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유중원
연락처 :
이메일 : rjo12@chol.com
홈페이지 :
주소 :
소개 :

이 포스트는 0명이 in+했습니다.

    목록이 없습니다.

    유중원님의 포스트

    [ 더보기 ]

    제 2인자

    0

    제 2인자

    그는 언제나 내 앞에,
    의연히 내 앞에 있었다.

    접견 신청서
    수감 번호: 1522
    피고인: 유석근
    죄명: 사기, 배임, 횡령,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위반죄 등
    접견 일시: 2012. 12. 3. 14:00
    2012. 11. 30.
    변호사 유중원
    서울구치소 귀중

    12월 3일 월요일
    변호사: 회장님의 편지를 받았지요. 그러나 너무나 의외였습니다. 저는 현재 반쯤 은퇴한 상태이지요. 쓸데없이 소설 쓴다고 허둥대고 있지요. 그러니까 별 볼일 없는 변호사라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형사사건을 맡아본지가 까마득한 옛날이지요.

    피고인: 잠깐만……. 너무 서두르지 마시오. 내가 그런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 않겠소. 심사숙고 했지요.
    종친회 회장이 면회를 와서는 추천을 하더구먼. 촌수가 멀긴 하지만 조카뻘이 되지.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고흥에서 살다가 아버지 때 전주로 올라온 거라네.
    그곳이 고향이 아니던가?

    변호사: 연세도 많으시고 집안의 아저씨뻘인데 말씀을 낮추시지요. 그리고 그룹의 회장님 아니십니까.
    조상 대대로 고흥에 살았지요. 바닷가에서…… 그 곳이 아주 머나먼 남쪽 끝이지요. 소록도가 근처에 있습니다.

    피고인: 말이라도 고맙구먼.
    아주 옛날에……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를 따라서 고흥에 갔다 온 적이 있다네. 아마 제각 준공식 때문이었을 거야.
    할아버지 때까지는 고흥에서 살았다네. 대대로 호산에서 말일세. 아버지가 일찍 객지로 떠났어. 그래서 전주에서 정착했지.

    변호사: 그렇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큰 사건이라면 대형 로펌에 맡겨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곳에는 전관예우를 받는 검찰이나 법원 고위직 출신들이 즐비하지 않겠습니까.

    피고인: 그렇겠지. 돈을 터무니없이 많이 요구하고 말이지. 전관예우라는 유구한 사법적 관습을 믿는 자들 말이야.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그런 종류의 인간들과 한바탕 홍역을 치렀지. 이 사건이 알려지자마자 자천타천으로 거물 변호사들이 몰려드는 거야. 구속적부심에서 풀어준다, 보석으로 내보내 주겠다, 최소한 집행유예만은 장담한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리고 그들은 재판을 받을 때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마스크를 쓰고 휠체어에 앉아 대단한 환자인 것처럼 해서 법정으로 들어가라고 코치를 했었지. 자신들이 잘 아는, 진단서를 잘 써주는 아주 특별한 병원도 소개해준다고 했어. 그게 재벌 회장들의 공식이라고 하면서.
    그러나 그렇게 돈에만 환장한 인간들은 도대체 믿을 수가 없는 거야.

    변호사: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지요. 요즘 세상에 돈 싫어하는 사람이…….

    피고인: 그건 맞는 말이야. 솔직해서 좋군.
    자본주의 사회란 황금만능주의이니까. 돈은 원하는 대로 줄 수 있지. 어서 요구해보라고. 변호사들은 황금의 노예가 아니던가. 난생 처음 보는 목돈을 만지게 해줄 테니까.
    나는 내 이야기를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주고 그걸 뼛속 깊이 이해하는 사람, 그런 변호사가 필요했던 거요. 나는 늘 대화할 사람을 목말라 했거든. 대화할 상대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멋진 일 아니겠는가. 그만큼 진심이 통하는 사람이 드물었다는 얘기야.
    그래서 말인데…… 자주, 그러니까 매일처럼 접견을 와주면 고맙겠군. 감방 안은 너무 답답하다네.
    그러니까, 발화자에게는 항상 진지한 청자가 필요한 법이지.
    그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이겠지. 뭐니 뭐니 해도 독자가 절실히 필요했을 테니까. 당신도 독자가, 무슨 독자더라, 그렇지 당신의 소설을 뼛속 깊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모델 독자가 필요하다고, 실토하지 않았던가.
    아시겠어? 유 변호사는 뭐랄까, 시쳇말로 괴짜라고 할 수 있겠지. 겉모습을 보면 아직 멀쩡하니까 반 은퇴라는 말은 하지 마시오.
    내가 당신의 소설을 죄다 읽었어. 솔직히 말해서 여길 들어오기 전엔 이름조차 몰랐지만 이곳에는 지겹게 시간이 남아돌고 이상한 소문을 들었던 거야. 당신이 제법 작가인척 한다는 거지. 자신을 구구하게 변명할 필요가 있었겠지.
    그래서 ‘(변호사가) 왜 소설을 쓰는가.’라는 에세이를 썼던 거고. 당신은 능수능란하거든. 자신을 비하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은근히 과시하고 있는 거야. 유 변호사는 소설보다는 비평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남을 비꼬는 데는 소질이 있는 것 같거든.

    변호사: 제가 무슨 쓸데없는 이야기라도 늘어놓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오해가 있었던 거 아닌가요?

    피고인: 4.19 때는 문과대를 다니는 대학생이었지. 그러나 거리로 나선 적은 없었어. 그 험한 전쟁을 경험한 내가 그런 건 애들 장난처럼 우스워 보였거든.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나도 문청이었다네. 전쟁의 후유증을 털어내기 위해서는 많이 읽으면서 잊어버려야 했으니까.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네. 내가 자신을 잘 알지 않겠나. 그런데 문학은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네. 문학에는 권력이 없어.

    변호사: 그러니까, 한 때는 문학청년이었다구요?

    피고인: 그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넘어가자고.
    그건 아니지. 분명히 아니지만 거기에는 오싹한 경멸이 숨어있었거든. 그러나 유머 감각이 너무 부족했던 것만은 인정해야할 거야.
    다만 손으로 종이 위에 또박또박 쓰는 것만큼은 공감이 가지. 펜으로 종이 위에 글을 쓰는 것은 컴퓨터의 키보드를 치는 것 하고는 차원이 다른 거지. 컴퓨터 속 윈도는, 그건 가짜인 거야.
    인간은 본질적으로 창문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걸, 그걸 실체라고 할 수도 있겠지, 그걸 보고 싶어 하고 만지고 싶어 하는 거야. 실제로 무언가를 직접 쓰는 행위에는 심오한 철학적 배경이 있는 거지.
    손으로 글씨를 쓰는 행위는 마음에 평안을 가져오고 잡념을 없애주고 스트레스를 잊게 만들고 쓰는 내용을 더 깊이 음미하게 해주는 거야. 그런데 글씨를 쓰다보면 몰입하게 되고 그럼 결국 명상하는 효과와 같은 효과가 나오는 거지. 불경을 베껴 쓰는 사경寫經을 하게 되면 산란한 마음이 가라앉고 안정감이 생기는 것과 같은 거지.

