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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쇄살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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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쇄살인범?!

    301번 지방도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산리에서 시작해서 매향리를 지나고 화옹 방조제를 지나고 서신면 궁평리를 지나고 탄도방조제를 지나고 대부도를 지나고 시화 방조제를 거쳐 시흥시 정왕동 오이도 관광단지까지 이르는 63킬로미터 남짓의 경기도 지방 도로이다.
    우정읍은 화옹호와 화옹지구 간척지를 품고 있다. 우정읍 선창포구는 한 때는 도시인들이 많이 찾는 바닷가 횟집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간척지에 묻혀서 바닷물도 들어오지 않고 그러니 고깃배도 들어오지 않는다. 선창에서는 아직도 갯내가 물씬 풍기지만 말이다.
    매항리에는 6‧25전쟁 당시부터 미군의 쿠니 Koo-Ni 사격장이 있어 주민들이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고 배상을 받기위해 투쟁했던 지역이다. 우정읍내에서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미군부대가 없었다면 아주 평범했을 시골 바닷가 마을인 고온이 포구가 보였고 포구의 마을 건물 벽에는 분노에 찬 농부가 쇠스랑으로 철조망과 성조기, 포탄을 찢어발기는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포구에서는 폭격연습에 항의하는 플랜카드가 걸린 철조망이 쳐진 미군부대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바다 쪽으로는 폭탄의 과녁이 되어 하얗게 패어버린 작은 섬인 농섬도 보인다. 그러나 이제는 옛일이 되었다. 2005년 미군은 철수했고 그 사격장 시설들은 ‘한옥 등 건축자산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서 경기도 제1호 우수건축자산으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화성시는 사격장 일대를 평화생태공원으로 조성했다.
    궁평리는 단편소설 ‘밀항’의 작중인물로서 희대의 사기꾼이었던 김희걸 회장이 중국으로 밀항을 시도했던 궁평항이 있는 곳이다.
    어섬은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의 작은 섬이었다. 시화호 물막이 공사가 끝나면서 바다를 잃고 육지가 되었다. 마을은 온데간데없고 갈대만 무성한 개활지가 넓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황혼녘이면 여전히 시화호 갯벌에서 먹이활동을 하는 저어새와 민물도요, 알락꼬리마도요가 떼를 지어 군무를 하며 비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서신면 제부도는 조류의 흐름에 따라 하루에 바닷길이 두 번 열리는 섬으로 주말이면 차량 행렬이 줄을 잇는 관광 명소이다. 매바위와 삼형제바위 등 갯바위가 아름답고 산책로가 더 없이 편안한 곳이다. 그러나 좀 더 먼 바다로 나가려면 (모습이 낙지 같다고 하여 낙지섬이라 불렸던) 대부도와 선재도를 거쳐 인천시 웅진군 소속인 영흥도까지 들어가야 하는데 대부도는 안산시 땅으로 시화 방조제를 거쳐 안산시와 연결되어 있다.
    시화 방조제는 배수갑문과 방아머리 여객선 터미널에서부터 시작해서 시화조력발전소, 큰가리기섬과 작은가리기섬을 거쳐 시흥시 정왕동에 이른다. 정왕동에는 시화 멀티 테크노벨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그런데 오이도는 조선조 초기에는 까마귀의 귀를 닮은 섬이라고 해서 오질애라고 불렸으나 정조 때 지금의 이름인 오이도가 되었고 일제 강점기 때 갯벌을 염전으로 개발하면서 육지가 되었다. 그러나 삼전벽해. 지금 그 염전은 오이도 관광단지가 되었고 바로 인근에 배곧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서울대 시흥캠퍼스가 2018년 3월 개교할 예정이다.
    301번 지방도로가 4차선에서 2차선으로 좁아지는 궁평리에서부터 해안 도로는 나무와 잡초가 우거졌고 야생동물 보호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도로에서 불과 10여 미터 들어간 으슥한 공터에는 공사 중에 발생한 폐아스콘, 폐콘크리트, 일반 폐기물 등 폐기물을 그대로 방치해서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비산 먼지가 공중으로 흩날린다. 그리고 광대한 간척지에는 인적이 끊긴 채 갈대만이 무성하다. 만약 살인범이 시체를 외진 곳에 버리려고 한다면 딱 적합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간혹 가다 주유소와 모텔, 횟집 등이 있어 오가는 관광객들을 유인하지만 가로등이 없어서 밤에는 캄캄했고 폐쇄회로 TV도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타인의 시선을 피하기 쉬운 곳이다.
    안산시에서 방범용 CCTV를 설치 및 관리하는 안산 U정보센터에 의하면 301번 지방도에 설치된 CCTV는 8대에 불과했다. 그러니 63킬로미터 도로에 고작 8대이니까 대략 8킬로미터 간격을 두고 하나씩 CCTV가 있는 셈이다.
    토막 살인범 송ㅇㅇ이 그의 아내 박ㅇㅇ의 시신을 유기한 장소는 301번 지방 도로 내 시화 방조제의 오이 선착장 입구였고, 지난 2005년 안양 초등학생을 유기하여 살해한 김ㅇㅇ도 시화 방조제 부근인 오이도에 시신을 유기했으며, 2008년 8월 대형 유흥업소 영업사장이었던 강ㅇㅇ은 동거녀를 목 졸라 살해한 후 시화호 갈대밭에 시신을 암매장했다. 안산시 대부도에서 하반신 토막시신이 발견된 지 며칠이 지나서 방아머리 여객선 터미널에서 불과 3킬로미터 떨어진 시화호 물가에서 시신의 나머지 부분인 상반신이 발견됐다. 경찰은 상반신과 하반신의 DNA를 분석한 결과 같은 사람의 것으로 확인됐다고 하였으며, 지문인식을 통해 김ㅇㅇ의 사체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 시체의 상반신과 하반신이 각각 발견된 장소는 모두 301번 지방도로였다. 12명의 목숨을 앗아간 희대의 연쇄살인범 남ㅇㅇ은 두 번은 화성시청 뒷골목 노래방에서 피해자를 데리고 나와 차에 태워서 성관계 후 살해하여 사체를 시화호 어섬 근처 갈대밭에 묻어 버렸고 두 번은 우정읍 버스정류장에서 피해자를 차에 태워 강간을 시도했으나 피해자가 격렬히 반항하자 목 졸라 살해한 다음 사체를 토막 내 선창포구 근처 간척지 갈대밭에 묻었다.
    2002년에는 서신면 백미리 바닷가에서 이ㅇㅇ의 시체가 발견됐다. 인근을 지나던 주민이 파도에 떠밀려온 구멍 난 마대자루에서 신체의 일부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발견 당시 이ㅇㅇ은 검은색 비닐봉투에 겹겹이 싸여 마대자루에 들어있었는데 옷은 그대로 입고 있었고 성폭행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약 40여 곳에서 흉기로 찔린 흔적이 발견됐다. 2004년에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6살 난 아들을 살해한 어머니 김ㅇㅇ와 시신을 암매장해버리자는 아내의 부탁에 따라 계부 박ㅇㅇ은 우정읍 화수리 멱우저수지 인근의 야산에 유기했다. 그러나 경찰은 형사기동대, 감식반 등 100여 명과 함께 굴착기 등을 동원해 시신이 유기된 멱우저수지 인근의 야산을 샅샅이 찾아 수색작업을 벌였지만 아직까지 시체를 찾지 못하였다. 그리고 2010년 9월 술집 여종업원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토막 내 유기한 남성이 평택경찰서에 검거됐는데, 이 남성은 평택시 안중리의 주유소 인근 도로변 차 안에서 술집 종업원 한ㅇㅇ을 상대로 범행을 저지른 뒤 자신의 고향인 우정읍 석천리 습지 풀숲에 사체를 매장했다.
    그러므로 301번 지방도 인근에서 사는 사람들은 밤이면 귀신이 출몰해서 곡성을 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억울하게 죽은 사자들의 원혼을 달랠 수 있을 것인가. 그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무슨 제사라도 지내거나 푸닥거리라도 해야 될 것 같다.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 순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무슨 격한 감정 따위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강력하다는, 승리에 도취된 감정은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목을 누르면서 졸랐을 때 손에 느껴지는 그 따뜻한 감촉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시체가 곧 썩기 시작할 텐데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할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그는 예전에 오이도 수산물 직판장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시화 방조제를 지나고 화옹 방조제를 거쳐 아산까지 내려갔을 때 길가에 나무와 잡초가 우거져 있던 해안 도로를 떠올렸다. 그런 곳이어야 할 것이다. 딱 알맞은 장소 아닌가.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에는 차량 통행이나 인적이 끊길 것이다. 차가 달리고 있는 주변이 한적해보이면 곧바로 도로를 벗어나면 될 것이다. 너무 멀리 벗어나서는 안 된다. 여차 하면 바로 도로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밤의 어둠이 찾아오자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아주 외진 곳이었다. 왼쪽으로 검은 바다가 보였다. 적당한 장소를 찾기 위해 다시 천천히 얼마큼 달렸다. 계속 차를 달리다가 도로에서 빠져나가는 길이 하나 보였다. 그 길은 일반적인 도로가 아니었다. 백미러로 보니 뒤를 따라오는 차량이 한 대도 없었다. 그래서 그 길로 방향을 틀었다. 작은 도로와 들길을 몇 군데 지나 마침내 알맞은 곳을 찾아냈다. 몇 미터 가지 않아 배수로와 연결된 지하도가 나타났다. 그곳은 가장 가까이 있는 도로 쪽을 몇 그루의 동백나무들이 가려줬다. 시체를 파묻어 버리기에 적당한 장소로 보여 정차했다. 주변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2월의 춥고 바람 부는 초저녁, 또는 으슥한 밤.
    20대 중반 또는 30대 남자가 신촌 이화여대 뒤쪽 추계예술대학에서 이화금란고를 올라가는 골목에서 짙은 안경과 챙이 긴 모자를 쓴 채 괜스레 왔다 갔다 했다. 그러나 폐쇄회로 TV에 포착된 그의 인상 착의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며칠 째 2호선 지하철 신촌역 입구 CCTV에도 같은 차림새로 몇 번 등장했다. 얼핏 보면 불안한 듯 보였지만 여유로운 걸음걸이였다. 그런데 딱 한 번 모자를 벗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모습이 잡힌 것이다.
    서대문경찰서 강력계의 의뢰에 따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디지털 분석과는 생체 인식 프로그램을 가동해서 그 남자의 신상 분석에 착수했다. 먼저 CCTV에 나온 주변 공간을 3차원 그래픽으로 재현했고 얼굴의 윤곽과 머리의 크기와 모양새, 걸음을 걸을 때 발을 내딛는 지점, 그때 무릎과 허리를 구부린 각도와 고개를 건들거리며 숙이는 횟수 등을 입력해서 가상적으로 인체의 골격을 컴퓨터 화면에 배치했다. 담당 연구관은 그의 발목과 무릎, 골반과 허리, 손을 흔드는 자세 등을 몇 십번에 걸쳐 조정하여 용의자와 똑같은 신체와 자세로 설정한 뒤 똑같은 길을 걷게 했다. 몸을 바로 했을 때의 키와 보폭, 신체의 특징을 계산하기 위해서였다.
    디지털 분석과는 강력계에 보고서를 보냈다. ‘용의자는 키 172.5cm, 평균 보폭은 71.4cm, 나이 28세에서 32세 사이로 추정되는 남성, 친구가 없고 외롭게 지내는 외톨이며, 미혼, 덥수룩하게 수염이 자랐으며 짙은 검은 머리카락.’ 그리고 몽타주보다 훨씬 정확하게 보이는 전체 얼굴 사진을 3차원 그래픽으로 구현해서 첨부하였다.
