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유중원
연락처 :
이메일 : rjo12@chol.com
홈페이지 :
주소 :
소개 :

이 포스트는 0명이 in+했습니다.

    목록이 없습니다.

    유중원님의 포스트

    [ 더보기 ]

    마늘밭의 비밀

    0

    마늘밭의 비밀

    남에게 속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J.W 괴테

    의료기기 위탁 임대업 다단계 사기 사건의 주범인 현주엽이 남태평양 소시에테 제도에 있는 작은 섬나라 타히티에서 검거돼 국내로 송환됐다. 그는 해외에서 도피 생활을 하다 5년 9개월 만에 붙잡혔던 것이다.
    그는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낌새를 느끼고 해외로 도피했다. 호주에서 남동쪽으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타히티는 원주민인 마오리족과 중국인, 프랑스인들이 주로 사는 작은 섬나라다. 한국인이 얼마쯤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숫자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는 출국한지 1년여가 지나서야 타히티에 도착했다.
    경찰이 출입기자들에게 설명했다.
    “처음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남태평양을 염두에 두고 치밀하게 도피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여권만 있으면 비자 없이 갈 수 있는 나라가 널려 있지요. 다시 말하면 범죄자가 도망칠 수 있는 나라가 170개국이 넘어요.
    이번 사건은 그 쪽 사법 당국이 잘 협조해 준 덕택이지요.”
    경찰이 타히티에 들어간 현주엽의 행방을 확인하는 데에만 5년이 걸렸다. 그는 처음에는 홍콩으로 갔고 거기서 거액을 주고 신분세탁을 한 후 가짜 여권을 만들어 중국 상하이, 필리핀, 아르헨티나 부웨이노스아이레스, 호주 브리즈번을 거쳐 타히티로 갔던 것이다.
    그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 3년 전에 아버지가 죽은 줄도 몰랐을 정도로 국내와는 철저히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한국과 타히티 사이에 범죄인 인도 조약이 체결되지 않아 타히티 당국의 협조를 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타히티는 수십 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작은 섬으로 숨어들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파페에테 항구의 고급 저택에 살고 있었다.
    태평양은 어느 바다보다도 공간이 광활하여 망망하고 황량해 보인다. 남태평양에 있는 타히티는 프랑스령 소시에테 제도 가운데 가장 큰 섬으로 망망한 바다 위에 높이 솟아오른 푸른 섬이다. 그 곁에 있는 타히티의 자매 섬인 할 무레아 섬은 장엄한 바위 섬의 모습을 띄고 있다. 파피에테 항구의 부두에는 세관 건물과 출입국 관리 사무소가 있고 작은 어선들과 요트, 범선들과 함께 부정기 화물선, 프랑스 군함 등이 정박해 있었다.
    파도가 곡선을 길게 그리며 먼 바다에서 밀려와 거품을 일으키며 하얗게 부서졌다. 태양이 막 떠올랐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고 물안개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바닷새들이 이른 아침부터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배다리에 모여 앉아 부리로 깃털을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장교처럼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짧은 머리를 한 단정한 모습이다. 동양인처럼 보이는 세 사람의 남자가 서성거렸다. 그러나 날카로운 눈길로 거리를 샅샅이 훑는다. 그들은 약간 긴장한 듯 했고 서로 간 말이 없었다. 그 중 연장자로 보이는 사람이 담배를 입에 물었고 곧 바로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바닷물에 던져 버렸다.
    그가 말했다.
    “가보자고…… 외출하기 전에…… 집에 있을 거야. 방심한 틈을 타서 덮치는 거지. 그리고 찔러보는 거야.”
    남쪽 바다의 찬란한 태양 아래 우뚝 서있는 우아하고 조용한 집. 그의 유럽식 집은 뱃사람들이 모여드는 빅토르 젤뤼 광장에서 야자나무, 망고나무, 빵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사이로 울창한 덤불숲이 우거진 뒷산 쪽으로 들어가 있었다. 정원에는 아름다운 타마린드 나무 몇 그루가 서있고 폴리네시아 특유의 꽃들이 만발해있고 원형 연못에 있는 분수대에서는 한 줄기 가는 물줄기가 허공으로 곧게 올라가더니 투명한 유리구슬이 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정원 구석에는 구형 검은 메르세데스가 서 있다. 그리고 집 뒤편으로 망고나무 과수원이 딸려 있다.
    아주 현대적인 감각과 유럽식 고풍스러운 감각을 동시에 갖춘 안락하고 여유로운 방. 그 집의 넓은 거실은 천장이 높고 청동 받침대 위에 훌륭한 벽난로가 설치되어 있고 창문에는 밝은 색 레이스 커튼이 쳐져있다. 바닥에는 붉은 색조의 두터운 페르시아 양탄자가 깔려있다. 프랑스식 고급 장식장들로 꽉 차있다. 연초록 빛깔의 벽에는 현실적인 것과 초현실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서로 뒤섞여 있어서 구분을 불가능하게 하는 폴 고갱의 그림들 중에서 비교적 초기 작품인 ‘노 테 아하 오에 리리 (왜 화가 난 거야?)’, ‘나베 나베 마하나 (감미로운 나날)’, ‘테 레리오아 (꿈)’의 복제화가 걸려 있다.
    한국 경찰 세 명이 그의 집에 찾아 갔을 때 현주엽은 벌레라도 씹은 표정이었다. 그는 충격을 받아서 입을 헤벌리고 멍청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낮은 담벼락을 가볍게 넘었고 반쯤 열려있던 문으로 잽싸게 들이 닥쳤다.
    전직 보험설계사였던 40대 중반의 남자는 적당히 살집이 오른 체구에 온통 얼굴을 뒤덮을 만큼 덥수룩하게 수염을 길렀다. 키는 170센티미터 정도로 보인다. 기껏해야 서른 살 내외로 보이는 여자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경찰인데!”
    현주엽이 말했다.
    “뭐라고요? 어디서?”
    “어디긴 어디야. 한국에서 왔지.”
    “어떻게 여기까지?”
    “당신 찾느라고 경찰이 고생깨나 했어. 우린 체포영장을 가지고 왔지. 수염을 많이 길렀지만 그 얼굴 어디 가겠어.”
    “여긴…… 타히티…… 한국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음대로 안 될 걸요. 변호사를 부르겠습니다……”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당신의 여권은 무효화됐어. 불법 체류자 주제에……. 여권을 교묘하게 위조해도 소용이 없다구. 여기 경찰이 복잡한 출국 절차를 생략하고 우리에게 넘겨준 거란 말이지. 우리가 도망가기 전에 적당히 교섭을 했거든.”
    “어정쩡하게 서 있지 마시고 좌우지간 좀 앉으십시오. 정말 억울합니다. 진실은 밝혀지겠지요. 여기까지 경찰이 찾아온 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있으라고. 꼼짝 말라니까. 우린 총이 있지.”
    “걱정 말라고요. 집에 무기는 없어요. 누가 여기까지 올 줄 알았겠어요.”
    “정말 다행이야. 천려일실이라고 해야겠군. 좀 더 깊숙이 숨어 있지 그랬어. 그러면 찾기가 매우 어려웠을 거야. 그리고 기관총 같은 걸로 중무장하고 있어야 되는 거 아니야?”
    “……”
    “사법 당국이 체포와 본국 송환을 이미 승인했으니까. 쓸데없이 굴지 말라구. 이미 늦었단 말이야. 그리고 할 말이 있거든 귀국해서 실컷 하라구. 억울한 거 있거든 전관예우를 받는 거물 변호사를 사면 될 거 아냐.”
    그가 비굴하게 웃었다.
    “술 한 잔 하시겠어요? 아주 고급 술이지요.”
    “어련하겠어. 우리는 지금 공무집행 중이니까……”
    여자가 말했다.
    “제가 커피를 내어오죠.”
    사기 사건을 전담하는 경제팀의 반장인 경위가 말했다.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커피에 독약을 탈 수도 있으니까.”
    현주엽이 말했다.
    “며칠 시간을 주십시오. 여길 정리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건 우리가 알 바가 아니지……”
    경위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느릿느릿 포장을 뜯었다. 여자가 여기서…… 담배는 안 돼요. 카펫에 담뱃재가 떨어지면 더러워져요. 그러니까 안 된단 말이에요. 라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그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퍼져서 덩어리가 되어 자욱이 깔렸다.
    “돈은 충분히 있어요.”
    “개새끼! 여기까지 와서. 그 버릇 어디 가겠어?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빨리……”
    어느 형사가 수갑을 채우고 안 보이게 수건으로 감쌌다.
    그는 그가 타히티에서 자리를 잡은 후 따로 입국한 술집에서 만난 내연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 여성도 그가 체포돼 송환될 즈음에 함께 귀국했다. 경찰이 참고인으로 조사할 게 있다면서 귀국을 종용했던 것이다. 경찰은 그녀를 의심했고 공모해서 최소 몇 십억 원을 해외로 빼돌려 도피 자금으로 쓴 것으로 보았다.

