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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과 왜곡 – 영화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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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과 왜곡
    영화 1987

    과연 영화 1987은 99% 실화일까? 실화와 얼마나 비슷하게 만들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을까? 실화를 영화로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팩트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고 역사는 왜곡과 훼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시나리오 작가 (김경찬) 스스로 말하지 않았는가.
    이 영화는 5공화국 정권의 폭력성을 30년이 훌쩍 지났는데 새삼스럽게 고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개봉 2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하니 얼마나 축하할 이야기인가. 영화감독이나 제작자 혹은 투자자는 손익분기점을 훨씬 넘어 많은 수익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명이 짧은 5공화국의 단말마의 순간을 포착하려고 시도했겠지만 진실을 외면하여 왜곡투성이가 되었다.
    6월 혁명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사건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평가나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몇 가지 사실 자체가 크게 왜곡되었으므로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 * *

    (그 당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 학생이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실은 다음과 같다.
    그 당시 박종철 군이 신림동 하숙집에서 연행된 시간은 검찰 발표에 의하면 1987년 1월 14일 오전 6시 40분경이었다. 그리고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 끝에 질식사한 것은 11시 30분쯤이었다. 그날 오후 7시 40분경 서울지검 최환 공안부장은 경찰의 사체 화장에 관한 강력한 요청을 뿌리치고 사체 보존과 부검을 지시했다.
    1월 15일 저녁 9시경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이 시작되었는데 검찰에서는 김진덕 입회계장과 형사 2부 수석 검사였던 안상수 검사가 참석했고 (그러므로 최환 검사가 부검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는 황적준 박사와 부검 보조직원인 구연반, 고영찬, 사진사 한한수가 참석했고, 한양대 병원에서는 마취과 전공 박동호 의사가 참여했고, 유족으로는 박종철의 형인 박종부와 삼촌인 박월길이 참여했는데 형은 부검이 시작되기 전에 도저히 입회할 수 없다고 하여 중간에 빠져나갔다.
    부검이 끝나자 안상수 검사는 관례대로 가족에게 시체 인계를 지시했다.
    5월 16일 8시 25분, 박종철 시체는 영안실을 떠나 벽제 화장장으로 옮겨져 오전 9시 10분에 화장됐고 화장이 끝난 박종철의 유골은 분골실로 옮겨졌고 잠시 뒤 하얀 잿가루로 변해 형 박종부의 가슴에 안겨졌다.
    당초 고문경찰에 대한 수사는 ‘신길산업’이라는 위장 간판이 달린 신길동에 있는 치안본부 특수수사대 건물에서 17일 오후부터 전담 특별 조사반장으로 임명된 이강년 치안본부 수사부장에 의해 진행되었다. 19일 오전 10시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을 갖고 경찰에 의한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박종철 군이 서울대 민추위사건 주요 수배자인 박종운 군의 소재를 알고 있음이 확실함에도 진술을 거부하자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위협수단으로 대공수사 2단 5층 9호 조사실에서 박군의 머리를 욕조물에 한 차례 잠시 집어넣었다가 내놓았으나 계속 진술을 거부하면서 완강히 반항하여 다시 머리를 욕조물에 넣는 과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턱에 눌려 질식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연행시간은 8시 10분. 사망시간은 11시 20분경. 사망원인은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 복부팽만은 조사관의 인공호흡과 초진의사의 호흡기 주입으로 인해 공기가 위장에 들어가 생긴 일시적 현상이다.