    며칠 전 서대문경찰서에 실종신고가 접수됐었다. 이름은 신은명, 34세, 사립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금융기관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고향에 있는 어머니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회사에는 이틀째 아무런 연락 없이 결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회사 직원 3명과 신촌의 카페에서 저녁식사 겸 몇 잔의 술을 마신 후 헤어진 게 밤 10시 무렵이었다. 실종자는 그 골목에 있는 여성 전용 빌라 1층에서 몇 년째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집에 침입한 흔적은 없었다. 그리고 CCTV에는 사각지대가 여러 군데 있기는 하였지만 그 골목에서 납치한 흔적이나 남자와 여자가 몸싸움을 하는 모습 역시 보이지 않았다.
    집안은 그녀의 평소 성격대로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서 어떠한 흐트러짐도 없었다. 면식범의 소행은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지만 아무리 탐문을 해 봐도 실종을 전후에서 목격자는 없었다.
    강력계에서는 가족들의 진술이나 회사 동료들의 진술 등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판단한 결과 단순 실종이 아니라 중대한 범죄에 의한, 즉 강도 살인이나 강간 살인 혹은 단순 살인에 의한 실종으로 판단하였다. 혹은 연쇄살인범의 소행이 아닌지 의심했고 그를 체포하면 서울 서부지역에서 발생한 몇 건의 장기미제 사건을 해결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그녀는 지극히 온순한 성격이어서 원한을 살만한 일을 한 적이 없었고 회사에서도 모범적인 직원이라서 순조롭게 승진해서 일 년 전에 과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리학적 프로파일링 기법을 활용해 분석한 결과 범인은 자신이 친숙하게 여기는 공간에서 범죄를 저지른다는 속성을 토대로 해서 범행 장소와 범인의 주거지는 인접해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니까 범인과 피해자가 최초로 접촉한 지점과 구체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장소, 만약 살인이라면 시체를 유기한 장소는 어떤 경우에도 범인의 주거지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북아현동과 대신동, 대현동 일대를 중심으로 수사를 펴기 시작한 것이다.
    추계예술대학교 부속 추계초등학교 정문에서 500미터 정도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주택가가 나왔다. 올라가는 동안길가에는 가로등은 두 개 뿐이고 CCTV는 설치되어 있지 않으며 주차된 차가 많아 누군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평소 골목이 어두웠으니 밤길이 무서운 골목이었다. 그곳에 정원 원룸이 있었다.
    압수 수색을 위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왼쪽이 보일러 및 세탁실이고 오른쪽이 화장실이었으며 비좁은 거실과 부엌, 방안은 발 디딜 틈이 없이 어질러져 있었다. 지독하게 퀴퀴한 냄새와 그림 물감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른다. 방주인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과 외롭고 비천한 삶을 살고 있다는 뚜렷한 인상을 준다.
    방 안 여기저기에는 온통 낙서 투성이었다.
    운명은 개척해 나가는 자의 몫이다. 세상을 강하게 살자. 나는 왕이다. 집착이 강하면 못할 것이 없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나는 뛰는 놈이고 나는 놈이다. 정직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 남는다. 자신에게 달려있다. 나는 강하다. 나는 신이다. 나는 왕이다. 실패란 다시. 새출발. 시작할 수 있다. 내 말이 곧 법이다. 악으로 시작한 것은 악의 힘으로. 악으로 깡으로. 검은 바다. 호수. 갈대밭.
    매직펜으로 굵게 쓴 것도 있다. 악마가 나를 공격한다. 나를 죽이려고 한다네. 악마여 나를 놓아주라. 제발 좀.
    화장실 변기 위에는 다음과 같은 경고문도 붙어 있다.
    변기에 절대 이물질 버리지 말 것. 하수구에 버려야 한다. 막히면 답이 안 나온다. 절대 주의할 것.
    그리고 다른 벽면에는 또 다른 낙서들이 있다.
    현재 형성된 습관이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르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자. 난 특별한 존재이고 소중한 존재이다. 웃음 헤픈 여자는 버러지이다. 버러지를 밟아 죽이자.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사랑받는 건 자기 자신이 어떻게 하기 나름이다. 담배 필 때 문을 활짝 열어놓고 환기시켜라. 볼펜 사용하고 난 후 세톱박스 위에 올려놓을 것. 작은 것을 얻어도 소중하게 여기며 큰 것을 가지고도 아끼지 아니하고 좋은 것이 있을 때 서로가 양보하고 허물이 보일 때는 덮어주게 하소서. 어려울 때 곁에서 힘이 되게 하시고 벅찰 때는 서로가 나눠지게 하시며 용기를 잃었을 땐 두 손 잡게 하소서.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고 종이고 노예이다. 날 무시하지 마라. 나는 왕이다. 나는 장군이다. 흥분하고 소리 지르지 말라. 참는 자가 이긴다. 불황일수록 절약만이 살길이다. 인생의 정답은 없다. 오직 노력만 있을 뿐이다. 내 운명은 내가 만들어 간다. 나 자신을 아끼고 나 자신을 사랑하라.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사랑이 필요하다. 삶의 에너지. 강박관념.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 인생의 동반자는 없다. 오로지 혼자서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고 고독을 이겨내는 자만이 인생의 승리자가 된다.
    동백꽃이 핀다. 천재는 중대한 망상증. 환각에 시달리게 하는 라임병. 선한 것은 악한 것, 악한 것은 선한 것. 지금 머릿속에서 방울소리가 음악소리가 아버지의 고함소리가 그 메아리가 들린다.
    그리고 또 다른 벽면에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수백 마리의 뱀들이 우글거리는 그림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거실과 방 안의 유리창에는 한 쪽은 흰색, 다른 쪽은 검정색 페인트칠을 하고 정교하고 복잡한 콜라주 기법으로 작업을 해 놓았다.
    동백꽃이 피어있는 동산과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희미하게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벌거벗은 어린 소녀들의 사진, 어린아이 시체, 게이 역병에 걸려 악성 피부암이 온몸을 뒤덮고 있는 비쩍 마른 남자, 독사가 틀림없는 뱀과 다리가 부러져 덜렁거리는 흰색 말 등 동식물 사진, 검정색의 헝겊 조각, 포르노 잡지에서 뜯어낸 장면들, 초현실주의 미술책에서 잘라 낸 그림, 날카로운 쇠붙이 조각, 드로잉용 연필, 몇 방울의 핏자국,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린 그림, 스텐실 그림, 이미지가 변형된 스케치 등을 한데 모아 풀로 붙여서 복잡하고 상징적인 그림인지 조각인지를 만들어 놓았다. 그것들은 파괴와 절망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져 형태적 완벽성을 보여준다.
    현관문은 열쇠공이 도착하자 5분 만에 철컥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서울지방경찰청 과학수사센터의 감식요원이 출동해서 집안 곳곳을 샅샅이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지문이나 혈액은 발견되지 않았다.
    서울경찰청의 디지털 포렌식 센터는 컴퓨터, 스마트폰, 태블릿PC, 블랙박스, CCTV, 내비게이션 등 디지털 기기 대부분을 분석하고 복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설치한 후 지워버린 프로그램이나 이용자가 방문한 사이트 기록, 통화 내역, 문자 내역, 인터넷 채팅 내역, 스마트폰을 켠 횟수, 가장 많이 사용한 앱 등을 분석해 이용자의 디지털 활동 흔적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 용의자의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분석한 결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욕조는 깨끗했다. 하지만 형사들이 이틀째 샅샅이 뒤진 끝에 욕조 배수구의 좁은 틈에서 피의자의 것으로 보이는 몇 올의 몸털을 찾아내서 국과수에 분석을 의뢰했다. 그리고 2차선 큰 길에서 실제 상황처럼 가정해서 측정해보았다. 용의자의 차량과 동일한 차종으로 타이어나 차체의 가라앉음 정도를 실험했던 것이다. 기아 자동차의 구형 스포티즈였다. 용의자의 차량의 상태가 시신의 무게인 52kg을 적재하고 이동했을 때와 동일하다는 게 밝혀졌다.

    용의자는 살인혐의를 받아 구속까지 됐지만, 당사자는 계속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아직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하기로 했고, 본인은 자신 있게 동의를 하였다. 검사는 국과수 심리분석실이 맡았다. 심리분석관들은 우선 용의자에게 검사 과정을 설명한 뒤 용의자의 몸에 호흡, 맥박, 혈압, 손끝 전극 등 네 가지 요소를 체크할 수 있는 장치를 부착했다. 그러고 나서 용의자의 혐의와 관련된 핵심 질문 3가지를 반복적으로 묻고, 용의자가 대답할 때 몸에서 나타나는 반응 수치를 분석하였다. 그런데 용의자의 검사 결과는 ‘진실’과 ‘거짓’을 확증하기 힘든 ‘판단 불능’수치가 나왔다. 용의자가 일관되게 이번 사건과 자신은 무관하다는 답변을 반복했는데 진실이나 거짓을 가릴 만한 유의미한 수치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이번에는 두 사람의 프로파일러가 프로파일링 기법으로 용의자의 범죄행동을 분석하기로 했다. 서울지방경찰청 지하에 있는 심리분석실에서 진행되었다. 그 방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다만 사각형 테이블 하나와 의자 세 개만 놓여있을 뿐이고 천장에 녹음 또는 영상 녹화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들은 미리 준비한 살인 피의자용 설문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들은 피의자의 반응을 면밀히 검토하게 될 것이다. 늙은 남자 형사가 주로 질문하면 젊은 여자 형사가 부족한 부분을 보충적으로 담당할 것이다.
    그는 경감 계급인데 56살이고 정년이 4년 남았다. 1년 전에 아내가 암으로 죽어서 지금은 처량한 홀아비 신세이다. 그는 젊은 부하 형사들 앞에서 선배로서 체면을 지키기 위해 늘 조심스러워했다. 그래서 곱씹어 가며 아주 느릿느릿 말을 한다.
    그녀는 30살이고 경사 계급이다. 대학에서 심리학과 범죄수사학을 전공했고 경찰이 되었다. 현재 임신 3개월 째여서 배가 그렇게 불러보이지는 않는다.
    심리학적 평가는 우선 사건의 객관적 정보를 수집하고, 피의자와 면담을 가지게 된다. 먼저 소개 단계로 시작하여 피의자의 성장 발달 과정과 사회문화적 이력에 관한 진술을 청취하는 단계, 현재의 정신상태를 평가하는 단계, 피의자의 범행 당시 행위와 느낌을 묻는 단계, 마지막에는 논리적으로 모순되거나 일관되지 못한 답변에 대해 다시 묻거나 답변을 꺼려했던 중요한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이다. 그리고 피의자가 없는 상황에서 분석관들이 각자의 의견을 교환하거나 분석을 비교하는 단계를 거친다. 이때 어떤 분석가는 지나치게 조심할 것이고, 또 다른 분석가는 무모할 정도로 대담할 수 있다. 그러나 분석 과정에서 분석가들 역시 상상력과 창의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적 도약이 필요하다.
    그는 173센티미터 키에 몸무게는 65킬로그램이었다. 구속된 후 경찰이 강제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고 이발을 하여 말끔하게 면도를 한 얼굴은 단정해보였고 자주 수줍은 미소를 띠었다. 회사에 출근하는 옆집 총각처럼 보인 것이다. 도저히 살인범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성격 평가와 반사회적 인격 장애 검사에서는 사이코패스 성향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정신병적 상태와 정상인의 정신상태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범죄 수사에 있어서 프로파일링 기법은 범죄 현장의 증거를 분석해서 용의자의 신원을 추적하고 흉악 범죄자의 심리 상담을 통해 반복되는 범죄 유형을 분석하고 분류해서 유사 범죄 수사에 활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파일링은 범죄자를 미치광이로 낙인찍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범죄 심리 분석을 통해 범죄자의 패턴을 밝혀내서 미래의 범죄 예방에 도움을 주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누구든지 천성이 범죄자라고 예단하는 것이 아니라 무죄라고 생각하고 분석을 시작해야만 정확한 분석에 도달할 수 있다.
