문이었을까. 나의 오랜 경험에 의하면 술에 많이 취하게 되면 멜랑콜리에 빠질 수도 있고, 센티멘탈리즘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때는 거의 무의식 상태에서 온갖 상념이 뒤죽박죽이 되어 엉키게 되는 것이다.
    영국 작가 윌리엄 제임스는 말했다.
    알코올이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이유는, 멀쩡할 때 냉엄한 현실과 준엄한 비평 정신에 의해 땅바닥에 짓눌렸던 인간의 신비적 측면의 기능이 알코올에 의해 자극받게 되는 데 있음에 틀림없다.

    김재규 장군은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80년 5월 2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0·26 사건 피고인들의 ‘내란 목적 살인죄’ 등에 대해 상고기각 판결을 선고했다.
    정확히 예상한 그대로였다.
    재판장이 작은 목소리로 무미건조하게 사형선고문을 읽었다. 장군은 눈을 감고 어렴풋한 꿈속에서 무거운 고독과 침묵의 긴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꼈다.
    5월 24일 새벽 4시 장군은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육군교도소 7호 특별 감방을 나와 서대문 영천의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고 아침 7시 정각, (정확히 5년 전 인혁당 사건의 사형수들처럼) 같은 사형 집행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그날 밤 장군은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구치소에 도착해서야 어느새 일출의 여린 광채가 회색 담벼락을 물들이며 날이 밝았다. 하얀 천으로 된 건이 그의 머리와 얼굴을 뒤덮고 굵은 밧줄이 목에 걸렸다. 그는 그 신성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근엄한 인간은 거인적 풍모를 드러내며 자신의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그 운명적인 대결에서 자신의 절대적 의지를 관철시켰고, 정의가 불의를 굴복시켰으므로 궁극적인 승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대법원 선고와 사형집행 과정 역시 인혁당 사건의 완전한 판박이었다.
    인간의 일생은 덧 없다. 나는 ‘대부분의 인간은 인간답게가 아니라 동물처럼 죽는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비상고등군법회의 법정
    재판장 대장 이세호, 심판관 소장 윤성민, 심판관 소장 차규현, 심판관 판사 문영극, 심판관 판사 박천식, 검찰관 검사 백광현
    1심 선고가 내려진 후 8월 22일 고등군법회의 첫 공판이 열렸다. 재판장은 이세호 육군대장이었다. 사실상 최종심인 재판은 한두 번 심리하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 재판에서는 신문절차마저 거의 생략되었다. 그래서 금방 끝났다.
    어차피 예정된 순서에 따라 항소기각이었다.
    1974년 9월 7일, 비상고등군법회의 법정에서 선고 공판이 열렸다. 법정으로 재판장이 들어와 착석하자마자 피고인들이 합창으로 애국가를 불렀다. 그때는 방청석에 아무도 없었다.
    그 때는 교도관들이 피고인 하나에 한명씩 붙어서 계호를 했다. 중범으로 취급해서 수갑을 채워놓은 채로. 애국가를 부르니까 교도관들이 학생들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손으로 막고 밀치는 통에 법정은 아수라장이 되고 손을 피해가며 학생들이 애국가를 계속하자 재판장은 휴정을 하고 학생들 전원을 퇴정시킬 것을 명령했다.
    그 뒤 정작 재판을 받아야 할 학생들은 모두 퇴정당하고, 방청하던 학생 가족들과 신문기자들마저 모두 퇴정당한 가운데 횅하니 빈 법정에서 7인의 심판관과 2인의 검사, 군법회의 직원이거나 수사기관원인 듯한 방청인 10여명과 사방을 빙 둘러싼 헌병들, 그리고 유일하게 참석한 홍성우 변호사만 변호인석에 덩그러니 앉혀놓은 채 항소기각 판결을 선고한 것이다.

    2심 재판장인 이세호 대장은 뒷날 1979년 10·26 사건 직후 합수부에 의해 부정 축재자로 몰려 이등병으로 강등되었다.

    6. 공소 사실

    피고인 강신옥은 원적지에서 망부 강태흥의 5남으로 출생하여 영주중학교를 거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56. 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1958. 9. 경 고등고시 제10회 행정과에 합격하고 동년 11월 경 육군에 입대하여 1959. 9. 제11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후 1960. 4. 경 제대, 동년 9월 경 동 대학에 복학하여 1961. 9. 경 동 대학을 졸업과 동시 서울지방법원 사법관 10호로 발령을 받고 동 과정을 이수한 후 1962. 12. 경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어 근무하다가 1964. 9. 경 동직을 의원 사직하고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다가 1965. 6. 경 미 국무성 장학금으로 미국 예일대학 법과대학을 거쳐 조지 워싱턴 대학원에서 비교법학을 전공하여 동 대학원에서 법학 석사학위를 수여받고 1967. 9. 경 귀국하여 서울 중구 무교동 11번지에서 변호사업에 종사하여 오고 있던 중 1974. 6. 초순경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문학 교수 백낙청으로부터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 피고사건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구속 기소된 공소에 김영일의 변호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그 착수금 10만원으로 동인에 대한 변호를 수임하고, 동 년 6. 13. 경 한국교회협의회 총무 김관석으로부터 같은 피고 사건으로 같은 군법회의에 구속 기소된 동 나병식, 동 정문하, 동 황인성, 동 안재웅, 동 이직형, 동 정상복, 동 나상기, 동 서경석, 동 이광일 등 9명에 대한 변호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고 착수금으로 도합금 50만원을 받아 동인 등에 대한 변호를 수임하고 그들에 대한 변호를 위하여 동 군법회의 법정에 출입하던 중 동 군법회의로부터 같은 피고사건 관련 피고인 중 고등학교 후배인 여정남이가, 변호인을 선임하고 있지 않으므로, 동인에 대한 국선변호인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수락함으로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에 관련되어 동 군법회의에 구속 기소된 11명에 대한 변호를 수임한 자로서,
    변천무쌍한 국제정세하에 북괴는 재침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적화통일을 위하여 광분하고 있는 이때 국가의 보위와 민주수호를 위하여 전 국민의 총화 단결이 요구되므로 국민의 정당한 의사에 기초를 둔 유신헌법으로서 평화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고, 일부 몰지각한 인사들이 국민 총화를 저해하며 국론의 분열을 조장하고 유신체재를 부정하는 경거망동을 발본 색원하고 국가의 기본 질서와 안전보장을 위해서 헌법 제53조에 의하여 대통령 긴급조치가 선포되었는 바, 소수의 일부 불순학생들이 반 국가단체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구성하여 북괴의 사주를 받은 국내의 공산주의자들과 연립전선을 형성하여 인민 민주주의 혁명의 노선에 의한 통일 전선 형성 공작에 따라 폭력혁명에 의한 공산주의 정권수립을 획책 한, 건국 초유의 대역 기도를 1974. 4. 3. 선포된 대통령 긴급조치에 의해 사전 예방되어 동 연맹을 구성하거나 그 구성을 사주한 자들이 일망 타진되어 백척간두에서 조국이 수호되었음에도, 유신헌법은 1인 독재체재를 형성하여 장기집권을 위한 악법이며 대통령긴급조치는 정권유지를 위한 수단으로서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망상 오신하여 오던 중, 전시와 같이 동 연맹의 구성원들에 대한 변호를 수임하게 되자 동 군법의 법정에서 변호인의 변론을 하게됨을 기화로, 평소에 악법이라고 생각하던 긴급조치들을 반대 비방할 것을 결의하고, 동 군법회의 재판을 위협할 목적으로 1974. 7. 9 17:20경 동 군법회의 법정에서 변호를 담당한 동 연맹의 전시 구성원들에 대한 변론을 함에 있어서 ‘이러한 사건에 관계할 때마다 법률 공부한 것이 후회가 되는데 그 이유는 본 변호인이 학교에 다닐 적에 법이 권력의 시녀, 정치의 시녀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이번 학생들 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법은 정치의 시녀, 권력의 시녀라고 단정하게 되었다.
    지금 검찰관들은 나라일을 걱정하는 애국학생들을 내란죄니, 국가보안법 위반, 반공법 위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등을 걸어 빨갱이로 몰아치고, 사형이니 무기니 하는 형을 구형하고 있으니, 이는 법을 악용하여 저지르는 사법살인 행위라 아니할 수 없고, 본 변호인은 기성세대이기 때문에, 그리고 직업상 이 자리에서 변호를 하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피고인들과 같이 피고인석에 앉아 있겠다. 악법을 지키지 않아도 좋으며 악법과 정당하지 못한 법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있고 투쟁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학생들은 악법에 저항하여 일어난 것이며 이러한 애국학생들인 피고인들에게 그 악법을 적용하여 다루는 것은 역사적으로 후일에 문제가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나치스 정권하에 한 부부가 있었는데, 처가 남편과 이혼할 목적으로 남편이 나치스에게 저항하는 욕을 했다고 해서 나치스 당국에 고발하여 형을 살게 되었는데, 나치스 정권이 무너진 후, 남편이 풀려나와 악법하에서 자기를 고발하였던 처를 고발하여, 처에게 처벌을 받게 한 사실이 있으며 또한 러시아인이 당시 러시아는 후진국이라고 말을 한 마디 한 관계로, 러시아 황제로부터 엄중한 처벌을 받은 바 있다. 오적시를 쓴 김영일 피고인은 민족시인으로서 훌륭한 시인이며 본 변호인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훌륭한 시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고 발설함으로써 대통령 긴급조치 제1, 4호를 비방하는 한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구성원의 활동을 찬양 고무 동조함과 동시에 위 법정을 모욕한 것이다.