    그날 오후 5시 30분경 피의자들에 대해 서울형사지방법원 안영률 판사로부터 구속영장이 발부되었고 다음날 새벽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에서 영등포교도소로 호송되어 수감되었으며 1월 20일 검찰에 송치되었다.
    사건이 검찰에 송치된 후, 검찰에서 1차 조사는 서울지방검찰청 형사 2부 신창언 부장이 주임 검사가 되고 실제 수사는 안상수 검사와 박상옥 검사가 담당했는데 그 당시 검찰은 피의자들을 검찰청으로 소환하는 대신 영등포교도소로 가서 임시로 마련된 조사실에서 20일부터 23일까지 피의자들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1월 24일 두 경찰관을 기소하였다.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5.18 광주항쟁 추도 미사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가 추가 범인이 있으며 범죄사실이 축소 왜곡되었다고 폭로하였다. 그 폭로가 있은 후 5월 20일 검찰에서 2차 재수사가 처음부터 진행되었는데, 그 당시 담당 검사는 신창언 부장 검사, 안상수, 박상옥, 김동섭, 배재욱, 문영호, 이승구 검사 등이었다.
    그러나 범인 축소와 관련된 2차 재수사는 23일부터 대검 중수부 (한영석 부장)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때 추가로 밝혀진 고문 가담 경찰관 반금곤, 이정호, 황정웅 등은 1차 구속 기소된 조한경, 강진규와는 별개로 추가 기소되었다.
    한편, 대검 중수부는 5월 29일 오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범인 은폐 축소에 가담했던 박처원 치안감, 유정방, 박원택 등 3인에 대한 범인은닉 혐의에 대해서 발표하였다. (그때 수사결과를 발표하면서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이 사건 축소조작에 가담한 혐의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입건조차 하지 않았다.)

    축소조작
    ⦁사건발생 당일인 1월 14일 오후 5시경 치안본부 대공 3부 사무실에서 고문경찰관 5명이 모여 ‘조경위 등 2명이 수사하다 박군이 졸도사망한 것’으로 구두로 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1월 15일 오전 박원택 경정이 고문경찰관 5명을 불러모아 이들이 구두 약속대로 조서받는 연습을 하게 하고 각자의 역할을 숙지하도록 했다.
    ⦁1월 17일밤 11시경 유정방 경정은 특수수사대 조사관실을 방문해 조경위 등 2명이 범행 모두를 뒤집어쓰도록 설득했다.
    ⦁1월 18일 오전 10시경 동료직원 10여명이 조한경을 찾아가 회유를 했고 박치안감도 이들 2명을 찾아가 두 사람이 모두 책임지고 나가라고 설득했다.
    ⦁1월 19일 오후에는 유, 박경정이 다시 찾아가 경찰조사 때와 같이 검찰에서 진술하라고 하는 등 범인을 축소조작했다.

    은폐공작
    ⦁2월 19일 유경정 등 6명이 교도소로 조경위 등을 면회갔을 때 조경위가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하자 박치안감이 3월 8일 교도소로 다시 찾아가 조용히 있으라고 설득했다.
    ⦁3월 9일 박치안감이 가족들을 만나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3월 19일에는 변호사 선임을 취소하라고 종용했다. 유경정은 3월 11일부터 5월 17일까지 10회에 걸쳐 그 가족들을 만나 사건을 은폐하도록 설득했다.
    ⦁한편 박치안감은 4월 2일 신탁은행 이촌동 지점에 조한경과 강진규 명의로 5000만 원짜리 개발신탁장기예금 2계좌씩 2억 원을 가입한 뒤 다음 날 의정부교도소로 이들을 면회가 예금증서를 보여주면서 회유하였다.

    다음 해인 1988년 1월 12일 동아일보에 부검의 황적준 박사의 일기장이 공개되면서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이 대검 중앙수사부 (김경회 부장) 조사를 받고 15일 밤 직권남용 및 직무유기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다. 그는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면서 ‘업보로 생각하고 수양하겠다. 죄송스럽다’라고 말했다.