    경찰에서 고소인 조서를 작성할 때 피해자들이 말했다.
    “제가 그때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단계라고 의심을 했거든요. 그런데 절대 다단계가 아니라며 그쪽에서 오히려 화를 내더라고요. 연 20~30퍼센트 수익이 난다고 계속 권유하니 결국 넘어간 것이죠.
    의료기기 위탁 마케팅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수백만 원짜리 기계를 구입하면 매달 30만 원씩을 1년간 지급해주고 이후 기계를 회사에 넘기면 구입비의 60%를 돌려주는 방식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믿고 투자했습니다. 그런데 석 달도 안 돼 약속한 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기계의 제조번호와 공증문서에 적혀 있는 번호들이 안 맞더라고요.”
    “저는 6억 원이 넘는 돈을 투자했지만 결국 5억 원을 날렸습니다. 사업 시작 전 가지고 있던 아파트는 금융기관에 담보로 잡혔습니다. 빌린 돈만 3억 원이 넘습니다. 아들은 대학을 휴학시키고 36개월 동안 복무하는 유급병으로 지원해 군에 입대시켰습니다.”
    “오죽했으면 너무 아파서 몇 년간 입․퇴원을 반복했던 부모님 병문안도 한 번 밖에 못 갔어요. 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효자식이 없지요. 오늘 아침은 굶었고, 점심은 컵라면으로 때웠습니다. 아마 저녁도 똑같이 컵라면을 먹겠지요. 그래도 전 나은 편이에요. 피해자들 중엔 자살한 사람이 여럿 있거든요.”
    “제 아버지는 책만 보던 분이셨는데…… 그해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는 사실 아버지께서 그렇게 큰돈을 맡겼는지 몰랐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뒤에 알았던 거죠.
    아버지는 평소 가족들에게 앓는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80 평생 새벽기도를 하루도 쉬지 않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지요. 그런 아버지가 투자한 돈이 3억5000만 원에 이른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았습니다.
    사건이 있고 나서 아버지께서 많이 변하셨어요. 항상 정돈된 삶을 사셨는데 매일 같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피해자 모인인 바른생활 실천 국민연대의 카페를 들여다보시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아버지는 결국 선산으로 가서 소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우리 나라 최고의 부자들이 몰려 있는 강남 한복판에 번듯한 사무실이 있으니까 회사에 대한 믿음이 갔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100개나 되는 지점이 있다고 했으니까요. 만약 강북 지역의 허름한 곳에 사무실이 있었다면 제가 그들을 믿을 리가 없었겠지요.”
    “부자가 되고 싶다는 욕심은 없었지요. 맨날 골골해서 몸이 좋지 않은 아내가 바깥일을 쉬도록 하는 게 유일한 소망이었어요.
    의료기기 대여사업 다단계 업체에 처음 걸려든 게 몇 년 전이었습니다. 통장에 돈이 들어온다는 말에 처음에는 500만 원 정도 소액 투자를 한 것이죠.
    매달 꼬박꼬박 돈이 들어오는 걸 본 저는 아내와 상의해서 투자금액을 대폭 늘렸습니다. 살고 있던 다세대 빌라를 담보로 대출을 받고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1억 5000여 만 원을 투자했던 것이지요. 사건이 터지기 직전에는 그쪽 사람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요트 전문 회사를 만들테니 투자하라고 해서, 그걸 확인하기 위해 요트 계류장 예정지가 있는 부산, 통영, 여수까지 직접 다녀왔지요.
    하지만 얼마 뒤 강남에서 터진 최대 규모 사기 사건이라는 신문 보도가 나오면서 그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아내를 쉬게 해주려고 시작한 일 때문에 제가 심각한 병을 얻어 지금은 아내가 건물 청소 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 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 안 해요. 해외에서 떵떵거리고 살겠지요. 우리나라는 사기꾼 천국입니다. 정부는 뭘 하고 있는가요? 맨날 입만 번드르르 해가지고……”
    그는 사기 행각을 시작하면서 역삼동에 실 평수가 200평이나 되는 대형 사무실부터 열었다. 그리고 수억 원의 인테리어 비를 주고 초호화판으로 사무실을 꾸몄다. 이어 전국에 100개가 넘는 지점을 잇따라 개설했다. 물론 투자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서류상으로만 개설한 것이다.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의심하던 투자자들도 호화찬란한 강남의 본사와 100개가 넘는 지점 수를 보며 투자를 해도 좋겠다고 안심했다.
    그는 의료기기 임대업에 투자하면 큰 수익을 남길 수 있다고 하여 피해자 만 여명으로부터 2500억 원을 투자 받아 가로채며 사기 행각을 벌였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초기 투자자들에게 수익금을 지급했지만 이 수익금은 다른 투자자로부터 받은 신규 투자금이었다. 금융 피라미드 사기의 전형적인 돌려막기 수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규 투자자 모집이 지지부진하고, 이에 따라 수익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않자 사업이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투자자들이 사무실로 찾아와 항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때는 회사의 경호를 맡은 조폭들이 그들을 위협해서 쫓아내긴 했다. 결국 현주엽은 남은 돈을 챙겨서 급하게 외국으로 도주한 것이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2000억 원은 배당금으로 회원들에게 이미 지급했고 나머지 500억 원은 회사 운영비와 해외 도피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진술했다. 그렇지만 공범으로 지목된 그 당시 부사장, 전무, 상무, 본부장 등은 자신들 역시 다단계인 줄은 알았지만 잘 돌아가는 줄 알았기 때문에 자신들 역시 속았고 피해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이 추적했지만 회사 운영비 등으로 사용했다는 500억 원은 행방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사건을 송치 받은 검찰 역시 자금의 행방은 밝혀내지 못했다.
    검찰 조사에서 범행 자체는 순순히 인정했던 현주엽은 남은 자금의 행방에 대해선 극구 부인하였다.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금은 회사 경호를 맡은 강남 조폭들이 협박하여 100억 원이 넘게 뺏어갔고 또 대부분은 마카오 정킷방에서 바카라를 하면서 날려버렸습니다.
    그런 눈먼 돈은 도박으로 날리게 되어 있지요.
    피해자들이 무슨…… 속은 사람들이 바보예요. 어리석은 탐욕 때문에……”라고 말하면서 배째라는 식으로 버텼던 것이다.
    검찰 조사 결과 부동산이든 금융재산이든 현주엽 명의로 된 재산은 하나도 없었다.