    7. 1974년 8월 30일

    비상보통군법회의 제3심판부
    사건: 74비보군형공 제59호 대통령긴급조치위반, 법정모욕
    피고인: 강신옥 변호사
    검찰관: 소령 이근일
    변호인: 변호사 이병린 외 99명

    주문
    피고인을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에 처한다. 이 판결 선고 전 구금일수 중 50일을 위 징역형에 산입한다.
    압수된 변론초안문 3매는 피고인으로부터 이를 몰수한다.

    재판장:  육군중장 류병현
    심판관: 육군소장 강신탁
    심판관: 판사 신정철
    심판관: 판사 송병철
    법무사: 육군중령 황종태

    “같이 좀 가시죠.”
    두 사람은 법정 바로 옆방으로 끌려갔다. 시계는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앙정보부 제6국 소속 간부인 듯한 사내 두 명이 화난 얼굴로 두 사람을 맞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강신옥을 맡은 사내는 조금 전 변론 내용을 확인하면서 그런 변론을 한 의도를 물었다. 강신옥은 흡사 구토를 하듯 어제부터 가슴속에서 일렁이고 있던 것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군사법정의 소송절차 중 어떤 부분이 형사소송법과 군법회의법에 위반되고 있는지 조목조목 설명하는 그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사내는 변론 내용을 다시 진술케 하여 그것만을 자세하게 적었다.
    밤 8시쯤 일단 조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갔다.
    정신이 아뜩해지면서 참으로 긴 하루를 보냈구나 싶었다. 군사법정에서 오랏줄에 엮이고 수갑을 찬 학생들을 바라볼 때마다 느꼈던 그런 가슴 저림이 이젠 낭패감과 뒤섞이면서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지만 강신옥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늦은 저녁식사를 마친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1시쯤이었을까. 비몽사몽간에 그는 대문 두들기는 요란한 소리에 잠을 깼다. 저녁 내내 그를 옥죄고 있던 불안감의 실체는 역시 그들, 중앙정보부 요원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이 잠깐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침착하려고 마음을 다지며, 새파랗게 겁에 질린 아내의 등을 두드려주고 강신옥은 그들을 따라나섰다. 밤 기운이 전신을 감싸자 그는 비로소 섬뜩함과 함께 머릿속이 하얗게 변색되고 있음을 느꼈다.
    행선지는 남산이었다. 평소 낭만으로 바라봤던 남산에 그토록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소가 있었는가 싶도록 그곳은 입구부터 살벌했다. 검은 산등성이 아래 창백한 불빛과 어둠이 구획해내는 위협적인 건물의 윤곽에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이 세상의 온갖 강압과 공포가 다 서려있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지하실의 어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수사관이 야전침대 받침대를 빼내 들고 강신옥을 다짜고짜 내려치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그 몽둥이 찜질을 고스란히 맞았다. 이미 체념을 하고 있었지만 육체적인 고통이 야기하는 정신적 위축감을 견뎌내기는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얼마나 맞았을까.
    “이게 무슨 짓이야.”
    문이 덜컹 열리면서 고함을 지르는 사람이 있었다. 한 순간 방안에는 진공 상태처럼 모든 동작과 음향이 정지된 듯 했다.
    “누가 사람을 때리라고 했나?”
    고함은 어느새 점잖고 차분한 목소리가 되어 몽둥이를 든 청년을 타이르고 있었다.
    “나가 있어.”
    청년이 밖으로 나가자 사내는 쓰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강신옥을 일으켜 세웠다.
    “이거 정말 미안하게 됐습니다. 부장님 명령으로 몇 가지 조사할 게 있어서 모시고 오랬더니 애들이 지레 짐작으로 이런 무례를 범했군요. 용서하십시오.
    경상도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기분입니다. 어찌 배신감을 안 느낄 수 있겠습니까.”
    사내는 뻔한 거짓말을 능청스럽게 늘어놓고 있었다. 어쨌든 몽둥이를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에 강신옥은 고개를 들고 상대편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슨 과장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그날부터 사흘동안 강신옥은 정식으로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홍성우도 같은 경로로 끌려와서 비슷한 신세가 된 것 같았다. 그들의 추궁은 ‘긴급조치에 위반한 학생들과 민청학련이란 이적단체에 동조했으니 그 변론 행위는 역시 긴급조치에 위반된다’는 것이었고, ‘군법회의를 모욕했으니 법정모욕죄가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아직 민청학련이란 실체와 학생들의 행동에 대하여 법적 판단이 내리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그들을 변론한 행위가 긴급조치 위반이란 말인가?’ 강신옥은 처음에는 이들을 이론적으로 설득해보려고 시도를 했으나 결국 체념을 하고 말았다. 쇠귀에 경 읽기 식인데다 위의 지시를 받고 그 틀에 끼워 넣기 위해 행하는 수작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6국은 조사를 마치더니 처음에는 그냥 풀어주었다. 하지만 조사가 끝나고 사흘 만에 석방된 강신옥은 1974년 7월 15일 오후 4시경 무교동 변호사 사무실에서 다시 중앙정보부에 연행된 후 바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죄명은 법정모욕죄와 긴급조치 제4호 위반이었다.
    그는 변론을 맡은 사건 관계자들을 만나러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수사관원들에게 끌려갔다. 당시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었는데, 때마침 손에 그 당시 싱가포르 수상인 이광요의 전기를 들고 있었다. 독재정권과 부단히 싸워온 그의 생애에 워낙 매료되었던 탓에 재독하던 중이었는데 수사관들에 두 팔을 잡히는 순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갖고 끌려갔다간 또 무슨 빌미를 잡힐까 걱정돼서였다. 그래서 약속한 사람들에게 못 간다는 전화나 하고 가자고 사정해 간신히 사무실로 되돌아올 수 있었는데, 실상은 책을 놓고 가기 위한 핑계였다. 당시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는가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그 후 7개월간 서대문구치소에서 지냈다. 구치소에 들어가는 순간, 뭔가가 치밀어올라 가슴이 뭉클했다. 특히 그가 변론하던 학생들을 안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들도 강 변호사를 보더니 눈물을 흘렸다. 뭐라고 할까. 연대감 또는 현실에 대한 비통함 같은 것을 그 순간 다같이 느꼈기 때문이라고 할까…….
    안에서는 주로 책을 읽으며 소일을 했다.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블’같은 고전들을 원문으로 읽으며 지냈는데, 감옥생활을 경험한 이들은 누구나 느끼는 기분이겠지만 마치 성인이라도 된 듯 편안했다. 그래서 석방된 후, NCC에서 마련한 축하 모임에 나가서 ‘도덕사우나’에 가서 세속의 때 벗기고 잘 지내다 왔다고 하니 모두가 웃었다.
    강신옥은 8월 22일 법원에 기소되었다. 그리고 1974년 8월 30일 오후 3시 제1회 공판이 육군본부 법정에서 개정되었다.
    동료 변호사들이 1심때엔 99명의 변호인단을 짜 변론을 해주었고, 2심 때에는 1백25명으로 늘어나 많은 정신적 도움을 주었다. 또 앰네스티같은 국제인권단체들도 석방을 위해 힘써주었다.
    그 당시 법정은 변호사들이 완전히 주도했다. 검사는 기라성 같은 선배 법조인들 앞에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법조 원로들이 주로 나서서 변론을 했다. 그 사건은 변론할 명분이 충분했다. 변호사가 변론하다가 법정에서 구속됬으니까. 그래서 김제형, 고재호와 같은 재야 법조계의 최고 변호사들이 나서서 변론을 한 것이다.
    제1회 공판기일에서 인정신문이 있은 뒤 고재호 변호사가 모두진술과 함께 “변호인의 활동은 헌법 해석상 당연히 면책될 뿐만 아니라, 군법회의법 28조 소정의 면책조항에 비추어 본안 심리에 앞서 공소기각이 되어야한다”며 공소기각 신청을 했다.
    하지만 이 신청은 즉각 기각이 되었고 심리에 들어가 검찰관의 신문과 박승서 변호사와 김동환 변호사의 반대신문이 끝난 후 강신옥이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형사 변호인은 수임사건의 범죄사실이 아무리 흉악한 것이라도 변호할 의무와 권리를 갖습니다. 영국의 저명한 변호사 헤스팅의 말과 같이 ‘변호사는 마치 택시운전사와 같습니다. 차비를 거절할 수도 없고 자기 피고인이 과연 무관한지, 죄인인지, 거짓말쟁이인지, 진실한 것인지를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다만 변호를 맡은 피고인의 주장 범위 내에서 자신의 능력의 최선을 다하여 피고인을 위해 투쟁할 뿐인 것’입니다.”
    강신옥은 당시의 변론 경위와 심정, 변호인의 책무, 저항권 이론에 대한 신념, 변론 활동의 면책성에 관한 소신을 밝혔다.
    증거조사를 위하여 속행된 9월 2일 오후 공판기일에서는 변호사 김제형이 증거인부와 함께 이 사건 변론 당시 법무사였던 김영범 육군중령 등 증인 3명과 민청학련 사건기록 검증 등 증거신청을 했다. 그러나 법무사는 이 신청을 기각하고 검찰측 증인을 재정증인으로 신문한 후 바로 결심을 했다.
    검찰은 강신옥에게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구형했다.
    이병린, 박승서, 이재성, 조준희 순으로 변호인들은 약 3시간에 걸친 변론을 통해 “군법회의법 제28조 제2항은 변호인의 변호 행위의 절대적 면책특권을 규정한 것인데 이 사건 변론 내용은 변호인이 직무상 행한 변호 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되며, 또한 이 사건 공소장의 공소사실이 어느 부분이 누구에 대하여 어떤 방법으로 모욕 행위를 하였는가를 구분하여 지적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법정모욕 부분에 대하여는 범죄가 되는 사실이 포함되지 아니한 것으로서 결정으로 공소를 기각하여야 하며 공소사실 전체도 공소제기 절차가 법률상 방식에 위반하여 무효인 것으로 공소를 기각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변호인단은 변호사가 법정에서 변호 활동을 하다가 문제된 이 사건은 우리 나라는 물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사상 유례가 없는 중대한 사건임을 강조하고 공소사실이 일부 변호사의 변론 내용을 사실과 다르게 왜곡시키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변호인의 직무와 면책성, 자연법적 저항권 이론 등에 관한 진술을 했다.
    강신옥은 최후 진술에서, “인간의 역사에 비추어 인간의 오류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인간의 지혜로 재판 제도가 마련된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당사자주의를 취하고 있는 재판 제도 아래에서 한쪽 당사자가 자유롭지 않다면 재판 그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는 것이고, 자신은 전인격과 양심에 비추어 마지막 변론의 기회에 그 책무를 다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9월 4일 선고공판.
    심판관은 강신옥에게 징역 10년과 자격정지 10년을 선고했다.