    * * *

    우선, 이 영화에서 반동 인물 (antagonist)은 박처원 처장으로 고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일개 처장일 뿐이고 그 위에는 층층이 상급자가 있었으므로 모든 행위는 그들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 처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 조직은 군대처럼 상명하복을 하는 특수한 조직이지 않은가. 실제 강 치안본부장은 나중에 직무유기와 직권남용죄로 처벌받았지 않은가.
    그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은 예산이나 조직, 업무처리에 있어서 안기부와 안기부가 주도하는 대책회의의 지시에 따라 처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마치 혼자서 모든 걸 결정하고 실행한 것처럼 몰아갔다.
    그 지휘 라인을 따라 올라가보면 강민창 치안본부장, 김종호 내무부 장관, (1월 20일 이후에는) 교체된 이영창 치안본부장과 정호용 내무장관, 대책회의를 실무적으로 지휘한 안기부 이해구 차장과 J단장, 장세동 안기부장, 더 올라가면 전두환 대통령까지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일개 하수인에 불과한 박처원을 모든 악의 근원인 것처럼 몰아간 것은 너무 지나쳤다.
    5공화국은 군사독재 정권이었다. 그 당시, 안기부 남산 분실, 보안사 성남 대공분실, 서울 시내에 위장 간판을 달고 산재해 있는 치안본부 대공분실 (남영동 대공분실을 포함하여), 경찰서 조사실 등에서 정권 차원의 물고문, 전기고문, 성고문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그러므로 일개 경무관에게 무슨 책임을 물을 수 있단 말인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범죄수사의 주체는 검찰이고 경찰은 수사지휘를 받을 뿐만 아니라 영장을 청구하는 권한도 없다. 다시 말하면 경찰은 자기 손으로 기껏 수사를 진행하면서도 수사 종결권이 없고 공소권도 없다. 모든 권한은 검찰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박처원 처장은 공안부장의 지시를 받는 처지에 있어 공안부장을 어떻게 할 지위에 있지는 않다.
    경찰들은 항상 (경찰들이 검사를 비하해서 부르는 은어인) 검새를 두려워하고 증오하며 뼈에 사무친 원한을 갖고 있다.
    물론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동 인물 (protagonist)과 반동 인물의 대립 구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영화라면 그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박처원 처장이 악의 핵심인 것처럼 모두 뒤집어쓰게 하였으니 이 영화에서 그는 진짜 희생자가 되었다. 영화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심각한 왜곡을 통해 명예훼손과 인격살인을 자행함으로써 영화 그 자체가 악으로 변모한 것이다.
    시나리오 작가는 직업윤리를 그렇게 강조했는데 이 영화야말로 심각하게 직업윤리를 위반한 것이다.
    그의 유족의 심정은 어떠할 것인가. 지하에 잠들어있는 그의 영혼은 요즈음 마음이 편치 않으리라.
    둘째, 그 당시 최환 공안부장은 경찰 쪽에서 박종철의 시신을 곧바로 화장할 수 있도록 지휘해달라고 하였지만 이를 거부하고 시신 보존과 부검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는 수사가 본격적으로 개시될 무렵 처음부터 수사 라인에서 제외되고 이 사건 수사에는 직접 관여한 바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환 검사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많은 활약을 한 것으로 왜곡하였다.
    영화에서는 최 부장검사가 박종철 시신 부검을 강행하기가 어려워지자 언론을 통해 사건을 이슈화하는 장면도 나온다. 최 부장검사가 이홍규 당시 대검 공안4과장에게 박종철 사망 사실을 흘리고, 그 사실이 기자에게 전해져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참으로 어이없는 왜곡이다.
    (그 당시 공안부는 수사가 본격적으로 개시되기 전 처음부터 수사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최환 부장도 수사에서 배제되었고 그 사건은 형사2부로 넘겨졌던 것이다.
    그러면 공안부는 무슨 부서였던가. 엄혹한 시절에 독재정권의 파수꾼으로 가장 잘 나가는 곳이었다. 그래서 모든 검사들이 선망했다. 1986년 그해 전국 교도소에는 무려 2800여명의 시국사범들이 구속 수감되어 있었다. 구치소나 교도소마다 넘쳐났다. 그들은 전부 공안부에서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추가 조사를 받고 구속 기소된 것이다.
    박종철 사건의 경우 당연히 공안부 소관이었지만, 그 당시 검찰 상층부는, 공안부와 공안부 검사들이 공공의 적으로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욕을 먹고 있어 무슨 오해를 살까 염려되어 형사2부에서 맡도록 한 것이다.)
    왜 하정우가 그렇게 열연을 해야만 하였는가?
    더욱이 그가 왜 중간에 사표를 내고 변호사로 개업했단 말인가.(이 부분은 그 당시 수사검사였던 안상수 검사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다. 그는 춘천지방검찰청으로 발령난 후 사표를 내었다.)
    어쨌거나 이건 너무나 지나친 왜곡이다.
