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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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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혹

    악마는 우리들을 유혹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악마를 유혹하는 것이다.

    ― G. 엘리엇

    변호인 접견실.
    겨울 오후의 짧은 햇살이 교도소의 더럽고 꼴사나운 콘크리트 담벼락을 비스듬히 비추고 있다. 교도소 건물은 낡고 칙칙했다.
    그 건물은 오랜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 (혹은 죄수들)의 슬프고 혼란스러운 모습을 지켜보았을까? 이 교도소는 시간의 흐름을 역행해서 뿌연 과거로 되돌아가는 느낌을 주고 있지. 이 낡은 건물이 지금 보여주는 것과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숨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육중한 철문이 굳게 닫혀 있는 내부는 들어가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건물 밑에는 내가 모르는 비밀 통로와 어두운 지하 감옥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무한히 구불구불 뻗어 있는 통로는 아무리 헤매도 탈출구를 찾을 수 없고 다들 떠나버리고 나 혼자 남아 있다는 고독감과 한없는 불안감 때문에 몸서리치게 되는 미로가 아닐까. 한 낮에도 사형수들과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과 부패의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여기를 처음 왔던 게 언제였더라? 30년 전인가? 40년 전인가? 가물가물하다. 1980년대는 아주 폭력적인 시기였어.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었지. 그런 걸 애써 외면하려고 한들 어쩔 수 없었어. 이 건물은 직업적 타성에 젖어 수없이 들락거렸지만 단 한 번도 내게 유쾌해 보이거나 익숙해 보이지 않았다. 늘 나를 옥죄는 두려움과 섬뜩함과 거북스러운 느낌만 들었을 뿐이다.
    눈은 갈수록 침침하고 오줌 누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어, 손등에 죽음의 예고편인 검버섯이 점점 번지고 있다고. 내가 입고 있는 20년도 더 넘은 빛바랜 양복을 보라고. 나는 늙었다고, 그것도 너무 늙었어. 세상은 원래 안개가 낀 것처럼 너무 흐릿하다고. 내 삶으로부터 도대체 뭘 그렇게 기대할 수 있었단 말인가? 사는 것도 죽는 것도 그게 그거야. 나에게 언제 좋은 시절이 있었긴 했던가?
    늙은 변호사는 지친 표정으로 접견실에 무료하게 앉아서 희미한 옛 기억을 뒤적이고 기억들 사이의 틈새는 어리석은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그 유명한 야구선수는 TV에서 여러 차례 경기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인지 바로 이웃집 총각인 것처럼 익숙한 모습일 터이다. 나이가 몇 살? 서른한 살이던가? 서른두 살이던가? 선수로서 아직 한창때일까? 아니면 지난 것인가? 그는 호남형의 잘생긴 얼굴에 키가 185센티미터를 넘고 근육으로 뭉쳐진 단단한 체구이니까 얼마나 위압적일까. 변호사는 점점 쭈그러들고 있는 자신의 왜소한 체구를 떠올렸다. 그리고 괜히 반쯤 벗겨진 머리 뒤쪽에 붙어 있는 몇 올의 흰 머리카락을 쓸어보았다.
    그가 한창 전성기였을 때 그해 18승 7패에 방어율은 2.4였다. 그 중 21번을 퀄리티 스타트를 하였고 완투승 세 번, 완봉승 한 번이 있었다. 그러나 그해 최고의 컨디션이기는 했지만 탈삼진 기록만은 세우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의 주 무기는 타자 바로 앞에서 안쪽 또는 바깥쪽으로 예리하게 휘어지는 커브와 체인지업이었고, 홈플레이트 바로 앞까지 직구처럼 날아와서 곧바로 타자의 바깥쪽 아래로 갑자기 도망가 버리는 슬라이더는 일품이었다. 불같은 강속구는 아니었지만 큰 키와 긴 팔을 이용해서 150킬로미터의 속구를 던지기도 하였다.

    변호사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아들뻘 밖에 안 되는 그 유명한 야구선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부끄러운 듯 눈길을 외면한다. 그 눈에는 수줍음과 당혹감이 어렸다.
    “교도소 생활은 잘 적응하고 있나요?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요즘은 죄수들이 넘쳐나서…… 공간이 좁으니까 모두 어깨를 비비대며 지내야 할 거요. 프라이버시도 거의 없고 말입니다.
    그래도 지금은 천만다행입니다. 옛날에는 감방에 벼룩과 빈대가 시커멓게 기어 다녔어요. 그리고 옷깃마다 개미만큼 큰 이가 붙어 있고 털마다 하얀 서캐들이 달라붙어 있었지요. 그게 디디티를 뿌려도 소용없어요.”
    “옛날엔? 지금은? 어쩔 수 없어요. 참고 지내야지요.”
    “그렇다면 이곳 교도소 역시 피고인에게 잘 적응하고 있겠군요.”
    “……”
    “국선 변호사입니다. 법원에서 친절하게도 지정을 해주었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유명한 야구선수였는데…… 스타가 아니었던가요? 죄목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선을 선임하는 게…… 그렇다면 저는 물러나야지요.”
    “어차피 망가진 인생인데…… 비싼 돈을 들여서 사선을 할 필요가 있겠어요? 지금 돈도 없지요. 그런데 법원 때문에 원치 않는 사건을 맡게 된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국선을 자원했습니다. 오래되었지요. 그런데 감방 안에서는 말들이 많을 텐데요. 이 사람 저 사람 모두 전관예우를 들먹이지 않던가요?”
    “몇몇 변호사들이 스스로 찾아왔어요. 그렇지요. 어김없이 전관예우를 들먹이더라고요. 금방 빼준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그 변호사를 선임하는 게?”
    “어지간하게 불러야죠. 돈이 없다고 하니까 계속 깎아주겠다고 했지요. 시장 잡상인들도 그렇게는 안 하겠어요. 꼭 치사한 양아치 같더라고요.”
    “그건 알고 계세요. 저야 뭐…… 국선이니까. 전관예우는 있을 수가 없지요. 그 대신 야구는 광적으로 좋아합니다.”
    “아무렴 어때요. 전 빨리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안에서 콩밥을 먹으면서 수양을 쌓아야지요. 그래야만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밖에 빨리 나가면 그 자식들이 또다시 공갈 협박을 할 것 아니겠어요? 죽여 버리겠다는 말은 신물이 나지요.”
    “그랬다고? 협박은…… 그건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는 역겨운 속임수이거든.”
    “그놈들이 또다시 괴롭히면 전 정말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야겠죠. 다시 말씀드리자면…… 변호사님이 너무 신경 쓸 것은 없다고 봐요. 대충 해도 상관없어요.”
    “그런 말은 하지 마시게…… 그런데 결혼은 했던가요?”
    “오래 사귀던 여자가 있었긴 합니다만……”
    “이 지경이 되니까 멀리 도망가 버렸겠구만. 어차피 떠날 여자였어. 안 그런가? 처음부터 너무 심각한 이야기는 피해야 하겠지. 자네보다 열 살은 더 먹은 아들이 있다네. 야구 이야기를 해보지? 궁금한 게 많았거든.”
    “정말 야구를 좋아하시나요?”
    “그렇다니까. 두서없이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물어보아도 괜찮겠지? 물론 내가 뭘 물어봐도…… 혹시 내키지 않으면…… 꼭 대답할 필요는 없다네. 다시 말하면…… 말을 돌려서 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그건 시간 낭비니까.”
    “그럴 리가요. 변호사님인데……”
    그는 울퉁불퉁한 자기 손을 내려다보면서 수줍게 웃었다.
    “옛날 우리 고등학교가 야구로 유명했지. 그때부터야……. 훌륭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었지. 그중에는 메이저리그에도 진출했으니까…… 거기서 성공했는지는 잘 모르겠네만.
    그렇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내가 야구장에 가본 적은 없다네. 그래도 TV는 열심히 보았지. 마누라는 야구라면 질색이긴 했었네만…… 그 여자는 지금 내 곁에 없지……”
    “저는 야구 때문에 고등학교 때부터 서울로 올라 왔지요. 고등학교 때 공부라곤 전혀 안 했어요. 오직 야구만 했지요. 그래서 머릿속에 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누군들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겠나?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그래도 야구를 하면서 배운 게 많이 있었을 텐데?”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걸 야구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인간의 도덕과 의무 같은 거 말입니다. 그러나 전 그걸 위반하였지요.”
    “야구 때문에 행복했던 때가 있었긴 있었나?”
    “글쎄요…… 연습을 열심히 하고 나서 나른한 피곤함을 느낄 때는 정말 행복했지요. 그리고 관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 불 꺼진 야구장의 적막함을 느낄 때…… 그때는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었거든요. 그러나 기막힌 승리의 기쁨 같은 거는 행복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경기에서 패전 투수가 된 다음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슬픔 같은 것도……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게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구만…… 야구 경기를 TV로 보면 투수들이건 타자들이건 스트라이크존에 매우 민감하던데. 그렇지 않은가? 가끔 노골적으로 심판에게 불만을 보이기도 하고.”
    “심판들이 야구 규칙을 해석하는데 편차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심판도 인간인데요. 인간의 한계 아니겠어요? 현실에 따라, 상황에 따라, 심판에 따라 조금씩 변할 수밖에 없는 게 스트라이크존의 문제점입니다.”
    “그래서야?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사람 눈으로 보면 스트라이크존의 상한선이 높게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규칙대로 적용하긴 곤란한 부분이 있으니까 실제 조금 낮게 보는 경향이 있는 거죠. 타자가 서 있지 않고 구부리고 있어 상한선 자체가 조금 낮아지게 된단 말입니다.”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고 하더구만. 투수는 스트라이크존이 마음 속에 그려지나?”
    “타자가 치기 좋은 게 스트라이크존입니다. 그러나 스트라이크존 역시 허공에 떠 있는 가상의 공간에 불과하지요. 분명히 정사각형은 아닙니다. 직사각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 공간이 마음속에서 뒤틀리고 뭉개지기 때문에 경계선을 고정하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이론적으로 존재하나 명확히 선을 그을 수 없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투수는 허공을 향해 공을 던지고 타자는 허공을 향해 방망이를 휘두르죠. 그래서 허공에서 공과 방망이가 접점을 찾는 겁니다.
    타석에 서 있는 타자는 투수가 자신을 상대로 스트라이크를 던지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좋은 타구가 많이 나올 수 있는 존입니다. 그래서 타자는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지려고 하는 것 이상으로 그 공을 때리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이지요.”
    “경기할 때 보니까 땀을 좀 흘리더만…… TV화면에 땀방울이 보이니까.”
    “그렇겠지요. 땀을 흘릴 수밖에 없지요. 이것저것 불안하거든요. 불안하면 땀이 많이 나는 것 같아요.”
    그는 심각한 얼굴로 송진 주머니를 가볍게 주무른 후 타자의 자세와 미세한 몸동작을 예민하게 관찰한 후 볼을 뿌렸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는 속으로 되뇌었다. 너는 내가 어떤 볼을 던지는지 예측할 수 없어. 그러니까 타이밍을 절대 잡아낼 수 없단 말이야. 칠 테면 쳐 보라니까. (물론 그가 전성기 때의 일이다.)
    “투수의 볼 배합에 기본과 같은 원칙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답은 없겠지? 볼 배합은 투수와 포수의 합작품 아니겠어?”
    “볼 배합은 타자와 투수 간 피나는 머리싸움이지요. 투수마다 자신만의 결정구가 있어야 해요. 그게 없으면 프로야구에서 좋은 투수가 될 수 없어요. 결정적 순간에 그 공을 던지기 위해 먼저 반대쪽으로 향하는 공을 던져 타자의 시선을 분산시킵니다. 일종의 사전 예비작업이지요.
    타자는 먼저 바깥쪽 공이 들어오면 다음에는 몸 쪽 공이 들어온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기 마련이지요. 생각은 그렇더라도 막상 몸 쪽으로 공이 예리하게 찌르듯이 들어오면 몸은 쉽게 반응하지 못하고 움찔합니다. 그래서 지그재그 투구가 볼 배합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차간에 어느 정도는 상대방 수를 알고 있을 텐데?”
