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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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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내 기억에 새겨진 최초의 인간의 모습은 요람 옆에 서 계신 아버지였다. 그 때부터 아버지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 聖像 같은 인품에 경의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성화를 보는 기분으로 아버지를 우러러보곤 했다.
    - c. v. 게오르규

    ― 아버지! 북부지방에 폭풍우도 불고 폭설이 내렸지요. 그래서 며칠 동안 공항이 폐쇠되었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느냐. 내가 마지막 순간이니까 너에게는 이 이야길 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이해할 수 있겠지?

    ― 무슨 말씀인가요? 그 동안 제가 모르는 일이 있었던가요?

    ― 나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단다.

    ― 왜? 진즉 말씀하시지 않으셨어요. 오랜 세월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 말을 함으로서 고통스러웠던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절대로 떠올릴 수 없었지. 그렇지만 아무리 오래 전 일이라고 해도 어찌 잊을 수가 있었겠니. 그렇구나…… 물 좀 주겠니…… 목이 메이니까…….

    ― 제가 ……

    ― 아우슈비츠는 제3제국을 통틀어 가장 큰 강제수용소였으니까 ‘대수용소’라고 했어. 그리고 다들 죽었으니까 ‘절멸 수용소’라고도 했지. 넓고 복잡한 사무실, 작업장, 식당, 창고들을 비롯해서 3,000명 가량의 SS대원이 거주하는 주택을 두루 갖춘 복합단지였지. 그리고 정문 입구에는 ‘Arbeit macht frei (노동이 자유케 하리라)’라고 환히 빛나는 글씨가 걸려있었지. 1943년 단풍이 곱게 물든 늦가을 쯤 아버지와 나는 …… 그러니까 아버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이지. 우리는 체코의 테레지엔슈타트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기차를 타고 대수용소로 이송되었지. 그때는 매일같이 유럽 각지의 유대인 게토에서 온 화물 열차들이 수용소에 도착하면 새로 도착한 이들 중 열에 한명 꼴로 작업이나 잔심부름을 위해 작업조로 뽑혔고 나머지는 가스실로 직행했었단다. 새로 지어진 최신식 화장터는 밤낮으로 돌아갔고 시커먼 굴뚝에서는 새하얀 연기가 바람을 타고 어두운 하늘로 끊임없이 올라갔지. 그날 베를린에서 SS의 고급장교가 신축한 화장터의 성능을 점검하기 위해서 시찰을 나온 거야. 그에게 유흥 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 여러 명의 유대인을 도열시킨거지. 거기에 아버지와 내가 불운하게도 뽑힌 거야. 권총을 든 장교가 옆에 서 있는 부하에게 아무 숫자나 하나 대라고 하니까 이 부하는 우물쭈물하더니 숫자 7을 말했어. 그때 장교가 담배를 피워 물며 약간 수선거리는 틈을 타서 아버지가 나를 자신의 옆으로 끌어당기더니 자리를 바꾸었어. 그 장교는 1에서 7까지 세면서 유대인들의 이마에 차례대로 총구를 겨누다가 일곱 번째 사람의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지. 일곱 번째는 바로 아버지였어. 나는 그제서야 내가 처음에는 일곱 번째 자리에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때 내 나이가 열 살에 불과했으니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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