    검찰은 그가 한사코 계속 부인하자 현주엽이 가족, 측근, 변호인과 면회하는 구치소 접견실에 몰래 고성능 녹음기를 설치하였다. 행형법에 따르면 교정 당국은 범죄 증거를 없앨 우려가 있는 피의자가 구치소에서 나누는 대화를 녹음할 수 있다.
    얼마 뒤 녹음을 듣던 검찰은 귀가 번쩍 뜨였다. 현주엽이 가족을 면회한 자리에서 대화한 내용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가 말했다.
    “그년과 함께 실컷 잘 살고 들어오니 기분이 어련하시겠어요?”
    “목소리 좀 낮추라고. 어쩔 수 없었잖아. 쓸데없이…… 그 이야기는 그만 두자고……”
    “지금 집에 돈이 하나도 없다는 거 알고 있어요?”
    “돈이 하나도 없다고? 내가 준 게 얼마인데?”
    “그때 주고 간 돈이 몇 푼 된다고……”
    “돈 걱정은 말라고…… 내가 나가면 마늘밭에 묻어둔 걸로 모든 걸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밭에 묻어놓은 고구마가 잘 자라도록 해놨으니까……”
    “둘째까지 학교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걔를 돈 걱정 하지 말고 사립 초등학교에 보내도록 하라고. 그리고 서초동 쪽에서 괜찮은 빌라를 물색해봐.”
    “무슨 돈으로?”
    “돈 걱정은 하지 말라니까……”
    “마늘밭……? 고구마……?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당신은 불효자식이에요.”
    “그렇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아무 말씀 안 하셨나?”
    “무슨 말?”
    “글쎄…… 무슨 말이든……”
    “아버진…… 당신이 가고 나서 얼마 안 있어 충격 때문인지 치매 증상이 나타났어요. 아무것도 기억을 못 했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어요?”
    “그랬었군.”
    “어머니한테나 좀 잘 하지 그래…… 어머니한테 간 지가 1년도 넘었다면서…… 그렇게 연락을 끊고 살면……”
    “어머닌 제가 자기 집에 오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가요? 자기 딸밖에 모르지요. 어머닌 20년이 넘게 슈퍼를 하고 있는데…… 그게 재미있는 모양이에요. 마을 노인네들이 맨날 모여서 화투 치고 하니까…… 마을 사랑방인 셈이지요.”
    “그러니까…… 어머닌 정정하시단 말이지?”
    “어련하겠어요. 백 살까지 살 거예요. 당신보다 더 오래산단 말이에요.”
    “정말 다행이군.”
    “당신 걱정이나 하세요. 재판은 어떻게 돼가요?”
    “걱정 말라구. 법원장 출신 거물 변호사를 선임 했으니까. 전관예우를 듬뿍 받는다고 하더군. 스스로 그렇게 말했어. 재판장이 자기 배석을 했다네…… 그러니 잘 되지 않겠어? 곧 나가게 될 거라고. 장담을 하더라고……”
    검찰은 문제의 마늘밭이 거액의 현금을 묻어둔 진짜 마늘밭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가족 명의로 된 부동산 현황을 면밀히 검토하였다. 검찰은 옛날 인터넷 도박사이트 운영자가 불법 도박 수익금 몇 십억 원을 비닐봉지에 담아 시골 마늘밭에 묻어뒀다가 적발된 사건을 떠올렸던 것이다.