    “프로 야구에서는 경기 전에 상대 타자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분석은 이미 끝낸 상태이지요. 짧게는 한 시즌, 길게는 수년간 축적된 데이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타자의 약점만 줄기차게 공략하면 이길 확률은 높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닙니다. 타자도 투수의 약점을 훤히 꿰고 있거든요.”
    “투수들은 결국 도박사들이 아닐까? 볼 배합은 어느 정도 도박적인 요소가 있지 않겠어? 선택의 문제이니까. 다시 말하면…… 삼진을 잡으면 도박에 성공한 것이고 안타를 맞으면 실패한 거지.
    그런데 도박사들은 어쨌거나 미신을 믿게 되어 있어. 그리고 반신반의하면서도 행운의 부적을 믿고 있지. 그래서 징크스가 생긴 다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가 도박을 했다는 말씀이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볼 배합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결정구가 있어야 합니다. 타자를 상대할 때, 핀치에 몰리면 투수는 결정구를 던져야 하는 상황과 마주치게 됩니다. 투수의 결정구는 대부분 변화구이지요. 강속구를 결정구로 준비하는 투수는 거의 없습니다.
    결정구는 타자의 눈에 익은 공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아무래도 눈에 익은 공을 또 던지면 맞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베이스 코치는 온몸을 이용해서 팔을 휘두르며 사인을 보내지 않는가. 포수는 손가락을 폈다 쥐었다 하면서 손가락 개수를 몇 차례씩이나 바꾸고 말이야. 그 복잡한 사인이 차질 없이 전달될 수 있겠어?”
    “사전에 약속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포수가 손가락 한 개를 보내면 직구를, 두 개를 펼쳐 보이면 변화구를 던지라는 식이지요. 가끔은 투수가 어깨에 손가락을 대고 포수에게 먼저 사인을 보내기도 합니다.
    사인은 상대방에게 노출되면 안 되니까 극비 사항인 거죠. 그러나 너무 복잡하게 하다보면 깜박하고 헷갈릴 때도 있어요.”
    “투수는 포수와 호흡이 잘 맞는 게…… 그렇게 중요한가?”
    “포수가 사타구니 사이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할 때 보면 손톱에 형형색색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는 걸 볼 수 있지요. TV 화면에서는 안 보일 수도 있어요. 이들 손톱은 빨간색, 노란색, 분홍색, 검정색, 야광색 등으로 요란하게 치장하고 있다구요. 손톱을 보호하는 게 아닙니다. 투수를 위한 배려이지요. 투수가 사인을 쉽게 알아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포수가 투수의 마누라도 아닌데 투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나 신경을 쓴다구?”
    “포수가 영리하고 경기 운영에 여유가 있으면 투수는 정말 편하지요. 그리고 결과가 좋게 나오면 덩달아 좋은 평가가 나오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바탕이 됩니다.
    노련한 포수는 아주 긴박한 상황에서도 투수에게 믿음을 줘야 합니다. 저는 믿을 수 있는 포수인 경우 대부분 포수의 사인대로 던졌습니다. 그러면 결과가 괜찮았지요.”
    “그러니까 경기 결과를 보고 평가한다는 건가?”
    “중요한 것은 결과 이전에 과정이지요. 과정이 좋으면 결과도 좋게 나오는 거겠지요. 상대방 타자들이 경기 초반부터 타석에서 서두르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오는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빨리 점수를 뽑아 선발을 무너뜨리려고 한 거죠. 그러면 포수가 싸인을 보냅니다. 그런 타자들한테 스트라이크를 던질 필요가 있나요. 살짝 살짝 빠지는 유인구로 범타를 유도하지요.”
    변호사는 의자가 몹시 불편한 듯 의자 등받이에서 등을 떼고 몸을 꼼지락거렸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때가 낀 누런 책상 위에 놓인 검정 볼펜을 만지작거렸다.
    이윽고 그가 다시 말했다.
    “신경전이 대단하구먼.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투수는 누구보다도 머리가 명석해야 되겠지?”
    “그건 정말 피 터지는 신경전이지요.
    투수와 타자는 공 하나하나에 수 싸움을 벌입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의 의도를 알게 되면 상대하기 수월해지니까요. 포수는 홈플레이트 뒤에서 투수가 유리해지도록 리드 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중심 타선과는 달리 하위 타선은 좋은 공이 들어와도 볼 하나 정도는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오히려 스트라이크존으로 공을 던지지요.
    투수가 무슨 일 때문인지 평소답지 않게 바싹 얼어붙어 있을 때가 있어요. 이때 포수가 이거 안 되겠다 싶으면 투수를 달래주어야 해요.”
    “그러니까 포수는 투수에게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는구먼. 마누라는 그렇지 못해…… 잔소리나 하지.
    그래서 투수와 포수가 서로 어루만지듯 호흡이 잘 맞으면 폭투나 패스트 볼은 훨씬 줄어들겠군.”
    “그건…… 그렇습니다.”
    “상대팀 강타자를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울 때 기분은 어때? 기분이 째지지 않는가? 그때 타자는 실망한 기색이 역역하지. 삼진을 먹고 나서 볼이었는데 왜 그게 스트라이크지? 괜스레 주심 탓을 하며 은근히 째려보고 나서 덕아웃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거든.”
    “타자는 마치 허공에서 어떤 허깨비를 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내심 쓴 웃음을 지었겠지요.
    그러나 삼진 잡았다고 마운드에서 퍼포먼스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대방 감정만 건드릴 뿐이지요. 그 타자는 다음에 또 만나게 되어 있거든요. 쓸데없이 감정을 주고받을 이유가 없지요.”
    “그러면, 반대로 투수가 홈런이나 만루 홈런을 맞은 기분은 어떨까? 대게는 망연자실 하던데.”
    “홈런 친 타자는 투수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겠어요. 제 잘난 척 희희낙락 하지요. 그때는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털썩 주저앉아서 울고 싶지요. 그리고 막 후회가 되는 겁니다. 차라리 볼을 주고 말걸…… 그렇게 던져서는 안 되는데……”
    “현역 홈런 타자라면 역시 이승엽이나 이대호, 그리고 박병호가 대충 생각나는 구먼. 언제였더라? 여기 구장에서 박병호가 친 홈런 볼이 담장을 훨씬 넘은 적이 있었지. 정말 멀리 나갔어. TV 카메라가 쫓아가지 못했으니까.”
    “그 공은 아마 지금도 멀리 날아가고 있겠지요. 그날은 공이 정말 안 좋았어요. 웬일인지 투수 마운드에서 포수가 앉아있는 자리까지 거리가 아득하게 멀어 보이더라고요.”
    “컨디션이 안 좋았겠지?”
    “컨디션이 안 좋으면 공에 자신이 없으면서 의구심이 들지요.”
    “공이 투수 손을 떠날 때 느낌이라는게? 어떤? 내 말은 공이 갑자기 터무니없이 솟구쳤을 때를 말하는 거야? 그러면 웃음이 절로 나오지.”
    “손이 공을 장악하지 못 했을 때이지요. 그때는 공이 바람처럼 어디론가 날아가서 공기 속에 녹아 없어져 버리지요.”
    “어떤 때는 감독이 격려해 준 적이 있겠지? 누가 뭐래도 네가 팀의 주전 투수다. 왜 이런 말을 하냐 하면 한 때는 최고의 투수로 대접받았으니까. 책임감을 가지고 팀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해준 적이 있었던가?”
    “한 때 저의 입지가 매우 불안했지요. 제가 이런 저런 부상에 시달리면서 하향세에 있으니까 구단은 외국 투수를 영입 하였거든요. 그래도 감독님이 내가 잘해야 된다고 다독여주며 신뢰를 보내주시면 그때는 자부심이 생기지요. 그건 프런트가 자기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결정한 거라고 하면서 말이지요.
    언젠가부터 포수가 투수에게 공을 잘 닦아서 건네주면 포수가 사소한 일에도 정성을 쏟고 투수를 믿고 존경하기 시작한 거라고 봐야겠지요.”
    “감독이거나 또는 투수 코치는 경기가 진행하는 중에 투수교체를 하는 기준이 나름대로 있겠지. 투수교체 시기를 잡는 것이 승패를 가를 만큼 굉장히 중요해 보이거든.”
    “대부분의 감독은 투수의 볼끝이 무뎌졌다고 여겨지면 다음 투수를 준비시키지요. 그러니까 던진 투구 수보다는 볼끝이 우선이지요. 투수가 그날 시합에서 만족스럽게 볼을 던졌다고 한다면, 첫째는 제구가 잘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볼끝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볼끝이 좋은지를 어떻게?”
    “볼이 끝까지 살아 움직이면 볼끝이 좋은 것입니다. 볼끝이 좋으면 스피드가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빨라지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이때 타자는 공의 스피드를 따라가지 못하고 헛스윙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투수가 마운드에서 한결 여유롭게 행동할 수는 없나? 가끔 웃고 말이지……”
    “어떤 경우이건 마운드에서 웃을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항상 긴장하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인상을 쓸 수도 없습니다.
    내야수나 외야수나 할 것 없이 어느 순간 터무니없는 실수를 하면 온몸에서 힘이 쏙 빠지지요.
    그러나 내색할 수는 없습니다. 저도 자주 실수를 하거든요. 빨리 털어버리고 오직 경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얼간이 같은 플레이라는 뜻으로 본헤드플레이가 있지 않은가?”
    “정말 기가 막히지요. 그래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닙니다. 아주 가끔…… 저도 몇 번쯤은 당황한 나머지 그런 플레이를 한 적이 있었겠지요.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역시 만원 관중이 최고지? 엔도르핀이 마구 솟구칠 것이 아니겠어? 혹시 관중의 함성소리에 압도되어 기가 죽을 수도 있겠네.”
    “경기를 할 때는 관중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이 제가 던지는 공에 집중하면 그럴수록 오히려 에너지를 더 받았다고 해야 되겠지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저는 경기 규모가 클수록, 관중이 많을수록, 팬들이 몰려들수록 경기를 더 잘 해냈어요.
    그걸 즐길 줄 알았던 거지요. 선천적으로 타고난 배짱이 있었던 겁니다. 저의 경우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물론 관중들 때문에 무척 흥분하기도 했지만 아주 불안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어떻든 관중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흥분되고 불안한 감정에 자기를 내맡겨야 하지요.
    그러나 많은 관중 수에 겁을 먹은 선수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면 큰 경기에서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연습할 때는 기가 막히게 던지는데 막상 시합에 나오면 영 아닌 거죠. 심리적 압박을 이기지 못하는 겁니다. 누구라고 지적하고 싶지는 않네요. 이쯤 해두죠.”
    “모든 일이라는 게 신체적인 것만큼 정신적인 부분의 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다네. 그런데 팀의 주장을 맡은 적이 있었나?”
    “주장은 팀의 사기를 올리거나 분위기를 다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저는 주장이 될 기회가 없었습니다. 누가 추천해도 아마 거절했을 것입니다. 제가 저 자신을 잘 알지 않겠어요?”
    “잘 나갔을 때는 팬들이 구름처럼 모여 들면서 팬클럽도 생겼을 거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 여자도 거기서 만났지요. 그러나 제가 이 모양이니 흐지부지 되었지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지. 하루 종일 지루할거야. 책을 읽게나. 책은 악귀나 잡신을 쫓아내는 부적이라고 할 수 있지. 그게 시간을 때우는 데는 제일이지.”
    “그럴까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내가 몹시 피곤하다네. 신경쇠약 때문인지 요즈음 불면증으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였지.
    일주일 후에 다시 오겠네. 기록을 복사하고 잘 읽어야 하니까. 피고인이 국선을 취소할 거로 지레 짐작하고 복사 신청을 안했었지. 추운 날씨에 몸조심 하시게.”

    성민경은 도핑 검사에 걸려서 출장 정지를 당한 후 오늘 처음으로 출장하였다. 토요일 낮 경기였다. 그는 마운드에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차갑고 투명한 하늘이었다. 눈이 시렸다.