    변호사: 좋은 게 좋다는 식의 비평은 하나마나지요. 그건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죽도 밥도 아닌 것이지요.
    하여간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시지요. 제가 또 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를 편지로 알려주십시오. 이정도 사건이라면 요즈음 양형기준으로는 아마 10년쯤은 살아야 할 거에요.

    피고인: ……그래, 그렇군. 나더러 감옥에서 죽으라는 얘기군. 그러나 내 이야기는 시작도 안했는데 말이야. 그럼 언제쯤 다시? 그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
    그는 언제나 제일인자, 영원한 일인자, 독재자, 회장, 대표이사, 냉혹한 기업가, 탁월한 사업가, 분노조절 장애자, 비열한 인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메라 같은 다중인격자, 로맨티스트이거든. 어째 흥미롭지 않아?

    변호사: 저더러 그 사람 회고록을 대필하란 말씀인가요? 혹은 전기라도 쓰라는 말씀인가요?

    피고인: 전기? 회고록? 그건 과장과 왜곡, 미화, 우쭐대기, 잘난 체하기 등 온갖 수법을 다 동원한 전기 작가의 소설이야. 진짜 소설인데 쓰레기인 거지. 전부 불태워 버려야만 할 거야. 그런데 그 일인자는 이 사건에서 핵심인 거야. 암흑의 핵심.

    12월 10일 월요일
    변호사: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간단히 쓰셨더군요. 그런데 잘 모르겠습니다. 재판 날짜는 아직 멀었지요. 엊그제 기소가 되었으니까요.

    피고인: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재판을 서둘러서 무슨 좋은 수가 생기겠어. 안 그런가? 그 재판장 형이 세다고 하더군. 곧 사표내고 개업한다는 소문도 있고.
    우리는 지금 약속을 한 거야. 소송위임계약이란게 결국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어.
    나는 ‘인간의 초상’을 지금까지 열 번쯤 읽었고 이 재판이 끝날 쯤에는 그만큼 더 읽게 되겠지.
    그래, 그렇지. 지금쯤 고백록이 필요했겠지. 그걸 쓰고 싶기도 하고 남기고 싶기도 했겠지. 누가 읽어 보던 안 읽어 보던 상관없이 오직 자신을 위해서 쓸 수밖에 없었겠지. 그러니까 당신은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거야. 나 자신을 위해 그 소설을 썼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그것 말고 달리 뭘 위해서 쓸 수 있었겠습니까, 독자를 위해 쓴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가요, 나는 독자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상상할 수가 없지요, 나는 사람들이 내 소설을 좋아한다거나 읽을 거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싱싱한 구어체로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쓸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소설에 대한 오독에 화가 나지 않을까, 그런 거지, 어쩔 수 없다고, 그러기 마련이라고 자위할 수 있을까?
    당신인들 자신의 작품 중에서 상당 부분을 해석하지 못하거나 잘못 해석하고 있을 거야. 그 소설은 그건 ‘기억의 초상’이고, 퇴행성관절염에 걸린 한 ‘인간의 초상’이라 할 수 있겠군. 그러니 제목을 바꿔야 하지 않겠어. 그 제목이 왜곡된 이미지를 만들고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 작가 중에서 유일하게 전쟁을 이해하는 작가라고 믿게 되었어. 전쟁의 양상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 소설은 전쟁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서 형상화한 거지. 그걸 나는 인정한다네.
    죽음과 절망 말이야. 전쟁터에서는 패자는 죽어야하고 승자는 절망할 수밖에 없으니까.
    인간 실존의 비루함이란. 그리고 무신론의 문제가 있지. 전지전능한 신이 일찍부터 진짜 있었다면 그 비참한 전쟁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변호사: 왜, 갑자기 그 허접 쓰레기 같은 소설을 읽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 군요. 읽을 만한 좋은 책들이 널려 있지 않습니까. 베스트셀러 말입니다.

    피고인: 베스트셀러라는 것들은 거의가 쓰레기라네.
    그런데 독자가 아니라 작가가 스스로 쓰레기라고 말할 수 있는 거야. 자학이 심하군 그래. 그런데 그건 독자를 모독하는 거지. 독자에게 쓰레기를 던지는 행위이니까.

    변호사: 잘 아시잖습니까. 전쟁은 결국 쓰레기지요. 인간 쓰레기들이 저지른 비열한 짓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그걸 쓴 소설 역시 쓰레기 같은 거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피고인: 그러고 보니 당신의 대답 속에는 날카로운 질문이 숨어있군, 안 그런가?
    책은 독자가 선택하는 거야. 그걸 당신이 간섭할 필요는 없겠지. 작품이란 작가의 자식이긴 하지만 어디 자식이라고 마음대로 할 수 있나, 제 인생이 있는데 말이야. 자식이란 게 부모 마음대로 안 된다는 걸 깨달으면 아버지가 다 된 거야.
    책은 작가를 떠나면서부터 작가의 소유물이 아닌 거야. 아직 누구도 단 한 단어도, 한 문장도 읽지 못했더라도 말이지. 책은 제멋대로 자기 길을 찾아서 이 세상을 떠돌게 되는 거야.
    그리고 말이야, 그건 내 이야기이기도 하지.
    그런데 당신은 신경증이거나 강박증 환자임에 틀림없을 거야. 텍스트를 시도 때도 없이 마구 고치거든. 그건 지독한 동성애자인 영국 화가 트렌시스 베이컨의 버릇과 비슷한 거야. 그 양반은 작품을 갤러리에 내 보냈다가도 도로 가져와서 계속 덧칠을 하며 손을 보거나 때로는 그림의 전경에 들어있는 형상을 지우기도 하거든.
    그래서 가끔 결국에는 그림을 망쳐 버리지.

    변호사: 저는 그 화가를 잘 모르지요. 그러나 매사에 자신감이 없을 수밖에 없지요. 저는 늦깎이였습니다. 만날 늦깎이인 거지요. 한 번도 선두에 서본 적이 없었지요.
    제가 상대방과 이야기 하면서 자꾸 똑같은 말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는 것도 그런 거지요.
    작품에 대한 의혹이 끊임없이 고개를 쳐드는 거예요. 그럴 때면 그걸 태워버려야 하는데 용기가 부족해서 기어이 발표하고 말죠. 요즈음 인터넷에 올리는 건 쉬우니까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지요. 그쪽에서는 원고료를 주지 않아도 되니까, 선심 쓰는 척 하면서 얼마든지 올려주겠다는 것이고, 저야 원고료는 둘째 치고 우선 글을 실을 데가 한 군데도 없으니 울며 겨자 먹기로 인터넷에 띄우는 거지요. 하지만 그러고 나서 무척 후회를 합니다.
    피고인: 그러니까 예술가들이 더 잘 만들려고 좀 더 노력을 기울이다가 원래의 특성을 모조리 잃어버리는 우를 범하는 거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되는 거지.
    그건 결국 자살행위, 자기파괴 행위인 거지. 모든 게 지나치면 안 되는 거야. 균형이 문제인 거지.

    변호사: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잘 모르겠습니다. 그걸 알았더라면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었겠지요.

    12월 12일 수요일
    겨울의 시작. 겨울의 짧은 해가 구치소의 퇴락한 회색 담벼락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달콤한 혹은 쓸쓸한 슬픔.

