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정승열
  • 법무사
  • 대전
  • 민사법
연락처 : 042)489- 2104~6
이메일 : chungsyl@paran.com
홈페이지 : www.apollo100.com
주소 : 대전 서구 둔산중로78번길 26,104호(둔산동, 민석타워)
소개 : [전문 영역] 부동산경매, 개인회생 및 파산, 가압류가처분, 법인등기

이 포스트는 0명이 in+했습니다.

    목록이 없습니다.

    정승열님의 포스트

    [ 더보기 ]

    대만의 미래

    0

    새해 벽두인 1월 2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대만동포에게 보내는 서한 발표’ 40주년 연설에서 “평화통일과 일국양제(一國兩制)는 국가통일의 최선의 방식으로서 중국정부는 평화통일에 최선을 다하겠지만, 대만과의 통일을 위해 무력사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겠다”고 하자, 1월 5일 차이잉원 대만총통은 ‘국제사회가 대만의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호소하면서 ‘국제사회가 위협받는 민주국가를 지지하지 않는다면, 다음 차례는 어떤 나라가 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한 장개석 국민당정부가 1949년 타이베이(台北)를 임시수도로 삼은 이후에도 ‘자유중국’은 UN 창설의 주역으로서 강대국의 특권인 안보리상임이사국의 지위를 누렸으나, 1970년대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미국이 대륙의 중공(中共)과 수교하고 1971년 10월 중공이 국민당정부를 대신하여 UN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되면서 ‘자유중국’은 UN에서 축출되었다. 그리고 미국은 1972년 1월 중국대륙을 대표하는 중국과 수교하고, 우리도 1992년 8월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정부와 단교했다.

    남북 약 395km, 동서 약 145km로서 남한(98,000㎢)의 약 1/3정도인 섬(36,000㎢)에 2,350만 명이 살고 있는 대만정부는 수도 타이베이(台北)를 비롯하여 신베이(新北), 타이중(台中), 타이난(台南), 가오슝(高雄), 타오위안(桃園) 등 6개 직할시, 지룽(基隆), 신주(新竹), 자이(嘉義) 3개 시, 13개의 현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 타이베이 인구는 235만 명이다. 우리가 남북통일을 염원하듯 대만정부는 대륙 회복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지만, 통일에 대한 전망이 점점 암울해지자 1980년 원주민을 중심으로 중화민국이 아닌 ‘대만’을 강조하며 별도의 독립국을 주장하는 민진당(民進黨)이 결성되었다. 또, 1992년 대륙의 중국과 대만은 각자 ‘하나의 중국’ 원칙을 하되 이에 대한 해석은 각자에 맡기는 이른바 ‘92 공식’에 합의하여 대만정부는 ‘하나의 중국’을 전제로 국호를 ‘중화민국’이라 하며 대륙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고, 대륙의 중국 역시 ‘하나의 중국’을 전제로 대만을 1개의 성(省)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 사회에서는 이미 대륙의 중국을 유일한 주권국가로 인정하고, 대만정부를 중국의 일부인 ‘중화 타이베이(中華臺北: Chinese Taipei)’라고 하는데, 2000년 총통선거에서 민진당 천수이볜 후보가 당선되면서 본토 수복을 꿈꾸는 국민당과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의 대립은 ‘대만 판 남남갈등’이 되었다. 2016년 5월 총선에서도 민진당 차이잉원 후보가 총통에 당선되면서 ‘92 공식’을 거부하여 중국은 대만과의 공식적인 대화와 교류를 중단했는데, 2018년 11월 24일 국민투표에서 민진당의 참패로 대만의 전망은 매우 어둡다.

    대만이 세계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1590년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발견하여 ‘포모사((Ilha Formosa: 아름다운 섬)’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진 이후인데, 그 후 서구 세력이 잇달아 아시아로 진출하면서 통상을 시도했지만 명(明) 제국이 응하지 않자 1624년 네덜란드가 타이완의 남부 타이난(台南)을 무력으로 점령했다. 뒤이어 1626년 에스파냐도 타이완의 북부 를 점령하고, 네덜란드가 다시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낸 뒤 동인도회사를 세우더니 1642년부터 16개 부족의 원주민에 대한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한편,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를 왕래하는 무역거점으로 삼았는데,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네덜란드인들은 풍랑으로 제주도에 자주 표류했다. 대표적인 것이 1627년(조선 인조 5년) 베텔브레이(Weitervree: 한국명 박연), 1653년(효종 4년) 8월 항해 중에 난파되어 포로생활을 하던 중 13년 만에 탈출하여 서양에 조선을 최초로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Hendrik Hamel : 1692~ ?) 등이 있다.  1636년 누르하치(태조)의 아들 태종이 후금을 청(淸)으로 고치더니, 1644년 명을 멸망시켰는데, 이때 정성공이 명조 복위운동을 전개하다가 대만으로 건너와서 1682년 네덜란드 세력을 몰아냄으로서 네덜란드의 대만 통치는 38년 만에 끝났다. 그러나 1839년 영국은 아편전쟁으로 남경조약을 맺었지만, 청의 미온적인 자세에 불만을 품고 1858년 청의 관리가 영국선박의 국기를 밟았다는 트집으로 벌인 애로호사건(Arrow; 제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 후 톈진조약으로 홍콩을 조차하고, 대만 단수이(淡水)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그런데, 1894년 조선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청과 일본이 공동출병하고 전쟁을 벌였으나, 패배한 청은 요동반도, 타이완, 대만해협에 있는 핑후제도(澎湖諸島) 등을 일본에 할양하는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으로 대만에 진주한 일본은 1945년까지 50년 동안 식민통치했다. 이처럼 오랫동안 이민족의 지배를 받아온 대만은 어찌 보면 한말 우리를 보는 것 같기만 하다.

    국민당정부는 독립투사들이 상해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항일운동 벌일 때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를 승인해준 세계 유일의 우방이었다. 그렇지만, 1992년 8월 우리가 북방정책이란 정치논리로 하룻밤 사이에 단교하고, 동족상잔의 6.25 전쟁을 배후조종 하였으며 인해전술로 남북통일을 가로막았던 중공과 수교하자 대만정부는 지금까지 서운해 하며, 혐한주의자가 많다. 이처럼 국제정치에서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냉엄한 현실에서 만일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민진당의 정책에 반발한 중국이 힘의 논리로 강제 통일하고, 주한 미군의 방위비부담을 전년의 2배 이상 요구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도 불사하겠다고 호언하는 트럼프가 실제로 감행할 때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과 중국이 우리에게 어떤 군사적 위협을 앞세울지 모른다. 미국 민주주의수호재단의 데이비드 맥스웰 연구원이 의회전문지 더 힐 기고문에서 “한국은 미국 본토 이외에 가장 큰 미군기지인 (평택의) 캠프 데이비드 건설자금의 90%를 댔고 미군 주둔비용의 절반을 지원하고 있지만, 트럼프는 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면서 트럼프의 동맹관이 변하지 않을 경우 미군은 곧 한반도를 떠날지도 모르고, 한·미 동맹은 비극적이고 갑작스럽게 종식될지도 모른다고 분석하고 있다.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