    군산의 인테리어 업체에서 전기 기술자로 일하던 김상천은 군산시 옥구읍의 한 건물의 복구공사를 맡게 되었다. 며칠 전 전기 누전으로 추정되는 화재가 나서 2층 건물 전체가 엉망이 된 것이다.
    그가 동료 인부 2명과 함께 원래 사무실로 쓰였던 2층을 정리하면서 불에 반쯤 타고 그을린 붙박이장을 들어냈을 때였다. 붙박이장 아래서 가로 40센티미터, 세로 40센티미터의 정사각형의 낡은 나무 상자들이 나왔다. 그러나 무심결에 뚜껑을 열어본 김상천과 인부들은 그만 놀라서 주저앉고 말았다. 1킬로그램 금괴 200 여개가 누렇게 변한 한지에 꽁꽁 묶여 싸인 채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 상자들 속 금괴는 개당 5000만 원이 나가므로 시가로 치면 총 100억 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현장에서 그들은 입이 벌어진 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세 명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즉석에서 모의를 했다. “모두 가져가면 틀림없이 들키겠지만 한두 개쯤은 없어져도 모를 것이다.”라며 각자 금괴 1개씩을 챙겼다.
    그 공사의 책임자 격인 김상천은 말했다. “오늘 일은 모두 입을 다물라고…… 무덤 속까지 비밀을 가져가는 거야. 만약 탄로나면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내가 가장 중한 처벌을 받게 된단 말이지.”
    그러나 김상천은 그날 밤 늦게 동거녀와 함께 자신의 SUV를 타고 몇 번이나 공사 현장을 들락거리며 남아 있던 금괴를 모조리 챙겨왔다.
    그 건물은 튼튼하게 지어진 옥상이 평평한 2층 벽돌 건물로 밑바닥이 매우 두터웠는데 2층 붙박이장 아래 바닥이 20센티미터 가량 낮게 만들어져 있었다. 평상시엔 알 수 없지만 붙박이장 아래 서랍을 완전히 빼내면 비밀 공간이 드러났다.
    현주엽은 금괴를 모아 이곳에 보관했다. 2층은 아버지가 군청 말단 공무원을 퇴직한 후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현주엽은 아버지에게 귀중한 물건이므로 잘 보관해야 한다고 신신당부 했던 것이다.
    그 건물은 옛날부터 현주엽의 부모가 살고 있었다. 1층은 슈퍼겸 살림집이었는데 아버지가 몇 년 전부터 치매를 앓다가 80세의 나이로 숨지자 그의 어머니는 혼자 살면서 여전히 슈퍼를 하고 있었다. 공사를 하는 동안 어머니는 군산에 사는 딸 집으로 잠시 옮겨가 있었다.
    공사는 열흘 만에 간단히 끝났다.
    그 비밀은 현주엽과 그 아버지만이 알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죽었고 현주엽은 해외에 도피 중이었다. 그러므로 나머지 가족들은 그 비밀을 몰랐던 것이다.
    현주엽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낡은 초가집 옆에 200평 남짓한 텃밭이 있었는데 가족들은 이곳에 고구마나 채소를 심기도 했지만 주로 마늘을 심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마늘밭이라고 했다. 그의 부친은 퇴직을 한 후 몇 백 년이나 된 당산 나무가 서 있는 마을 입구로 새로 시멘트 포장 도로가 생기면서 그 도로와 접해 있는 마늘밭에 건물을 지었던 것이다.
    그날 오후 늦게 현주엽은 혼자서 내려왔다. 그가 왔을 때 짙은 향기를 내뿜는 하얀 꽃들이 핀 아카시아 나무들이 죽 늘어선 동네 골목길은 아무도 없었고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은 미리 약속한 대로 신속하게 일을 처리했다. 그제서야 아버지가 한숨 돌리며 말했다.
    “회사는 어떻게?”
    현주엽이 말했다.
    “아직은 괜찮아요. 그럭저럭 회전이 되고 있어요.”
    “다행이구나.”
    “비밀을 잘 지키세요.”
    “잘 알았다니까…… 어머닌 내일 돌아올 거다. 동네 할머니들과 온천에 관광 갔으니까. 네 어머니한테도 절대적으로 비밀로 하마.”
    “제가 당분간 못 올 겁니다. 누가 묻거든 10년이 넘게 연락이 안 된다고 하세요.”
    “뭐라고 하는 거야?”
    그가 아버지를 쳐다보았고 작은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아버지…… 저…… 올라가겠습니다.”
    아버지가 말했다.
    “밤길에 운전 조심해라. 아이들도 많이 컸겠구나.”
    옥구 저수지에서 저녁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전주 군산 간 고속화 국도를 달리는 대형 화물차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경적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동군산 IC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올라갈 것이다.