    12월 14일 금요일
    피고인: 오늘은 전쟁 이야기를 하고 싶군. 나도 6·25전쟁 중에 학도병으로 참가했었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겪고 나서 결국 운명론자가 되었으니까.
    나는 이 사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그런데 말이지, 유 변호사는 제법 죽음을 달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 내가 ‘죽음에 대한 단상’을 몇 번이고 잘 읽었거든. 당신은 월남전에서 죽음의 순간을 제대로 체험한 것 같더군. 당신은 자살 예찬론자인가, 아니면 반대론자인가? 자살에 대해 아주 길게 썼더구먼. 당신도 나처럼 자살을 시도 해본 적 있었던 거야?
    그런데 웬? 지랄병에 걸린 거야, 그 전쟁터에서 말이야. 싱겁지 않나? 차라리 베트콩의 총알이 가슴을 관통했는데 그래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것으로 각색했어야 했어.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믿어야만 하는 거야? 역사책도 픽션이라고 할 수 없을까? 역사가들은 특정한 인물과 사실들을 선택해서 나름대로 정리하고, 나머지 인물들과 사실들은 잊히도록 방치하거나 망각 속으로 던져버리거든. 만약 역사가들이 역사책에서 제외했던 것들을 재고한다면 똑같은 역사가 다른 형태를 띠게 될 거야. 사실 역사는 수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쓰일 수 있는 거지. 그렇기 때문에 역사에는 그 시대를 대변하지 못 하고, 숨기고 억압하는 것이 숨어있는 거야.
    역사가들은 1차 자료는 거의 보지 않아. 그래서 2차 자료, 3차 자료를 보게 되는데 어떤 것은 다른 자료의 내용을 그대로 베낀 것이고, 어떤 것은 남의 말을 경솔하게 옮긴 것이며, 어떤 것은 소문을 그대로 옮긴 것이고, 어떤 것은 1차 자료를 교묘하게 바꿔 놓았고, 어떤 것은 제멋대로 해석하고 그래서 어떤 것은 내용이 심하게 수정되었지. 신약성경을 보라고. 그러니까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야. 어차피 역사는 왜곡과 과장, 미화, 상상력이 가미된 소설이니까.

    변호사: 아저씨께서 차라리 작가가 되었더라면……
    그 소설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너무 조금, 그러면서도 너무 많이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말이지요, 그 전쟁을 말입니다.
    전, 콱 죽어버리기 위해서 그곳에 자원해서 갔었는데 죽지를 못했던 거지요. 전투에서 적군의 총에 맞아 죽었더라면 그게 차라리 좋은 거죠.
    그런데, 베트남에서 미국의 주도로 휴전이 성립된 직후 바로 월남은 패망했고 베트남은 통일이 되었지요.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요. 무엇 때문에 미국과 한국은 그런 부패하고 허약한 정권을 도우려고 참전했는지…… 왜, 젊은이들은 붉은 피를 쏟았단 말인가요, 쓸데없이. 어리석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겠지요.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까요?
    그 후 불과 17년이 지나서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거든요. 전쟁 기간 중 철천지원수였던 미국과 베트남,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에 수교를 하였습니다. 지금 한국과 미국은 베트남의 가장 중요한 교역국임과 동시에 자본 투자국이 되었지요. 호치민 시―그때는 사이공이라고 하였지요, 울림이 훨씬 좋지 않은가요? 멋있는 도시였지요.―와 하노이 거리에는 한국인들이 수없이 걸어 다니고 베트남 처녀 수만 명이 한국으로 시집오는 세상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참혹한 전쟁이 무슨 역사적 의미가 있었는가 말입니다.
    전쟁의 무의미함이란 결국 모순에 불과한 것이지요. 논자들은 무어라고 씨부렁거릴까요? 한편의 난센스 코미디에 불과했다고 평가할까요? 인간은 어쩔 수없이 어리석다고 할 것인가요? 그러니까 그 전쟁은 한 편의 서사시나 발라드는 아니라고 말하겠지요.
    그 전쟁은 인간의 분노, 권태 또는 광기를 해소하기 위한 카타르시스로서 유희에 불과했던 것일까요. 그러므로 제가 참전했던 그 전쟁이 저에게 지금 무슨 중대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인간의 어리석음은 인간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지요. 인간은 명석한 만큼 어리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치유가 불가능한 인간의 본성이지요. 인간은 어떤 역사적 단계에서도 결코 그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어리석기 때문에 신을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6․25 전쟁에 대해서는 말씀을 아끼시는 가요? 불편한 진실을 말하기가 두려우신가요? 아버지 세대는 한국전쟁을, 우리 세대는 베트남전쟁을 각기 겪은 거 아닌가요. 전쟁의 본질이야 다를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지금 세대는 전쟁을 모르지요.
    피고인: 386세대라고 하던가, 걔들은 젖비린내 나는 꼬마들이지. 잘난 체는 얼마나 하던지. 그러니까 모두 저마다 잘 알고 있는 척 나서는데 질려버린 거야. 저마다 한 마디씩 씨부렁거리는데 나까지 나설 필요가 있겠어. 그들은 그 전쟁의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거야. 그것도 피상적으로 말이야.
    어쨌거나 그 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과 모택동이 모의한 합작품인데 그들에게는 한 바탕 일종의 전쟁 게임에 불과했을 거야. 물론 김일성은 하수인에 불과했지만……
    세상은 역시 불공평하지. 그 악당들은 모두 천벌을 받는 대신 천수를 누리고 죽었으니까. 그러니까 전지전능한 신은 없다고 봐야겠지.
    당신의 견해가 옳은 거야. 전쟁은 신의 의지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인 거야.
    내가 16살 때 학도병으로 끌려갔지. 오죽했으면 5년 만에 제대해서 돌아오니까 키가 10센티미터나 더 자랐더라고. 그렇게 어린 녀석이었으니 얼마나 집이 그리웠겠어.
    엄마도 너무 보고 싶고……
    우린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겨우 방아쇠 당기는 법만 배워서 투입되었지.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우리 소대원 중에서 나 혼자 살아남고 다 죽었어. 군대에서 보병은 천덕꾸러기…… 프롤레타리아이지.
    그러면 살아남은 자는 행복하고 선택 받은 자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을까. 그만두자고. 나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의식을 떨쳐 내는데 반세기가 걸렸거든.
    칠십을 넘어서면서부터 그게 점점 엷어지고 마침내 사라졌어.

    변호사: 저의 경우에도 그랬었지요. 시간이 약이었지요. 시간이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갔지요. 현실에 익숙해지고 일상생활에 익숙해졌지요.
    그래서 문을 닫아걸고 문 안의 사적 세계에 안주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여전히 제 마음 한 구석에는 견고한 장벽이 존재해서 그곳으로는 타자가 들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12월 17일 월요일
    12월 19일 수요일
    12월 26일 수요일
    12월 28일 금요일

    1월 3일 목요일
    피고인: 벌써 해가 바뀌었어. 시간이 참 빠르지.

    변호사: 그렇지요 뭐.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가는 세월을 어찌 멈출 수가 있겠습니까.