    8. 14년 만에 무죄판결

    1975년 2월 15일 긴급조치 위반 구속자 석방 발표가 있었고 강신옥 변호사는 이틀 뒤 다른 구속자 148명과 함께 구속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그런데 다시 1976년 6월 법무부에서 ‘긴급조치를 위반하여 변호사법 14조 소정의 변호사의 품위를 손상했다’며 강신옥을 변호사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고 징계 개시 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대법원 판결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징계 절차가 정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져 이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그는 14년간 변호사 업무를 계속할 수 있었다.
    강신옥 변호사가 말했다.
    1976년 6월에 다시 사무실을 열긴 했으나 본격적으로 시국 문제에 관여하기 시작한 것은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에서 총소리가 울린 10·26 사건 이후이다. 김재규 재판의 변론을 맡으면서부터인데, 김재규를 살려내야 유신잔재를 척결하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고 판단하면서 변론과 동시에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비록 5·17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무산되긴 했으나 당시 재야를 위시한 국민의 열기는 대단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쿠테타 세력은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국회를 폐쇄하고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표해 정치활동 금지, 휴교령, 언론 검열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 다음 날인 5월 18일 역사적인 광주항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사흘 후인 5월 20일 오전 10시 정각,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대법원 판사들은 김재규 사형 확정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로 나는 또다시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돼 죄인 취급을 받으며 보름간 조사를 받아야 했는데, 예전에 갔을 때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심하게 조사를 받았다. 죄목인즉 김재규 변론을 맡으면서 고 박정희 씨의 사생활을 파헤쳐 명예를 훼손시키고, 구명운동을 전개해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것이었는데, 굳이 나를 구속해 문제를 확산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해선지 풀어주었다.
    강신옥의 법정모욕과 긴급조치 위반 사건은 당초 대법원 형사1부로 배당되었는데 빨리 결론을 내라는 정부 당국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사건기록을 캐비넷 속에 처박아둔 채로 판결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10년 후인 1985년 1월 29일에서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로 결론을 내렸다.(재판장 유태흥 대법원장, 주심 전상석 대법원 판사)
    대법원 판결은 비상고등군법회의의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하였다.
    그 파기사유 및 군법회의가 아닌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한 이유에 대하여는, “1972년 12월 27일 제정된 구 헌법에 따라 이루어진 긴급조치는 19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의 제정 공포에 따라 실효되었고, 구 헌법 제53조의 대통령 긴급조치권은 제5공화국의 국가이념이나 그 헌법정신에 위배됨이 명백하여 제5공화국 헌법 부칙 제9조에 규정된 그 계속 효 또는 잠정 효는 부인될 수밖에 없으며, 구 헌법에 따른 긴급조치가 실효된 이상 피고인은 면소의 판결을 받아야 할 뿐만아니라 군법의 피적용자도 아니고 현재 비상계엄 상태에 있지도 아니하므로 이 사건 재판 관할권은 일반 법원에 있다”라고 판시하였다.
    결국, 위와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서울고등법원이 1988년 3월 4일 강신옥 변호사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무죄판결을 선고하기에 이른 것이다. (서울고등법원 제1항소부, 재판장 최공웅, 임승균, 손평업 판사)
    재판부는 그 판결이유에서 법정모욕죄 부분에 관하여 “공정한 재판을 구하는 변호인의 변론 행위는 비록 변호사의 정당한 변호권의 범위를 일탈할지라도 명백하게 재판을 위협, 방해하기 위한 것임이 뚜렷한 고도의 모욕, 소동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한 법정모욕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라고 전제한 다음, “피고인이 이 사건 공소 내용과 같은 변론을 할 당시의 구체적 상황에 비추어 피고인이 재판을 위협하거나 방해할 목적으로 그와 같은 내용의 변론을 하였다고 볼 아무런 자료가 없다”고 판시하였다.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부분에 관하여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내용과 같이 긴급조치가 1980년 10월 27일 실효되어 형이 폐지되었으므로 이에 대하여 면소 판결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상상적 경합범으로 기소된 법정모욕죄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므로 이를 주문에서 별도로 내세우지 않는다고 하였다.
    한편, 서울고등법원 제1형사부는 1988년 7월 15일 강 변호사가 무죄 확정 후 신청한 형사보상청구 사건에서 1974년 7월 15일부터 218일간에 걸친 미결구금에 대한 보상으로 국가는 금 327만 원을 지급하도록 결정했다.