    프로파일러는 경찰에서 프로파일링 기법을 담당하는 범죄 심리 분석관을 말한다. 프로파일러는 범죄자의 머릿속을 들락날락하면서 범죄자처럼 생각하고 살아야 한다. 주로 연쇄살인범, 시신을 잔혹하게 살해한 흉악범, 금품, 성욕, 원한 같은 뚜렷한 동기 없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대상을 노리는 이상 범죄자들의 이야기를 몇 시간씩 또는 하루 종일 한결같은 표정으로 들어주어야 하므로 이것은 진이 빠질 정도로 극심한 감정노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만난 살인범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눈물을 흘릴 줄 모른다. 쾌락을 위해 살인을 자행하는 진짜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
    우리 시대는 이상 범죄의 시대다. 평범한 이웃의 얼굴을 한 범인에게 애꿎게도 선량한 시민이 피해를 입고 있다. 도시의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폐쇄회로 TV 덕분에 범죄자를 빨리 잡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범행동기를 규명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정확한 범행 동기는 여전히 미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억울한 범죄 피해자가 아니라 악인인 범죄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범죄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따라서 수사의 그것도 바뀌어야 했다. 이제는 피해자 주변을 조사해도 범인을 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묻지마형 범죄, 분노 또는 충동 조절 실패형 범죄의 경우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제3자를 범죄의 대상으로 노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인의 내면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한다.
    프로파일러가 말했다.
    “그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마음껏 하라고…… 우리는 이야기를 들어주러 왔으니까. 우리가 심령술사도 아니고…… 마법사도 아니니까 안심하라고. 마음을 진정하라니까…… 진정.”
    “……”
    “그리고 말이야, 정말 억울한 점이 많을 거야. 우린 억울한 걸 다 들어줄 수 있다구. 경찰들은 괜히 윽박지르기만 할 거야.”
    그는 묻고 대답하는 동안 내내 차분했을까. 처음에는 뭔가 숨기려고 머리를 굴리지도 않았고 꼬박꼬박 대답을 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말하는 듯 했지만 이내 장황했고 중언부언하였다. 한마디로 횡설수설이었다. 계속 듣다보면 정신이 멍해져서 노련한 형사마저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러니 정신병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부쩍 들었다. 그는 살인에 대해 되물으면 아주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려 버리거나 낯빛을 바꾸며 격분하였고 겨우 비위를 맞추어주면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러나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두 사람의 프로파일러는 8시간 동안 피의자를 상대로 범죄심리분석을 진행했는데 그는 8시간 내내 감정의 기복이 심하게 나타났다. 보통 프로파일링을 진행하다보면 답변을 안 하거나 속이려고 해서 힘든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의 경우에는 그 경우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는 상대를 경멸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가 무슨 일인지 마지막 30분 동안에 의미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아서 겨우 기록할 수 있었다. 늙은 형사가 무슨 말을 해서 그를 부추기고 자극했던 것인가.
    “넌 천재야! 천재라고! 우리가 천재를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야, 처음이라구. 10년 만에. 영광이라고 해야겠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왜, 아니겠나. 그렇다니까.”
    그는 정수리까지 벗겨진 짧은 머리를 쓸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상냥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 형사는 안경을 벗고 눈 밑 부풀어 오른 살덩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안경에 가려져있던 눈은 흐리멍텅했고 몹시 피곤해 보였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피조사자의 탁한 음성에서 새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벽에 그린 뱀 그림 말이야, 전문가가 보더니만 천경자 화백이 아주 옛날에 그린 그림을 모방한 거라고 하더구만. 그 화백은 그 뱀 그림 때문에 유명하게 되었단 거야.
    그런데…… 네 그림은 원작만큼 정교하게 잘 그린 그림이라고 하더라고. 살아서 막 꿈틀거리지. 난 그림에 조예가 없지만…… 내가 보기엔 원본보다 더 살아있게 보이더라고. 네 재능이 아깝다는 거야. 천재 화가가 됐을 텐데 말이야.”
    “미술 시간에 그 그림을 본 기억이 나서 그대로 그려 본 거예요. 그 뿐이에요.”
    “그런데 말이야, 왜, 하필 그런 징그러운 뱀에게 필이 꽂혔을까?”
    “뱀은 지혜롭지요. 여자를 유혹해서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신은 뱀을 질투했겠지요. ‘나는 너를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라고 신이 말했어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이지요.”
    “성경이라고……”
    “그래도 소용없어요. 저는 절대로 안 했다구요. 믿어 주세요. 경찰은 자꾸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하네요. 그때 다 말했거든요.”
    헛소리 좀 작작 하라고. 빨리 불란 말이야, 이 개새끼야. 끝까지 안 불려면 오늘 저녁에라도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유치장 안에서 혀를 깨물고 아니면 목을 매서 죽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편안히 쉴 수 있을 거야. 네가 그렇게 말해도 소용없어. 완전히 미친놈이니까.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고. 우린 사체가 묻힌 곳만 알면 된다고.
    “우리도 믿고 싶지. 우리가 조사해보니까 말이야. 너는 중학교 때까지 공부도 너무 잘했어. 전교 1등이었으니까. 그렇게 시궁창같은 환경에서도 말이야. 머리가 너무 뛰어난 거야. 그때 가출하지 않고 계속 나아갔더라면 의사가 되거나 고시에 합격해서 판검사가 됐을 거야.”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우시죠. 절 놀리려고……”
    “우린 진심으로 정말 걱정하는 거라고. 안타깝다고……. 형사가 할 소리는 아닌데 말이야, 오해는 하지 말라구. 그렇게 머리가 좋은데, 생활기록부를 보니까 아이큐가 150이 넘더라고.
    그렇다면…… 쩨쩨하게 이따위 살인을 할 게 아니라 큰 걸 한탕 해먹었어야지. 일확천금을 노려야 한단 말이야. 금융투자 사기나 대출 사기, 다단계 사기 같은 거를 해먹고 해외로 튀는 거야.
    몇 백 억을 해먹어도 잡혀봤자 6년이나 8년 쯤 살면 되거든. 무전유죄, 유전무죄라고 전관예우 잘 받는 거물 변호사를 사면 더 짧게 살다가 나올 수도 있거든……”
    “진즉 형사님을 만났다면 좋을 뻔 했습니다. 평생 술집 종업원만 했단 말입니다.”
    “고집을 피워 봐도 소용없어. 국과수에서 네 방에서 나온 털을 가지고 DNA검사를 했는데 피해자의 것과 일치했어. 빼도 박도 못 할걸. 그리고 네 차에 사체를 실었을 때 무게를 측정해 봤더니 시체의 무게가 52킬로그램이 나가더라고. 그 여자 키가 161센티미터이고 몸무게가 52킬로그램이야.”
    “어떻게 그걸 측정했단 말인가요?”
    “범죄도 첨단이고 수사기법도 첨단인 시대인 거지.”
    “……”
    “왜 그랬어?”
    “여자들이 거리에서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가지요. 또는 온몸을 위아래로 훑으면서 째려보기도 하지요. 어떨 때는…… 술집에서 여자가 담배꽁초를 제 얼굴에 던집니다. 그러한 사소한 일은 제가 끝까지 참아냈지요. 속으로는 죽이고 싶었지만 말입니다.”
    “그게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
    “그렇고말고요. 여성들이 나를 견제하려고 괴롭힌단 말입니다. 저는 선릉역 뒤쪽 룸살롱에서 종업원으로 열심히 일을 했는데 괜히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난다는 등, 위생이 불결하다는 등 하면서 저를 쫓아냈어요.
    이건 전부 여자들의 음해 때문인 것이죠. 그곳에는 100명이 넘게 근무했거든요. 대부분이 2차를 나갔어요.”
    “구속되기 전에 목욕은 언제 했는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몇 년은 된 것 같기도 하구요. 신이 제게 목욕을 하면 안 된다고 지시를 했거든요.”
    “그 피해 여성과는 알고 지내는 사이인가?”
    “전혀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날 밤 그 여자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지?”
    “골목을 왔다 갔다 하다가 그 여자와 마주친 것입니다. 그래서 마취제가 묻은 손수건으로 여자의 입을 가려서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해가지고 어깨동무를 하고 저의 집으로 데리고 왔지요.”
    “일반적으로 여자들에게 반감이 있는 여성혐오자가 아닌가?”
    “저는 여성혐오자가 아닙니다.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거든요. 그러나 결국 여성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당했기 때문에 범행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더 이상 당하고만 있다가는 내가 죽을 것 같아 먼저 죽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나? 안 그런가?”
    “잘 모르겠어요.”
    “그래. 치료는 잘 되었나?”
    “약을 먹었지요. 안 먹은 때가 더 많았지요. 의사가 막 야단을 쳤지만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요. 전 멀쩡했거든요.”
    “그 이전에도 어떤 종류의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있었던가? 우리가 조사해 보니까 폭력으로 소년원에 갔다 온 적이 있던데. 또 다른 살인 같은 거 있으면 다 털어 놓으라고. 우리가 다 들어줄 테니까”
    “그것밖엔 없습니다. 다른 건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피해자들을 선택하게 되었지?”
    “제가 그쪽 골목을 잘 알지요. 가끔 지나다녔습니다. 그리고 그쪽에 여자들만 사는 빌라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 여자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이유가 있었나? 성추행이나 성폭력을 한 일은?”
    “저는 성추행범도 아니고 성폭력범도 아닙니다. 그냥 하느님이 그 여자를 찍어서 시켰기 때문에 그대로 한 것 뿐 입니다.”
    “넌! 지금! 우릴 핫바지 취급하고 있어. 여자가 어떻게 집에까지 갈 수 있었겠어. CCTV에 그런 장면은 없었어. 소설 쓰지 말고, 솔직히 좀 말하라고. 우리도 가정이 있으니까 빨리 끝내고 퇴근해야 할 거 아냐. 거기 카페에서 10시 경에 일행이 헤어졌거든. 그 후 어떻게 했느냐 말이야?”
    “솔직히 말씀 드릴게요. 저는 한때 신촌의 으슥한 뒷골목에 있는 여성 전용 호스트바에서 종업원으로 있었어요. 저는 종업원이 직업이거든요. 아무튼 그 술집에는 레즈비언들이 단골이었어요.
    자기들끼리 술 마시고 가끔 껴안고 입 맞추고 했지요. 그리고 함께 나갔어요. 그런데 혼자서 오는 여자들도 있었거든요.
    그 여자들이 술에 취하고 몹시 외로우면 종업원들에게 집적거렸어요. 그래서 알게 된 거예요.”
    “계속 해 봐.”
    “그날 신촌역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뒤에서 가만히 따라 갔어요. 회사 사람들하고 카페에 들어갔지요. 저는 밖에서 3시간이나 기다렸고요.”
    “그러고 나서 집으로 함께 갔단 말이지.”
    “반가워 하더라구요. 술기운도 있었구요. 술을 무지하게 잘 마시거든요.”
    “그런데 왜 죽였어?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잘 모르겠어요. 여자가 보채니까 갑자기 싫더라구요.”
    “그게 말이 되는가? 왜? 왜?”