    피고인: 오늘은 제 일인자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할 거야. 그를 빼놓고는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없거든. 그 잔인한 인간의 이름을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그 독재자는 절대적 권한을 갖고 있었어. 그랬으니 한 번 입에서 나온 명령은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엄격하고도 철저히 임무수행을 하여야 했고, 명령을 받은 부하 직원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핑계나 이유로도 그걸 피해갈 수 없었지.
    하급자들을 지나치게 자유롭고 편안하게 대하면 존경심이 사라지고 방종이 자라나게 마련이라고 하면서, 아니, 더 정확하고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언제나 명령 불복종, 기강 해이, 무질서로 끝나게 마련이라고 하였지.
    일인자는 회사를 경영하면서 물불을 가리지 않았어.
    필요하다면 금융기관이나 거래처에 뇌물을 받치는 것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지. 그는 뇌물을 줘도 아주 교묘하게 요령껏 했어. 뇌물의 액수에 비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말이야.
    심리전의 대가인 거야.
    그는 뇌물 받을 사람의 취미와 수요를 미리 파악해 맞춤형 뇌물을 제공했기 때문이야. 예컨대 발주처의 담당 본부장에게는 현금을 건넬 뿐만 아니라 본부장의 아들이 골프 프로 지망생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아들의 레슨비와 해외 전지 훈련비를 골프 코치 계좌로 입금해서 대납하고 또 상임 감사에게는 퇴임 후 타고 다닐 고급 승용차를 제공하며, 담당 이사의 경우 딸이 수입차가 필요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독일 폴크스바겐의 승용차를 구입해서 제공하고, 담당 대리에게는 그가 자전거 마니아라는 사실을 알고는 500만원이 나가는 독일제 자전거를 선물하고, 또 다른 담당 팀장은 카 마니아이기 때문에 1,000만 원짜리 차량용 오디오를 설치해줬지.
    현금도 교묘하게 전달됐어. 뇌물 받을 사람의 아내나 친인척이 회사에서 일한 것처럼 위장해서 급여를 주는 수법이 사용됐지.
    그리고 금융기관의 경우 은행장에게는 현금과 함께 벤츠나 아우디, 에쿠스 등 고가의 차를 부인용으로 제공하고 고급 골프채를 건넸지. 여신 담당 상무에게도 현금과 자동차, 골프채를 상납하고 여신 담당 팀장에게는 직원들을 시켜 가끔 현금을 주는 외에 수시로 유흥주점과 골프접대를 하였지.
    그러나 수법이 하도 치밀하고 교묘해서 아무도 걸린 일이 없었어.
    그는 어쩔 수 없이 노조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시대의 흐름이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나 단 한 번도 노조를 정식으로 인정한 적이 없었던 거야. 그는 온갖 협박과 회유, 탄압, 매수를 통해서 어용 노조를 만들고 그 노조를 마음대로 조정했던 거야.

    변호사: 그 정도였다구요?

    피고인: 그렇다네. 그의 성격은 참으로 묘한 데가 있는 거야. 한 번은 군 최고위 당국자가 큰 건을 수주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먼저 대가를 요구했는데, 그러니까 그 쪽에서 먼저 요구한 거지, 그는 일언지하에 딱 거절했지. 정말 큰 건이었는데 말이야. 그리고 중간에서 브로커 역할을 한 군 장성 출신의 담당 전무를 단칼에 잘라버렸지. 다른 때라면 그걸 따 내려고 더 큰 뇌물을 받칠 사람이거든. 그는 그런 사람이야. 천성적인 반항아라고 할까.
    그리고 은밀히 이루어지는 대기업의 횡포, 하청업체 쥐어짜기를 말하는 거야. 마른 수건 쥐어짜기라고 납품단가를 갑자기 확 낮추고, 중소기업이 애써 개발한 기술을 빼앗고, 뇌물을 요구하는 행위 따위는 하지 않았거든.
    그의 기분은 참으로 예측하기가 어려웠지. 극과 극을 달렸으니까. 찬바람과 따뜻한 바람이 번갈아 불었어. 그러니까 우리들의 관계는 불안정해서 파국이 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래도 그는 항상 마지막 한계선을 넘지는 않았지.
    그는 주력 분야에서는 덩치를 키우고 다른 분야로 문어발 확장도 서슴지 않았지.
    어쨌거나 회사 경영에 있어서는 나와는 엄청나게 견해 차이가 있었지. 그러니 나는 완전히 소외되고 외톨이로 겉돌았지. 회사의 내밀한 경영상 기밀에는 접근이 아예 차단되어 있었어.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독재자였기 때문에 기업의 의사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거야. 과도하게 자신감이 넘치기 때문에 자꾸 인수 합병을 시도했는데, 물론 그 덕분에 회사가 성장하고 발전한 것은 인정해야겠지.
    그러나 인수 합병의 경우 그와 나는 하늘과 땅 같은 견해 차이가 있었던 거지. 나는 재무구조를 튼튼히 해서 내실을 우선적으로 기하자는 쪽이었고 그는 인수가 무산되면 다른 기업 인수를 계속적으로 추진했지. 그는 아주 적극적이었어, 나는 소극적이었고. 나의 관심은 오직 기술 쪽이었어. 기술 개발에 전력하자는 거였지.
    사실 그건 핑계인 거고 나는 너무 소심해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거야. 부실 회사를 인수해서 동반 부실하게 되면 망한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나 그는 전문가를 고문 변호사와 재무 담당자로 영입해서 오로지 인수 합병에 전력투구했지. 그걸 할 때도 치밀한 계산 하에 주고받기 식으로 백기사를 적극 활용하여 경영권을 장악하거든. 처음에는 단순 투자 목적이라고 하면서 소액주주나 2대 주주로 출발하는 거야. 그러면서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는 거지. 경영권 분쟁이 생기면 우호적 주주인 백기사를 이용하는 거야.

    변호사: 그래도 잘도 버텨냈군요?

    피고인: ……이런저런 과정에서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한 번 들이 받은 거야. 영업, 인사, 재무 담당 이사 자리를 요구하고, 실질 주주명부를 아무 때나 열람할 수 있고, 비업무용 부동산은 매각할 것과 자사주의 매입과 소각을 제안하고, 회사 경영에 대해 내 지분만큼은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그에게 전달했지.
    그러나 그는 제 1대 주주여서 주주총회를 마음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었지. 그래 그는 수없이 일어난 증자 과정에서 자신의 지분을 나보다 배는 늘리고 나서 차명 주주에게 넘겼으니까. 이사들, 사외이사들 모두 자기 쪽 사람들이었고, 회사 경영을 좌지우지했기 때문에 나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어.
    그때 날 어르고 달래고 협박도 서슴지 않았지. 그가 미친 듯이 화를 내더구먼. 그래서, 네가 경영을 하면 회사가 쭉쭉 빵빵 잘 나갈 것 같아, 어리석은 자 같으니라고. 기다려, 기다려 보라고 무슨 일이든 생기겠지. 그러니 우리는 불안한 동거 관계일 수밖에 없었어. 동업은 언제나 어려운 거고, 제 2인자는 항상 일인자 눈치를 살펴야 하니까 언제나 서럽지.
    절대 권력자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다음 사람이 나오는 것을 싫어하거든.
    그렇지만 2인자도 언제든지 빈틈을 노릴 수 있다네. 인간들은 모두 약점이 있으니까, 은인자중하면서 때를 기다리는 거지.

    변호사: 정말 흥미진진하군요. 그런 인물이었단 말이지요? 소설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지요. 그 사람의 성격이 정말 궁금하군요?