    강신옥 변호사가 말했다.
    특별히 큰일을 해냈다든가 자랑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이번 일로 보람을 느끼는 것이 있다면 앞으로 후배나 동료들이 아무런 두려움 없이 소신껏 변론을 펼 수 있는 선례를 남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번 판결로 인해 다시는 변론내용을 이유로 변호인을 구속할 수 없으리라고 믿는다.
    법정에서의 변론이 문제가 되어 변호사가 구속된 것은 우리 사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세계적으로 그 유래가 없었다.

    에필로그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1년 당시 민청학련 사건의 수사를 담당했던 그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을 상대로 진상 조사를 하였다. 조사 초기에 상당수 수사관들은 “이 사건은 재판을 통해 결론이 난 사건인데 무슨 일로 조사를 한다는 것이냐”며 응하지 않으려 했다. 심지어 자신은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며 발뺌하는 수사관들도 있었다. 일부 수사관은 “나는 가해자라기보다는 오히려 피해자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고 호소하며 조사를 피하려 했다. 대부분 수사관은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나기보다는 망각의 늪 속에 영원히 묻혀 있기를 바랐다.
    수사관들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였다. 즐기려는 마음에서 사람을 고문하는 사람은 드물다. 죄 없는 자를 식별하지 못하는 수사관도 드물다. 그래도 고문을 한 사람들은 일말의 양심 때문이 아니라 뒷일이 걱정되어서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으려고 꽤 신경을 쓴다. 그러나 어찌 대명천지에서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예상했던 일이지만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가자 대부분의 수사관들은 고문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조사를 받을 수 없다고 고함을 지르며 거품을 무는 사람, “정권이 바뀌면 당신부터 조사하겠다”고 협박하는 사람, “세상이 뒤집혔다. 빨갱이들에게 무슨 인권이 있느냐. 완전히 빨갱이 세상이 되었다”고 한탄하는 사람 등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조사관의 첫 질문은 대개 “왜 고문을 하셨습니까. 이제 연세가 들고 나서 돌이켜 보면 후회가 되시죠”였다. 그 당시와 같은 상황이라면 지금 조사하고 있는 나라도 어쩔 수 없이 그랬을 거라는 말을 덧붙였다. 위와 같은 질문의 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아무리 수사관들 스스로 고문 사실에 대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있다고 해도 어쩌다 비위가 상하면 한 번쯤은 조사관과 맞붙어볼 요량으로 가슴 한 구석에 전의를 간직하고 있게 마련이다.
    사실 조사관들은 그들을 조사하기 전에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왜 고문을 했는가에 대하여 상당 정도를 파악하고 있었고 조사를 받으러 오는 수사관들도 반쯤은 체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자백의 선두 주자일 수는 없다는 생각 그리고 위원회에서 자신이 한 진술이 외부에 공개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추정 때문에 고문을 시인하지 못하는 수사관도 있었고,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즉 자신이 저지른 끔찍한 고문을 차마 인정할 용기가 없어서 자백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 수사관들은 “이 사건의 현장 수사지휘 책임자이던 중정의 윤○○로부터 ‘물건(조직사건)을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
    사건 조사가 마무리에 접어드는 시점에 윤○○가 세칭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료를 열심히 들여다보더니 느닷없이 이 사건을 인혁당 재건위라는 조직 사건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잔혹한 고문을 직접 했던 수사관들을 제외하고는 위와 같은 구체적 진술 앞에서 동료 수사관들의 고문 사실과 이유를 털어놓는 수사관이 나왔다. 그뿐 아니라, 고문한 수사관들조차도 이 사건이 중정에 의해 조작된 사건이라고 털어놓았다. 무엇보다 세칭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이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사실이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검찰과 중정은 먼저 가상의 사실을 유포한 후 인혁당 재건위를 만들어 냈다. 중정 요원들의 냉소적인 표현을 빌리면 ‘제품을 만들기도 전에 광고 컨셉을 기획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증거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자신들이 기획한 제품 (공산주의 조직)을 만들어냈다는 이야기였다. 중정에서 사용한 ‘제품’의 제조기술은 다름 아닌 고문이었다.
    피의자신문조서에는 조사 일시뿐만 아니라 장소도 허위로 기재되어 있었다. 국방부로부터 제출받은 공판기록을 분석하면, 이 사건 피의자들을 조사한 장소는 대부분 서울구치소, 서울 중부경찰서로 되어있다. 이 기록 역시 허위이다. 수사관들은 몇몇 조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조서가 중앙정보부 제6국에서 진행됐다고 진술하고 있다.
    이를 부인하는 수사관은 한 사람도 없다. 특히 한 수사관은 “중정 간부로 수사를 현장지휘했던 윤○○이 경찰에서 파견나온 수사관들에게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모두 경찰이 조사한 것으로 만들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조사 장소를 허위로 작성하게 한 이유 역시 증언을 통해 확인됐다. 1964년의 제1차 인혁당 사건으로 망신을 당한 중정 수사관들이, 10년이 지난 후 또다시 이 사건을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만들려는 상부 방침에 ‘무리한 수사’라고 심하게 반발하며 조서에 이름 남기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퇴직한 한 중정 수사관은 “중정에서 수사관들이 상부 지시에 이렇게 반발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했다. “사흘 매에 견디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만 세 시간을 견디는 사람도 본 기억이 없다. 증거고 뭐고 소용없다. 일단 공산주의자로 도장을 박아놓으면 확실한 면죄부를 손에 쥔 것이다. 누구 하나 찍소리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 사건으로 피의자들은 고문으로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진 상태에서도 마지막으로 재판부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무참히 짓밟혔다. 재판은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됐고 검찰은 물론 재판관들도 피고의 발언을 수시로 제지했다. 이 사건 피고인이었던 임구호 씨의 경우 재판관의 제지를 무시한 채 최후진술을 통해 “증거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한 직후에 검찰관실로 불려가 문호철, 이규명 검사 등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더욱더 충격적인 사실은 공판조서 또한 허위로 작성됐다는 사실이다. 공판조서에는 이 사건 피고인들이 수사과정에 당한 고문에 대해서 단 한마디도 항변하지 않았고, 검찰에서 작성한 조서의 임의성을 인정한 것으로 돼 있으며, 지하 비밀당을 만들어서 국가를 변란시키고 정부를 전복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는 공소내용을 시인한 것으로 돼 있다.
    이렇게 허위로 작성된 조서와 공판조서를 바탕으로 여덟 명은 사형을 당했고 나머지 피고인들도 무기징역에서 징역 15~20년형을 선고받았다. 특히 사형은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날인 1975년 4월 9일 새벽에 집행되었다. 사형집행은 확정 판결 후에도 상당 시간 (보통 1~7년)이 경과한 다음에 집행되거나 혹은 감형조치되던 관례는 이 사건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사람들에 대한 가해는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사형장에서 ‘적화통일 만세’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등의 유언을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사형장면을 목격했던 교도관들과 군종 목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와 같은 유언 역시 조작된 것이다. 당시 교도관 김○○, 안○○, 이○○에 의하면 도예종 씨는 “통일을 못 보고 죽는 것이 억울하다”는 한마디를 남겼으며 그 외에도 ‘적화통일’이란 표현은 사용한 사람이 없다. ‘종교의식을 거부한다’는 말 역시 듣지 못했다는 것. 당시 사형집행 명령부를 작성했던 교도관 이○○ 역시 자신이 기록한 유언이 사실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유가족들은 사형이 집행된 후 사체조차 뜻대로 수습할 수 없었다. 일부 사체는 경찰이 경계하는 가운데 응암동 성당으로 옮기려는 가족의 의사를 무시하고 바로 대구로 옮겨졌고, 송상진 씨의 경우에는 경찰들이 사체를 탈취한 뒤 가족의 동의 없이 화장한 후에 유골을 인계했다. (시체에는 발뒤꿈치가 사라지고 손톱과 발톱이 모두 뽑힌 고문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심한 고문을 당했다는 사실이 폭로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유가족들은 ‘빨갱이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사회에서 격리됐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사를 다녀야 했고 어린 자식들은 ‘빨갱이 자식’이라는 놀림을 들으며 동네아이들의 전쟁놀이에서 나무에 묶인 채 수도 없이 총살을 당해야 했다. 이제야 이들의 무고함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고 하지만, 지난 세월 유신의 광기와 반공의 망령에 저당잡힌 인생은 무엇으로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인물들
    지금 되돌아 보면, 군사독재정권의 충복으로 입신 출세해서 惡의 편에 섰던 인물들과 자신의 양심과 의지에 따라 온갖 고통과 불행을 무릎섰던 善의 편에 선 인물들이 선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인물들은 명확하게 갈린다.
    한쪽은 법기술자로 독재 정권의 하수인으로 복무했다. (스탈린 치하에 살았던 유명한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독재자를 가리켜 ‘백정이고 강도’라고 하였고 그의 심복들은 ‘백정이나 강도의 졸개’가 된다고 하였다.)
    ‘법과 양심’ 또는 ‘정의’는 어디로 실종되었는가.
    그들은 큰 권력으로부터 흘러나온 작은 권력을 휘두르면서 거기에 도취되었고, 관존민비라는 유구한 전통 속에서 입신출세하기 위해 법률가의 양심이 인격이 파탄날 정도로 마비되어도 수치스러움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 했다. 그들은 정신적이건 육체적이건 고문을 하고 싶어서 안달을 했다. 그래도 그들의 정신 수준은 죄책감을 느낄 수 없었다.
    다른 한쪽은 극히 소수였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인 위대한 양심과 정의감 때문에 국가라는 거악에 맞서 외롭게 투쟁했고 마침내 승리했다. 정의가 불의를 누르고 승리한 것이다. 그들은 당연한 일을 했다고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유치하게 그 승리감에 도취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한승헌 변호사님
    1934년, 전라북도 진안에서 태어났다. 전북대 법정대학을 나왔다. 1957년 제8회 고등고시사법과에 합격한 후 군법무관을 거쳐 법무부 검찰국, 서울지검 등에서 검사로 근무했다. 1965년 변호사로 전신하여 작가 남정현의 ‘분지’필화 사건, 동백림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 여러 정치적 탄압 사건을 변호하는 한편, 국제앰네스티 한국위원회 창립이사,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 등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75년, 2년 반 전에 쓴 ‘어떤 조사弔辭’라는 수필 내용이 용공이라는 누명을 쓰고 반공법 위반으로 그는 전격 구속 기소되었다.(이 사건에 관해 상세한 것은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 실록’ 제3권 참조) 그해 4월 서대문구치소에 구속되어있었는데 함께 구속되어있었던 그가 변호했던 여정남은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과 함께 4월 9일 새벽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홍성우 변호사님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 해군 법무관을 마치고 1965년부터 6년 동안 판사를 역임했다. 1971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계기로 인권변론에 투신, 20여 년에 걸쳐 학생, 노동자, 민주인사, 조작간첩사건 등의 변론에 힘을 쏟았다.
    이외에도 민주회복국민회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앰네스티, 가톨릭정의평화위원회 등에서 인권 신장을 위해 활동했다. 정법회 결성에 앞장섰으며 1987년을 전후하여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대한변협 인권위원으로 활약했다. 이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대표, 참여연대 초대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그가 말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받은 사람이 수십 명이지만, 이 때 잡히지 않고 구속되지 않은 사람도 많습니다. 이 공소장에 “공소 외” 누구누구 이름만 나온 게 100명도 넘을 겁니다. 그 후에 그 친구들이 민주화운동에 관련된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 때 도망 못가고 잡혔으면 조영래도 피고인석 맨 앞줄에 나올 인물이지요. 이때부터 도망가서 1980년도에 자수한 겁니다. 오랫동안 도망 다니면서 그 동안 장가도 들고 애도 낳고 했지요. 김근태나 장기표도 그 때 다 도망갔어요. 그 후에 조영래, 김근태, 장기표는 산발적으로 사건 만들고 기소되어 관련 재판이 이루어진 게 여러 건이에요.