    “전 여자를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커피 한 잔 하자며 억지로 따라왔다니까요. 여자가 ‘병신 같은게……’라고 말했지요. 여자가 절 죽이려고 하니까 내가 살려면 여자를 죽여야만 했지요.”
    “다시 말해봐. 어떻게? 여자가 어떻게? 어떻게 했냐구?”
    “여자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절 죽이려고 작정했다니까요…… 그 순간 악마로 변한 거예요…… 처음부터 악마였을지도…… 제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 그때 신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 여잘 죽이라고 명령…… 어떻게 신의 명령을 거역할 수……? 그렇지요…… 그랬다니까요……”
    “화제를 한 번 바꿔보자고. 어머니는 어디에 있지? 어딘가에 살고 계시지 않겠어? 부모님과 관계는 어땠어?”
    “저는 중학교 졸업하고 나서 가출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증오합니다. 악마 중에 악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를 너무 좋아했지만 어머니는 나를 버리고 떠났어요. 그래서 그 후 저도 가출했습니다. 아무리 죽도록 맞아도 어머니가 곁에 있었으면 안 아팠거든요. 여수를 떠나면서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지요. 그래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 술집이 어디야?”
    “진즉 없어졌지요. 워낙 뒷골목이라서 장사가 안 됐거든요. 그리고 사장님은 필리핀으로 갔다고 나중에 들었어요.”
    “강남의 룸살롱에서는 뭘 했었나?”
    “요즈음 아가씨들은 다루기가 힘들어요. 옛날에는 업소가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다 했지만 지금은 아가씨가 왕이란 말입니다. 아가씨가 없으면 영업을 못하니까요. 그리고 그것들이 조금만 눈에 띄면 조건이 좋은 대로 튀어버려요. 그래서 수익 배분도 업소와 아가씨가 6대 4였는데 5대 5로 가더니 지금은 거꾸로 4대 6이 되어 버렸어요. 걔들이 밤에는 일하고 낮에는 외제차 타고 다닌다니까요.
    그래서 아가씨들을 잘 관리해야 해요. 온갖 심부름과 비위를 다 맞춰주지요. 정말 싫어요, 싫다고요. 지독한 암컷들.”
    처음으로 여자 형사가 말문을 열었다. 그녀는 군인처럼 머리를 짧게 커트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위압적이지 않고 기어 들어가는 것처럼 가늘었다.
    “우리 사회를 증오하고 있겠지요. 그렇지 않은가? 자신은 버림받고 학대 받았으니까. 그런 거지 뭐. 그렇지 않아요? 피의자는 사람들에게 적의를 품고 사람들은 그러니까 피의자에게 적의를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와! 예쁜 여자가 처음 입을 열었네. 커피나 한 잔 타주지 그래요? 거기에 독은 타지말고.”
    “……”
    “그런데요. 그럴 리가요. 전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래봤자 종업원…… 종업원이 평생 제 직업이지요.”
    “벽면에 가득 찬 낙서 말입니다. 그게 무의식적으로 마음의 상태를 나타낸 것 아니겠습니까? 심리학적으로 분석한다면 정상적이라고 판단할 수 있겠는데요.”
    “그렇겠지요.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 그림을 보면 천재성과 함께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괴물이거나 완전한 정신병자로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고등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지요? 왜 그랬어요?”
    “제가 학교에 있는 쓰레기통은 죄다 불을 질러버렸어요. 그러니까 답답한 기분이 풀리면서 상쾌해 지더라구요. 그랬더니 1등을 하고 있는 저에게 무기정학을 내렸습니다. 학교가 저를 버린 것이지요. 학교가 그런 가혹한 처사를 한 것이란 말입니다.”
    “한 때는 담배를 태웠던 것 같습니다. 코카인 같은 마약을 한 일이 있었던가요?”
    “마약은 안 했습니다. 제 정신을 좀 먹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친한 친구나 연락할 지인이 있는가요?”
    “저는 평생 외톨이였습니다. 친구 같은 건 없습니다.”
    다시 남자형사가 무겁게 가라앉아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체는?”
    그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갑자기 킬킬거리며 웃는다.
    “아삭아삭 씹어 먹어 버렸어요. 뼈는 잘게 부숴서 봉투에 담아 쓰레기통에 버렸고요.”
    “인체는 아삭아삭하지 않지. 기름에 튀기지 않았다면 말이야. 생으로 먹으면 질기고 짜지. 그래서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고 나서 하루 종일 냇가에서 물을 마신다고 하지 않는가. 어때?”
    “형사가 그걸 직접 먹어 봤나요?”
    “그렇지. 진짜 형사가 되려면……”
    “그렇다면 삶아 먹었겠지요.”
    “그만하라고. 차에 실었잖아. 그러니까 어디로 갔어?”
    “기억이 안 나요.”
    “잘 생각해 보라고. 금세 기억이 돌아올 거야. 기억이란 그런 거야.”
    “……”
    “이제 기억이 나나?”
    “바닷가에 있는 도로예요.”
    “좀 더 구체적으로……”
    “그러니까 말이에요. 긴 방조제를 달렸어요. 오른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호수가 보였지요. 저 멀리 광활한 갈대밭이 펼쳐져 있었어요. 저는 갈대를 좋아하거든요.”
    “그리고……?”
    “한참 계속 달렸어요. ‘301번 지방도’라고 팻말이 서있는 도로를……”
    “더 말해 보라고. 그 도로는 60킬로미터가 넘어.”
    “모르겠어요. 더 이상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럴까? 넌 여수에서 살았으니까 동백섬도 기억나고 동백나무도 기억날 것 아닌가?”
    “네. 물론입니다. 동백꽃은 너무 아름답지요. 이른 봄에…… 지금쯤 피니까요.”
    “그래, 이만하자고. 피곤하구먼. 더 자세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진술서를 써서 내도 좋아. 우리가 열심히 읽어줄게. 담배를 끊었는데……”

    “어떻게 분석하고 평가해야 할까?”
    “글쎄요. 지독한 정신분열인지 약간 정상인지 판단하기가…… 혼란스럽지요. 전 아직 경험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그 낙서들과 그림을 보아도 그렇지. 7시간 30분동안 미친놈처럼 횡설수설하다가 마지막 30분 동안만 약간 정상이었지.”
    “인성검사(PI)에서도 사이코패스는 안 나왔어요.”
    “쓸모 있는 그럴듯한 진술은 잠깐이었어. 그 인간이 설마 우리를 가지고 논 것은 아니겠지? 그림을 보면 진짜 천재처럼 보이거든. 주정뱅이에다가 폭력적인 아버지가 문제였어.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물증인 사체는 찾을 수 있게 되었어. 그게 성과이지. 우리는 성공한 거야.”
    “아직 사체가 매장된 장소는 말 안 했거든요?”
    “화성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의 수사본부에서 2년간 파견 근무를 했었지. 죽도록 고생만 하고 아무런 성과도 없었지만 말이야. 단서 한 조각 찾아내지 못했다고. 영구 미제 사건이 되어버렸고 공소시효마저 끝나버렸지.
    우리 경찰의 수치인 거지. 그러나 범인은 죽었다고 보아야겠지. 자살할 놈은 아니고…… 살아 있다면 절대로 범행을 멈추지 않았을 거고. 그놈은 살인을 통해 자신의 나약함에서 벗어나고 시체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려는 자기도취증이 있는 사이코가 틀림없을 거야.
    그런데 2004년에 또다시 화성 여대생 피살사건이 있었단 말이지. 그거 역시 장기 미제 사건이라고. 그렇지만 ‘태완이 법’으로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시효문제는 해결이 된 셈이야. 공소시효가 폐지되면 범죄자는 끝까지 쫓겨야 한다는 부담감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경찰이 끝까지 수사한다는 것만으로도 억울한 피해자 가족들에겐 큰 위안이 될 거야.
    어쨌거나 그곳 사정과 도로, 지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 2년 간 쥐 잡듯이 뒤지고 다녔으니까. 최근에 화성경찰서에 연락을 해 봤는데 CCTV가 8킬로미터 간격으로 띄엄띄엄 설치되어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도 스포티지가 통과한 도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특히 도로가에 동백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 곳은 몇 군데가 되지 않을 거야.
    그 자식의 낙서에 보면 서로 다른 벽면에 검은 바다, 호수, 갈대밭, 동백꽃이라고 휘갈겨 놓았어. 거기에 단서가 있는 거지. 아무리 용의주도한 범인이라도 무의식중에 단서를 남기는 법이니까.”
    “그렇군요. 언젠가? 정신분석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요.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은 어땠나요?”
    “내가 그 쪽에 관심이 있어서 정신과 교수한테 특강을 받은 적이 있었거든.”
    “어떻게요?”
    “그냥 찾아가서 들은 거야.”
    “그게 수사에 도움이 되었나요?”
    “큰 도움이 된 건 아냐. 그래도 많이 알게 되었지. 무어냐 하면 말이야…… 정신분석에서 대화는 환자가 실제 체험했던 것이거나 정말로 생각했던 것을 찾아내는 게 목적이 아니더라고.
    다시 말하면 정신분석은 진상을 규명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피분석자가 거짓 기억을 생각해내서 진술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는 거야. 그러니까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데 그게 바로 헛소리라는 거지.
    거기에서는 대화 자체가 중요한 거고 그게 치료 방법이야. 그냥 대화를 통해서 정신분열증의 증상이 소멸되게 하는 거라고. 그런데 우리는 그 자식의 헛소리 중에서 수사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게 중요했어. 치료는 무슨…… 그건 정신과 의사가 해야 할 일이거든.
    그걸 찾아내기 위해서는 길고 긴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말을 건네서 말이 많이 나오도록 하는 거란 말이지. 그가 되는 대로 지껄이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징하는지를 알아내야 하니까. 분석가는 끈질기게 들어주는 게 중요해. 예전 형사 시절 못된 버릇이 남아 있어서…… 인내심이 부족해. 윽박지르고 싶거든.”
    “잘 참으셨는데요. 뭘……”
    “내가 참았다고?”
    “오늘은 힘들었겠지만…… 좋은 경험이 되었겠군요.”
    “그렇다면 천만다행이군. 결론을 내리자면…… 결국 우발적인 거였어. 피해자에게도 조금 책임이 있고. 연쇄는 아닌 거지. 현장검증은 강력계에서 하겠지. 그렇게 보고서를 작성하는 거야.”
    “잘 알겠습니다. 보고서는 내일 오전까지 올리겠습니다.”
    “그래, 길고 긴 하루였어. 퇴근하자고…… 담배가……”
    “저녁 식사나 하시죠. 술 좋아하시잖아요?”
    “좋지, 좋아. 그런데 식사하다 보면 약간 이야기가 길어질 텐데. 정년이 몇 년 남았지만 명예퇴직하기로 결정하였다네……”
    “어떻게 그럴 수가?”
    “어쩔 수 없었다네. 어려운 결정이었지. 악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산 게 너무 오래되었어. 그들을 보면서 인간의 잔혹함이 어디까지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네.
    내가 우리나라 범죄사에 남을 만한 연쇄살인범들과 흉악범들을 모두 조사했지 않았나. 큰 상도 많이 받고 특진도 하고 그랬지. 그런데 큰 상을 받으며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은 가족이나 동료가 아니었어. 담당했던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이었지. 타인에게 매우 불행한 일인 범죄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계속 찜찜했었다네. 어쩐지 미안했거든……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지. 이제는 오랫동안 소홀히 했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구만……”
    “그렇게 가시면…… 전 어떡하라구요?”
    “좋은 분이 올 거야…… 그렇지…… 그렇지 않겠나.”