    피고인: 그래, 정말 흥미진진한 사람이지. 그러나 정신병자인지도 모르겠어. 틀림없다고.
    그러니까…… 눈물을 잘 흘리고, 분노조절장애자이고, 다중인격 장애자라고 할 수 있지. 잘 알겠지, 다중인격 장애는 해리성 장애의 하나인 거야, 가끔 그런 증세를 보였거든. 그의 자아는 늘 한결같지 않고 계속 변해가는 거야. 하나가 아니라 여럿으로, 복합적이고 분열적이고 모순적이었지. 그렇지, 그렇고말고. 그의 다중 연기는 참으로 기가 막히게 현란했거든.
    그는 냉혈동물이고 온혈동물이지. 흥분하면 말을 하면서 손을 흔들어 대고 시도 때도 없이 감탄과 강조를 남발하고. 익살꾼, 만담꾼이었지. 하지만 냉정한 성격이었고 입은 대단히 무거웠지. 비밀을 남에게 털어놓는 일도 드물거니와 남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갈 사람이었거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메라인 거야.
    그리고 두주불사하는 술고래이지. 술만 취하면 눈이 충혈 되고 이유 없이 분노를 터트렸어. 고래고래 욕설을 퍼부었지. 나는 그가 그렇게 더러운 말을 많이 알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어쨌거나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말았지. 그러나 확실하게 로맨티스트인 거야. 여자들을 무척 사랑했지. 모든 여자들을 사랑했으니까.
    그는 첫사랑 여인을 잊지 못했어. 그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서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던 그 여자를 기어이 이혼시키고 결혼했던 거야.
    그들에게는 외아들이 있어.
    부부 모두 아이를 더 낳고 싶어 했지만 남자 쪽에 유전적이 문제가 있어서 매번 일찌감치 유산으로 끝나버렸어. 잇따른 유산의 스트레스 때문에 아름다웠던 여자는 지쳐버렸고 그 후 충격적일만큼 뚱뚱해지고 약간의 조울증 증세를 나타내고 자주 히스테리를 부렸지. 그러나 내치지지는 않았지.

    변호사: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었군요. 정말…… 흥미롭기도 하구요. 다음 월요일에 오겠습니다. 주말에 어디 다녀올 일이 있어서요. 그때 다시 듣겠습니다.

    1월 7일 월요일
    피고인: 여전히 그 날이 생각나는군. 너무 생생하게 말이지.
    쾅. 쾅. 쾅. 쾅. 쾅.
    그때 아군 포병대가 갈긴 105미리 오발탄들이 갑자기 쏟아졌지. 눈부신 섬광이 번쩍했지. 마치 번개가 치는 것과 아주 비슷했거든. 참호가 무너져 내리는 거야.
    그때는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지. 이틀 밤낮을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못한 채 질척거리는 참호 안에 처박혀 있었는데 바깥으로 나가 배변을 할 수 없었지. 하늘이 뻥 뚫린 것처럼 하염없이 비가 쏟아졌으니까. 참호 안은 매캐한 화약 냄새, 시신 썩는 냄새에 뒤섞여 오랫동안 치우지 못한 지독한 분뇨 냄새가 진동했었지. 막바지 여름이었으니까.
    그런데 적들도 별 수 없었는지 슬금슬금 후퇴하기 시작하는 거야. 병사들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총알 세례에 픽픽 쓰러지니까.
    나는 그때 고개를 땅에 처박고 내장에 남아있는 마지막 토사물이 될 것들을 쏟아내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소대장이 무전기에 대고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더라고.
    “조준을 똑바로. 반복한다. 조준을, 조준을. 생사람 잡지 말고, 생사람. 반복한다. 적들은 후퇴했다, 적들은. 이건 안 돼. 사람 살려. 씨발 새끼들.”
    다시 오발탄 한 발이, 마지막 오발탄이 소대장의 바로 머리 위쪽에서 작열하였고 소대장은 산산조각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지. 나 역시 온 몸에 엄청난 압력을 느끼며 튕겨져 나갔고 내장들이 붕 떠서 날아가는 느낌이 들었거든.
    나는 살아서 야전병원으로 호송되었지. 막상 병원에 있으니까 살고 싶더라고. 그래서 ‘죽어서는 안 돼.’ ‘죽으면 안 돼지.’ 하고 혼자 계속 중얼거렸어.
    그러나 오랫동안 기억상실, 두통, 발작, 수면장애, 귀 울림, 현기증, 감정의 기복 등 다양한 증상 때문에 고생했었지. 집에 돌아와서도 밤마다 비명을 질렀어.
    백병전을 치르면서 서로를 찔러 죽였는데…… 대검으로 얼굴이고 가슴이고 닥치는 대로 찔렀는데…… 뼈마디가 부서지며 우두둑우두둑 소리가 났는데…… 주위에서 계속 신음 소리, 비명, 욕설, 의미 없는 고함소리들이 끊이지 않고 들렸는데…….
    그게 요즈음 말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일 거야. 당신도 이미 겪어봤으니까 그 증상과 고통을 잘 알거 아닌가. 나는 지금도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여러 군데 상처 자국이 마구 쑤시거든.
    나는 그때 세상 모든 종류의 고통과 괴로움을 맛보았지. 하지만 말일세, 전쟁터에서 사람이 죽고 죽이고 불구가 되는 것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었어. 전쟁이란 게 원래 그런 거 아니겠어.
    같은 종을 잔인하게 죽이는 건 인간 밖에 없으니까, 그건 지극히 인간적인 행위라고 볼 수 있지.
    그런데, 사람이란 날이 갈수록 더욱 잊어버리고 사는 거야. 우리가 늙고 죽는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듯 잊어버리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인데 말이야. 나는 그때를 서서히 잊어버렸어. 그리고 먹고 살려고 기업을 시작하면서 욕심이 생기고, 그렇게 변해간 거지.

    변호사: 그걸 잊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나이 탓이 아닙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은 그만큼 기억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이겠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여태껏 베트남도, 전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거지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환상이었는지 확실하게 구분이 안 되지요.
    제가 진실을 말했는지 의심스럽군요. 뭔가 중요한 것, 자신에게 숨기고 싶은 건 숨긴 것이 아닐까요.

    피고인: 어느 날, 일인자가 날 찾아왔더군.
    그가 말했어. 그 동안 미안했으니까, 정식으로 사과를 하지, 정말 미안하이, 네가 믿을지 모르지만, 지금 개소리한다고 이죽거릴 필요는 없겠지, 내가 그 동안 한 짓은 회사를 발전시키고 탄탄한 일류 회사를 만들어 넘겨주려고 했기 때문이야, 주식까지 넘겨줄 거야, 인수인계는 실무자들이 차질 없이 진행하고 있지, 그리고 멀리 떠나는 거지, 이건 큰 뜻은 없어, 단지 약속을 지키는 것 밖에, 자네와 30년 전에 했던 처음 약속, 그때 나 자신과 했던 약속 말일세……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최고의 도덕원리이고 정의의 법칙은 약속을 지키는 거지, 유대인들은 신과도 약속을 했었지, 하지만 우리는 지금 약속이라는 행위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있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밥 먹듯 약속을 내팽개치고, 채무를 갚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약속을 철회하고 있는 거야……
    회사는 지금 안정 단계에 접어들었지, 더 이상 인수 합병이나 확장은 필요 없게 된 거지, 나는 수탁인에 불과했어, 애시당초 네가 모든 재산을 털어서 내 놓았고 나는 몸뚱어리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우리는 시작했지, 그때 절친한 친구, 아니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친형제나 다름없었지, 지금도 친형제인 거지, 안 그런가……? 그러니까 웬만하면 봐줄 것은 봐 주고, 넘어갈 것은 넘어가주게……

    변호사: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그 지독한 인간이? 정신병자가 아니었던가요?