    최환 검사는 이듬해 (1988년) 서울지검 남부지청 차장검사를 지내고 이후 검찰의 요직 중의 요직으로 빅4라고 할 수 있는 대검 중수부장을 제외한 대검 공안부장과 법무부 검찰국장, 서울지검장 등 3자리를 거쳤다. 그렇게 요직을 거친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까.
    그는 부산고검장을 마지막으로 검찰을 떠나 1999년 개업했다.
    셋째, 영화에서는 최환 검사가 이홍규 당시 대검 공안4과장에게 박종철 사망 사실을 흘리고, 그 사실이 기자에게 전해져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간 것으로 되어있다. 그 당시 검찰 직제는 대검 공안부 1,2,3과장은 검사가 맡았으나 4과장은 자료과장으로 검찰 일반직이 맡던 때였다.
    그런데 실제는 중앙일보 법조 출입 7년차 기자였던 신성호 기자가 이홍규 4과장 방에 우연히 들렀다가 기자들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예민한 재치를 발휘하여 특종을 한 것에 불과하다.
    (신성호 기자의「특종 1987」을 읽어보라. 과연 영화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영화를 만들기 전 이 책을 읽어보았는지. 또는 그때 중앙일보 사회면 2단 기사를 찾아보고 그 기사를 쓴 신성호 기자를 만나보고 인터뷰를 한 사실이 있는가?)
    넷째, 이 영화와 관련하여 가장 억울한 사람은 다름 아닌 1차 수사와 2차 재수사를 담당하면서 엄청난 고뇌와 함께 고생을 했던 서울지검 형사2부 신창언 부장검사 (이 사건 1차 수사와 2차 재수사의 당초 주임검사는 바로 신창언 부장이었다), 박종철 사체의 부검과 1차 수사에서부터 2차 재수사까지 끝까지 참여했던 안상수 검사가 있고, 중간에 이승구 검사와 교체해서 수사를 담당했던 박상옥 검사가 있다.
    2차 재수사에서는 신 부장과 안상수 검사, 박상옥, 배재욱, 김동섭 검사 등이 있었다.
    이들에 의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경찰의 은폐 조작 사건은 세상에 밝혀진 것이다.
    (그때 법무부 장관은 김성기 장관, 검찰총장은 서동권, 서울지검장은 정구영, 담당 2차장은 서익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영화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왜 진짜 수사에 참여하지 않은 최환 부장검사만 부각되는가?
    그런데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4번의 검찰수사가 있었는데 고문 경찰관에 관한 직접적인 1차 수사와 2차 재수사는 형사2부가 주로 담당했고, 그 후 은폐 조작과 관련한 3차, 4차 수사는 대검찰청 중수부가 담당했다.
    이 3차, 4차 수사는 1차, 2차 수사보다는 중요성이 떨어지지만 5공화국 정권의 운명과는 관련되어 있었다. 그런데 왜 이 수사에 대한 부분은 완전히 빠져 있는가?
    (5월 26일 오전, 전두환 대통령은 전면개각을 단행했다. 노신영 국무총리가 물러나고 대신 이한기 전 감사원장이 총리에 임명되었다. 장세동 안기부장이 퇴진하고 안무혁 국세청장이 그 자리로 옮겼다. 김성기 법무장관과 정호용 내무장관이 물러나고 대신 정해창 대검차장과 고건 민정당 의원이 새로 들어섰다. 검찰총장은 서동권에서 이종남으로, 치안본부장은 이영창에서 권복경으로 각각 경질되었다.)
    검찰 수사와 관련해서 가장 기본 자료는 뭐니뭐니해도 안상수 저 박종철 사건과 6월항쟁의 진상이라는 부제가 붙은「안 검사의 일기」가 가장 중요하고, 그 외 신성호 지음「특종 1987」, 황호택 지음「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항쟁」,서중석 저「6월항쟁」등이 있는데,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는 이들 책을 제대로 읽어보았는지, 몇 번이나 읽었는지, 이들 책의 저자와 만나서 인터뷰를 한 일은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5공화국 군사독재 정권은 안기부의 지휘 아래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이 언론사에 대하여 이런 내용은 실어라, 이런 내용은 싣지 마라는 지시사항을 직접 전화 또는 문서로 전달하고 심지어 이 기사는 이런 제목으로 몇 단으로 실어라는 주문까지 했다.
    이러한 주문을 그 당시에 보도지침이라고 불렀고 언론은 이 보도지침에 순응했기 때문에 제도 언론이라 불렀다.
    그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정책실에서는 신문사로 매일 한 두건씩 보도지침이 내려왔으니 1년 동안 모으면 오백 몇 십 건이 되었다.
    그 당시 언론기관에 내려온 보도지침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민청련 전 의장인 김근태 씨는 이날 4차 공판에서 지난해 9월 26일 검찰에 송치된 후 무려 3개월 15일간 변호인 접견을 차단당하다가 첫 공판을 10일 앞둔 12월 9일에야 변호인들과 접견할 수 있었다고 밝히고 이는 자신에게 가해진 처절한 고문의 흔적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근태 전 의장은 1985년 여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3일간 불법 구속되어있으면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고 그 무렵 검찰에 송치되었다. 그 당시 3개월 15일간 변호인 접견을 차단한 검찰부서가 바로 공안부였다. 공안부는 이런 사건을 수사지휘했고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며 추가 보강 수사를 한 후 기소하였다. 물론 공판에도 관여하였고 아주 이례적으로 중형을 구형하였다. 그리고 법원은 대부분 구형대로 선고했다.)
    그런데 보도지침은 그가 ‘고문당하고 변호인 접견을 차단당했다’는 등의 주장은 보도하지 말도록 지시했고 사진이나 스케치기사도 쓰지 않도록 지시했다.