    민청학련에 빨갱이 색깔을 입혀야 했는데, 그 때 잡힌 학생들은 일반국민들이 잘 모르니까 어려울 것이고요. 그래서 과거 사건에서 빨갱이로 낙인찍힌 이름 있는 사람들을 연결시키면, ‘아! 민청학련은 그런 빨갱이 뭐와 한통속인 모양이다’ 이런 연상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키려는 정치적 의도가 아닐까요.

    아주 한여름에요. 그 때 변론하면서 흥분은 되고 화는 나고 그래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했어요. 법정에서는 양복도 못 벗잖아요. 옷 저고리에 땀이 줄줄 흐르면서 재판하던 생각이 나데요. 그러다가 강신옥 변호사가 변론하다가 험한 꼴도 당하고….

    내가 한 2,30분 했을 거예요 변론을. 그 다음 황인철이 했어요. 황인철은 나와 평생 친구지만 묘한 재주가 있습니다. 얘기하는 건 과격한데 듣는 사람에게는 전혀 과격하게 들리지 않아요. 목소리도 낮고.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성량 자체도 잘 안들리고 표정도 부드럽고. 목소리도 그렇고 표정도 그렇고 어투가 술술 부드럽게 하기 때문에 듣기에 거슬리지 않아요.
    나는 싸우는 것 같이 덤비고. 손해는 내가 보지요. 매도 내가 먼저 맞고 그러는데.

    나는 인간적으로 강 변호사 참 좋아하고 지금도 가끔 만납니다. 대체로는 보수적, 혹은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인 셈인데, 강 변호사의 보수주의적 입장에서도 이 재판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지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는 사람에게 유신정권의 행태라는 게 어쩌면 더 참을 수 없는 거였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더 격렬하게 비판을 한 겁니다.