    피고인: 그 말을 듣는 순간 회오리바람이 일어났고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어질어질 했지. 속이 울렁거리고.
    그러니까, 그룹의 회장 자리를 넘겨준다고, 주식을 넘겨준다고, 일인자가 멀리 떠난다고, 그리고 뭘 봐주라고, 뭔 심각한 짓을 저지르고 도망치는 게 아닐까?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어.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무슨 일 때문인지 흉괴를 꾸미고 후퇴하거나 도망치면서 낚싯바늘 던지는 거라고 생각했었지.
    내가 말했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친형제라고, 뭐라고 회사를 넘겨주려고 했다고, 네 잘난 아들놈은 어떡하고, 그래, 네 아들 잘생기고 똑똑하지, 서울대 출신에 MIT 박사이고, 한국개발연구원에서 수석연구원이었으니까 스펙 하나는 끝내주지, 지금 다른 회사에서 후계자 수업을 충실히 받고 있겠지, 그 아들한테 물려주면 되는 거야,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거야…….
    그가 다시 말했어. ……흐흐흐. 우리나라 기업은 무능한 오너 일가가 회사의 요직을 차지하는 현상이 문제가 되는 거야, 너무 무능한 것들이 오너라고 마구 설치는 거지, 그러니까 조직 내 임직원들의 능력을 사장시키고 그들이 성장할 기회를 박탈하는 거지, 그들은 더러워서 다 도망가지, 남아있는 인력들은 오너 가문의 시종처럼 일하거나 보신주의로 일관하게 되고, 나는 부하 직원들에게 무자비하게 가혹했지만 그러나 신상필벌의 원칙을 지켰고 아부하는 놈일수록 과감하게 내쳤지……
    후계자 말인데 자네 알고 있나? 19년간 로마제국을 다스렸고 그 유명한 ‘명상록’을 썼던 로마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라우스는 딱 한 가지 큰 실수를 한 거야, 그때까지 지켜오던 자식에게는 세습을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친아들 코모두스에게 제위를 넘겨주었지만 그 후 로마는 어떻게 됐나, 폭정이 이어지고 쇠망의 길로 들어선 거지……
    나는 그동안 단 한 명의 친인척도 우리 회사에 고용한 일이 없었네, 내 말 잘 듣게, 내 지분의 반은 너에게 넘겨주고 반은 공익재단에 기부할 거거든……
    안 가본 데가 많으니까 머리고 식힐 겸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거지, 그러고 나서 이 세상 끝으로 가는 거야, 그러니깐 불쌍한 원주민을 도우려가는 게 아니거든, 내 코가 석자야, 나는 지금 만신창이야, 더 늦기 전에 나를 추슬러야 하지, 그게 말이야…… 나를 찾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곳은 될 수 있는 데로 먼 곳이야, 연락이 안 되는 곳, 전화도, 팩스도, 이메일도 안 되는 곳이야, 그곳에 가서 푹 쉬고 싶구먼, 죽을 때까지 말이야, 나는 돌아올 생각이 없어……
    내가 그때 비꼬았지. 오래 살다보니까 별 일이 다 일어나는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구만.
    그가 말했어. 그런 곳을 알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 세상 끝이라고 할 수 있는 파타고니아의 남극 쪽 해안, 파타고니아에서는 일 년 내내 바람이 분다는 군, 거기서는 하나님의 우렁찬 목소리마저도 바람에 지워져서 도저히 들을 수 없다고 하더군, 아니면 로빈슨 크루소와 방드르디가 28년 2개월 19일 동안 살았던 머나먼 섬, ‘머리가 없는 여자의 몸’ 같이 생긴 섬 또는 ‘두 다리를 접고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을 닮은 섬, 그리고 아마존 강의 상류 아마조니아에 있는 열대 우림, 뉴기니의 밀림, 아프리카의 적도 저지대 식인종이 사는 곳, 사하라 사막 남쪽의 타만라세트 부근 사막 중의 사막 같은 데를 말하는 거야……
    우린 그때 서로 해야 할 말을 모두 했지. 때로는 언성을 높이며 격렬하게 때로는 가볍게 웃으며 조용조용 이야기를 했던 거야. 처음에는 분노로 들끓어 올랐지만…… 서로 멱살잡이를 할 뻔 했지. 나중에는 파안대소를 하였지. 모두가 속 시원히 풀린 건 아니지만 많은 오해가 풀리고 결론이 내려졌던 거지. 그리고 악수를 했지.
    저쪽에서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던 거야. 그가, 거인 big man이 떠난 거지. 그리고 그 이후 그를 만날 수는 없었지.

    변호사 : 저더러 그걸 믿으라고요? 그렇게 쉽게 그 정도로 끝났단 말이죠? 우리나라 기업 풍토에서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소리죠. 그렇지 않은가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의 법칙에도 반하고……

    피고인 : 대충 사실이라고 할 수 있지. 어쨌거나 내게 회사를 넘겨주었으니까.

    변호사 : 그렇게 쉽게……. 형법적인 문제도 있었겠지요. 고소한다고 협박했던 거 아닌가요? 그리고 일인자는 해외로 도피한 거겠죠?

    피고인: 마음대로 생각하게나. 법률 전문가니까……

    변호사: 다시 말씀드리지만…… 너무 현란하군요? 그렇지 않은가요? 저더러 그대로 속으란 말씀인가요? 절 완전히 멍청한 인간으로 보시는 군요.

    피고인 : 그렇다니까…… 더 들어보게나……
    나는 그가 마약을 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네. 틀림없이 중독일 거라고……? 그가 어떻게 그 고통을 마약 없이 견뎌낼 수 있었겠어. 독한 술로 해결할 수는 없었겠지.
    그가 아주 멀리 이 세상 끝까지 도망간 것은 중독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을 걸세. 마약만이 그의 정신 상태를 설명해줄 수 있어.

    변호사 : 그러니까…… 마약이 그의 정신 상태를 혼미하게 만들었군요. 그리고…… 자포자기하게 만들었군요.
    그렇다면, 자살하지 않은 게 다행이군요.