    1985년 11월, NCC는 고문대책위를 구성했다. 고문대책위란 종교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등 재야단체와 ‘민추협’, 신민당 등이 독자적으로 전개해 온 활동을 통합, ‘고문 및 용공조작 저지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 대책위원회는 발기문을 통해 ‘최근 들어 애국학생, 노동자, 청년에 대한 대량 구속, 국가보안법 적용의 남용, 야만적인 고문에 의한 용공조작 등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음에 대해 우리는 심각한 우려와 분노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청년 지도자인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민청련) 상임위 부위원장은 고문수사에 견디다 못해 정신이상증세를 보이고 있고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이자 전학련 삼민투위원장인 허인회 군을 비롯한 많은 애국학생, 민주인사들이 수사 과정에서 비인간적인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우리는 현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용공으로 매도하여 국민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이 같은 고문을 자행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보도지침은 고문대책위 구성 사실을 보도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보도지침은 기자들에게 알게 모르게 전달되어 기사 작성을 통제하였지만 신문사의 편집국 칠판에 공공연히 적혀 있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영화에서 신문사 간부가 편집국 칠판에 적힌 보도지침을 지우며 사실대로 보도하라고 지시하는 장면은 그 당시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암암리에 내려왔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보도지침과 관련하여 상세한 것은 민언련 저「보도지침」을 참고하기 바란다.)
    또한, 영화에는 경찰이 신문사 사무실 내부에까지 들어와서 최루탄을 쏘아 아수라장이 된 장면도 나오지만 그 시절 경찰이 신문사 사무실까지 난입한 적은 없었다. 실제는 기자들이 데모 현장에 나가 취재하면서 어쩔 수 없이 최루탄으로 범벅이 돼 신문사로 복귀하는 일은 있었지만 말이다.
    박종철은 1987년 1월 14일 아침에 불법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하다 그날 12시 반경 죽었다. 그리고 15일 저녁 9시경 한양대 부속병원에서 부검이 있었고 다음 날 아침 8시 25분 박종철의 시체는 한양대 병원 영안실을 떠나 벽제 화장장으로 옮겨져 오전 9시 10분에 화장됐다. 그러므로 박종철의 부모와 누나가 부산에서 올라와 병원에 빈소가 차려진 것을 보고 오열하는 장면은 없었던 것이다.
    과연 그 당시 영등포교도소 보안계장이었던 안유라는 인물은 정말 의인이라 할 수 있는가?
    ‘재단법인 진실의힘’의 이사이며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센터장이기도 한 정신과 의사 강용주는 영화 1987에 대해 보이콧을 선언했다. 영화에 나온 안유라는 인물의 모습이 실제 행적과는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다. 구미 유학단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인 강용주는 안유를 가해자로 기억한다. 간첩단 사건 후 안유가 보안과장으로 있던 대구교도소에 수감된 그는 상당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밝혔다. 안유가 자신에게 수갑을 채워 개밥을 먹이고 전향서 작성을 강요했다는 것이다. (gojin@kyunghyang.com)
    왜 하필 연희는 교도관 한병용의 조카 자리에 앉혔던 것일까. 6월항쟁 당시 자료를 보면 여대생들이 시위에 많이 참여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런 여대생들 중 한 사람을 연희로 하였다면 도대체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교도관 한병용의 조카 자리에 앉힘으로써 심각한 역사 훼손이 된 것이다.