    피고인 중에서 진짜 죽음의 위험 속에 가장 놓여 있었던 게 이철하고 여정남이었습니다. 우리는 제일 위험하다고 느꼈지요.
    강 변호사님은 여정남을 변론했으니까. 여정남은 민청학련보다 사형의 위험성이 더 컸을 것이고, 그 때문에 강 변호사님은 더욱 절박한 심정이었을 것 같습니다. 강력한 경고성의 비유를 쏟아내니, 재판부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느낌으로 제지했을 것 같고요. 더욱이 ‘사법살인’이란 말은, 이 재판에서 강 변호사님이 처음으로 쓴 용어 같은데, 실제로 사법살인으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은 별개로 재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건이 다릅니다. 나는 그래서 도예종이나 서도원이나, 이 사람들 얼굴을 모릅니다. 민청학련 사람과 인혁당 사람들 사이도 서로 몰라요. 나는 인혁당 법정에는 안 들어 갔어요. 다만 여정남이는 민청학련에도 이름이 올라 있으니까. 여정남만 양쪽 재판정에 다 섰지요. 내가 본 건 여정남뿐이지요.

    정보부에 붙들여 가면 담당 계장은 지휘를 하고 계장 밑에 수사관이 있고, 수사관이 나를 조사를 합니다. 신문을 해서 조서를 썼는데, 수사관이 다른 방에 지시받으러 가고, 나는 잠시 숨 돌리고 그럴 때 있잖아요. 그럴 때 방에 날 혼자두지 않습니다. 절대 혼자 놔두질 않아요. 무슨 자해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수사보조원이 하나 있어요. 수사관이 나갈 때는 그 보조가 옆에서 나를 지킵니다.
    둘이만 앉아 있으면 대화를 하게 되죠. 이런 저런 대화를 하던 중에 이 사람이 나한테 잘해줘요. 마음으로 잘해주는 건 금방 알 수 있잖아요. 어떻게든지 가능하면 날 편하게 위로해주고 안심시켜 주려고 그러고요. 이 사람 얘기하는 게, 참 빨리 잘되어 나가게 됐으면 좋겠다. 이런 취지의 얘기를 해요. 난 그 때까지만 해도 속에 좀 삐딱한 게 있었지요. “당신도 내가 나가는 걸 바라느냐” 그랬더니 “아니 변호사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냐”고 하더군요. 자기는 사람 아니냐 그거지요. 그 때 정색을 하면서 “사실은 제 형님이 최종길 교수입니다” 그러더라고요.

    1975년 소위 2·15조치 때 이철을 비롯한 학생들은 나왔고, 김지하도 나왔고, 지학순 주교도 나왔고요. 강신옥 변호사도 석방되었습니다. 못 나온 게 유인태, 이현배, 그리고 이강철이도 못 나왔을 겁니다. 그게 참 얼마나 웃기는고 하니, 2·15조치로 석방하는 명분이 학생들은 석방한다는 것이에요. 재학생만, 하여간 이 철이는 이거할 때 학부 4학년이었어요. 민청학련 조직할 때 재학생이었고, 유인태는 미리 졸업을 했어요. 그러니까 유인태는 무직자란 거지요. 그렇다고 이 철은 아직 순진한 대학생이니까 석방이고, 유인태는 대학도 졸업한 무직이니 너는 풀어줄 수 없다… 그때 기준이 우습잖아요? 그래서 ‘무직자’인 이현배하고 유인태가 오래 살았어요.

    민청학련 사건을 변론할 때 “양심범 변호”, “정치범 변호”, “인권사건” 이런 식으로 불렀어요. 점잖게 부르면 “시국사건”이고. 그 사건을 하다보니까, 아까 당시의 내 정신적 혼미에 대해 얘기했잖아요, ‘아 내가 앞으로 갈 길이 이거구나.’ 꼭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한마디로 변호사로서의 내 직업에 대한 보람을 거기서 찾은 겁니다.
    고립무원한 정치범 · 양심범들의 편이 되어 준다는 것, 그들의 법률적인 입장이나 권익을 보호해 주고, 그들의 주장을 대변해주고 하는 것, 이게 지금 우리나라 상황에서 변호사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절감한 거지요. 힘든 가운데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되고 전력투구를 하게 되었어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참 그런 사건에 초짜고 아마추어고, 그냥 흥분도 잘하고 그랬지만, 정말 열심히 했어요. 그 때 내 나이 서른일곱이었어요.
    이걸 맡으니까 다른 일을 하나도 못 하겠더라고요. 재판을 하루 걸이로 하고 그래요. 그러면 재판 안하는 날은 구치소에 가서 면회를 해야 해요. 서른 몇 명을 면회한다고 생각해봐요.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게. 재판 없는 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면회 다니고, 재판하는 날은 육군본부 비상군법회의에 가서 하루 종일 재판하고 그렇게 이 사건에 빠져 지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건은, 사건이 잘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할 수도 없었어요. 완전히 이 사건에 전력을 쏟아 지냈는데…

    1970년대 후반 학번인 제가 보거나 들은 바로는, 1970년대 학생시위에서 화염병이 등장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화염병 제조 방법도 몰랐고, 실험한 적도 없고요. 화염병이 학생시위에 등장한 것은 1984년 정도인 것 같습니다.

    강신옥 변호사님
    1936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났다. 1956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1958년 고등고시행정과에, 1959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1962년 서울지방법원 판사로 임명되었지만 이듬해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1968년도 통일혁명당 사건과 관련된 신영복 교수의 변호를 맡으며 시국사건 변호에 참여했으며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된 9명에 대한 변호를 맡았다. 최종 변론 중 긴급조치를 비판하다가 구속되어 구금되었다가 1975년 2월에 석방되었으며 이후 1988년 무죄로 최종 확정되었다.
    강신옥 변호사는 10·26 사건을 이렇게 평가했다.
    김재규 장군이 10·26 혁명을 결행한 날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과 같은 날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그리고 7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은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기막힌 우연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김재규 장군은 박정희를 죽인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 이후는 우리 국민들의 몫이었지요. 김재규에게 그 이상을 요구하면 안 됩니다. 당시 박정희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습니까? 그런 박정희를 제거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거지요.

    황인철 변호사님
    1940년, 충남 대덕에서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으며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서울형사지방법원과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하다 1970년 변호사를 개업했다. 그가 변론을 맡은 주요 사건은 대부분 70, 80년대 시국 사건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인권 변호사로서 독재 정권은 물론 세상의 불의와의 외로운 싸움을 계속했다.
    그 무렵 그가 말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철이 회상했다.
    황 변호사님은 섬세한 영혼을 가지신 분이셨다.
    “이군, 정의와 진리는 그것을 ‘깨닫는 것’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짐이 될 수도 있는 게야. 그리고 그것이 역사성 · 사회성을 띠게 될 때에 그로 인해서 겪게 되는 고뇌와 아픔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야. 나는 처음부터 이 사건이 학생들의 데모를 잠재우기 위한 충격 요법의 일환으로 민중을 우매하다고 착각한 정부가 만들어낸 조작극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네. 어린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해야 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긴 하네만 힘들겠지만 우리들이 ‘민중을 위한 헌신의 의무’를 삶의 몫으로 받았다 생각하면 힘이 날 것이네.”
    그리고는 말없이 내 손을 굳게 잡아주셨다.

    민복기(일본식 이름, 이와모토 후쿠키 岩本復基) 전 대법원장
    제2차 인혁당 사건은 1974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에 의해 국보법, 반공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다. 6월 15일부터 시작된 재판은 비상보통군법회의, 비상고등군법회의를 거쳐 대법원 확정까지 10개월이 걸렸다. 3심을 거치는 동안 피고인등의 형량은 변함이 없었고, 특히 8인의 사형수들의 형량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형이었다.
    1975년 4월 8일 오전 10시 재판장 민복기는 방청석에 몇몇 가족들만 띄엄띄엄 앉아 있는 썰렁한 법정에서 무표정한 얼굴에 건조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10분 동안 읽은 뒤 상고기각을 선고하고 곧바로 퇴정했다.
    (그는 1974년 12월 10일, 인권선언기념일에 축사를 하면서 ‘유신은 인권 보장의 첩경’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2000년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을 수상했다.)
    대법원 1975. 4. 8. 선고 74도3323 인혁당 및 민청학련 사건 전원합의체 판결에 참여한 대법원 판사들은, 민복기(재판장), 홍순엽, 이영섭, 주재황, 김영세, 민문기, 양병호, 이병호(주심), 한환진, 임향준, 안병수, 김윤행, 이일규이다. 이들 중 유일하게 이일규 대법관이 반대의견을 냈다.