    피고인: 이 이야기는 이정도로…… 그렇게 해서…… 순순하게 물려주었든지…… 아니면 억울하게 쫓겨났든가…….
    하여간에 내가 그룹을 물려받은 거야. 소규모 그룹이지만 말일세. 그래도 재벌 흉내는 조금씩 낼 수 있었어. 그때 그룹은 탄탄했지. 그럭저럭 비교적 탄탄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룹 전체적으로 부채 비율도 괜찮았다니까. 그때부터 나는 혈기왕성하고 의욕이 넘쳤던 거야.
    내가 제일 먼저 처리한 게 뭔지 알아? 내가 샅샅이 조사했던 거야, 뭔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말이야. 그가 20년 동안이나 회사를 맡아서 독단적으로 경영했으니 썩은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았겠어. 그러나 비자금을 많이 조성한 건 사실이나 개인적으로 거액의 자금 유용이나 횡령의 흔적은 찾기가 무척 힘들었지.
    감쪽같이 처리했으니까. 정말 귀신같았어.
    우리나라에서 대기업을, 그것도 그룹을 경영하려면 비자금 조성은 필요악이라고 할 수 있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이건 추악한 변명이 아닐세. 문제는 상당수 재벌기업들이 비자금을 조성해서 사리사욕을 취하는 게 문제인 거지.
    그리고 모든 면에서 나보다 나은 일인자를 한 번쯤 앞서고 싶었던 거지. 어쨌거나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일인자인 것은 틀림없어.
    그 동안 열등감과 패배의식 때문에 고통을 받았거든. 일부 야구선수들이 약물의 힘으로, 그건 악마의 속삭임 같은 것인데, 대기록을 세웠지. 본즈, 맥과이어, 소사 등도 약물의 힘으로 홈런왕이 되었거든. 나는 그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회사를 키우고 확장하고 싶었던 거야. 나의 경영능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거지. 그래서 일인자 못지않은 탁월한 기업가가 되고 싶었거든.
    그랬던 거라네. 그래서 2005년부터 금융기관의 돈을 마구잡이로 빌려서 인도네시아 쪽에 공장을 증설하고, 매물로 나온 법정관리 중인 회사를 인수하고 또다시 중국 대련에 있는 회사를 인수했던 거야. 나는 회사 경영에 있어서 정신적 노자와 같았던 그의 충고를 마음속에 불의 글자로 깊이 새기기는커녕 철저히 무시했던 거지.
    그는 나의 말로를 예감할 수 있었을까? 가능했을 거야. 기업 환경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빠지고 말 구멍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으니까.
    그는 숨기고 있었지만 신의 신탁을 이미 들었던 예언자이었겠지.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가 오면서 불황이 깊어지자 중국 쪽에서부터 판로가 막히면서 매출이 줄고 재고 물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누적되고, 거의 회수가 불가능한 악성 미수채권이 수천억 원씩 쌓이기 시작하면서 유동성 위기가 찾아왔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꾸 연체가 발생하는 거야.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중국에서 인수했던 회사는 완전한 부실기업으로 그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어. 그게 말일세, 소규모 그룹에서는 자금을 감당할 수 없으니까 재기 불능의 결정타가 된 것이지.
    그때 모든 임원들이 반대를 했었거든, 중국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회사를 호락호락 넘기려고 했겠느냐, 그들의 재무제표는 도무지 믿을게 못 된다, 장부상 기재는 그럴 듯 하지만 실제와는 영 딴 판이라는 거지, 막상 인수하고 나면 우발채무를 감당할 수 없을 거라면서, 부실회사가 틀림없다는 거지.
    그러나 내가 밀어 붙였지. 마구 소리를 지르고 호통을 치고 하면서, 그게 일인자에게서 배운 것이지만, 빨리 인수하라고 닦달을 한 거지. 어쨌거나 큰 건 하나 건져서 내 능력을 보여줘야 했으니까.
    그리고 우리 건설회사도 애물단지였어. 중동에서 작은 토목공사를 저가 수주한 것이 발목을 잡고 늘어졌지. 뒤늦게 대표회사를 문책 경질한 들 무슨 소용 있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그러자 나는 다급하게 거래은행에 긴급 운영자금의 지원을 요청했는데 자금 지원은 커녕 돈줄을 조이기 시작했어. 나는 그때서야 위기의식을 느끼고 급한 김에 재무구조가 탄탄하고 잘 나가는 자회사로부터 자금을 끌어다가 메꾸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분식회계를 안 할 수가 없었지.
    그렇지 않으면 은행 돈줄이 당장에 막혀서 회사가 부도가 나거든. 그래서 전 계열사에서 인력 감축을 하고 수익성이 낮은 해외 생산 법인은 매물로 내 놓고 부진한 국내 사업 부분 역시 팔려고 내 놓았지만. 그러나 이미 때가 늦어 버렸던 거야.
    모두 신문에 난 이야기야. 그룹을 살리기 위해서 채권단인 금융기관들과 지루한 교섭에 들어갔지. 우리는 대출기간을 연장해 달라, 이자율을 조정해서 낮춰 달라, 채무 일부를 탕감해 달라, 출자 전환해달라는 등 온갖 요구사항을 내걸었고, 만약 여의치 않으면 일괄해서 법정관리를 신청하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지만 소용없었지. 그래서 돈을 싸들고 가서 정치권 유력 인사들과 교섭한 거야. 그러나 이미 늦었지. 씨알도 먹혀들어가지 않았어. 채권단에서는 부실이 워낙 심해서 전혀 회생 가능성이 없다고, 못 박아버린 거야.
    그렇게 해서 모든 회사를 일괄하여 회생절차 개시와 회사재산보존 처분을 신청했지만 대부분 기각되었지. 그래서 그들 회사는 파산절차를 밟고 있는 거야.

    1월 8일 화요일
    1월 9일 수요일
    1월 10일 목요일

    1월 14일 월요일
    월요일 오후여서 변호사들의 접견 신청이 몰렸다. 접견실의 차례가 좀처럼 오지 않고 대기 시간이 길어진다. 오늘 따라 집사변호사로 보이는 젋은 여자 변호사들이 앉을 자리가 없자 불안하게 서성거리고 있다.
    1월 15일 화요일
    1월 16일 수요일
    1월 17일 목요일

    1월 18일 금요일
    변호사: 다시 말하면……. 그러니까, 회장님은 모든 걸 금융위기 탓으로 돌리는 것인가요. 금융위기는 천재지변 같은 거였다고 주장하는 거죠. 증인이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똑똑한 증인 말입니다.

    피고인: 엉뚱한 소리 그만 좀 하게나. 금융위기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금융위기는 엎친 데 덮친 격은 되었겠지. 어차피 망하게 돼 있었어. 그룹 전체의 부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마침내 M&A의 진실이 드러난 것이지. 잘못된 M&A는 죽음의 키스인 거야. 일인자가 M&A에 성공한 것은, 왜 이 기업을 인수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집중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난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그냥 허둥댄 거야.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게 되었으니까.

    변호사: 그래도 변론의 방향은 금융위기 탓으로 몰고 가야겠지요. 그리고 회장님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해야겠지요.

    피고인: 모든 공소사실을 인정하게. 내가 무슨 낯짝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겠어. 나는 검찰에서도 모두 시인했어. 검사가 묻지도 않은 것을 다 불었더니 어리둥절한 모양이야.

    변호사: 왜……? 다 불었단 말씀인가요? 끝까지 버티지 않고.

    피고인: 경찰 수사는 경제팀에서 담당했지만 걔들은 경제 지식이 형편없었어. 기업 회계도 모르고. 맨날 겁을 주면서 다그치기나 하고…….
    겨우 삼십대 중반을 넘긴 것들이 늙은이한테 반말지꺼리나 하고 가끔 길게 훈계까지 했다니까.

    변호사: 그렇겠지요. 그 버릇 어디 가겠습니까.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이네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군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더 험한 짓들을 했었지요. 심한 욕설과 모욕은 다반사이고. 때리고 발로 차고. 완전히 불 때까지 며칠씩이나 잠을 재우지도 않았지요.