    그는 지난 밤에 잠을 설치면서 생각했었다. 가수면 상태에서 많은 생각들이 두서없이 머릿속을 스쳤다.
    내가 다시 마운드에 서면 어떤 기분일까? 몇 번이나 상상했었다. 내가 이번 일로 정신적으로 많이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까? 팀 동료들의 표정은? 관중들의 반응은? 그때 구단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실은 구단을 위해서 투수는 심한 허리 통증 때문에 금지 약물인지 모르고 복용했다고 발표했으니까, 그건 일부는 맞는 사실이다. 나는 온몸을 쥐어짜서 투구를 하니까 관절이 있는 무릎과 허리, 팔꿈치, 어깨 등 안 아픈 데가 없지 않은가. 열성 팬들은 그렇게 믿고 있겠지? 그걸…… 당분간 잊을 것은…… 잊어버려야 한다. 오직 볼 하나하나에 집중하자. 약물의 후유증은 말끔히 털어냈다. 나는 몇 달 동안 제대로 몸을 만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그렇지 않은가?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을, 다시 부름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굳게 확신할 수 있었던가? 과연 어떤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인가? 짧았던 영광의 날들이 먼 과거의 일로 되어버릴 것인가? 올해는 지루한 한 해가 될 것이다. 시간이 느리게 흘러갈 것이 아닌가…… 내년은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는 게 아닐까?
    완봉승을 할 때였다. 그때는 공을 던질 때마다 모든 잡념이 사라졌고 완전히 집중하였다. 9회 말이었던가? 아니면 9회 초였던가? 우타자의 무릎 쪽으로 예리하게 파고드는 스트라이크를 던졌고 마지막 타자는 멍하니 쳐다보다 꼼짝없이 삼진을 당했다. 그 완봉승은 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순간 공은 어째서 마술을 부린 것처럼…… 천둥이 치고 번갯불이 치는 것처럼…… 스트라이크존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일까? 그 후 가끔 그 순간을 생각할 때마다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벌써 자정이 지났다. 그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1회 말부터 선발 투수가 두들겨 맞았다. 4회가 되자 벌써 5점이나 내주었다. 5회 말 성민경이 등번호 19가 새겨진 흰색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서자 관중석에서 가벼운 환호성이 터졌다. 홈 팀을 응원하는 관중들은 1루 쪽 방공호 뒤편에 몰려 있었고 그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1년여 만에 그가 마운드에 우뚝 선 것이다.
    그는 마운드로 올라가면서 초조함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는 숨을 몇 번이고 깊이 들이 쉬었다. 그리고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관중의 수는 관중석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일 년 사이에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위안을 삼는다.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려 한다.
    첫 상대는 1번 타자였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타자를 노려보며 어린 포수의 손가락 신호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초구를 던졌다. 시속 131킬로미터 높은 변화구였다. 심판은 가차 없이 볼 판정을 내렸지만 관중들은 그래도 함성을 지르며 첫 투구를 반겼다.
    이날 성민경은 날씨가 쌀쌀한 탓인지 볼 컨트롤이 좋지 않았다. 벌써 4월이었지만 꽃샘추위가 운동장을 덮고 있었다. 잔인한 4월. 연속 안타를 허용한 성민경은 무사 1,3루에서 센터 깊숙이 날아간 희생플라이를 맞고 선취점을 내줬다. 후속 타자들을 간신히 범타로 처리했지만 5회에만 벌써 25개의 공을 던졌다.
    6회에도 성민경은 선두 타자에게 하염없이 볼넷을 내줬다. 그러나 다음 타자를 병살타로 잡으면서 한숨 돌렸고, 세 번째 타자는 볼 카운트 3-2 풀카운트에서 몸 쪽 낮은 변화구로 삼진 처리하며 실점 없이 마쳤다.
    너무 긴장했던가. 땀방울이 온몸에 송글송글 맺혀서 흘러내려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더그아웃에 들어온 성민경은 흰색 두터운 다운점퍼를 입고 연신 손을 비비며 간신히 몸을 추스렸다.
    위기는 7회에도 계속 이어졌다. 연속 안타를 맞은 성민경은 무사 2,3루에서 희생플라이를 내주고 2실점 째를 하였다. 투수 코치가 올라왔다. 그는 올라오자마자 다짜고짜 투수에게 심호흡부터 시켰다. 그리고 나무라듯 말했다. “자신감을 가지라니까. 두들겨 맞으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라니까. 볼을 던지지 말고 스트라이크존 가운데로 던지라고……” 그리고 어깨를 툭툭 치고 내려갔다. 그러나 다음 타석 때 도루에 이어 폭투가 나오면서 또다시 실점 위기에 몰렸고, 타자가 안타를 치면서 3점째를 내줬다.
    또다시 폭투가 나오면서 1사 2루가 된 상황에서 성민경은 다음 타자를 3:2 풀 카운트에서 9구만에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미 예정했던 투구 수를 초과한 상태였다.
    그는 어깨를 내리 누르는 피곤을 느꼈다. 이때 투수코치가 구심에게서 새 공을 받아 쥐고 다시 마운드로 올라왔다. 이는 투수교체를 의미했다. 실망한 기색을 감추려고 애쓰고 있었다. 후속 투수가 안타를 맞으면서 성민경의 실점은 4점으로 늘었다. 경기는 9대 1로 졌다.
    그는 멀리 우뚝 서 있는 경기장 조명탑을 새삼스럽게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벤치를 향해 천천히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두리번거렸고 은근히 감독과 코치들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거세어진 바람이 운동장을 휩쓸고 지나간다. 근 1년 만에 돌아온 벤치가 반갑다기보다는 매우 낯설었다.
    이날 성민경의 최종 성적은 2와 3분의 2이닝 동안 4실점이었다. 투구 수는 65개 (스트라이크 35개, 볼 30개)를 기록했고, 직구 최고 구속은 139킬로미터를 찍었다. 그러나 관중에게 기록은 의미가 없었다. 팬들은 마운드에서 내려오는 성민경을 위해 박수를 보냈다. 성민경도 모자를 벗어 답례했다.
    이날 성민경은 타자들을 상대하면서 몇 명에게만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았는데 처음에는 스트라이크를 던지는데 애를 먹었다. 변화구가 제구가 안 되면서 직구로 승부를 했지만 구위는 아직 덜 올라온 상태였다. 안타 전부가 밋밋한 직구를 던지다 내준 것이었다.
    팀의 전력분석 코치는 어느 야구 전문 기자에게, 변화구의 각도와 스피드는 그럭저럭 괜찮은데 스트라이크존에서 터무니없이 너무 크게 빠지는 공이 많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앞으로 변화구 제구가 관건이라고, 특히 예전의 날카로운 커브와 슬라이더의 위력을 되찾는 것이 재기의 관건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경기 후 성민경은 마냥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1년여 만에 마운드에 서니까 너무 감격스러웠습니다. 투구 내용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점점 좋아지겠지요……. 조급한 마음에 마운드에서 다소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밸런스가 깨지고 집중력이 떨어지면서 스트라이크를 잡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요. 빠른 시일 내에 투구 수를 100개까지 늘리는 게 목표입니다.”

    제구력과 스피드를 모두 타고난 투수는 거의 없다. 투수가 빠른 공을 가지고 있으면 빠른 공과 밸런스를 맞추는 제구력이 부족하게 된다. 이처럼 뛰어난 제구력과 타자를 압도하는 스피드를 다 갖춘 투수는 드물다. 프로야구 역사에서 제구력과 빠른 공을 모두 보유한 투수가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국보급 투수로 회자되거나 메이저리그로 진즉 진출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선동열, 최동원, 박찬호, 류현진, 오승환 선수처럼 말이다.
    성민경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빼어난 스피드를 자랑했고 프로 야구 초기 시절에도 그의 스피드는 국내에서는 수준급이었지만 점점 스피드는 줄었다. 그는 스피드 대신 정확한 제구력을 연마했다. 그는 원하는 곳에 구석구석 공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한 것이다.
    그때 감독으로 올라갈 가망이 전혀 없는 늙은 투수 코치가 말했던 것이다. “공부 안 하고 시험을 잘 볼 수 없어. 제구를 잡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3배, 4배 이상 많이 던져야 한다. 그런 노력이 필요하단 말이다. 요즘 투수들이 제구가 안 좋은 건 그만큼 안 던지기 때문이야.”
    그는 자발적인 훈련을 강조하며 노력하지 않는 자세를 질타했다. 피나는 노력 없이는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강조했다.
    “제구를 잡기 위해서는 수많은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데 요즘 투수들은 힘든 걸 안 하려고 한다. 프로가 왜 프로인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야구 선수에게는 인간이 먼저 되는 게 첫 번째 덕목이겠지. 누구나 그걸 강조하지. 그걸 누가 모르겠어? 그러나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된다고.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자세가 더 필요하단 말이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꽝이 되는 거라고.”
    그런데 왼손잡이가 더 대우받는 분야가 있다. 야구 선수의 경우이다. 야구는 다른 종목에 비해서 왼손잡이가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왼손 강속구 투수는 지옥에서라도 데려오라는 야구 속담이 있는 것이다. 모든 팀은 왼손 투수에 대해서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같은 강속구를 던져도 오른손 투수보다 왼손 투수가 훨씬 유리하다. 이는 좌우 타자를 가리지 않는다. 좌완 투수가 던지는 공은 우타자의 몸 쪽으로 각도 상 더 파고드니까 더 빠르게 느껴진다.
    일류 투수들의 폼은 제각기 개성이 강하지만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다. 공이 나오는 지점을 알아채기 어려운 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릴리스 직전까지 공을 감췄다가 느닷없이 공이 나오는 느낌을 준다. 우연히 그렇게 하는 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공을 감춘다. 투수는 가능한 공을 오래 숨겨야 한다. 우타자를 상대하는 좌완 투수는 자연스럽게 릴리스 직전까지 공을 숨길 수 있다. 왼팔의 스윙과 몸통과 머리에 가려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수가 아무리 위력적인 직구와 다양한 구종을 갖추고 있어도 그것만으로 이길 수는 없다. 타자와 타이밍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게 컨트롤이다. 아무리 강속구 투수라고 하더라도 제구가 안 돼 실투가 나오면 얻어맞게 되어있다.
    야구에는 구속 이외에 수많은 변수가 있다. 스트라이크존 구석을 찌를 수 있는 제구력과 완급 조절로 타이밍을 뺏을 수 있는 변화구 구사 능력이 스피드 이상으로 중요하다. 아무리 강속구라도 비슷한 코스로 계속 오면 타자가 때려낼 가능성이 크다. 오히려 제대로 맞게 되면 반발력 때문에 큰 타구가 나오게 된다.
    왼손잡이인 성민경은 공이 점점 느려졌다. 그래서 제구력과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완급 조절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는 타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코스인 무릎 근처로 공을 던져 스트라이크를 잡아내는 능력을 연마했다. 여기에 직구와 변화구의 구속 차이로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투구 능력도 어느 정도 갖추게 되었다. 140킬로미터 정도인 평범한 직구에 비해 체인지업과 슬라이더는 더 느리고, 심지어 커브볼은 타자의 방망이가 다 돌아간 이후에는 공이 홈플레이트를 통과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상대 타자는 타이밍을 못 맞춰 땅볼을 치기 일쑤였던 것이다.

    오늘은 창문이 없는 방이 배정되었다. 사방이 퇴색한 회색 벽인 방이다. 접견실의 천장 형광등은 오래돼서 짙은 젖빛 색깔이었다. 변호사는 의자에 앉으면서 좀 더 편안한 자세를 취하려고 몸무게를 이리저리 이동하였다. 한쪽 벽 위에 붙은 환풍구에서 담배 냄새라도 올라오는 것처럼 코를 벌름거린다. 복사한 기록은 한편으로 치워 놓은 채 실눈을 뜨고 여전히 야구 이야기를 꺼냈다.