    절도범 김상천은 그러한 전후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는 행여 꼬리를 잡힐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 등 대도시 금은방을 6개월 동안 암암리에 돌며 한 번에 금괴 몇 개씩을 현금으로 바꿨다. 그리고 크고 튼튼한 금고를 새로 사서 그 돈을 넣어 두었고 금고를 열 수 있는 비밀번호는 동거녀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거액의 돈을 손에 쥔 김상천은 이제 지긋지긋한 회사를 그만두었다. 집을 아산만과 삽교천이 멀리 보이는 아산시에 있는 고층 아파트로 옮겼다. 금의환향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1억 원이 넘는 BMW 승용차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매일 술에 절어서 단골 술집에 처박혀 살았다. 아예 그 단골 술집 젊은 여주인과 동거하다시피 하였다.
    그때 동거녀는 너무 속이 상하고 화가 난 나머지 술집으로 찾아가서 술집을 뒤엎고 대판 싸웠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육촌 오빠인 유승정에게 자초지종을 알렸다.
    그녀가 말했다.
    “오빠, 잘 계시지요? 통 연락도 못 드리고…… 죄송해요…… 그렇지요…… 그렇다니까요…… 이 인간이 날 배신해도 분수가 있어야지요. 올 구정에 그 양반 사주를 보았어요. 군산에서 아주 용하다는 점쟁이가 올해 운수대통할 거라고 했는데…… 영락없이……”
    어느 날 유승정이 조폭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 둘을 데리고 아산으로 내려왔다. 김상천을 반죽음이 되도록 때리고 바다에 던져버리겠다고 위협을 하여 비밀번호를 알아내고 금고 안에 들어있던 90억 원을 빼앗았다.
    그녀가 말했다.
    “오빠…… 저에게도 돈 좀 주어야 할 거 아니에요?”
    오빠가 말했다.
    “그렇지. 이억 원을 줄게……”
    그녀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다시 말했다.
    “너무 적지 않나요? 그걸 오빠 혼자 다 갖겠다고요? 좀 더 주면 안 될까요?”
    그가 정색을 하며 훈계하듯 말했다.
    “돈이 많다고 좋은 게 아니야. 돈이 많으면 인간이 타락하게 돼있어. 그 사람 좀 보라고. 돈은 오빠에게 맡겨 놓았다고 생각하라고.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연락을 해. 송금해 줄 거니까. 알았지?
    내가 바쁘니까 지금 빨리 올라가야 해.”