    * * *

    시나리오 작가는 (혹은 감독은) 왜 99% 실화라고 장담했던가? 마치 역사학자나 되는 것처럼 ‘역사는 왜곡과 훼손이 안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던가. 그렇게 역사를 형편없이 왜곡시켰으면서 말이다.
    정확하면서도 극도로 절제하고 객관성을 지키는 냉철한 역사 인식이 필요했지만 영화의 흥행 성적과 대차대조표에만 관심이 있는 그들에게 그걸 기대하는 것은 애시당초 무리였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이 되돌아올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마태복음 7장 1절은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고 했다), 결론을 내리자면, 영화는 냉혹한 역사적 사실을 심각하게 왜곡하면서까지 부적절한 에피소드를 나열하여 관객을 모독하는 멜로드라마이다. 멜로드라마가 되면서 무언가 신성한 것이 신성 모독을 당했다는 절망적인 기분이 든다.
    그런데 영화 속 사건과 인물들이 진짜라고 믿은 관객들은 어리석게도 자신이 모욕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소설의 경우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기도 하고 각색을 거쳐서 연극, 영화나 TV 드라마로, 만화로, 뮤지컬이나 오페라 등 새로운 버전으로 전환한다. (트랜스 미디어 스토리텔링 시대에 컴퓨터 게임, 소셜웹, 가상현실 게임, 테마파크 같은 엔터테인먼트 분야로의 전환은 제외하고서도 말이다.)
    그 과정에서 각색자는 원천 작품을 재해석하여 시간과 공간을 변화시키고 캐릭터를 다른 관점에서 정체성을 변형하고 플롯을 변경해서 디테일을 생략하고 주제를 변주하면서 개작하고 재조합한다. 그래서 그들 각각의 버전은 상호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에는 옹기 그릇에 도공의 손자국이 남아있듯이 이야기꾼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제 각색자는 창작자가 되어 그 작품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논픽션과 역사적 사실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사실을 왜곡해서 지어낸다면 그것은 일종의 범죄행위로 여겨질 수 있다. 그래서 역사학자나 에세이 작가들은 이야기를 제대로 하고 싶어서 지어내기나 은유, 심지어 수식어까지 여러모로 삼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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