    이일규 전 대법원 판사, 전 대법원장
    그 당시 이일규 대법원 판사는 다음과 같이 반대의견을 냈다.
    비상군법회의의 설치에 관한 대통령긴급조치제2호는 2 「11」에서 그 조치에 특별한 규정이 없는 한 군법회의법을 준용하고 있으므로 아래에서 단순히 법이라함은 군법회의법을 가리키면서 나의 의견을 기술하겠다. 군법회의의 항소심은 원칙적으로는 사후심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법 제415조, 제416조에서 변론의 방식이나 피고인의 출석에 관하여 제1심과 다른 규정을 들고 있으나 그렇다고 전혀 복심 내지 속심 즉 사실심으로서의 기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법 제425조에 따르면 고등군법회의(따라서 비상고등군법회의)는 원심판결을 파기하는 경우에 그 소송기록과 원심군법회의 또는 고등군법회의에서 조사한 증거에 의하여 판결하기 충분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피고사건에 대하여 직접 판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이는 원심판결에 사실의 확정에 영향이 없는 법령적용에 잘못이 있는 경우와, 원심판결에 사실오인 또는 양형부당이 있는 경우를 포함하여 제1심에의 환송 또는 이송하는 번잡을 피하기 위하여 소송경제상 자판을 하도록 인정된 제도로서 후자의 경우 즉 사실인정을 다시 하거나 새로운 형의 양정을 할 때는 사실심으로 심판하여야 함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군법회의에서 판결은 특별한 규정이 없는한 구두변론에 의하여야함은 법 제71조에 명백히 규정되고 있는 바로서 항소심에 있어서도 법 제420조와 같은 특별규정이 없는한 판결은 반드시 변론을 거쳐서 하여야하며 여기서 말하는 변론을 거친다함은 군법회의의 면전에서 당사자가 공격방어한 소송자료에 터잡아서하는 심리과정을 거쳐서 하는 직접심리주의(법 제349조)를 말하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소심이라 할지라도 다시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양형을 할때에는 위에서 말한 의미에서의 변론을 거치지 아니하고서는 본안판결을 할 수 없다 할 것이며 이는 소송경제때문에 직접심리주의가 변질될 수 없고 또 헌법 제24조에서 법률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보장되어 있는 점에도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에 의하면 이 사건의 항소심인 원심판결은 검찰관의 공소사실의 진술도 없이 또 제1심에서의 신문과 중복된다하여 피고인의 신문을 생략한다하여 항소이유에 관한 변론만을 시행하여 결심하였는바 이는 공소사실에 대한 변론을 거쳤다고 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 E, 같은 F, 같은 G, 같은 H, 같은 L, 같은 M, 같은 N, 같은 O, 같은 Q, 같은 R, 같은 임규명, 같은 C, 같은 D, 같은 T, 같은 U, 같은 AB, 같은 W에 관한 제1심의 양형이 부당하다하여 제1심판결을 파기하여 사실인정을 다시하고 양형을 달리하는 판결을 하였으니 이는 변론 즉 사실심리를 아니하고 재판을 한 재판절차에 위법이 있다고 아니할 수 없고, 이 위법은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할 것이므로 이 부분 원심판결은 파기를 면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고 당원 1963.10.10. 선고 63도256 판결이 군법회의의 항소심에서 사실인정과 양형에 관한 자판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직접심리를 아니하여도 위법이 아니라는 뜻이라면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일규 대법원장은 훗날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혁당 사건이) 내가 있던 3부로 배당됐다. 3부 구성원은 주심이 이병호 판사였고, 주재황 판사, 김영세 판사 그리고 나였다. 나 혼자 소수의견을 내서 전원합의체로 갔다. 통상 막내 판사가 먼저 의견을 말하는데 내가 의견을 말하자 일순 침묵이 흘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민복기 대법원장 주재로 다수결을 통해 2심 판결이 확정됐다. 피고인들의 ‘고문으로 그렇게 진술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상고 이유에 대해 ‘그렇게 볼 만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상고기각했다.”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질 때 ‘아이고, 이렇게 생명이 사라지는구나’ 싶었다.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당시 우리 대법원이 군법회의가 내린 1심, 2심의 ‘잘못된 판결을 잘한 재판’으로 잘못 판단한 책임이 있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이미 지난 제도 아래서 내려진 판결이다. 이번 재심판결 역시 이번 제도 아래서 내려진 판결이다. 제도가 바뀌고 나서 판결이 달라졌다고 사과한다면, 제도 바뀐 때마다 예전 판결을 가지고 일일이 사과해야 하는가.”

    여정남
    대구에서 태어났다. 1962년 경북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1969년 3선개헌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1971년 전국 대학생 학술 토론 대회에서 ‘반독재 구국 선언문’과 관련하여 구속되었다가 5개월 만에 석방되었고, 1972년 구국장교단의 반유신 유인물 배포 사건으로 강제연행되어 고문을 당해 한쪽 귀가 먹고,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으로 풀려났다.
    1973년 11월 5일 경북대의 대규모 반유신 시위를 주도적으로 지휘했다. 1973년 12월 서울대의 이철, 유인태를 만나 전국적 유신 반대 투쟁을 협의 · 연대하고, 1974년 민청학련의 반유신 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북대 시위를 추진하였다. 그해 4월 체포되어 50일 동안 남산 지하실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인민혁명당 재건위의 학생 조직책으로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구속되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다른 인혁당 관련자 7명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바로 다음 날 새벽 사형이 집행되어 세상을 떠났다. 2007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Internatinoal Commission of Jurists)는 사형이 집행된 19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김형욱은 회고록 ‘혁명과 우상’에서 말했다.
    박정희와 이후락의 지령을 받은 신직수, 그리고 신직수의 심복 이용택은 10년 전에 문제됐다가 증거가 없어서 석방한 사람들을 다시 정부 전복음모 혐의로 잡아넣었다. 중정이 발표한 혐의사실로 보아서는 이용택이 새로운 혐의와 이를 뒷받침할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나는 단번에 그 사건이 조작된 것임에 분명하다고 직감했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의 조작이라고 발표했다.
    박근혜가 말했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에게 인혁당 사건 사과를 요구하자, “이미 충분히 사과했다. 헐뜯기에 불과하다. 법적으로 이미 끝난 일이다.”라고 말했고, 그 후에는 “한마디의 가치도 없는 모함이다. 대통령과 코드가 있는 인사들이 모여 역사를 왜곡하고 헐뜯는 수작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근혜가 왜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변명을 해야 했을까. 그녀가 그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말이다. 그 사건은 아버지 때의 일이고 아버지와 딸은 별개의 존재가 아닌가. 존재는 개별적이고 그래서 고독하다. 그녀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연좌제의 망령을 떠올린다.)