    “피나는 두뇌 싸움을 한다고 했는데…… 오늘은 슬럼프에 대해 이야기 해보지. 모든 게 슬럼프 때문에 발단이 된 게 아닌가? 그러니까 슬럼프를 이기려고 그 빌어먹을 약을 먹었던 게지.
    그리고 재수 없게도 도핑검사에서 걸려 출장정지를 당했고…… 정말 재수 없었지…… 그냥 속아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그 기간 중에 도박을 했고, 도박 빚 때문에 승부조작까지 하게 된 것이 아닌가?
    가장 좋은 약은 인내라고 했네만……
    약물, 도박, 승부조작은 악마였지……”
    “그렇게 되었지요. 슬럼프 말인데요…… 처음엔 잘 몰랐어요. 내가 어느 순간부터 야구를 즐기지 못하게 됐다는 걸…… 그땐 야구에 전념했고 어떻게 해서든지 완벽하게 내 몸을 관리해야만 했거든요. 건강관리를 위해서 스케줄을 얼마나 지독하게 짰는지 몰라요.
    몸에 좋다는 보약도 끊임없이 먹고 뱀탕께나 마셨지요.
    지금은 컨디션이 괜찮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슬럼프가 올 것이라는 걸 생각해서 거기에 맞춘 것이지요. 이미 슬럼프를 겪은 동료 선수들의 경우를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도……?”
    “내 몸을 엄격하게 통제했어요. 그야말로 가장 완벽한 틀 안에 나를 옭아맨 거죠. 그게 감독님의 지시 사항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어느 종목이건 운동선수가 아무리 자신을 관리해도 슬럼프는 오거든요. 아무런 상관없이 와요. 처음에는 왜 오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지요. 이렇게 철저하게 자신을 관리하는데 말이지요.
    그러나 그게 아니에요. 제가 좀 민감한 편이거든요. 잦은 이동으로 불규칙한 생활을 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밤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남몰래 수면제를 먹기도 해요.
    그럴 때 온몸이 멍들고 피로가 겹치면 야구가 지독히 싫어질 때가 있어요. 그때는 무조건 쉬어야 되는데…… 팀 사정상…… 감독님 눈치도 봐야하고…… 아프면 아프다, 힘들면 힘들다, 인정하고 그걸 솔직하게 털어 놓아야 슬럼프가 오질 않는 겁니다.
    웬만한 부상은 혼자 진통제를 먹으면서 숨겨야 했습니다. 출전 명단에서 제외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자신을 통제 하다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 최면을 걸게 된답니다. ‘지금 괜찮다니까! 참으라고! 참아야 된다고!’ ‘정말 잘 하고 있다니까!’ 이렇게 자신에게 속삭이는 거죠.
    결국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몇 번이고 속이면서 학대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반드시 무너지는 거죠. 운동장이 지옥처럼 느껴져요. 공에 손을 대기 싫어지죠.”
    “그러니까…… 그렇게 노력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찾아온 느닷없는 슬럼프가 주저앉혔다는 거네. 평균 자책점이 어느새 5점대 이상으로 올라갔군. 야구 천재라고 칭송하던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기 시작했겠지.”
    “동네 야구선수라든가, 아마추어 선수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왔지요. 술만 마시고 연습을 게을리 한다는 소문도 돌았구요. 저는 그때 야구장에 서 있는 것 자체가 싫을 정도로 힘들었는데…… 그러나 감독은 팀이 연패에 빠지니까 눈치도 없이 자꾸 내보냈지요.”
    “정말…… 그랬었나?”
    “정말 실컷 놀았으면 억울하지도 않았어요. 누구보다 기를 쓰고 있는데. 매일 술집에서 새벽까지 술을 먹었네, 도대체 연습을 안 한다고 하니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다들 그런 식으로 입방아를 찧는 걸까, 싶었습니다.
    팬클럽 사람들이 한 술 더 뜨는 거예요.
    그러나 냉가슴을 앓았지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괜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겁니다.
    그거 아세요? 제가 출전 정지를 당하니까 그때 비로소 푹 쉬게 되었다니까요. 그때에야 비로소 내 곁에서 끊임없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몇몇 사람들이 보이더라고요. 난생처음 푹 쉬면서 낚시도 가보고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서 실컷 이야기하고 그랬어요. 그 전에는 어디 여행을 가본 적도 없었고 속마음을 주위 사람에게 말해본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여행을 다니긴 했어? 마카오 쪽 말고……”
    “마음만 먹었지요. 국내는 어딜 가든 다들 제 얼굴을 아니까 사람들 만나는 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거길 갔었지요.”
    “왜? 그랬어?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데……”
    변호사가 그를 나무라듯 부드럽게 말했다.
    “좀 더 진즉 그런 걸 알았더라면…… 그런 걸 깨칠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요. 그런 건 다 낭비라고 생각하고 죽도록 훈련하고 운동만 했던 거죠.
    그러다가 출장 정지를 당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거예요. 내가 나 자신을 더 아껴주지 못해서, 주위를 더 돌아보고 쉬어갈 줄 몰라서 그런 시간을 겪고 있다는 걸요.
    힘들면 울고, 즐거우면 웃어야 하는데 그동안 나는 그런 것에 초연한 사람인 척 살아왔어요. 남들보다 강하다고 믿었어요.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나도 약하다는 걸, 나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걸, 나도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걸 알았어요. 그걸 알고 나니 편해졌어요. 그때부터 비로소……”
    “구속되고 나니까 기분이 어땠어? 유명한 선수가 구속되니까 매스컴에서 상당히 씹었겠지. 자존심이 상했겠네.”
    “뭘…… 그렇지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자들도 등을 돌리더라구요. 더 난리를 쳤지요.”
    “그런 게 세상 인심이라네. 어쩌겠어? 기자들이란 게 머릿속에는 쥐뿔도 들어있는 게 없으면서 입만 살아있는 자들이야. 평생 남을 씹는 직업이라네.”
    “어쩌면 내 인생은 지금부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젊거든요. 그동안 산등성이에 서있는 소나무처럼 홀로 지냈다면 이젠 여러 그루의 나무들과 함께 지내야 되는 시기가 온 거겠지요.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하지만…… 이제부터 야구를 잊어버려야죠. 무슨 일을 하던 인생의 밑바닥부터 새로 출발할 거예요.”
    “스타가 밑바닥부터 출발하는 게 쉽지는 않을 거야. 마음을 완전히 비워야 하니까. 내 아들 말이야…… 좋은 대학을 나오고 고시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수없이 떨어졌다네. 결국 폐인처럼 되었지. 지금 어디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 없어……. 그러니까 인생의 밑바닥을 기고 있겠지.”
    “아버지이신데 아들을 잘 좀……”
    “인생은 가는 대로 가는 거라네. 자기 인생이야. 다 자란 자식한테 아버지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네.
    그걸 알게나. 인생도 슬럼프가 수없이 많다네. 슬럼프의 연속이지. 나를 돌아보면 오히려 슬럼프 기간이 훨씬 더 길었지. 행복했던 시절이 도대체 기억나지 않는다네. 여자들의 갱년기는 생리적 슬럼프이고. 늙으면 죽을 때까지 슬럼프이지. 슬럼프란 결국 고통이고 불안이고 강박 아니겠나? 그보다는 울화라고 해야겠군?”
    “그럴까요?”
    창살이 박힌 먼지 낀 창문으로 들어오던 겨울 늦은 오후의 일광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마 저물어가고 있던 황혼의 마지막 빛줄기였을 것이다. 멀리 교도소 밖 간선도로에서 자동차의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겨울 해가 짧군.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며칠 후 다시 오겠네. 나이가 들수록 겨울은 정말 지긋지긋하지. 차가워진 날씨와 함께 세월의 스산함을 느낀다네.
    요즈음은 척추협착증 때문에 오래 앉아있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네.”

    성민경은 프로 야구 데뷔 후 5년 차부터, 그러니까 처음 팀에서 별 볼일 없는 중간계투 선수로 몇 년을 보낸 후 트레이드가 된 다음 해부터 투수로서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다. 그때부터 팀의 주전 투수가 되었고 덩달아 몸값도 뛰고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몇 년 후 그는 공이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했고 방어율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따라서 이기는 경기보다 패전하는 경기가 더 많아졌다. 이제는 2군으로 내려가야 할 정도였다.
    갑작스럽게 공이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밋밋한 공은 어김없이 얻어맞았다. 그래서 그 즈음엔 내 실력이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자신을 심하게 자책하게 되었다.
    야구에서 슬럼프의 기준은 딱히 없지만, 그래도 타자의 경우 지난 시즌 대비 타율이 현저히 떨어졌거나 투수의 경우 평균 방어율이 현저히 상승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스타급 최고의 선수라 해서 슬럼프를 겪지 않거나 또는 덜 겪거나 무명 선수라고 해서 슬럼프를 더 자주 겪는 것은 아니다. 성적이 뛰어난 선수가 슬럼프를 안 겪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각이다. 어느 스포츠이건 선수는 오랜 선수 생활 중에 슬럼프를 경험한다. 슬럼프는 신체적 이상과 함께 오기도 한다. 오히려 가장 흔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수가 까닭 모르게 슬럼프를 겪을 때 느끼는 스트레스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는 봄 동안 허리 통증을 겪었던 그 해에 극심한 슬럼프로 선수 생활에 빨간불이 켜졌다. 꾸준히 양방과 한방 치료를 받았지만 5.16까지 치솟은 방어율이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리 통증이 가셨는데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한번 무너진 투구 폼이 도대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슬럼프를 피하려고 하는 것보다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 선수들은 현실을 직시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바닥을 찍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을 때 그때부터 회복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존심이 강한 선수들은 자신이 슬럼프에 빠져서 바닥으로 떨어진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데?) 그러면 슬럼프는 헤어날 길 없이 길어진다.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은 코치를 따로 찾아가 조언을 받고 투구법을 교정하는 등 적극적으로 변화를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걸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새 스스로 스타 선수라고 뻐기는 그릇된 자부심이 그를 좀먹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2군에라도 떨어진다면 더욱 자신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나는 2군 선수다. 2군이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거다. 이곳이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이다. 그렇게 인정을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없다. 좋아졌다가 나빠지기를 반복한다. 슬럼프는 인생의 동반자인 고독과 불안처럼 늘 함께한다. 중요한 건 슬럼프에 안 빠지는 게 아니라 가끔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인 그 슬럼프에서 가능한 한 빨리 탈출하는 것이다.
    그러면 슬럼프 극복 후 성적이 올라갈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 긍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심리적 변화는 다음에 다시 오는 슬럼프에 대한 완충장치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그냥 자신의 자리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해마다 시즌을 시작하면서 그가 그리는 목표 안에 갈 수 있게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그만큼 안 되면 남몰래 씩씩거리며 혼자서 연습하기로 작정하였다. 야구는 선수의 성적 관련 통계가 너무나 철저하다. 어떻게 하여 그 통계 숫자를 속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투수로서의 성적을 그래프로 그려보면 밑에서 위로 올라갔다가, 위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기복이 심했던 것이다. 그는 성적이 위에서 떨어지는 게 너무 싫었다. 한 해는 잘했다가 다음 해는 떨어졌다가 다시 한 해는 잘했다. 그렇게 되는 게 싫었다. 그 자신이 마음속에 목표로 정한 (투수에게 가장 중요한 지표인) 방어율이 일정한 기준에 도달하면 그때부터는 기복 없이 쭉 가고 싶었다. 물론 좀 무리하면 어느 정도 더 치고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까? 그렇게 되면 떨어지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떨어지는 것을 최대한 짧게 가자 그렇게 각오를 다짐했던 것이다.