    피고인: 구치소에서 수사 받으러 검찰청에 가면 닭장 같은 대기실에 가두어 놓는 거야. 숨이 막힐 듯하지.
    그런데 검사실에서 나이 든 검사가 따뜻한 커피를 내 놓는데 그만 감격을 한 거야. 담배도 권하고. 커피를 마시면서 담배 한 모금 빠는 기분이란…… 그래서 술술 이야기했어. 담배 연기가 사람을 풀어놓는 다니까.

    변호사: 커피 한 잔에 그렇게 쉽게…… 그래도 검사가 경찰보다는 단 수가 높군요.

    피고인: 그렇다네. 경제 지식도 해박하고. 그런데 그 검사는 내가 심경이 변해서 법정에서 부인할까봐 노심초사하더군. 조서에 서명까지 했으니까 부인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더군.

    변호사: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피고인: 그 무렵에는…… 사건이 터졌을 때 말일세. 예측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갑자기 극심한 두려움이 생기고…… 숨이 턱턱 막히면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신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어.
    나는 그때 말할 수 없이 극심한 공포감으로 죽을 것 같았고 어찌할 바를 몰라 미칠 것 같았지. 식은땀이 나며 숨이 막혀 메스껍고 기절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 그게 바로 공황장애였던 거지.
    그래서 죽을 생각을 했던 거야. 그러나 죽지 못하고 차라리 감옥으로 가자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법정에서 구구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을 거야. 내 입으로 직접 말하기에는 쑥스러운 일이야. 그건 위선이거나 위악이 되겠지.
    제발 판사에게 관대한 처벌을 바랍니다 라는……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는 하지 말게. 무슨 염치로. 오히려 법이 허용되는 한에서 최대한 엄벌에 처해 달라고 말하게.
    그렇지? 변호사가 그렇게 변론하는 것은 변호사 윤리에 어긋나는 것이고 나중에 징계를 받게 될 거구만. 그건 내가 직접 말하겠어.

    변호사: 간디의 재판을 흉내 내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간디는 자기의 죄가 기소된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크다고 말하고, 판사에게 최대의 벌을 주도록 당부했지요. 판사는 간디에게 6년 징역형을 선고했고 간디는 정중하게 그 판사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법대에 앉아서 거들먹거리며 피고인을 벌레나 되는 것처럼 깔보고 있는 그 거만한 판사가 감격을 할까요? 아니면 의아하게 생각할까요? 우선 깜짝 놀라겠지요.
    판사생활 30년 동안 그런 엄청난 말은 처음 듣기 때문에 자기 귀를 의심할 거거든요.
    그래도 오너 회장님 아닙니까. 그러고 나서 내심 비웃을 것입니다. 별일 다 보겠네. 이건 위악이야, 위악.

    피고인: 내가 그 사람 속마음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나.

    1월 21일 월요일
    오늘 우리는 별로 할 이야기가 없었다. 지난 접견일에도 그랬다. 피고인은 점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1월 23일 수요일
    변호사: 정직한 기업가께서 왜? 갑자기 마음이 바꾸었는가요? 공판기일이 잡히니까. 역시……?

    피고인: 그래, 역시 대단한 착각이었어. 차츰 내가 뭘 원하는지를 깨닫게 된 거야.
    먼저 정치부터 살펴보아야겠지. 그 놈의 정치, 정치인들이야말로 철저히 부패했지. 내가 뇌물로 갖다 바친 돈이 얼마인데. 정치인들은 모두가 범죄자인거야. 살인자이고 날강도들이지. 그것들은 참으로 후안무치하다고. 돈만 먹고 싹 입을 씻는 거야.
    민주주의를 옹호할 필요는 없어.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고 자본주의는 인간을 이기적으로, 탐욕스럽게 만드는 거야. 그것이 인간을 범하고 인간을 먹어치우는데 정치인들이 앞장을 서는 거지. 타락은 타락을 낳고, 죄가 죄를 먹고 자라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네.
    우리나라 기업치고 특히 재벌기업치고 부정부패가 없는 데가 어디 있겠나? 회계부정과 탈세, 수상한 뒷거래가 없는 기업이 어디 있겠어. 다들 해먹고 있어. 그러나 통계적으로 볼 때 발각될 가능성은 1퍼센트도 안 되지. 집안 단속을 잘 하니까. 그리고 모두 한 통속이 되어 눈감아 주니까. 내가 왜 모르겠어. 그걸…….
    그만 하지. 나 혼자서 뒤집어쓰고 희생할 순 없어. 그건 억울한 일이고 불공평하지. 그건 정의가 아니야. 내가 지금 자기연민의 죄에 빠진 것도 아니고 자신은 당연히 희생자라고 여기는 감정이나 분노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 잘 알 거 아닌가.
    전쟁 때도 말이야…… 사실을 말하면…… 나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바닥에 그냥 엎드려 있었어. 너무 무서워서 오금이 저렸거든. 여기서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 개죽음이라고. 그게 인간의 생존본능이 아니겠어?
    IMF사태 때 무너진 그룹들을 보라구. 그들의 비리가 세상에 전부 까발려 졌지 않은가. 그때 누가 제대로 처벌을 받았나?

    변호사: 그럼 지금 뭘 원하시나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피고인: 자넬 짜르고 싶지는 않지만……. 지식인들이란 한심하지. 좋게 말하자면 샌님이고 어리석기 짝이 없어.
    사임계를 곧바로 내주게.
    역시 전관예우를 듬뿍 받는 거물 변호사가 필요하지. 그들이 많은 돈을 받은 만큼 잘 할 거야.

    변호사: 그래서, 절 이제껏 이용하셨군요. 그것도 집안 어른이…… 제가 너무 흥미로워서 그 일인자에 대해서 대충 조사를 해보았지요. 그 일인자는 아예 존재조차 하지 않더군요.
    회장님께서 책을 많이 읽은 것은 사실이겠지요. 알고 있는 지식도 많고 상상력도 풍부하니까요. 그게 뮌하우젠증후군과 비슷한 거지요.
    정말 썩어빠진 기업가 대신 작가가 되셨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피고인: 할 수 없었네. 그렇다고 지금 사과할 생각은 없네. 감방에도 통용되는 관습이 있더군. 다들 변호사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고 하더라고…… 실제 그렇게 하고 있고……

    변호사: 저야 뭐……. 원하시는 대로 사임해야겠지요. 어차피 변호사로서 해야 할 역할이 없으니까요. 그 동안은 집사 변호사 노릇을 하긴 했습니다만…….
    감방 안에서 답답하고 심심하던 차에 말 상대가 필요했는데…… 말 상대로서의 역할이 끝났다는 거 아닙니까.

    피고인: 그렇지…… 그렇지 않은가…… 우린 사건의 핵심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 재산범죄이니까 구체적인 금액이랄까…… 수치가 중요한 데 말이지. 그건 다른 변호사와 할 거니까.
    변호사가 한 역할에 비하면 너무 많은 돈을 주었다고 하더군. 같은 방에 있는 잡범들이 그랬어. 그것들이 빠꼼이 이거든. 돌려주는 게 좋을 거야.
    뭐라고 했지? 그렇지, 집사 변호사라고 했지. 일당으로 계산해서 그에 상응하는 수임료는 따로 지급해야겠지.

    변호사: 뭔가 착각하고 계시군요. 약속하신 돈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지요. 차일피일했단 말입니다. 일종의 훌륭한 지연 작전이었지요.

    피고인: ……

    변호사: ……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