    강력계 형사들은 피의자의 심각한 환각 증상이 혹시 마약 복용의 부작용인지 판단하기 위해 그의 머리카락 300여개를 채취하여 마약 투약 여부를 조사하기로 하였다. 피의자의 머리카락을 넘겨받은 국과수는 머리카락의 무게를 잰 뒤 화장품이나 염색약 등 이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물과 알코올로 세척하여 분말에 가까울 정도로 잘게 분쇄했고, 마약 성분이 용매에서 우러나오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화학분석 작업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만약 그가 마약을 투약했다면 그 마약의 종류가 필로폰, 코카인, 엑스터시, 스파이스, 대마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300개의 머리카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약 성분은 검출되지 아니하였다. 다시 말하면 최근 1년 동안 마약을 투약한 사실은 없었던 것이다.

    배심원은 시민인 피고인을 재판하는 동료 시민이다. 배심원은 원칙적으로 만 20세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될 수 있고 특별한 제한은 없다. 다만 원한다고 누구나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배심원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재판은 국가업무이므로 외국인은 배심원이 될 수 없다. 배심원의 임무는 국가업무인 재판업무이므로 배심원은 일시적으로 공무원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공무원이 될 수 없는 사람은 배심원이 될 수 없다. 법원은 미리 작성된 배심원 후보 예정자 명부 중에서 필요한 수의 배심원 후보자를 무작위 추출방식으로 정해 배심원과 예비 배심원 선정기일을 통지한다. 배심원 후보자는 선정기일에 출석해야 한다. 배심원 후보자들이 출석하면 배심원 선정 절차가 시작된다.
    배심원은 출석한 배심원 후보자 중에서 추첨으로 결정한다. 추첨으로 선정된 사람은 우선 배심원 후보자가 되고 이들에게 검사와 변호인이 질문을 한다. 질문과 답변을 바탕으로 검사, 변호인은 배심원 후보자를 기피할 수 있다.
    무이유부 기피는 검사와 변호인이 배심원 후보자에 대해 이유를 제시하지 아니하고 기피 신청을 하는 것을 말한다. 무이유부 기피는 이유부 기피와는 달리 사실적, 법률적 이유가 없음에도 배심원 선정을 기피할 수 있는 경우다. 검사와 변호인은 질문을 통해 법률적 이유까지는 아니지만 편견이 있다고 느낀 경우 배심원 후보자를 배제할 수 있다.
    배심원 선정 절차는 오전 10시부터 진행되었다. 이 절차는 비공개가 원칙이지만 법정 경위가 일일이 신분증 검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 40여명의 배심원 후보가 방청석에서 대기했고 법대 앞쪽에 놓인 백색 추첨함 안에 참여관이 팔을 넣어서 휘휘 저었다. 번호가 뽑힌 후보자는 배심원석에 1번부터 차례대로 착석했다. 배심원단은 예비 배심원 1명을 포함하여 10명으로 구성되었는데 남자가 4명, 여자가 6명으로 구성되었다.
    배심원 후보자들은 모두가 똑같이 ‘열 명의 범죄자를 풀어주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처벌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이 나오더라도 열 명의 범죄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보는지?’를 질문 받았고, 또한 ‘가족이나 지인 가운데 폭행 혹은 살인사건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검찰 측에서 4명을 배제 요청했고 변호사는 신문이나 TV를 통해 사건 내용을 자세히 알고 있어서 유죄의 심증을 굳혔다고 의심되는 5명을 제외하였다. 그러나 변호사는 의식적으로 여자 배심원을 고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배심원이 된 당사자들의 기분은 어떨까? 국민의 의무이니까 하게 되었지요. 바빠서 하고 싶지 않았지만 선출되었으니까 하게 되었어요. 전부터 꼭 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판사가 된 기분이 어떤지 알아보려고요.
    정면 법대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른쪽으로 2열로 된 배심원석이 있고 배심원석 옆에 검사석이 붙어있고 건너편에 증인석과 변호인석, 피고인석이 있다. 그 가운데에 속기석이 있고 참여사무관의 책상이 있다. 그리고 스크린은 배심원들이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벽에 설치되어 있다.
    재판장이 말했다.
    “지난 공판기일에 증거 조사가 일단 끝났지요. 원래 국민참여재판은 집중심리를 하여 하루 만에 끝내는 것이 원칙이지요. 그러니까 재판을 종결하고 평결에서 판결까지 한꺼번에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변호인 측에서 증인신문을 요청했기 때문에 공판 기일을 두 번 열게 된 것입니다. 배심원들께서는 이 점 양지해 주십시오. 증인들은 출석했는가요?”
    증인 선서가 끝나자 변호인이 증인신문을 시작했다.
    “아들인데 알아볼 수 있겠어요? 헤어진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말입니다.”
    “물론……늘 생각하고……”
    “정확히 언제쯤인가요? 헤어진 게 말입니다.”
    “글쎄요……1995년 쯤 되겠네요. 그때 서울로 올라왔응께……”
    “아들과 헤어진 경위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머니는 그때 하염없이 울기 시작했고 배심원들은 깜짝 놀라서 시선을 집중한다.
    “진정하시고. 천천히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그 남자와 만나서 동거를 시작했을 때 아들은 막 돌이 지났응께…… 지 엄마가 남자의 행패를 못 이겨 도망가고 나서 몇 달 지나서 들어갔…… 여수 동백섬 입구에 있는 쬐끄만 식당에서 일했는데 그 남자가 같이 살자고 꼬드겼는데…… 넘어간 것…….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힘들 때라서…….”
    “그 때가 몇 살이었지요?”
    “마흔이 넘었응께……”
    “그러면 그 남자와는 얼마나 함께 살았는가요?”
    “꼬박 12년을 살았…… 참고 참았는디…….”
    “그 남자는 무슨 일을 했었지요?”
    “어판장에서 잡일을…… 그리고 매일 술마시고……”
    “범죄행동분석관들이 심리검사를 한 결과 어머니는 좋아했으나 아버지를 몹시 증오했습니다. 어떤가요?”
    “그 사람은 평소에는 참 착했는데 술만 마시면 획 가버렸응께…… 사람이 갑자기 변해서 물불 안 가리고 행패를 부렸당께. 닥치는 대로…… 정말 죽도록 때렸어요. 나는 물론이고 쟤까지를…… 지가 그랬어요. 나만 때리라고…… 어린 것까지…… 그 남잔 도망간 쟤 엄마가 밉다면서……”
    “증인은 그 남자와 사이에서 자식을 안 낳았는가요?”
    “지가 돌팔이한테 임신중절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뭐가 잘못 돼서 임신이 안 된다고…… 쟤를 친자식 이상으로 아끼고 키웠는디…… 아버지가 그렇게 때리니 애가 주눅이 들어가지고 말을 더듬고 밤마다 오줌을 쌌어요. 그러면 병원에 데려갈 생각은 않고 더 날뛰고 때렸응께……”
    “한마디로 아들은 너무 불행했군요. 불행했습니다. 어린 시절이 말입니다. 그랬으니 그 불행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친 엄마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그렇지요. 끝내 몰랐을…… 맞는 말…… 지 애비가 그렇게 만든 거구만요. 지는 끝까지 버틸 수 없어…… 참다 못해 도망쳤는디. 아들한텐 한 없이 미안하구먼…… 미안하다. 미안…… 내가 나쁜 년이여……”
    “서울에 올라온 후에도 그 남자와 아들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는가요?”
    “그 남잔 여자를 잘 후려쳤…… 여자들은 실컷 두들겨 맞고 다 도망을…… 그 남잔 맨날 그렇게 술을 쳐마셨으니…… 위암인가 대장암으로 죽었…… 그 인생이 불쌍…… 쟤는 여수에서 중학교까지 마치고 어디로 간 것만 알았…… 그림 잘 그리고 공부 잘 하는 천재로 소문났…… 인생이 그렇게…… 오늘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평생을 식당일을 벗어나지 못했으니께 찾을 염두를……”
    그녀는 다시 한없이 슬프게 울었다. 배심원 중에서 중년 부인이 그만 참지 못하고 훌쩍거렸다.
    재판장이 말했다.
    “검사께서 반대신문을 하시겠습니까?”
    “없습니다.”
    판사가 말했다.
    “다음 증인 나오시지요.”
    변호사가 신문을 하기 시작했다.
    “증인은 연세세브란스병원 정신과에서 과장으로 오랫동안 근무하셨네요. 바쁘실텐데 나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 피고인을 알고 있지요? 치료를 담당한 일이 있었지요?”
    “그렇지요. 제가 오랫동안 담당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신분열증에 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언제부터인가 이 병을 조현병이라고 하더군요.”
    “현악기의 현은 악기에서 소리를 내는 줄인데요…… 정기적으로 조율해주어야 합니다. 조현이란 것이 현악기의 줄을 고른다는 의미이지요. 줄이 고르지 않으면 이상한 소리가 나게 되는 것입니다. 뇌의 신경세포는 현악기의 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병에 걸리면 신경세포의 연결에 이상 징후가 보인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신분열증은 편집증적 정신분열증이라고 해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피해망상이나 자신이 굉장한 사람이라고 착각을 하는 과대망상을 하는 병이 있구요, 또 긴장성 정신분열증과 분열성 또는 미분화성 정신분열증이 있는데 편집증적 정신분열증이 가장 문제가 됩니다.”
    “정신분열증의 증상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이 병은 15세에서 25세 사이에 초기 증상이 나타납니다. 그때는 부모들이 청소년기의 반항이나 약물사용에 의한 증상으로 착각을 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원인은 매우 다양하겠지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유전적 성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2월이나 3월에 태어난 아이들에게서 이 병에 걸릴 확률이 높게 나타난다고 통계 수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현병은 100명 중 1명이 걸리는 아주 흔하디 흔한 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의학에서 이 병은 신경 전달 물질인 도파민이 분비되는 과정에서 균형이 깨져 발병하는 것으로 밝혀냈습니다. 그래서 가장 성공적인 치료제는 도파민의 생성을 조절하는 약입니다.”
    “이 피고인의 초기 증상은 어땠습니까?”
    “다른 사람과 전혀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목욕을 너무 오랫동안 하지 않거나 씻지 않아서 지저분한 모습으로 병원에 나타났습니다. 진단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신과 다름없는 초인적인 능력이 있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만간 자신이 유명한 영웅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환청을 듣는데 환청에서 자신을 모욕하는 말을 듣거나 신이 자신으로 하여금 무슨 위대한 일을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이 병은 망상과 환청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망상 속에서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타인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성적인 판단을 하거나 충동을 조절하는 게 사실상 어려워집니다. 이렇다보니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분노가 쌓이는 것입니다.”
    “증인께서 이 화면을 봐 주시겠습니까? 피고인의 방이지요. 이 낙서들을 주목해 주십시오.”
    화면 가득히 쓰레기 하치장처럼 지저분하게 널려있는 방안의 모습과 벽면에 가득 차 있는 낙서들이 보였다.
    “그렇지요. 방 안에 널려있는 것들, 낙서와 그림을 보면 정신분열증의 증상이 더욱 뚜렷이 보입니다.
    환자는 쓰레기 같은 사물들을 인격화해서 그것들에 대해 충성심을 품고 신에 대한 것처럼 경건한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소한 물건들을 좁은 집안에 비축하는 사람들은 사회적 은둔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콜라주 그림은 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정신과적으로 문제가 있는…… 비정상적인 상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끔은 정상일 때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치료를 했는가요?”
    “증상이 심했기 때문에 안정을 위해서 입원이 필요했습니다만 그럴 형편이 못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입원 시설도 마땅치 않습니다. 아주 열악하지요.