    신직수 전 검찰총장, 전 중앙정보부장
    1927년, 충청남도 서천군에서 태어났다. 종교는 천주교이며(아마 황사영 백서 사건 이래 가톨릭 교회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흑역사의 대표적인 사례), 세례명은 요셉이다. 1946년 전주사범학교(현 전주교육대학교)와 한국대학(현 서경대학교, 과거 국제대학) 법과를 졸업하고(일부 포털에서는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대학의 오기로서 잘못된 정보이다.) 육군 법무장교로 임관하였다. 박정희가 5사단장일 때 참모장이 김재규였으며, 법무참모로 근무하기도 했고,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였다.
    박정희와의 인연으로 5.16 군사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법률비서관이 되고, 1961년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63년 7월 중앙정보부 차장이 되었으며, 그 해 12월 불과 36세의 나이로 검찰총장이 되어 1971년 6월까지 재직하였는데, 검사장들이 이에 반발하여 검찰총장 취임식에 불참하기도 하였지만, 군사정권 시절에 중앙정보부 차장까지 지낸 사람이 낙하산 인사로 내려오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등고시 사법과 출신이 아닌 군법무관 시험 출신이 검찰총장이 된 유일무이한 사례) 그가 검찰총장 당시 제1차 인혁당 사건이 있었다.
    1973년 12월 이후락의 뒤를 이어 제7대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김재규가 중앙정보부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유신정권 기간 동안의 인권유린 문제에 있어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는 인물. 그가 검찰총장과 중앙정보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민청학련 사건과 인민혁명당 사건을 비롯한 수많은 간첩 조작 사건, 장준하 의문사 사건,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등이 일어났었다.
    김형욱은 이렇게 평가했다.
    ……법무부 장관 등의 직을 거치는 동안 부패하기 시작해 끝내 유신체제를 앞장서 변호했으며 정보부장 취임 후에는 유신헌법 체제를 수호하는 데 누구보다 선두임을 자처했다. 10월 유신의 각본을 만든 장본인은 박정희와 이후락이었지만 이 각본을 사실상 연출한 것은 신직수였다. 그는 민주회복운동자들을 탄압하는 데도 앞장섰으며 필요하다면 박정희의 뜻을 받들어 그들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잘라버리는 것도 불사할 만큼 표변했다. 그것은 변신 치고도 무서운 변신이었다. 아무리 인간의 심리와 태도가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라 돌변하는 가변적인 존재라고들 하지만 신직수의 변신을 나에게 현기증을 일으킬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김형욱 회고록 ‘혁명과 우상’ 제4권, 216~217쪽 참조)

    문호철 검사
    1937년 출생. 남산 부활절 예배 내란 조작 사건을 담당했다. 1974년 민청학련 · 인혁당 고문 · 조작 사건의 신문 조서 작성을 담당한 검사들 중 중심적 역할을 했다. 민주화 운동가들에 의해 ‘공안사건의 저승사자’로 불리었다. 1978년에 사망했다.

    송종의 검사
    1941년 평안남도 출생. 1974년 민청학련 · 인혁당 고문 · 조작 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직접 와 신문 조서를 작성한 검사로서, 문호철 검사와 함께 중심적 역할을 했다. 1992년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 1996년 법제처 처장을 역임했다.

    이규명 검사
    1934년 출생. 1971년 사법파동을 야기한 검사로 1974년 민청학련 · 인혁당 사건을 맡았고 1986년 구국학생연맹 및 자민투 사건으로 86명을 구속 · 기소했다. 1988년에 사망했다.

    이용택
    1930년 11월 29일 경상북도 달성군(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대구농림고등학교, 단국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박정희 정권 때 중앙정보부에서 근무하였는데 1974년 중앙정보부 제6국장으로 있으면서 민청학련 사건과 인민혁명당 사건을 조작 기획하였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말했다.
    이용택은 나를 매우 따르던 심복이었으나 한때 밀수와 관련된 부정이 말썽이 되어 나는 재임 후반기에 그를 잘랐다. 그는 실직자가 되어 있었는데 이후락이 중앙정보부장이 되자 그를 다시 채용했다. 이후락은 중앙정보부를 대폭 개편하여 제6국 총무국을 정치수사국으로 만들고 이용택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새로 만든 제6국은 북한의 정치보위국에 맞먹는 남한의 정치적 반대자를 탄압하는 정치 전위대였다.

    참고 자료
    벌써 반세기가 지나갔다. 우리 세대에, 나의 경우 20대 중반쯤 한참 젊은 시절에 일어난 대단히 중요한 사건임에도 벌써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 시점에서 민청학련과 인혁당 사건을 재조명하거나 재평가할 위치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늦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그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알지 않고 넘어갈 순 없었다.
    나는 이 엄청난 역사적 사실을 재료로 하여 에세이를 쓸 수는 없었다. 삶과 죽음과 관련한 이런 난해한 단어들이 떠올라서 가슴이 꽉 막혀 버렸기 때문일까? 나는 에세이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소설에서는 소설이니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면 이게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백일몽을 꾸는 것처럼 혼란스러운 가운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들이 한낱 幻像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사형선고와 교수형. 사법살인. 그들의 광기란!? 불안. 체념. 절망. 다시 체념. 설마!? 설마!?? 무고한 사람들을!!?? 천벌을 받으리라!! 일말의 양심이 있을 것이 아닌가!! 캄캄한 독방. 밤의 공포 불면증. 악몽. 신들은 불행하게도 인간처럼 자살을 할 수가 없다. 고독. 패배. 마지막 희망. 눈물과 냉소. 운명 혹은 숙명. 순환. 죽음이 안겨줄 평화. 사랑. 이별.)
    4월은 잔인한 달인가. 나는 그날 새벽의 뼛속 깊이 스며드는 한기를 느낀다.
    나는 아래 참고자료 중에서 어떤 부분은 전부를 그대로 인용, 원용해서 이 논픽션 중편소설을 완성했다. 그렇다면 나는 사실주의 작가들이 강조한 관찰과 자료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표절을 하였거나 절도를 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거대한 역사적 진실 앞에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염치로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실을 (작가의 발상의 근원이지만 작가의 편견, 고정관념, 가치관과 밀접하게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상상력을 동원해서 첨가, 삭제, 수정, 재수정하거나 변주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역사적 진실에 관한 그들의 언어를 충실히 옮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것도 포함해서) 전체 자료가 잘 정리 보관되어 있지는 않다. 특히 인혁당 사건의 경우가 그렇다. 이 중대한 사건에 대한 자료가 그렇게 허술하다니. 국방부 자료실에는 인혁당 사건의 공소장, 판결문, 소송기록 등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창고에 처박혀 있을 것이고 그나마 조만간 보존기간 만료로 소멸될 수도 있다. 대법원에는 판결문만 겨우 남아있을 것이다.
    이 대명천지에 국방부는 이 역사적 사건의 기록 보존을 위해서, 특히 방대한 소송기록이 사라지지 않도록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할 것이다.

    한승헌 변호사 ‘변론사건실록’, 제2권, 제3권. 민청학련계승사업회 지음, (영구집권을 꾀했던 박정희 정권에 온몸으로 맞선 청년학생들의 기록)‘민청학련’.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민청학련운동 자료집: 비상보통군법회의 판결문집’. 전창일 · 강창덕 · 정화영 · 임규영 · 임구호 공저, ‘인혁당, 그 진실을 찾아서’. 법률신문사 발행, ‘법조 50년 야사’(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서울대학교 공익인권법센터 펴냄, 인권변론자료집 1(1970년대). 허문명 저, ‘김지하와 그의 시대’. 천주교인권위원회 편 ‘사법살인-1975년 4월의 학살’. 김충식 지음, ‘남산의 부장들’.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변명에 급급하지만 상당한 진실이 담겨있는)김형욱 회고록인 김경재 저, ‘혁명과 우상’ 전 5권 중 제2권 및 제4권. 대담 한인섭, ‘홍성우 변호사의 증언 인권변론 한 시대’. 황인철 변호사 추모 문집 “‘무죄다’라는 말 한마디”. 김재홍 지음,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정병진 저, ‘궁정동의 총소리’. 문영심 지음,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자료. 국가정보원과거사건진실규명을통한발전위원회의 자료. 위키백과. 나무위키. 등
    특히 “피고인 이철, 사형!”은 한승헌 저, 전게서 제2권 280~297쪽을,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 부른 민주주의 만세’는 전게서 제2권 362~393쪽을, 유인태의 ‘내가 겪은 민청학련 사건’은 전게서 제2권 319~346쪽을,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이었던 유봉인이 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추적기’는 전게서 제2권 520~538쪽을, ‘혁명과 우상’ 제2권 267~269쪽을 참조하였다.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