    남대문 시장에서 거액의 자금이 이동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변진장을 긴급체포했다.
    변진장이 경찰서에서 진술했다.
    “6개월쯤 됐나요? 유승정이 갑자기 전화를 했다니까요. 70억 원을 몇 바퀴 돌려서 세탁할 수 있겠냐고 묻더라고요. 그 사람과는 뭐 가까운 사이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좀 알고 지냈지요. 저야 뭐 솔직히 말해서 남대문 시장에서 시장 상인을 상대로 조무래기 조폭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아저씨라고 하면 이쪽 업계에서도 꽤 알려졌으니까요. 제가 ‘그런 건 일도 아니야. 손바닥 뒤집기라니까. 수수료를 두둑이 챙겨달라’고 말했지요.
    그러고 나서 바로 김 여사님한테 연락했던 것입니다.
    김 여사님 하면 이 바닥에선 모두 다 알아주지요. 남대문에서 환치기로 유명한 큰 손 아닙니까.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대포폰을 10대나 굴리면서 통화가 끝나면 깨끗하게 기록을 다 지울 정도로 깔끔하게 처리하더라고요.
    벌써 낌새를 알아채고 감쪽같이 숨어 버렸지요. 정보망이 쫙 깔려 있거든요. 아마 해외로 잠시 나갔을 거예요.
    처음에는 70억 원이라니까 너무 큰 돈이라고 무척 놀라더군요. 무슨 범죄와 관련된 구린 돈이 아니냐고 걱정을 좀 하더구먼요.
    제가 설득했지요. ‘수사가 들어올 만큼 범죄와 관련된 건 아니에요. 처음엔 나도 놀랐거든요. 유승정이 말을 들어보니까 자신도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재벌 그룹의 실세 오너가 가지고 있는 자금이라고 했어요. 유승정은 홍콩으로 의류를 수출할 때 그 재벌 기업의 수출 창구를 이용한 적이 있기 때문에 잘 아는 사이라고 했어요. 그 돈을 해외 지점을 통해서 처리하자면 회사 회계장부에 올라가서 세무 당국에 노출될 수밖에 없으니까 이렇게 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유승정 역시 너무 거액이고 위험이 크다는 걸 인정했어요. 그 대신 수수료를 통상의 3배로 선금으로 주기로 한 겁니다.
    어쨌든 돈은 홍콩으로 송금을 해서 중국 위안화로…… 달러로 제대로 세탁이 됐어요. 워낙 금액이 크다보니까 시간이 많이 걸렸지요. 세탁된 돈도 유승정을 거쳐 그 재벌 오너에게 잘 들어갔으니까 일이 잘 끝난 셈 아닌가요?
    그래서 유승정과 마카오, 홍콩, 필리핀, 베트남 등지로 돌면서 게임도 좀 하고 고급 술도 많이 마셨지요.
    그 뿐입니다. 저도 더 이상의 내막은 정확히는 모른다고요.”
    경찰은 유승정과 재벌 오너의 연결 고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마침내 자금의 이동 경로를 파악했다.
    경찰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유승정은 한창일 때 동대문 평화시장에 봉제공장을 두고 원청회사에 납품을 하면서 남대문 시장에서는 여성의류 판매와 해외 수출을 하는 탄탄한 작은 회사를 운영한 적이 있었다. 변진장과 유승정은 그때부터 알고 지낸 것이다. 그러나 회사는 IMF 사태 때 원청회사가 도산하면서 연쇄 부도를 맞아 함께 도산하였다. 그는 몇 년간 노숙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고 언제부터인가 다시 남대문 시장으로 돌아와 옷 장사를 했다.
    김여사는 처음에는 금액이 너무 커서 움찔했지만, 그러나 재벌 오너의 얌전한 돈이고 수수료가 3배라고 하니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여사는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영 찜찜해서 홍콩의 거래처에게 협조를 부탁했다.
    홍콩에 있는 거물 환치기 업자의 별명은 한국에서 홍콩 대부로 통했다. 대부는 흔쾌히 그까짓 거 사소한 거라고 하면서 승낙하고 깔끔하게 처리해 주었다. 대부 역시 잘게 쪼개서 대포통장으로 송금된 돈을 몇 번 굴린 다음 잔 심부름 해주고 먹고사는 인출책 패거리를 통해 인출했던 것이다.
    경찰은 유승정이 아직도 중국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필리핀 바탕가스 외곽의 사탕수수밭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피살된 채 발견된 한국인 남녀 2명은 중국에서 필리핀으로 건너 간 유승정과 그 내연녀인 것으로 밝혀졌다.
    필리핀에서 발생한 한국인 남녀 피살사건의 피의자가 경찰에 붙잡혔다. 필리핀 현지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었다.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필리핀에서 살인을 한 변진장을 전남 목포에서 긴급체포했다고 밝혔다. 몇 달 전 출국한 변진장은 필리핀에서 성명미상 남자를 만나 범행을 전후해서 함께 머물다 사건 발생 직후 며칠이 지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필리핀 주재 한국 경찰인 코리안 데스크와 함께 한국에서 급파된 경찰은 필리핀 현지에서 변진장이 마닐라에서 리스한 SUV 자동차의 진행 경로를 찍은 폐쇄회로 TV를 확보했다.
    변진장 등이 힐튼 호텔 로비를 서성이는 모습, 호텔을 출발해서 북쪽으로 앙헬레스로 가서 유승정과 여자를 납치해서 태우고 국도를 통해 남쪽으로 내려가는 모습, 바탕가스에 도착해서 샛길로 빠지는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있다. 차 안에서 몇 개의 지문도 채취했다. 그리고 수십 통의 통화기록을 분석해서 변진장을 검거했고 마침내 그가 범행 일체를 자백한 것이다.