    그곳에서는 치료제를 제대로 먹었는지 검사하거나 운동을 시킬 때를 제외하고는 환자를 방치하다시피 합니다. 그러니까 환자가 얌전히 곯아떨어지도록 격렬한 운동만 시키는 겁니다. 이게 제대로 된 치료라곤 할 수 없겠지요.”
    “그러면……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요?”
    “글쎄요…… 요원한 일이기는 합니다만, 정신과 전문의와 직업재활 훈련가, 사회복지사, 교육 전문가 등으로 이루어진 전담 팀이 환자의 증상과 성격, 가족관계 등을 면밀히 조사해서 맞춤형 집중치료를 하는 것이 필요하지요.”
    “정말…… 우리나라에서는 언감생심이군요. 그렇다면 주로 약물치료를 했다는 이야기인데 어떤 약물을 투여하였는가요?”
    “……초기에는 약물치료를 했는데 할로페리돌이나 클로르프로마진같은 항정신성 약물을 투여했습니다. 이 약들은 정신분열증의 예후를 훨씬 좋게 치료하는 약으로 알려져 있거든요. 그러나 항상 성공적이진 않았습니다. 환각과 망상을 줄이기는 했습니다만. 시간이 걸리고 지속적으로 약물에 의존해야 하는 부작용이 있었습니다.
    그 부작용 중에도 심한 것은 입이 마르고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소변을 보기 어려운 증상이 나타납니다. 또 장기 복용할 경우 운동장애 증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면 피고인은 약을 제대로 잘 복용하였는가요? 치료 경과는 어떠했습니까?”
    “피고인은 제 말을 잘 듣지 않았습니다. 약도 제대로 먹지 않고 병원에 잘 나타나지도 않았습니다. 정기적으로 나와서 진단을 받고 약을 처방 받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주 심할 때만 제 발로 걸어서 왔었습니다. 가족 관계를 물어봐도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일체 대답을 하지 않았지요. 가족들의 협조가 중요한데 말입니다.”
    “가장 최근에 온 게 언제입니까?”
    “한 일 년인 지…… 이 년인 지 된 것 같습니다. 이때는 새로 나온 클로자핀을 처방하였지요. 그러나 지금 보니까 약을 제대로 먹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헌팅턴 병에 의한 중증 치매는 조현병 같은 정신질환과 유사한 증상이 있다고 하던데요? 시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점에서요. 그렇다면 혹시 치매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긴 합니다. 그러나 치매는 아닙니다. 그건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치매와 조현병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그건 간단합니다. 조현병은 치료제가 많이 나왔고 그래서 충분히 치료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치매는 ‘나를 잃어버리는 병’입니다. 아직까지 특별한 치료가 없지요. 그러니 증상이 계속 악화된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현병을 치료하는 좋은 약이 나왔다고 했는데요.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이 있는가요? 완치가 가능한가요?”
    “완치가 가능한지는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요. 그러나 엄격한 스케줄에 맞추어 약물을 투입하는 복합치료를 하면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요. 치료약을 먹기 시작하면 균형이 깨져있는 뇌의 상태를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좋은 약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조현병 환자가 특별히 폭력성이 있다거나 위험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병의 경우 특별히 위험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의 쓸데없는 편견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병과 폭력과의 인과관계는 증명된 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일부 연구에 의하면 조현병 환자들의 범죄율은 일반인에 비해 더 낮거나 비슷하다고 나와 있습니다.”
    “증인의 말에 의하면 피고인은 중증 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속적인 치료도 필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피고인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씀드리면 처벌을 해야 옳겠습니까, 치료를 해야 합니까?”
    “피고인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미쳐버린 것입니다.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도덕관념도 없고 살인이 무슨 의미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마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믿는 사람이니까요. 이 사건에서도 환각에 의해 여자가 악마로 보였던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피고인을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에게 무슨 책임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치료가 우선이지요. 치료하면 됩니다.”
    검사가 보충 신문을 했다.
    “제가 몇 가지 묻겠습니다. 물론, 외국의 경우입니다만, 연구에 따르면 조현병 환자에게서 폭력성을 보이는 경우가 일반인보다 더 많다는 보고가 최근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조현병 환자가 왜 범죄를 저지르는지 그 이유에 대한 연구서를 보면…… 첫째는, 보호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환자를 관리해주는 가족을 구속하는 사람이거나 자신에 대한 방해물로 여기고 이를 참지 못해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조현병의 증상인 망상이나 환청 때문에 범죄를 일으키는 경우입니다. 조현병 환자의 일반적인 경우인데요…… 저 사람을 해치우지 않으면 너가 다친다는 환청을 듣거나 또는 저 사람이 나를 해치려 한다는 피해망상 때문에 살인 등 범죄를 저지른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조현병과는 별개로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처럼 반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범죄를 일으키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에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많다고 합니다.
    넷째는, 조현병 환자 중에서도 약을 제대로 안 먹거나, 반사회적 성격장애가 동반되거나 알코올에 중독된 환자들이 주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조현병의 경우에는 다른 정신질환에 비해 알코올 중독, 우울증, 공황장애 같은 다른 종류의 질병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느 나라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외국과 우리나라는 생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다고는 인정하기 곤란할 것입니다. 이 사건의 경우 환자는 약을 제대로 안 먹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 사건의 경우 범행 수법이 교묘하면서 잔인했고 지능적이었습니다. 검찰 조사에서도 섬망과 언어장애로 인해 진술을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가끔은 조리있게 대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심신미약은 몰라도…… 심신상실의 상태였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재판 전략상 중증 환자인 것처럼……”
    “정신과 의사의 견해로서는…… 그의 뇌는 이상하게 망가져서 도덕적 기초가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의식 상태로는 현실을 논리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재판 전략을 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재판장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변호인께서 피고인 신문 하시겠습니까?”
    변호사가 피고를 향해 말했다.
    “피고인은 증인으로 나온 어머니를 알아보았는가요?”
    피고인은 여전히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고 있다. 피고인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방청석에 앉아있던 어머니는 다시 울기 시작했고 그것이 전염되었는지 그 중년의 여자 배심원이 다시 훌쩍거렸다. 그 우울한 감정은 다른 배심원들에게도 이심전심으로 전달된 것처럼 보였다.

    첫 날 공판 기일에서 공판검사가 공소사실과 죄명(당연히 살인죄, 사체손괴죄, 사체은닉죄였다), 적용 법조문을 낭독하자 피고인석에 앉아있던 피고인은 얼굴을 숙인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수척한 모습으로 옅은 하늘색 수의를 입고 흰 고무신을 신고 있다. 판사는 물론이고 배심원 등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그저 쾡 하니 초점 없는 눈으로 가끔 법정의 둥근 천장을 쳐다볼 뿐이다. 재판 도중에는 지루한 표정이었고 입술 사이로 침을 흘리기도 했다.
    검사가 사건 현장의 사진과 방수포에 펼쳐진 동강난 사체의 사진을 증거로 화면에 제시하자 배심원들과 방청객들은 일제히 신음인지, 탄식인지를 내뱉었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검사는 최후 의견에서 피고인의 범행 수법이 잔인하기는 하지만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피해자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고 우발적인 범행인 점, 초범인 점, 피고인이 어린 시절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고 지금 스스로 자책하면서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그러나 현재 중증의 정신병으로 치료가 되지 않은 점 등을 참작할 필요가 있기는 하나 살인이라는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으므로 처벌을 면할 수 없다는 점, 재범의 위험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으므로 이를 감안해야 한다고 하면서 징역 5년을 구형하였고 동시에 치료감호법에 의거해서 치료감호를 청구하였다.
    이에 국선 변호사는 마지막 변론을 하였다.
    “검사님께서도 잘 아시겠습니다만…… 그리고 피해자에게는 죄송하긴 합니다만…… 피해자는 스스로 범행을 자초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극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시체에서는 아무것도 안 나왔어요. 깨끗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피고인은 성폭행범은 아닌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피고인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불우한 환경에서 불행하게 자랐지만 참으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사회의 밑바닥에서 종업원으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모든 범죄에는 반드시 그 밑바탕에 동기가 깔려 있지요. 특히 살인죄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는 아무리 찾아봐도 마땅한 살인의 동기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차별대우를 하고 있고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타인과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밀접하게 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내면적으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 분노가 자기 자신을 향할 때는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지요. 과거의 무의식적인 정신적 외상 때문에 망상과 환각이 수반되었습니다. 꿈속에서처럼 토막토막 연결되지 않은 환각 상태에 빠져있었단 말입니다.
    법원에서 실시한 공주치료감호소의 정신감정 결과를 살펴보십시오. 이 감정에는 검사님도 전적으로 동의하셨고 권위 있는 감정기관에서 정밀한 감정을 위해 감정기간이 4주일이나 소요되었습니다.
    피고인은 감정 과정에서 ‘피해자가 무서운 뱀으로 보였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덤벼들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싸웠다.’고 말했습니다. 요약하자면 피고인은 사물변별력이 전혀 없는 심신상실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필요한 치료를 받지 않으면 불행한 결과가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환경에 맞닥뜨리게 되면 무서운 감정폭발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자살하든가 아니면 지금 심각한 강박증이나 공포심 때문에 정신적, 신체적 발작을 일으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피고인에게 반사회적 특징은 발견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법정에 증인으로 나온 권위 있는 정신과 교수님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내용이지요.
    그러니까 불가항력적으로 범행이 일어난 것입니다. 피고인의 정신 상태에서는 불가항력이란 말입니다. 어쩔 수 없는 망상에 의한 피해의식 때문이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지엄하신 신께서 직접 명령을 내린 겁니다. 피해자가 죽이려고 하니까 목숨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씀드리면…… 피고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게 정당방위였습니다. 그는 그 순간 윤리의식도 없었고 자기 행위의 의미도 알지 못했습니다. 심신상실입니다. 어떻게 피고인을 처벌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적절한 치료가 필요하지요.
    이 사람은 천재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어떤 기회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불쌍한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틀림없이 그의 천재성이 발휘되어 유명한 화가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피고인을 감옥에 넣는다면 아주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불행한 결과 말입니다.
    여러분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지막 기회를 주십시오. 배심원 여러분들의 현명하신 판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판사님께서도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일융 (호적등본에 의하면 본래는 김이수였으나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김일융이라고 불렀다.)에 대해 배심원들이 한 시간 여 동안 토의한 결과 심신상실을 이유로 8대 1로 무죄 평결을 내렸고 판사들은 이를 받아들여서 무죄를 선고하면서 동시에 검사가 청구한 치료감호청구를 받아들여 치료감호 처분을 선고하였던 것이다.
    이 재판 과정에서 김일융이 성폭행범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의 진실을, 정신감정 결과를, 모든 증언들을, 변호사의 최후 변론을 신뢰하게 만들었으니 재판에 참여한 그들 모두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어느덧 계절의 여왕인 5월이었다. 오후의 춘곤증이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지만 법정 안은 터질 듯이 긴장되어 있어서 누구도 졸린 눈을 하고 입을 벌리고 있지는 않았다.
    판사는 수갑을 찬 채 교도관 두 사람이 양쪽에 붙어있는 피고인을 넌지시 내려다보았다. 피고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무심한 얼굴로 마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재판장은 공허한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었다.
    김일융은 공주에 있는 국립법무병원 치료감호소에 3년 동안 수감되어 정신과적 치료를 받았고, 즉 정신요법과 약물요법, 환경요법 등의 치료를 받았고 치료 경과가 너무 좋아서 피치료감호자가 스스로 치료감호의 필요가 없을 정도로 치유되었음을 이유로, 담당 주치의가 정신의학적 면담, 뇌기능 검사, 임상심리 및 정신적, 신체적 검사 등을 실시하여 그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치료가 완전히 또는 거의 완료 되었다는 의견서를 첨부하여 치료감호의 종료 여부를 심사, 결정하여 줄 것을 신청했고 ‘치료감호심의위원회’는 치료감호 종료를 결정한 것이다.