    이제부터 부상을 당하거나 아프지 않으려고 철저히 준비를 잘하자. 웨이트 트레이닝을 열심히 하고 투구폼을 흐트러지지 않게 유지하자. 더 아프기 전에 빨리 알아서 치료하자. 또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자. 회식을 할 때도 끝까지 갈 분위기만 풍기고 그러나 끝까지 가지는 않아야 한다. (아니 그렇게 몇 번이고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그 결심은 너무 쉽게 무너졌고 자주 반복적으로 슬럼프를 겪었고, 그래서 악마의 유혹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를 잃어 버렸다. 딱히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찾아오고 온갖 걱정에 휩싸였다. 실수하면 어쩌지? 만약 이렇게 되면? 저렇게 되면? 어느 순간 갑자기 공을 스트라이크존 안으로 던지지 못하게 된다면?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 두려움이 더 큰 두려움을 낳고 있었다. 고통이 점점 커져서 나를 삼켜버리고 있는 거야. 도무지 버텨낼 수가 없어. 이제 그만. 야구는 그만이야. 야구는 그만이라고. 나이 탓인가? 체력이 고갈된 것인가? 벌써? 회복은 불가능할 것인가? 이러다가 2군으로 내려갈 것인가? 방출될 것인가? 병원에? 술을 마실까? 약을? 약효가 강한 것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주절거리는 게 제일 좋은 거야. 다시 말하면 수다를 떨고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늘어놓는 거야. 무언가 바늘 같은 것이 내장 안을 찌르는 것 같다. 그는 배가 아팠고 머리가 어지러웠으며 팔다리의 통증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자주 오줌을 누고 싶고 구토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구토가 나올 것 같았지만 요란한 헛구역질만 나오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는 수많은 관중들의 시선이 집중된 운동장에 가서 마운드에 오를 수 없을 거야? 그러나 내 상처를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까? 어디에서 도움을 구한단 말인가? 그러나 도와달라고 말하기가 부끄럽지 않을까? 안 된다. 비밀로 꽁꽁 감추어야 한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지.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면 절대로 안 돼. 초조해서도 안 되지. 함정에 빠져서도 안 돼. 후배들 앞에서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팀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 자존심이라고, 자존심, 자존심 문제란 말이지. 나는 스타야, 스타라고. 경기를 하려면, 승리를 거머쥐려면 기가 살아야 한다.
    그는 그때 너무 혼란스러웠다.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갈피를 못 잡았다. 그는 예리한 칼로 몸을 찔러서 긋기 시작했다. 고통이란게 어떤 것인지 느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흐르는 검붉은 피를 보며 흥분 또는 공포를 느끼기 위해서였다.

    “지금부터 야구단 단장인지…… 사장인지…… 그리고 막강하다는 프론트에 관해 이야기해보게. 그들의 역할이 무엇이지? 일요일 판 신문에서 그에 관해서 특집기사를 읽은 적 있었거든.”
    “그건 감독의 역할과도 겹치는 데요…… 숨은 선수를 찾아내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값에 영입해 키우고 성과를 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값비싼 선수를 데려와서 한다면 누가 못하겠어요?
    선수를 고를 때 야구에 대한 기본 실력은 물론이고, 야구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를 중시해야 합니다. 어떤 선수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동료 선수들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태도를 살펴보고, 평소에 어떻게 생활하는지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선수가 아닌 인간을 스카우트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그 수많은 선수들 중에는 본받을 만한 훌륭한 선수가 있었을 것 아닌가?”
    “저는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최고의 타자도 타율이 3할 대를 넘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열에 일곱은 실패한다는 말이지요. 야구는 실패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지요.”
    “선수 중에는 거만한 선수가…… 그러니까 저만 잘난 척 하는 선수도 없지 않을 텐데?”
    “저는 잘난 척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건 믿어주세요. 팀의 균형을 깨는 선수는 스타 플레이어라도 언제든지 내보내야 합니다. 몇몇 스타를 통한 경기 운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도록 팀 자체를 단합시키는 것이 중요하지요.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입니다. 통계적으로, 수학적으로 분석해 선수의 재능을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축적된 자료를 가지고 선수의 기량을 끌어올리거나 부상을 방지하는데 활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말입니다…… 선수의 성적이 극도로 부진할 경우와 가장 좋았던 경우를 엄밀하게 비교해서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모든 스포츠는 멘탈 게임이 아닌가? 특히 야구가 심하지. 그래서 야구에는 징크스도 많던데?”
    “정말 그렇습니다. 스포츠는 인간이 하는 멘탈 게임이기 때문에 징크스나 저주가 많은 것이겠지요. 그걸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깨지지 않는 징크스는 없겠지요.”
    “언젠가 감독을 해보시지. 잘할 것 같은데……”
    “감독 한 번 하는 게 꿈이었지요. 감독이 아무리 파리 목숨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지요. 끝났다니까요. 끝났…… 영구 제명이 된 거라고요.”
    “내가 눈치 없이 말을 잘못 꺼냈구만.”
    “일장춘몽이 되어버렸네요.”
    “인간이 꾸는 꿈은 모두 개꿈이라네.”
    “글쎄 말입니다.”
    “그래도 말이지…… 그 사정을 알고 싶었다네. 어떤 감독과는 불화설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감독은 그 후 성적 부진으로 쫓겨났지만…… 헛소문이었던가, 아니면 실제 그랬었던가?”
    “그 감독과는 애증의 관계였죠. 심정적으로는 서로 맞지 않았어요. 어쩐지…… 너무 심하게 엄격했어요. 그래서 저는 쓸데없이 반항하고 싶었던 거지요. 한 번은 찾아가서 노골적으로 트레이드를 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마구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싸늘한 눈으로 쳐다보더군요.
    그렇지만 언론은 과장을 너무 좋아하니까 터무니없는 소설을 썼지요.”
    “그래도 한 팀에 있으면서 그러면 괴로운 일일 텐데.”
    “매우 엄격하게 통제했습니다.”
    “그건, 대부분 감독이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렇지만…… 분명히…… 그 감독은 까탈스러웠지요. 너무 지독했어요.”
    “뭐가 있었지?”
    “제가 지금부터 감독을 까발려야 하겠군요. 진실을 말하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죠.
    그 감독은 규율을 무척 강조했습니다. 운동장 밖에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등 생활이 흐트러지면 운동장 안에서도 플레이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엄격하게 통제한 것입니다.
    그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수들을 혹사했습니다. 너무 심했지요. 그것도 팀 성적을 올려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그랬단 말입니다. 감독은 선수에게 맞춰서 가르쳐줘야 하는데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고 자기 것만 가르치니까 오히려 선수에게는 독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선수들이 아프다고 하는 것을 싫어했어요. 꾀병으로 간주하고 더 다그쳤습니다. 실제 아프면 무조건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밖에서 아는 것하고는 영 딴 판이구만.”
    “그렇겠지요. 밖에서 어떻게 그런 내막을 알 수 있었겠어요?
    자기가 유명한 투수 출신이거든요. 그래서인지 자신이 제일이라고 자부심이 대단했지요. 한마디로 오만했던 것입니다. 그랬으니 구단 운영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했고…… 프런트와는 끊임없이 충돌했지요.”
    “세상 어디에나 자기중심적이고 과대망상적인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 난 훌륭한 선수가 훌륭한 감독이 되라는 법은 없는 걸세. 어떤 종목도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자네는 어떤 스타일의 감독을 생각하고 있었나?”
    “저는 야구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출전 정지가 되니까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지요. 그래서 선수 생활이 끝나더라도 야구를 떠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단계적으로 계속 올라가서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감독은 선수들을 공평하게 대하려고 해야지, 똑같이 대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면 모든 선수가 성격과 특성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지요. 좀 더 혹독하게 훈련을 시켜야 그제서야 움직이는 선수가 있고 칭찬을 하고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지도해야 통하는 스타일이 있지요. 선수들에게 다른 방식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감독은 선수들과 정말 대화를 많이 나누어야 하지요. 그때는 친형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야구장에 나오는 게 즐거워야 하지 않겠어요? 연습하고 경기하는 게 가슴 설레이도록 기다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감독은 선수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비록 지독하게 통제를 해도 말입니다. 실제 선수들 간에 사이가 항상 가깝고 좋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30여명의 코칭 스텝과 100여 명의 선수가 다 제각각 개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하지만 함께 팀으로 나서면 코치나 선수들 모두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좋은 감독이라면 이렇게 상호간 존중과 배려를 이끌어내야 하지요.”
    “감독에게는 그런 탁월한 리더십이 필요하겠군.”
    “그런데 감독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지요. 미국식 프런트가 등장하면서 실제 권한은 프런트가 쥐고 있어요. 그러니까 감독은 프런트로부터 견제를 받고, 그리고 요즘 너무나 야구 상식이 풍부한 열성 팬들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고 있지요.
    팀 성적이 나쁘면 괜스레 감독을 타깃으로 해서 분풀이를 하는 거죠. 팀이 연패에 빠지기라도 하면 그 감독은 온라인에서 거의 뭇매를 맞는 거지요.
    이때 프런트의 책임은 쏙 빠져버리지요. 밖에서는 프런트와 감독 간 알력이나 대립은 알 턱이 없는 거지요.
    그래서 감독 연봉의 절반은 욕먹는 값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뭐더라…… 그렇지 않은가…… 넥센이라고 있지? 그 팀 감독이…… 누구였는데?”
    “염 감독님 말씀인가요?”
    “그렇지. 이제 기억이 나는 군.”
    “훌륭한 감독님이죠. 맨날 꼴찌 팀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리지 않았습니까.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아버지가 훌륭한 변호사였거든. 훌륭한 아버지가 훌륭한 아들을 만드는 거지. 나는 그렇지 않네만……”
    “왜 그 감독님을?”
    “갑자기 생각이 났다네. 그 친구 선수시절은 별로였던 모양이야. 선수 생명이 짧았어. 그러고 나서 닥치는 대로 프로팀의 운영팀장도 하고 작전코치와 주루코치, 수비코치도 했던 모양이야.
    그러면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생겼다는 거야. 그리고 야구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하는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거지.
    내가 무슨 신문에 난 인터뷰 기사를 감명 깊게 읽었다네.”
    “저에게도 진정한 꿈이 있었지요. 버려진 이름 없는 선수들을 데려다가 훌륭하게 키워내는 것이죠. 그들의 꿈을 이루게 해주고 싶었지요. 모두 함께 노력해서 꿈을 이룬단 말입니다.
    ……그때 약물 파동으로 징계를 당하고 돌아왔을 때 감독님의 따뜻한 격려가 잊혀지지 않는 군요. 저도 그런 감독이 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
    “……”
    변호사가 멍한 눈으로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날따라 작은 창으로 보이는 풍경이 낯설어 보였다. 하늘은 금세 눈이라도 내릴 것처럼 회색 구름으로 덮여있다. 손목시계를 본다. 그리고 낡은 접이식 서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난 야구 이야기가 재미있으니까 자주 올 수 있다네. 택시가 올 시간이지. 자네한테는 미안하지만…… 오늘 밤에는 이놈의 날씨 때문에 술에 취하고 싶다네.
    나는 알코올 의존증이지. 아직 중독까지는 안 갔을 거야. 내 좁은 사무실에는 값싼 양주병이 여러 개 있지. 독한 술이 좋은 거야. 이유 없이 홀짝 거린다네.
    그러니까 울적한 기분이 들면…… 술잔을 들고 길게 목구멍 속으로 털어 넣는 거지. 그러면 머리끝까지 곤두서는 싸늘한 기분이 든다네.
    지금 당장은 밖에 나가서 담배를 빨고 싶지.”

    테스토스테론은 남자를 남자답게 만드는 호르몬이다. 울퉁불퉁한 근육, 거뭇거뭇한 수염을 만든다. 1935년부터 테스토스테론 유사체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가 다량으로 만들어졌다. 혈압, 신장, 당뇨 치료제로 쓰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의료용이었지만 멀쩡한 사람이 이 주사를 맞으면 근육이 늘어나고 힘이 강해졌다. 그래서 스테로이드가 선수들 사이에 마법의 주사로 은밀하게 돌기 시작한 것이다.
    몇 주간 스테로이드를 주사로 맞거나 약으로 먹으면 근육이 증가하고 힘이 늘어난다.