    그러나 필리핀 경찰은 이번 사건의 공범으로 추정되는 성명미상 30대 남성을 검거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잠적한 상태였다.
    차는 구도시의 포장 도로를 벗어나서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울퉁불퉁한 비포장 샛길로 들어서서 한참을 더 달렸다. 곳곳에 웅덩이가 패어 있고 길가에는 벌채한 목재가 쌓여 있다. 차는 밀려드는 황혼 빛에 차츰 제 고유의 녹색 색깔을 잃어가는 열대 우림의 고무나무가 촘촘하게 우거진 낮은 언덕길을 내려왔다. 인적은 전혀 없었다. 숲속 나무의 우듬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어른 키 이상으로 자란 사탕수수들이 하늘거리며 아득히 멀리 쭉 늘어서 있다. 열대의 후끈거리는 열기는 옅어지고 있다. 석양의 하늘을 배경으로 풍경 전체의 윤곽이 뚜렷해졌다. 유승정과 여자는 사탕수수 밭의 가운데 경계선을 이루는 도랑에 꿇어 앉아 있다. 킬러는 차가운 눈으로 냉정하게 희생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유승정은 총구가 눈앞에 어른거리자 그제서야 깊은 몽상에서 깨어난 듯 했다. 유승정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이게 모두 유승정 탓이라는 듯 그를 흘겨보았고,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유승정이 그때 느릿느릿 말했다. 돈은 가지고 있는 거 다 주겠다고…… 그까짓 것…… 바카라가 워낙 빨리 돌아가니까…… 난 이제 알거지가 되었다고…… 이 여자는 쓰레기이지, 내 돈을 그렇게 많이 빨아 먹고도 홀라당 다 먹으려고 여기까지 쫓아왔으니까…… 증거가 남으면 안 되니까 이 여자를 쏘는 게 좋을 거요…… 남자들끼리 이야기 하자고……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그보다는 그 말에 킬러의 심사가 뒤틀려 버렸다. 그가 신경질적으로 폭소를 터뜨리며 방아쇠를 당겼다.
    그 일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그는 열흘 넘게 구속되어 있다.
    변진장이 경찰서 조사실에서 진술했다.
    “유승정이 나를 핫바지 취급한 거예요. 완전히 소설을 쓴 것이지요. 그 때문에 외국환거래법 위반으로 몇 달을 살았어요. 집행유예를 받고 나왔지요.
    돈을 내놓으라고 했지요. 20억을…… 경찰 조사에서 그 돈이 마늘밭에서 나온 돈인지 알았거든요. 나는 그 돈 때문에 처벌을 받았으니까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것이지요.
    그런데 푼 돈 밖에 안 되는 돈을 주겠다고 버티면서 딱 잡아떼더라고요. 환전한 돈을 카지노에 숨겨 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제가 이쪽에서 잔뼈가 굵었는데 홍콩 쪽에 루트가 있으니까 이것저것 확인을 했어요…… 그랬다구요.”
    형사가 말했다. “좀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말하라고.”
    “그 여자가 소개해준 것이겠죠. 그 술집에 드나들던 카지노 에이전트나 정킷방 업자들과 친하게 지냈으니까요.
    단골 술집 마담이었거든요. 그때 잘 나갔지요. 논현동에 있는 소위 텐프로 룸살롱의 얼굴 마담 아니었습니까.
    거긴 양주 한 병에 100만 원을 받고 룸이 가장 싼 게 300만 원 이상이니까요. 그놈은 돈이 생기자마자 거기 단골이 돼서 물 쓰듯이 쓴 것이지요. 국내에서 벌써 그 여자를 꼬시려고 10억을 내던졌어요. 그리고 홍콩에서 환전 절차가 무사히 끝나자 나중에 여자는 이곳을 정리하고 해외로 빠져 나간 거예요.
    이러한 사실은 제가 필리핀으로 출국하기 전에 강남 쪽 사람들을 만나서 알아낸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야. 그 킬러는 누구야?”
    “그 사람은 필리핀 국적이에요. 튀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에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한국 사람이고 아버지가 필리핀 사람이란 말입니다. 한국 말은 조금 해요. 맨날 ‘마사랍 코리안’이라고 해요. 그게 한국인은 맛있는 사람들이란 뜻이죠.
    그쪽 이름은 앙리킴이었는데 진짜 이름은 저도 모릅니다. 마닐라 호텔에서 정킷방을 운영하는 목포OB파의 졸개가 돈을 주니까 소개해 주었지요.”
    “어떤 놈이었어?”
    “미남으로 생겼지요. 그러나 더럽게 성질이 급해요. 여자 이야기에 벌컥 화를 낸 것이지요.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당겨 버렸어요.
    맹세할 수 있습니다. 전 살인과는 관계없어요. 돈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단 말입니다.”
    “필리핀에는 칠천칠백 개나 되는 섬이 있다는데…… 다시 말하면 숨어있지 왜 나왔어?”
    “그 냉혹한 킬러가 저도 죽일 거라고 직감했었지요. 그래서 필리핀을 빠져나온 것입니다.”
    “유승정이 말이야. 총 앞에서도……?”
    “그 비열한 인간은 오직 돈 밖에 몰랐지요. 사람보다 돈이 더 중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에 그렇게 환장했으니까 자기 목숨과 바꾼 것이지요.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인데…… 지독한 놈이에요. 그놈은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거예요.”
    천장의 우윳빛 불빛은 흐릿하다. 사방이 회색인 몇 평 남짓한 지하 조사실은 썰렁했다.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는 젊은 형사와 반장, 변진장이 정사각형 철제 탁자를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마주보고 앉아 있다.