    이제 그는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혜순 정신과 의원’은 인천시 연수구 연수동 남동국가산업 1단지 건너편 연수고등학교 정문 근처 5층 건물의 3층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전문의 자격을 딴 직후 공주 치료감호소의 일반정신과 소속 의사로 오랫동안 근무한 후 퇴직하여 이곳에다 병원을 개업한 지가 3년이 지났다.
    어느 날 김일융이 병원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날은 오후가 되면서 음산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었다가 그대로 거두어 들였다. 그녀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고 표정이 뜨악했던 것이다.
    김일융이 말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입니다. 저를 기억하시겠지요.”
    “그렇지요. 오래된 일도 아닌데요. 감정서를 작성했고 그 후에는 주치의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그저, 지나가다가 들렸다고 해야겠지요. 여전히 옛날 그 향수를 쓰고 있네요. 장미꽃 향수 말이에요.”
    “그래요?”
    “여기에다 개업을 했단 말이지요.”
    “무슨 뜻인데……”
    “도대체 어울리지가 않지요. 치료감호소에서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나 약물 중독자, 살인을 저지르는 정신병자, 인육을 먹은 범인, 소아성애자, 여자의 속옷 절도범인 페티시스트, 스스로 해리성 정체장애라고 주장하는 놈, 지킬앤하이드증후군 환자, 사이코패스만 상대하다가 시시한 환자를 치료하는 건 재미없지 않겠어요?
    그러면 나는 어디에 해당되는 걸까요?
    그리고 ‘연쇄살인범과 실질적 동기가 결여된 살인 행위’ 또는 ‘살인에 대한 무의식적 동기 가설’을 열심히 연구한 전도한 유망한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나요?”
    “그런 미친놈들이 지겨웠다고 해야겠지. 그런 지독한 놈들하고만 상대하다보니 내가 미쳐버릴 지경이었지.”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어야…….”
    “대학은 얽히고 설킨 인맥이야. 내가 무슨 인맥이 있겠어.”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고. 마흔이 넘었는데. 혹시?”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은 하는 게 아니지요.”
    “대략 짐작했을 텐데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제가 누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을 텐데요.”
    “무슨 말씀인가요?”
    “정신과 의사가 상상력을 발휘해 보지 그래요.
    정신분석 요법이라는 게 곧 의사와 환자의 긴 대화에 불과한 것이지요. 그 대화가 치료의 시작이고 끝이었던 거죠. 쓸데없는 약은 필요 없었던 거지요. 이건 의사 선생님이 가르쳐 준 거예요. 그때 그렇게 말했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눈 사이가 아닌가요?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계속 ‘그래서’ 했었잖습니까. 우리의 대화는 온 몸의 신경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공감이 넘쳐흘렀지요.”
    “할 말이 있으면 빨리……. 우리는 의사와 환자 사이였던 거지. 주제넘게스리…… 그렇다고……”
    “그럴 필요가 있을까? 차분하게…… 어차피 환자도 별로 없는데 말이야. 오랫동안 지켜봤는데 병원이 어렵겠더라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건 내 사정이에요. 그런데 돈이 필요한 건가? 아님 돈을 털려고…… 그런 찌질한 인간은 아니었는데. 이건 인간의 품위 문제이거든.”
    “맞습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인간은 품위가 있어야지요. 살인범이 되어서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돈을 훔치고 빼앗을 만큼 야비한 인간은 아니지요.
    그러니까…… 내가 치료감호의 종료를 신청했을 때 치료가 완료되었다는 의견서를 상세히 써 주었단 말이지요. 그게 어떻게 그렇게 작성된 것인가요? 제 말은…… 물론 그 덕분에 내가 자유의 몸이 되어 빠져 나오기는 했지만요.
    정신과 의사는 분석가 입장에서 피분석자의 정신 상태를 분석해본 결과 정말 정상이라고 판단했던 것인가요? 뭘, 근거로? 인간의 무의식 세계를 그렇게 쉽게 분석할 수 있을까요? 어두운 파괴 본능을…… ㅎㅎㅎ…… 세상이 우스운 거야. 정말 가소로워…….
    그런데 정신분석은 말이 분석이지 사실은 해석이라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당신의 해석 모델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는 거겠지. 아니면 날 불쌍히 여겨서 동정했기 때문에 분석인지 해석인지가 소용이 없었던가? 그렇다고? 그렇지 않나?”
    “그렇게도 나가고 싶어서 안달을 하더니만…… 간절하게 소망했었지.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라구. 내가 보증을 서준 셈이라고.”
    “날 도와주었다고. 내가 그 은혜를 몰라본단 말이지요. 내가 지금 당신한테 단단히 얽혀 있다는 뜻인가요?”

    공주시 반포면에 있는 국립 법무병원인 공주치료감호소.
    그를 태운 차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이나 달린 끝에 적막하게 서 있는 회색 건물 앞에 멈춰 섰었다.
    공주에서 3년 동안 일어났던 일 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지나갔다. 빠르게 또는 천천히 지나가는 그때의 영상들은 참으로 다양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칠흙 같이 짙은 어둠의 색깔이거나 아니면 5월의 찬란한 햇빛 같은 밝은 색깔. 흰색 검은색 회색 파란색 노란색 빨강색 등이 뒤섞여 눈앞에서 어른거리며 춤을 추었다.
    그 감호소에는 1,000여 명이 넘는 정신 질환자가 수용되어 있고 그 중에서 약 절반이 김일융처럼 조현병 환자였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감호소에 너무나 잘 적응하였다. 모든 규칙을 철저히 준수했으니 가히 모범적이라고 할 만 했다. 그리고 치료 경과 역시 좋았다. 놀랄 만큼 빠르게 좋아졌던 것이다. 그는 다른 환자들에게 헌신적이었고 천주교에 귀의하였으며 직업 교육으로 목공일을 열심히 배웠다.

    “뭐가 잘못된 것인가요……?
    나는 임상 경험이 아주 풍부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 500명 이상을 치료하고 감정도 했으니까. 특히 정신분열증 환자는…… 그러니까 계획 살인과 망상에 의한 살인을 분별하지 못 할 만큼은 아니란 말이지.
    그리고 모든 검사 결과가 완벽하게 정상으로 나왔단 말입니다.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 결과, 피의자신문조서에 나타난 범행 전후의 행동 분석, MRI 측정, 진단 검사, 심리 전문가의 표준 심리 검사 등 10단계를 모두 통과했단 말이지.
    그러니까 당신은 완벽하게 정상이었다구요. 정상이란 말입니다. 책은 얼마나 많이 읽었고. 좋은 책들을 그렇게 많이 읽었으니 마음의 양식이 되었을 거라구. 아무리 봐도 범죄자로 되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지.
    그리고 그림을 열심히 그렸지. 여자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었지. 내게 선물한 그 초상화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어. 특히 어려운 수감자들에게 헌신적이었어요. 자신이 지급 받은 새 팬티와 런닝셔츠 등을 오줌을 심하게 지려서 지저분한 노인 수감자에게 입혀 주기도 했단 말이지…… 그래서 감동을 먹은 거라구.
    그런데 하느님에게 귀의하지 않았던가요. 수녀님이 ‘그 사람은 지극히 정상이에요. 제가 보증할 수 있지요. 하느님이 정상으로 인도하신 겁니다. 그는 매일 기도하고 명상을 한 답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감사!’라고 말했거든.”
    “천주교 수녀님이 나를 인도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요. 그건 인정할 수밖에. 그래서 정말 신실한 신자처럼 행세했던 거지요. 그러나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있고, 진정으로 반성하면 구원받을 수는 있으나 구원을 받아도 죗값은 치러야 한다는 가톨릭의 교리를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하느님까지 속이다니.”
    “하느님 좋아하시네. 그런 건 없다니까 그러네요. 당신도 철저한 무신론자 아니었던가요? 웬 하느님 타령. 그만 두자고요, 그만.”
    “내가……?”
    “감방에 있는 재소자들은 전부 자신이 독실한 신앙인이라고 주장하는 거 몰라요? 그게 ‘감방증후군’이라고 하는 거죠. 거짓으로 선한 사람처럼 보여서 조기 석방을 노리는 수작이란 말입니다.
    그들의 논리에도 무슨 근거는 있어요.
    ‘너희들 중에서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있으면 이 여자를 돌로 쳐라’라고 예수님이 말했다는 거 아닙니까. 이말 때문에 죄수들은 독실한 기독교도가 아니면서도 예수님에게 열광하는 거죠. 그때나 지금이나 죄 지은 자를 향해서 돌을 던질 수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우리 모두 죄인이라는 거죠.
    그래서 죄수들은 이구동성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하지요. ‘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런 상황에서 나야말로 피해자였다고’, ‘재수가 더럽게 없어서’ 혹은 ‘그 순간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해서’ 감방에 오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나는 그렇게 치사하고 자기 기만적인 그런 인간은 아니거든요. 그건 확실해요.”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인간들은 도대체 알 수 없다고…… 인간의 내면 세계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니까. 그래서 어떤 인간의 정체성 역시 복잡하고 복합적이라고.
    그런데 그것들은 인간에 대해 몰이해하니까…… 모두가 돌대가리고 엉터리인 거지. 어리석은 자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으니 큰일이란 말이지요. 뭔가 잘못되었어.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부터 자세히 말씀드리지요.
    뭐라고 하더라, 그렇지, 프로파일러 말이에요. 그것들이 심리학을 전공했고 경험이 무척 많다고 했지만 정말 엉터리였지요. 그것들이 나를 실토하도록 유도했지만 내가 역으로 이용했어요. 그건 어차피 치열한 두뇌 게임이었거든. 어리석은 자들은 유도신문을 하면 마침내 이것저것 털어놓는데 나는 어떤 경우에도 그 덫에 넘어간 적이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수사기관에서도, 정신병원이나 법원에서도 그렇단 말입니다.
    그들과 두뇌싸움에서 제가 완벽하게 승리를 거둔 거라고.
    마지막 관문은 당신이었는데 그걸 무사히 넘긴 거지…… 지금 억울한가? 아님 자신이 한심한가? 자멸, 자폭, 자괴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차피 늦었으니까.”
    “지금…… 무슨……?”
    “그 여자와 일면식도 없었어. 그냥 여자가 싫고 죽이고 싶어서 그 골목을 왔다 갔다 하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였어. 경찰은 내가 사실을 말해도 자기들의 인식오류와 편견 때문에 믿지를 않는 거지. 그러니까 난 성폭행범은 아닌 거야.
    나는 그런 개새끼들을 증오한다고. 그건 아니거든. 섹스는 약물 중독과 다름없어. 그저 약하고 못난 여자들이 죽도록 싫은 것뿐이야. 여성 전용 호스트바니 레즈비언 운운한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단 말이지……”

    그날 저녁 어스름한 골목길에서 주차된 차들 사이를 킁킁 냄새를 맡으며 어슬렁거리던 꼬리가 짧은 검은 큰 개가 으르렁거렸다. 그 순간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에 공포심을 느꼈고 그걸 잡아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던 것이 기억난다.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는 것은 언제나 괴로운 일이다. 머리가 지근지근 아팠고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으며 무릎이 저렸다.