    최근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도핑약은 두뇌 도핑에 사용되는 도파민과 노니페린으로 두뇌 호르몬이다. 이 주사 한 방이면 근육은 탄탄해지고 손발은 민첩해진다. 그리고 혈액 도핑은 근육에 산소를 더 공급하게 한다. 산소가 더 많아지면 더 빨리, 더 강하게 움직일 수 있다. 수혈로 산소 운반 적혈구를 늘린다. 타인이나 자기 피를 몇 주 전에 뽑아 놨다가 시합 바로 전날 맞는다.
    그러나 심근경색, 뇌졸중, 간종양, 무월경이라는 부작용이 있다. 애너볼릭 스테로이드는 근육을 빠르게 생성하고 골밀도를 늘리는 데 최적화된 약물이다. 자율신경계와 손, 발 등을 비대화시키고 생식기를 이상하게 변하게 한다. 어깨와 등에 여드름 증세, 탈모, 고환이 축소되면서 정자수가 급격히 떨어지는 심각한 약물 후유증을 겪는다. 애너볼릭 스테로이드는 신체 모든 세포에 침투해 원래 체내에 유지되던 각종 호르몬과 세포 균형을 전부 깨기 때문에 중독이 되면 뇌뿐만 아니라 간, 콩팥, 전립샘 등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이 약물은 단백질 합성을 촉진해 근육을 빨리 만들어주기 때문에 효과가 탁월한 만큼 부작용의 범위가 큰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밝혀지지 않은 부작용도 많다.
    도핑검사는 소변, 혈액 속의 흔적 물질을 찾는다.
    방해 도핑은 도핑 약물이 검출되지 않도록 방해 물질을 주사하는 것이다. 교묘하게 도핑을 감추겠다는 것이다. 이뇨제로 소변량을 늘리고 수혈 보조제로 혈액 수분을 늘린다. 소변, 혈액이 희석되면서 도핑 약물 검출이 어려워진다. 숨기려는 도핑과 찾으려는 반도핑이 숨 가쁘게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환각 성분이 포함되어 있는데다가 중독성이 강한 그 약을 멀리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아침에 잠이 깨면 다시 약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단증세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는 50경기를 뛰지 못한다. 사실상 시즌 아웃이 되었다. 한국야구위원회는 구단에도 제재금 1억 원을 물렸다. 한국야구위원회가 주관했던 도핑 테스트에서 금지 약물에 양성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동화작용이 있는 남성 호르몬 스테로이드 계열 약은 세계반도핑기구가 지정한 제1종 상시 금지 약물에 속한다.
    한국야구위원회는 등록 선수 중 구단별로 5명씩 총 50명의 선수를 대상으로 표적 검사를 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도핑컨트롤센터의 분석 결과 그를 제외한 49명은 음성 판정을 받았다.

    “지금은 사정이 이렇게 변했네만…… 운동장에서 수많은 관중들의 함성을 들으며 포효하던 때가 엊그제 같을 텐데 정말 답답하지. 그런데 그때 은퇴를 생각하지 않았나? 팀 동료나 후배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랬더라면 차라리 잘 됐을 텐데…… 너무 때늦은 후회가 되겠지?”
    “그때는 아직 물러갈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창피하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말입니다. 지금 당장 유니폼을 벗기엔 너무 아쉬운 게 많았습니다.
    언젠가 야구를 그만둘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한창일 때 그 좋았던 공이 왜 안 나오는지 확인해보고 싶었지요. 선수는 운동장에서 제일 행복한 거라고요.
    그러나, 아시다시피, 일이 계속적으로 꼬이기 시작했었지 않습니까? 훈련을 정말 성실하게 했는데 직구 속도가 현저히 줄어들고 투구 폼도 알게 모르게 흐트러졌지요. 그러니까 약물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그렇게 된 것이지요.”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오랫동안 그렇게 야구를 했는데 말이지, 어떻게 폼이 흐트러진단 말인가? 그 폼은 빳빳하게 굳어 있을 거 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슬럼프가 찾아오면 그렇게 된답니다. 인간의 동작은 기계가 아니거든요.
    한 번 투구 폼이 망가지면 정말 말썽이지요. 그건 타자들도 마찬가지에요. 나쁜 폼을 가지고 하면 아무리 연습을 해도 더 나빠져요. 그런데 마음이 급하니까 이것저것 폼을 바꾸면 더 나빠져요. 자기한테 맞는 것으로 쭉 나가야만 하는데.”
    “만약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없었다고 하고…… 그러니까 나이가 들면 후배들의 눈초리가 따갑지 않을까? 거 왜 있지 않은가? 유명한 탤런트나 한창 잘나가던 가수들도 때가 있는 법이고, 언젠가는 한물가고 뒤로 밀리니까 말이야.”
    “누구나 나이가 들어가면 경기력이 조금씩 쳐지니까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후배들이 불편하다고 해서 내가 나갈 입장은 아니지요. 후배들은 오직 실력으로 선배를 밀어내야만 하지요.
    후배들은 이걸 알아야 해요. 선배들이 오래 있어줘야 자신들도 오래 있을 수 있는 거다.
    선배가 그런 식으로 빨리 나가면 그 후배들도 언젠가 똑같이 밀려나가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선배들이 굳건히 버티는 것을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해요.”
    “야구 선수 중에 친한 친구가 있는가? 또는 야구선수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우리는 고등학교시절 야구 때문에 행복했지요. 저에 대해 나쁜 소식이 돌면 그 친구가 바로 연락했어요. 고등학교 때부터 저는 투수이고 그는 포수였거든요. 우리는 그때 맨날 붙어살면서 친형제보다 가깝게 지냈어요.
    그러나 머리가 좋아서인지 학교 졸업하고 삼수를 해서 명문 대학으로 진학했어요. 그는 나중에 은행원이 되었어요.
    저는 바로 프로팀의 연습생으로 갔구요. 체육 특기생으로 오라는 대학은 몇 군데 있었습니다. 대학 가봤자 어차피 공부는 안할 텐데 무슨 소용이 있었겠어요? 그리고 할머니만 계시니까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는 나쁜 소식이 들리면 사실이냐고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하지만 저는 냉정하게 네가 뭘 안다고, 겨우 은행원이나 하는 주제에,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라고, 쏘아 붙였습니다.
    그와는 결국 인연이 완전히 끊어졌지요. 그의 마지막 잔소리가…… 잔소리가 아니라 훌륭한 충고였는데……
    ‘야구는 핀치에 몰리면 대타나 구원이 있는데 인생엔 그런 게 없다.’고 하더군요.”
    “인생에 대타나 구원이 없다는 말이지? 인생은 쓸데없이 길다네.”
    “그런데…… 변호사님의 경우는 어때요?”
    “난들 별 수 있나. 보시다시피 내 나이가 꽤 되었지. 대머리에다 몇 가닥 남은 흰머리 보게.”
    “저도 알고 있어요. 옛날에 판검사 하면서 떵떵거렸을 거고 변호사해서 돈도 많이 벌었을 거 아녜요?”
    “내가 떵떵거렸다고…… 겨우 말석으로 합격해서 시골에서 바로 개업을 했다네. 사실대로 말하면…… 젊었을 때니까 떵떵거리고 싶었었지. 하지만 아버지가 옛날에 부역을 해서 임관될 수 없었지.
    그리고 장사가 잘 안 되니까 여기저기 옮겨 다녔어. 오죽하면 이 나이에 국선을 하고 있겠나. 이게 내 밥줄이라네.”
    “설마……”
    “가끔 울고 싶어질텐데. 안 그런가?”
    “벌써 그랬지요. 지금은 무덤덤합니다. 시간이 약이지요.
    정말 많이 울었던 때가 있었긴 합니다. 출전 정지가 풀리면서 처음 나간 재기전을 잊을 수가 없지요. 데뷔 전이나 트레이드 되고 난 후 첫 출전 때보다 더 그랬어요. 엄청 긴장했거든요. 그래서 투구 내용이 안 좋았어요.
    그날 경기가 끝나고 나서 남자 화장실은 북적거리니까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서 혼자 엉엉 울었어요. 왜 그랬는지 모르지요. 그렇게 눈물이 많이 흐르더라고요.”
    “다시 생각해보면…… 그 도박 말일세…… 자네는 돈에 대한 욕심이나 무슨 비틀어진 속물근성 때문이 아니라…… 그때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으니까 손을 댔는데…… 그만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는 생각이 드는 군.”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물은 약물이고. 도박만 안 했어도 제 운명은 달라졌겠지요.”
    “그놈들은 꽤 잘 짜여진 관료주의적인 조직체였어. 그 브로커 역시 중간 두목급에 불과한 거야. 그들이 자네를 상대로 게임을 벌였단 말이지. 그 게임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었네. 결국 그 게임에서 졸 역할을 한 거야.”
    “그 졸이라는 게 다름 아니라 미끼였단 말이군요. 어리석게도 미끼였다구요.”
    “인간들이 기대하는 최선이란 게 바로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것인데 말이야. 하지만 희생자가 되고 말았네.”
    “그만 하세요…… 그만 두라고요…… 제가 스스로 그 미끼를 덥석 물어버렸으니까요……”
    “그럴 테지. 진정하시게. 나도 그런 적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네. 왜 없었겠는가. 자업자득이지.
    내가 이 모양이니 친구들이 없다네. 늙게 되면 사람들과 어울리고 관계를 맺는 게 매우 어려운 일이지.
    자신을 보호하고…… 그러니까 신경질적인 노인이 안 되려면 외부 세계와 자신과의 관계를 아주 단순화시켜야만 하는 거라네.
    요즈음 매일 혼자서 술 마시는 게 무척 고역이지만…… 그래도 술이라도 마음대로 마실 수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성민경은 마카오에서 각각 수억 원대의 원정도박을 벌인 혐의를 받고 있었다. 경찰은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그의 금융계좌를 추적했다. 1년 치 자금 흐름을 조사한 것이다.
    그는 예전에도 가끔 프로야구 시즌이 끝나면 동계 훈련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마카오로 가서 슬롯머신을 하거나 블랙잭을 했었다. 그때는 작은 돈으로 했고 돈을 잃기도 하고 약간 따기도 했다.
    물론 일부 선수들은 전지훈련 중에는 물론이고 시즌 중에도 경기가 끝난 뒤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해 많게는 수천만 원씩 베팅을 해서 불법 도박을 해왔다.
    그는 수사당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마카오 현지 카지노에서 도박장을 운영하는 조직폭력배들에게 도박자금을 빌린 뒤 한국에 들어와 돈을 갚는 방법을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조폭들은 그에게 도박자금을 빌려주고 숙박, 항공, 차량, 환전 등 일체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리고 마카오 현지에서 도박 자금을 빌려줄 땐 나중에 발뺌하지 못하도록 동영상을 찍었다.
    그는 조폭들이 마카오 현지에서 운영하는 정킷방을 이용한 것이다. 정킷방은 VIP를 위한 일종의 도박방으로 규모에 따라 1년에 70억~150억 원의 보증금을 내면 카지노에서 임대받아 정킷방을 운영할 수 있다. 정킷방은 판돈의 일부를 정킷방 업주가 챙기는 ‘캐주얼 정킷’과 고객이 잃은 돈의 일정 부분을 카지노에서 받는 ‘셰어 정킷’으로 나뉜다. 카지노와 정킷방 업주는 고객이 게임에 참여해 이긴 금액은 반반씩 부담하고, 잃은 금액은 일정한 비율로 나눠 갖는다. VIP룸에서는 90퍼센트 이상 ‘바카라’라는 카드게임을 한다. 바카라는 단숨에 승부가 나고 회전율이 빨라 딜러나 업주, 게임 참여자 모두 선호한다.
    호텔은 세련된 반달형의 하얀 건물이었다. 그 호텔 어딘가에 특별한 고객들만 들어갈 수 있는 정킷방이 숨어 있었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창문마다 육중한 붉은색 벨벳 커튼이 연극 무대의 막처럼 드리워져 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도박에 열중하기 위해서 시계가 보이지 않는 방.
    어두운 욕망과 흥분과 열정과 소리 없는 탄식이 교차하는 방.