    강력반 반장인 경감이 말했다.
    “왜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거부했을까? 우리는 동의하지 않으면 억지로 할 수는 없지.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으니까 자신이 없었겠지. 그렇지 않은가?”
    “전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지요. 그런 상태에서 그걸 하면…… 그 이상한 기계를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요? 그리고 검사관인들 인간인데 어떻게 그를 신뢰할 수 있어요.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게 아닌가요.”
    “그렇단 말이지.”
    “저를 믿어 주세요. 전부 말씀 드렸잖아요.”
    “전부 털어놨단 말이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어쩔 수가 없었어요. 유승정이 때문에 킬러가 화가 난 거예요.”
    “필리핀 경찰이 부패했다고는 하지만 수사는 제대로 했더라고.”
    “무슨 말씀인가요?”
    “권총의 출처를 밝혀냈거든.”
    “총은 저하고는 관계없는 일 아닌가요?”
    “우리가 당신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어리숙하진 않지. 백번 양보해도 당신은 킬러가 당길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어. 그러니까 미필적 고의가 있었단 말이지.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함께 당긴 거지.”
    “무슨 말씀인지……?”
    “시치미 좀 그만 떼시지. 지겹단 말이야. 우리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는 거지.
    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이런 거야. 앙헬레스에서 강제적으로 마취제를 주사로 주입했어. 그리고 그 킬러의 패거리들의 도움을 받아 밤새 술에 취해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사람들인 척 부축해서 헤롱헤롱하는 남녀를 차에 태웠지.
    길을 잘 아는 킬러가 운전을 했고 당신은 뒷자리에서 침을 흘리며 잠들어 있는 남녀를 지켜보고 있었지. 그때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여잔 평생 얼굴 하나로 먹고 살았거든. 여전히 요염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자극을 받았을 거라고. 그렇지 않나? 네 거시기가……
    앙헬레스 남쪽으로 바탕가스까지 7시간인지 8시간인지 과속으로 내려오면서 중간 지점인 케손시티의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지. 그리고 주유소에 딸린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었고 사탕수수밭에 도착하니까 남녀가 깨어나기 시작했어.
    유승정은 능구렁이이고 깐죽거리는 스타일이니까 그자는 총 앞에서도 제 버릇 개 못주고 주절주절 거렸겠지. 말을 빙빙 돌리면서 말이야. 카지노에서 돈을 전부 잃고 말았다고 했다가, 여자가 다 가지고 갔다고 했다가, 가진 게 그것 밖에 없으니까 조금만 줄 수 있다고 했겠지. 그러자 성질 급한 킬러가 당겨 버렸고 당신도 그것에 촉발되어 거의 동시에 당긴 거지.
    필리핀 경찰이 부검을 했는데 사체에 박힌 총알을 빼냈고 몸에서 마취제 성분을 검출했지.
    그런데 말이야. 각기 다른 종류의 총알이 나왔단 말이야. 그게 무얼 의미할까? 종류가 다른 권총이 두 자루 있었다는 거지.”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끝까지 오리발이군. 그래봤자 소용없어. 증거가 다 있으니까. 당신은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작은 총으로 쐈고 킬러는 구경이 큰 리볼버로 쏜 거야.
    코리안 데스크가 필리핀 경찰을 잘 설득해서 협조를 구한 거지. 한국인들끼리 범죄는 필리핀 경찰이 강 건너 불 보듯이 시큰둥하거든. 필리핀에는 100만 장이 넘는 불법 총기가 돌아다닌다고 하니까 총기 수사에는 일가견이 있다고 봐야겠지.”
    변진장의 안색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눈동자에는 지치고 피로하고 자포자기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지막으로 더 할 말이 있는가? 말해보시지. 여기에 다 기록해 줄테니.”
    “…… ”
    “피의자를 강도살인죄의 공모공동정범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할 거야. 우리 손을 떠나는 거지. 나머지 할 말은 검사한테 하라구.”
    “변호사를 선임하겠습니다.”
    “어련하시겠어. 그렇게 해보시지. 그런데 요즈음은 전관예우가 예전 같지 않거든. 비싼 돈 주고 변호사 사 봐야 별 볼일 없단 말이지…… 차라리 국선으로 하는 게…… 이 정도만 말해줄 수 있지.”

    현주엽은 전관예우를 받는 거물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제3조 (사기죄의 가중처벌), 제4조 (재산 국외도피의 죄), 유사수신행위의 규제에 관한 법률 위반죄, 외국환거래법 위반, 여권법 위반 등 경합범으로 유기징역의 상한선인 25년을 선고 받았고, 상고 하였으나 대법원의 상고 기각 판결로 형이 확정되었다.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