    그 여자는 그때 마취에서 깨어나긴 했지만 위협을 가하자 순순히 옷을 벗었던 거지. 하지만 ‘여자의 벗은 몸은 참 따뜻하구나’ 정도의 느낌이 들었을 뿐이야. 여자의 목을 어루만지다 조를 때서야 쾌감을 느꼈던 거야. 강한 남성이 약한 여성을 살해하는 전형적인 쾌락 살인이었다고.
    나는 평생 딱 한 번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었다. 첫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여자와 정서적 만족감을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섹스는 슬픈 것이다. 그 뿐이다.
    그때 이후 슬픈 일을 당했을 때도 위로를 받은 일이 없었고 기쁜 일이란 도대체 없었지만 기쁜 일이 있어도 나를 찾아와서 함께 기뻐할 사람은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으니 무리에 끼지 못했다.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와는 헤어진 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모든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이란 과거로부터 불현듯 튀어나온다. 나에겐 어린 시절도, 청소년 시절도, 청년기도 없었다. 나의 인생은 영원히 멈춰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인생은 비현실적이거나 초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나에게는 희망과 기쁨과 행복과 사랑과 질투와 슬픔과 불행과 쓰라림과 가슴 아픈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지금 불면증과 악몽, 공포 때문에…… 아버지가 꿈속에 계속 나타난다. 나는 굉장히 자기파괴적이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나는 다시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완벽을 기하려고 했는데 내가 여자의 털을 몇 올 남긴 것은 정말 큰 실수였어. 완전 범죄를 꿈꾸었거든. 그때 시체를 집 밖으로 옮기는 일은 정말 난감한 일이었다. 그걸 미리 검토했어야 했다. 방수포에서 두 조각으로 자를 때도 얼마나 애를 먹었는지. 아무리 조심해도 피가 튈 수밖에 없었다니까. 운반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니까. 나는 시체를 훼손할 만큼 잔인한 사람이 아니야. 아! 한 인생의 종말이!

    “……그나저나 아마추어에 불과한 배심원들을 속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어요. 그게 말이지요, 법률지식도 없고 정신병에 대한 전문 지식도 없는 무지랭이들을 배심원으로 시켜놓고 검사와 변호사, 판사들이 요란 뻑쩍지근한 쇼를 벌이는 것에 불과해요.
    내가 정신병자 행사를 하고 어머니란 여자가 마구 울고 하니까 다 넘어간 거지. 배심원 중에 중년의 여자들이 있었던 게 큰 도움이 되었지요. 여자들은 눈물에 한 없이 약하거든. 그래서 나는 연기를 하기 위해서 억지로 눈물을 한 줄기 흘렸던 거고.
    그러나 어머니란 여자를 증오했어요. 어머니는 무슨, 피도 한 방울 안 섞였는데. 나를 내팽개치고 도망을 간 거거든. 아버지란 자가 그 여자가 가버리고 나서 그제서야 친어머니가 아니라고 실토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증인으로 나온 정신과 의사는 얼빠진 인간이야. 내가 정신분열증에 관해 연구를 한 다음 교묘하게 연기를 한 거지.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가짜 보디랭귀지도 사용했지. 요즈음 보디랭귀지를 주제로 한 책들이 넘쳐나거든. 어떻게 의사가 연기와 실제를 구분하지 못 하는 거야?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지만…….”
    “그렇겠지. 나야 말로 얼빠진 인간이니까.”
    “우리 음악 얘기를 다시 해보는 게 어때요. 역시 명품 오디오 세트가 있군요.”
    “음악은 불멸의 예술이라고 말했었던가. 음악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언제까지나 남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언제나 음악이 필요하다. 음악이야말로 인간이 말로써 말할 수 없는 것까지 뭐든지 말할 수 있다.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음악은 절대적으로 순수하다. 음악에서 위안을 얻으라고.”
    “셰익스피어가,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그런 사람은 살인이나 반역과 같은 비열한 행동조차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자라고 말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아시라고. 어떤 경우에도 음악은 별로라고.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다고. 그러니까 억지로 음악을 열심히 듣고 좋아하는 척 연기할 수밖에.”
    “지금 보니까…… 연기에는 천재적이었구만…… 차라리 배우가 되지 그랬어.”
    “ㅎㅎㅎ…… 내가 정신병 연기를 한 이유가 있었지. 가출한 후 부랑자로 떠돌면서 젊고 약한 여자만 보면 마구 때리고 싶은 거예요. 그러다 피해자가 신고를 해서 경찰에 붙잡혔는데 내가 막 횡설수설을 했더니만 간이 정신감정을 하더라고. 근데 내가 누구야. 식은 죽 먹기였어. 그 후부터는 정신과 치료가 크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중에 빠져나오기 위해서 정신과에 들락날락한 거지.
    또 한 가지 목적은 일류 병원 의사와 지적 두뇌 게임을 하고 싶었던 거였는데 내가 완전히 승리한 거지. 그 얼빠진 의사가 법원에서 증언한 것을 들어 보라고. 나는 방도 정신병자의 방처럼 꾸며 놓았거든. 그리고 말이야. 검사나 판사, 변호사들도 얼빠진 인간들인 것은 의사와 마찬가지야. 모두 넘어갔거든. 그런 자식들이 그렇게 잘난 체 거들먹거리니……
    이건 내가 상대하는 인간들과 벌이는 치열한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가 모두 승리한 거야. 승리자에게 영광을! 패배자들에게 죽음을!”
    “승리 좋아하네. 사이코 주제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신도 그렇지 않나? 괴물과 싸우는 자는 자신 역시 괴물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지. 모두 괴물들이었지.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면서도 언변이 매우 뛰어났지.”
    “그렇게 이죽거릴 것까지는…… 자기 환자를 연민의 감정으로 대해야…… 어떻게 연쇄살인범인 프랑켄슈타인과 비교를……
    우리는 아마 꽤 많이 농담을 했었지. 지독하게 술을 좋아했고. 술에 취하면 엉엉 울고 토하고. 유혹……”
    “엉뚱한 소린 그만하라구. 그러니까…… 멀쩡한 사람을 죽였으니까 사형을 받아야 할 흉악범이 겨우 3년 만에 석방되었네. 그것도 병원에서 편히 지내다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괴물들에게도 양심의 가책이라든가 죄의식이 있어야 하는 거 아냐?”
    “한심하구먼. 여자는 별 수 없어. 그런 게 있으면 현대의 괴물이 될 수 없는 거지.”
    “착한 괴물이 없다고? 내가 여자라고?”
    “왜, 그런 허튼 소릴 지껄이지? 무슨 딜레마에 빠진 거겠지. 그걸 해결하려면 자기 살해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정신의학과 임상」이라는 정신의학 학회지에 내 경우를 모범적인 치료 사례로 발표까지 하지 않았던가?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훌륭한 논문과 나의 석방이 교환된 거라고.
    그러나 날 다시 잡아갈 수는 없어. 지금 경찰을 불러보시지 그래. 소용없다구. 뭐더라, 일사부재리 때문에…… 하여간에 두 번 처벌하지 못 하도록 헌법이 보장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당신도 공범이 아닌가? 빨리 석방되도록 결정적으로 도와주었으니까.”
    “그만하세요, 그만…… 빨리 돌아가 주세요. 그 논문 때문에 치욕적인 결과가……?”
    “ㅎㅎㅎ…… 내가 악인 또는 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까짓 여자 하나 죽였다고. 어떤 게 선인가? 이 세상에 선이 있기라도 하는 거야? 성경에 의하면 신이야말로 정말 잔인했거든. 신은 스스로 잔인한 폭력을 인정했던 거야.”
    “악마도 성서를 인용한다고 하더니만…… 그러면 얼마나 더 죽여야 되는데…… 진짜 연쇄살인범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 그래야만 악마가 되는 거야?”
    “그래요, 진짜 용건은 아직 말하지 않았어요.”
    “뭘 말인가?”
    “당신은 주치의면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단 말이야. 육체와 정신은 분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정신 활동은 뇌의 신경세포의 작용에 불과한 것인가? 나 같은 게 어떻게 알겠어. 그러나 내가 내 자신을 잘 알고 내 마음을 분석할 수 있지.
    내 안에서 의식과 무의식은 분리되어 있고 분열되어 있는 건 확실하다고. 그것쯤은 스스로 알 수 있지. 거기에 나약한 선과 함께 어두운 악과 악마가 숨어 있는 거라고 보아야겠지. 그것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융합될 수 없는 거야.”
    “엄청나게 연구를 많이 했네. 정신과 의사를 해도 되겠어. 그러니까 이중인격이나 다중인격 장애인 해리성 정체장애를 말하는 거야? 인간의 내면에 숨어있는 동물적인 야수성이 그 순간 폭발한 건가? 그렇다는 거야? 자신은 가해자이면서 한편 억울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건 이쪽에 조금만 관심이 있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이지.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기묘한 증상사례」에서 이미 나온 이야기이거든. 그러니까 흥분할 필요가 없는 거야.
    본론으로 돌아가면…… 당신은 정신과 의사이면서도 나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악의 근원을 찾아내지 못한 거라고. 당신은 나한테 속삭였지. 내게 비밀을 모두 털어 놓으라고. 그러면 홀가분해지고 해방감을 느낀다고 했지……
    그리고 자신의 그런 과거에 대해 얼핏 암시를 주었거든. 이복동생과의 관계를 이야기했던 거 기억나요? 왜 그랬을까? 지금도 악몽 속에서 동생의 울음소리를 듣는 거야?”
    “그렇다면…… 부끄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내가 형편없는 의사란 걸 인정해야겠지. 그렇다고 치자고. 잔인한 인간의 그 사악하고 심오한 무의식의 세계를 어떻게 탐지할 수 있었겠어……
    내 동생은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백혈병으로 죽었어. 그때 동생은 자신이 죽어가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지막 몇 달 동안 나는 동생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었지…… 계모는 날 지독히 미워했었지만. 그러나 나는 하나밖에 없는 그 동생을 무척 사랑했었거든……”
    “그래서인가…… 누님인 것처럼 또는 수호천사인 것처럼 행세한 거야. 하느님인가 신부님인가 행세를 했지. 고해성사를 하라고 다그쳤다고. 그리고 나는 속아준 거고.
    당신은 편견과 편향에 사로잡혀 자기도 모르는 새 속아 넘어간 거란 말이지.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을 인정하라고. 인정을…… 냉철하게 판단하지 못 한 거야.
    그 사건과 나를 객관화시켜 분석하지 못하고 사디스트인지 사이코패스인지 지독한 여성 혐오자인지…… 나에게 동화되어 버렸거든. 대화요법을 통해서 감정적 교류가 있었단 말이지. ‘양들의 침묵’에서 FBI의 임시요원이었던 스탈링이 전직 정신과 의사였던 연쇄살인범 렉터 박사의 심리전에 말려들은 것처럼 말이야.
    가령 당신이 그렇게 원해도 당신과 사랑할 수는 없어. 요즈음 유행하는 뇌섹남이거나 요섹남은 아니거든. 솔직히 고백하자면 스스로 판단해 보건데 무성애자이거나 동성애자인지 모르겠어.
    나는 가끔 당신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한다고. 내가 만약 연쇄살인범이 되기라도…… 그러면 그게 누구 탓일까. 당신은 어리석게도 나를 석방시켰어. 언젠가 후회할 날이 올까?
    그곳이 한없이 그립다고. 감옥의 창살에 비치는 밤하늘의 별, 금강의 강물이 떠내려가는 소리, 국사봉의 흙냄새가 그립단 말이지. 난 그곳에서 육중한 철문이 여닫는 소리를 들으며 오랫동안 갇혀있어야만 했어. 결국 그곳에서 스스로 죽어야 했는데 말이야.”
    “…………………………”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면서 주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김일융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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