    경찰은 최근 해외 원정도박 기업인과 도박을 알선한 조폭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성민경이 도박을 한 사실을 밝혀내었다.
    그 브로커는 마카오에서 귀국하면서 인천공항에서 꼼짝없이 체포됐다. 경찰은 그의 휴대전화에서 동영상과 문자메시지 등을 복원해서 수사 단서로 활용했다. 그는 두목급으로 단순한 브로커가 아니었다.
    그는 카지노의 거물 에이전트였고 불법 스포츠 도박에도 관여한 것으로 의심을 받았다. 그리고 고액의 수수료를 받으며 환치기라고 하는 불법 환전을 통해 국내 유력 인사들의 검은 돈을 세탁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한국에서 환전 브로커에게 현금을 건네면 해외 환전상이 현지에서 이를 달러 등으로 바꿔 되돌려주는 방식이다. 환치기로 만든 검은 돈을 카지노에 넣어 두면 이자는 없지만 거래 명세나 환전 사실 등이 적발될 위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예치자의 신분 또한 확실하게 비밀 보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마카오 도박장은 아주 안전한 금고인 것이다.
    그러나 불법 스포츠 도박이건 환치기이건 현금화하는 단계에서 반드시 대포 통장을 이용한 자금 세탁을 거쳐야 하니까 문어발식 조직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부 조직으로 조직폭력배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대포 통장을 모으는 모집책과 은행에서 자금을 인출하는 인출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끔 협박과 폭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도 그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필로폰이나 엑스터시를 공급해야 하는 경우에는 마약 조직이 있어야 하고, 요즈음 도박 사이트 별로 회원 유치 경쟁이 치열하다보니까 가끔 경쟁사 홈페이지에 과부하가 걸리게 해서 마비시켜야 하므로 이때는 디도스 공격을 담당하는 해커 조직도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각 파트마다 자체 구성원과 책임자급 두목이 있었고 서로 완전히 칸막이가 되어 있었다. 전체 조직을 아우르고 지휘 총괄하는 회장님과 극소수의 그 측근들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아무도 그들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여러 개의 가명을 썼고 수십 개의 대포폰을 이용했으며, 그나마 기록이 남는 전화통화는 가끔 했을 뿐이고 주로 암호화된 문자를 모바일 메신저로 주고받았다.
    그들은 정킷방이 있는 호텔의 스위트룸에 간이 사무실을 차리고 업무를 처리하였다.
    그 브로커가 경찰에서 진술했다.
    “저는 10년 넘게 마카오 카지노에서 에이전트로 일했습니다. 중견기업 대표, 유명 연예인, 스타급 야구선수 등 고객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힌 장부를 부하들을 시켜 관리했지요. 특히 현지에서 도박 빚을 빌려줄 때는…… 그걸 일명 빽이라고 하는데요…… 꼼짝달싹 못하게 차용증에 지장을 찍게 하고 동영상까지 촬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고객이 돈을 잃어야만 정킷방 운영자와 에이전트가 돈을 버는 것은 아닙니다. 고객이 돈을 따서 계속 칩을 교환해야 수수료를 따 먹게 되는 것이죠. 그러다가 고객은 결국 다 잃게 됩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도박 자금을 탕진하고 현지에서 빽까지 쓰게 되면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조폭의 빚 독촉과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 야구선수는 모아놓은 돈 다 털리고. 본전 생각 때문에 점점 크게 덤벼들었지요. 그랬으니 도박 빚이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불어났지요. 마침내 도박의 함정에 빠진 거예요. 누적 도박 빚이 5억인지 그 이상인지 될 거예요. 당장은 감당할 수 없는 돈이겠지요. 그러니까 돈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승부조작을 하라고 협박한 것이죠. 불법 스포츠 도박에서는 이리저리 잘 엮어서 승부조작에 성공하면 아주 쉽게 10억 이상도 벌 수 있거든요. 틀림없어요.
    그런데 몇 번이나 실패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은 과정은 따지지 않고 오직 결과만 봅니다. 그건 핑계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지요. 그랬으니 그쪽 조폭들이 아주 심하게 했겠지요.
    물론 저하고는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전 에이전트에 불과하고 환치기 전문입니다. 자세한 것은 그쪽에 알아봐야 할 거예요.
    한국에서 오는 VIP들은 대부분 전문 모집인을 통해 옵니다. 전문 모집인들은 국내 카지노나 골프장, 유흥주점 등에서 대상을 물색하지요. 국내 도박 관련 커뮤니티 등에도 많은 홍보 글을 남깁니다. 그러니까 인터넷에 올라오는 해외 원정 후기의 10퍼센트 정도만 어쩌면 사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돈을 얼마 땄다는 글은 대부분 미끼용 홍보글입니다. 이렇게 모집한 고객이 게임에 참여할 때마다 쓰는 게임비의 통상 몇 퍼센트는 수수료로 정킷방에서 전문 모집인에게 지급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민경은 출장정지를 당하니까 약간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었겠지요. 인터넷을 보고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입니다. 불과 몇 달 동안 도박에 빠져서 그렇게 된 거예요.”

    변호사는 그날따라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있는 교도소 특유의 역겨운 냄새가 느껴졌다. 검정색과 흰색의 사각 리놀륨이 깔려 있는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안경을 만지작거렸고 가끔 벗었다가 다시 쓰곤 했다.
    “도박 빚 때문에? 돈에 몹시 쪼들리고 있었으니까 그 유혹을 뿌리치기가…… 어려웠겠지. 나도 그 지경이면 그랬을 거라고.”
    “재기에 성공하고 있었어요. 선발 출장도 보장되었구요. 그런데 느닷없이 연락이 온 거예요. 그걸 잘 처리해주면 빚을 깨끗이 없애주겠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매 건마다 충분히 보상을 해준다고 했어요. 결코 섭섭하지 않게 말이지요.”
    “걔들한테 죽도록 얻어맞지는 않았나? 말 안 듣는다고. 그것들은 남을 죽도록 때리고 싶어서 좀이 쑤실 텐데.”
    “솔직히 귀가 솔깃했지요. 빚도 없어지고 게다가 목돈도 쥘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저는 흔쾌히 응했어요. 그러니 절대로 때릴 이유가 없었지요. 조건이 좋았어요. 채무면제 합의서도 받았고…… 선금도 두둑이 받았거든요. 그래서 신사적으로 처리했습니다.”
    “다른 투수를 포섭하라는 지시는 안 받았나?”
    “당연히 받았지요. 하지만 제가 먼저 시작하고 성공하면 그때부터 친한 동료들을 끌어들이려고 했어요. 몇몇하고는 이심전심으로 이미 이야기가 되었지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그 유혹에 넘어갔고…… 나중에는 심한 협박을 받았고…… 후배를 끌어들이려고 시도했고…… 그걸 검찰에서 순순히 이미 진술했단 말이지?”
    “그렇게 되었지요.”
    “자유계약 선수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제가 투수 아닙니까. 투수는 타자와는 대우가 다르지요. 제가 재기에 성공했단 말입니다. 4년에 40억, 50억이 가능했겠지요.”
    “좌우지간 안 됐구먼.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으니……”
    “…… 잘 모르겠습니다.”
    “선수 생명이 끝나면서 괴로웠겠지…… 그렇지 않나? 술 꽤나 마셨겠군. 그럴 때는 알코올이 해결책이 될 수 있으니까.”
    “그렇지요. 죽을 것처럼 마셨어요. 그런데 아무리 들이부어도 술이 취하지가 않는 거예요. 뻗어버려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면…… 그러니까…… 그렇게 망가지게 되면…… 이왕지사 약에 손을 댔다면…… 마약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요즘은 좋은 게 많을 텐데…… 쉽게 구할 수도 있고……”
    야구선수가 거북하고 언짢은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정신적으로 무너지니까 유혹을 받았지요. 그러나 그것만은 차마……”
    “나도 한때는 강한 유혹을 받았었지. 단골로 만나는 여자가 있었거든. 그 여자도 나이가 드니까 별 수 없이 은퇴했다네. 아주 오랜 옛날 일이구만.”
    “약물의 유혹은 뿌리칠 수가…… 슬럼프라든가…… 스트레스라든가…… 그것도 미국 선수들이 먹었던 약효가 매우 강한 것으로 먹었지요. 빨리 효과를 보고 싶어서…… 과다 복용했어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변호사는 외면했고 누렇게 색이 바랜 천장을 쳐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변호사가 말했다.
    “그렇게 되었구만. 모든 약물은 어떤 면에서 독약이고 마약이라고 할 수 있다네. 반드시 부작용이 있거든. 그래서 약은 조심해야 한다네.”
    “그 약도 부작용이 심했지요. 그리고 금단증세도 있었어요. 복용을 중단하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니까 극심한 신체적인, 정신적인 고통을 겪게 되지요.
    그래서 불안, 불면, 두통, 귀울림, 극도의 우울감이 발생하는 거예요. 그러나 아직 발작이나 경련, 환각, 망상까지는 가지 않았지요.”
    그는 우울하고 창백한 얼굴이었고 목소리는 다소 쉬어 있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셔츠가 땀으로 축축했으니 가슴과 등쪽으로 달라붙어 있었다.
    “우린 야구 이야기만 했네요. 재판은 어떻게 될까요?”
    “야구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었네. 궁금증이 많이 풀렸거든.”
    “재판 말입니다? 재판 날짜가? 요즘은 밤마다 나쁜 꿈만 꾸니까 온종일 뒤숭숭해요.”
    그때는 매일 새벽이면 얕은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어김없이 나쁜 꿈을 꿨다.
    그들이 검찰청 건물 정문의 포토라인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기자들이 몰려든 것은 아니었다 몇몇 얼굴을 잘 아는 야구 전문 기자들이었다 사진기의 찰칵 소리가 반복해서 터진다 고개를 들라고 고개 좀 이쪽으로 이쪽이야 개미만한 수많은 이들이 스멀스멀 온몸을 기어 다니며 귓속으로 콧속으로 헤벌린 입속으로 기어들어갔고 흡혈귀처럼 피를 빨아 먹었다 그의 손을 떠난 공은 하늘로 높이 올라가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다 심판은 가차 없이 볼 판정을 내렸고 관중들은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야유를 보냈다 투수 코치가 올라왔다 그런데 코치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판사라고 했다 그는 마구 날뛰며 화를 냈고 심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차디찬 금속성 수갑이 손목을 죄어왔다 여자는 완전 나체였다 마른 상체에 봉긋한 가슴 흑갈색 유두 빈약해보이지만 의외로 풍만한 엉덩이 역 이등변 삼각형 형태 속의 무성한 거웃 살결이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잘 아는 사람처럼 보였으며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여자 검사였다 그러나 그를 향해 히스테릭하게 비웃었다 그래도 그는 여자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온몸이 일어섰다 육체는 스스로 알아서 반응을 했던 것이다 그는 도무지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발을 질질 끌면서 미로 같은 길을 맹목적으로 끝없이 걸었다 벗어나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힘겹게 손을 들어 온몸을 더듬어 보았다 온몸이 피투성이고 깨진 머리에서는 피까지 흘렀다 칼에 찔린 듯한 예리한 통증이 머리에서부터 발바닥까지 꿰뚫고 지나갔다 무더운 여름날 개처럼 숨을 헐떡였고 연거푸 신음을 내뱉었다 더 이상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그 사람들이 날 끝까지 놓아주질 않을 거라고 누운 자세에서 침대 위 창문을 올려다보았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창문가로 올라갔다 그가 월셋방으로 얻은 임시 거처는 지하철 강남역 1번 출구 근처 20층 원룸의 5층이었다 그가 창문의 방충망을 위로 젖히고 뛰어내리면서 밖으로 뻥 뚫린 창틀을 붙잡고 위태롭게 매달렸고 병신 새끼! 뛰어내려봐! 손을 놓으라고! 남자들이 외쳤다.
    꿈이 깨면서 겨우 잠든 새벽잠에서 깨어났다.
    사기전과 9범인 남자가 앉아있는 똥통으로부터 역겨운 똥 냄새와 희미한 정액 냄새와 소독약 냄새와 감방 냄새가 뒤섞여 확 풍겨왔다.
    늙고 꾀죄죄한 변호사는 담배 진으로 누렇게 변한 이빨을 드러내며 애매하게 웃었다.
    “법적 관점에서 검토해 보겠네. 생각 나름이지만 별 것이 아닌 것은 확실해. 도박이 합법적인 나라도 많지. 그것도 선진국에서 말이야. 외국환거래법 위반도 그렇지 뭐, 벌금으로 끝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도박빚은 법률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거야.
    그런데 승부조작이 문제야. 물론 실패로 끝나긴 했지. 피고인은 협박과 공갈 때문에……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공모 부분을 빼는 게 너무 늦었다는 거지.”
    “그걸 빼는 게 변호사님의 역할 아닌가요?”
    변호사가 신경질을 냈다. 무뚝뚝하고 약간 빈정거리는 듯한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내 변론에 큰 기대를 하지 말게. 국선이 뭘 어떻게 하겠나? 그저 죽을 죄를 지었으니 잘 살펴봐 주십시오, 라고 말할 걸세.”
    “제가 뭘…… 죽을 죄를 지었다구요?”
    “그러면? 검찰에서 다 인정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 브로커인지 뭔지가 진술도 했더구먼.”
    “여자 검사가 친절했지요. 그냥 믿음이 갔어요. 꼬박 이틀 간 조사를 받았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좌우간 다 이야기 했지요.”
    그녀는 마른 체구에 단순하면서도 촌티나는 우중충한 검은색인지 또는 회색 옷을 입고 검정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조사가 끝날 무렵 우울하게 말했다. “나로선 어쩔 수 없다고…… 재판이나 잘 받으세요.”
    “검사가 예뻤던가…… 검찰이 미인계도 쓰는 모양이지. 검사가 범죄사실에 대해 세심하게 조서를 잘 꾸미긴 했더구먼. 그런데 검사가 야구에 대해서 뭘 알고 있긴 했어? 그 부분이 좀 미심쩍었거든. 야구 용어도 부정확하게 사용하고 말이지……”
    변호사는 수사기록을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면서 노란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진 관련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야구선수는 그 동작 하나하나를 눈으로 쫓으며 거기에 구체적으로 무엇이 적혀있는지 새삼스럽게 궁금했다. 문장은 끊기고 이어졌지만 투명했고 단단했다. 자신이 진술한 그대로라고 하지만……
    그때 (그녀가 말할 때마다 볼우물이 들어갔고, 꿈속에서 두 사람의 팔다리가 한없이 부드럽게 뒤얽혔던) 그 예쁜 여자는 아주 날렵한 솜씨로 유영하듯 능숙하게 글자판을 두들겼었다.
    “…… 아니요. 전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지요.”
    “그렇다면…… 자넨 승부조작 부분에서 볼 배합하는 것처럼 지그재그로 진술할 수도 있었는데…… 다시 말하면, 야구의 기술적인 부분이니까 실제 조작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단 말이지.
    미수범도 원칙적으로 처벌되긴 하지만 정상참작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있었는데…… 그만 실토하고 말았구만. 너무나도…… 진실인 것으로 믿을 수밖에 없게…… 상세하게 진술했단 말일세.”
    “……”
    “거짓말을 해 본적이 있었던가? 가끔 거짓말하면 기분이 후련해지거든.”
    “글쎄요. 오직 야구만 했으니…… 사회생활을 많이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거짓말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겠군. 밑바닥 생활을 하려면 거짓말도 가끔 해야 될 거야.”
    “그렇지만……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저 자신을 죽인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구요. 승부조작도 모두 실패로 끝났어요. 승패와 관계가 없었단 말입니다. 제가 죽어야할 만큼 양심의 가책을 받아야 하나요?”
    “그 애송이 판사는…… 내가 보기에는 틀림없이 애송이지. 제 잘난 맛에…… 천방지축 철없이 까분다네.”
    “판사들한테 심한 알레르기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그렇다네. 그렇고말고.”
    야구선수는 당황했고 낙심한 표정으로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나갈 수가 없단 말인가요?”
    “글쎄…… 집행유예가…… 설마…… 장담할 수는 없다네.”
    “저는 어떻게 될까요? 제가 앞으로……?”
    “내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너무 일찍 인생의 험한 꼴을 맛본 거겠지. 인생에서 누구는 성공하고 누구는 실패한다네.”
    그들은 더 이상 별로 말을 나누지 않았다. 딱히 더 해야 할 만한 말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변호사는 쇠창살이 박힌 창밖으로 골짜기 건너 아주 멀리 있는 산을 문득 바라보았다. 변호사가 일어섰다. 그가 연약한 눈빛으로 야구선수의 슬픈 눈을 내려다보았다.
    변호사가 악수를 하기 위해서 연약한 손을 내밀었다. 말라비틀어진 손가락의 뼈마디가 딱딱했지만 약간 끈적거렸고 따뜻했다. 야구선수의 목에서 맥박이 뛰었다. 거구의 야구선수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허리를 굽혀 손을 잡았다.
    “오늘이 마지막일세. 물론 법정에서 잠깐 함께 있겠지. 우리가 무슨 인연이 있다고…… 다시 만날 기회는 없을 걸세.
    내가 특별히 해줄 말은 없다네. 힐링이니 그따위 말들은 믿지를 말게. 그저…… 스스로 자신을 지키게.”
    “……”

    경찰에 체포된 투수는 결국 승부조작을 시도했다고 자백했다. 그가 자백한 경기는 지난해 여름에 홈에서 야간 경기로 벌어진 경기였다.
    그때 브로커가 그에게 주문한 내용은 첫 이닝 첫 타자를 몸에 맞는 볼로 출루시키는 것이었다. 그것도 몸 쪽으로 속구를 던져서 허벅지나 정강이를 맞추라는 것이었다.
    타자들은 언제든지 빠른 공이 자신의 몸 쪽으로 날아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타석에 서게 된다. 그러니까 투수가 던지는 강속구는 자신의 머리로 언제든 날아올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투수의 제구력은 늘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투수는 실제 타자를 이기기 위해 몸 쪽 승부를 한다. 그리고 가끔 투수는 위협구는 물론이고 악의적으로 몸에 맞히기 위해서 공을 던지기도 한다. 선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몸에 맞는 공의 고통이란 게 별 거 있나요?”
    “안 맞아 봤으면 말을 마세요!”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아프다는 것이다. 그 고통은 직접 당해봐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살집과 근육이 두툼한 엉덩이나 허벅지는 그나마 괜찮다. 그건 뼈를 깨부수는 고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날 성민경의 시즌 10번째 선발 등판 경기였다. 그는 1여 년 만에 복귀해서 성공적으로 재기하고 있었다. 이미 6승째를 챙겼기 때문이다.
    그는 이 경기에서 1회 선두 타자의 목표지점을 향해 포수의 사인을 무시하고 인정사정없이 강속구를 던졌다. 그러나 타자는 엄청난 반사신경에 의해 엉겁결에 피해버렸다. 그리고 투수가 볼카운트를 조절할 틈도 주지 않고 2번째를 건드렸다가 볼이 붕 뜨면서 하늘로 치솟더니 내야 플라이로 아웃되었다. 그는 두번째 선수에게 안쪽 낮은 볼 2개를 던진 다음 스트라이크 1개를 던졌고, 볼카운트 2-1에서 바깥쪽 높은 볼, 몸 쪽 낮은 쪽으로 계속 공을 던져 볼넷을 허용했다. 그는 볼넷 이후 내야 수비 실책으로 다음 타자를 내보내 자초한 1사 1,2루에서 4번 타자에게 2루타를 얻어맞고 먼저 2점을 내줬다. 볼넷이 빌미가 되었다. 그는 7회에서 첫 타자에게 볼넷을 내주고 내려갔는데 성민경의 기록은 6와 3분의 1이닝 5피안타 5볼넷 4실점이었다. 하지만 팀타선이 나중에 6점을 뽑아내며 6대 5로 역전승했다.
    그는 그 경기 이후에도 브로커의 지시를 받고 승부조작을 시도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는 1회에 볼 컨트롤이 안 되는 척하면서 두 번씩이나 볼 넷을 주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경기 기록상 성민경이 1회에 허용한 볼넷은 없었다. 첫 타자가 초구를 건드려 내야 땅볼 아웃됐고, 다음 타자들도 풀카운트 대결 끝에 높은 공을 쳐내서 외야 플라이로 아웃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2회 3점을 내주는 등 5이닝 5실점한 후 투수 교체로 내려왔다. 하지만 이날 팀은 7회 이후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끝내기 안타로 7대 5 역전승을 거뒀다.
    그는 이제부터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쫓기기 시작했다. 성적은 뒤죽박죽이 되어 감독의 신뢰를 다시 잃어버렸다.
    그가 경찰에서 진술했다.
    “제가 승부조작을 한 사실은 인정합니다. 엄청난 도박 빚 때문에 그들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첫 번째 승부조작에 실패한 뒤부터 브로커들의 협박과 공갈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저 때문에 엄청난 손해를 봤다고 하면서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을 하고 죽도록 때렸거든요.
    저는 무서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오죽했으면 자살할까도 생각했습니다.”
    두목인 조폭은 구단에도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구단 소속 어떤 선수가 승부조작과 연루됐는데 내가 그 때문에 돈을 잃었다. 다른 구단은 이럴 경우 돈을 메꿔줬다며 돈을 요구했다. 브로커들은 약점을 쥐고 구단 소속 선수의 승부조작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구실로 거액의 돈을 요구한 것이다.
    그동안 야구계에선 구단들이 소속 선수의 승부조작 사실을 자체 조사를 통해 알았으면서도 구단 이미지 등 악영향을 고려해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증거가 너무 명백했기 때문에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형사 법정
    성민경은 도박과 외국환거래법 위반, 국민체육진흥법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었다. 법정에 팽팽한 긴장감은 없었다. 그는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했다.
    변호사는 연신 고개를 굽신거리면서 입안에서 우물거렸다.
    “피고인은 흔히 말하는 대로 초범이고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글쎄 말입니다. 그리고 공갈 협박을 받은 가련한 피해자라는 점을 고려해 주십시오. 동기와 그 과정을 면밀히 살펴봐 주십시오.
    국가는 거대한 괴수이지요. 그 괴수는 언제나 비단뱀처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습니다. 희생자를 통째로 삼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국가가 이 불쌍한 청년을 처벌해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처벌만이 가능할까요?
    처벌이라는 것은 그 안에 악이 들어있습니다. 이 말은 제가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에 영국 법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하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다른 피해자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모세의 율법에는 목숨은 목숨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갚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법 감정은 수천 년이 지나도 여전히 소멸되지 않은 채로 살아있지요. 그러나 이 사건엔 피고인 이외에 다른 피해자는 없습니다. 피고인은 이미 충분히 처벌받았습니다. 삶의 전부이고 일생의 꿈인 야구와 영원히 결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충분히 준비했고 성공할 수 있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이 젊은 사람을 변호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쩐지…… 그런 생각이 문득 듭니다.”
    애송이 판사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무테 안경 속에서 나른하게 눈알을 굴리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피고인을 내려다본다. 서로 시선이 엇갈린다.
    3주 후 선고가 있었다.
    판사는 엄하게 훈계하듯이 말했다.
    “유명한 야구 선수는 공인이나 다름없고 커가는 어린이들의 꿈의 우상인데, 그런 기대를 저버리고 약물을 하고 해외 원정도박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 승부조작까지 하였는바, 어떻게 피고인이 공갈 협박을 받은 피해자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요?
    다시 말하면 처벌 받을 일을 했으면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지요. 그래야만 합니다. 그게 판사의 거룩한 임무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는 기색도 없으니 엄벌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판사는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항소하고 말고는 피고인의 자유라고, 자신이 관여할 바는 아니라고, 만약 항소를 하게 된다면 기간을 잘 지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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