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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톨이 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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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톨이 테러리스트

    인세인 형무소
    철조망이 둘러쳐진 감옥의 퇴색한 콘크리트 담벼락 위로 으스스한 망루가 보였다. 밤이면 감시탑의 서치라이트 불빛이 시간 간격을 두고 허공을 가르다 사라질 것이다. 육중한 회갈색 철문을 열고 들어서면 바로 면회실이 있었다. 그 면회실을 지나서 뒤쪽으로 붙어 있는 작은 방에서 낡은 철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는 벌써 60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른 체격이지만 다부지고 머리는 짧게 깎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보인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무기수의 운명이란? 이 깜깜한 벽 안에서 20년을 넘게 갇혀 있었으니.
    그러니까, 그에게 아직 희망이,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일까? 어머니와 여동생, 연인에 대해 지금도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또는 만나고 싶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고향에 대한 기억은 갈수록 희미해지고 멀어지는 게 아닐까? 아직도 그리움과 향수라는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 남아 있을까? 지금 고국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자신에게 고국이 있기는 한 것일까? 고국은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자신을 철저히 버렸지 않았는가. 민족과 국가, 그 거대한 이름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는 증오할 것이다. 이제 점점 늙어가고 몸은 날로 쇠약해지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문득 생각할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스스로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닐까? 나는 허깨비가 아닐까? 나는 완전히 잊혀진 존재이리라.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와 있는가? 라고.
    끝없는 외로움과 고뇌.
    그리움과 증오.
    절망과 희망.

    기자 : 밍굴라바 (안녕하세요). 여전히 건강하시네요. 그렇지 않은가요? 저는 한국에서 온 이인원 기자입니다. 아마 기자를 만난 것은 처음이겠죠? 우기가 다 끝났다니까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마테 : 아직 새파랗게 젊은 량반이네. 테러리스트로 보이지 않는가? 또는 살인마로……? 험상궂고 잔인하게 생긴……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렀으니……
    그런데 버마는 사회주의 국가로 언론인들의 입국과 취재가 극히 제한되어 있는데 그게 가능했는가? 더욱이 남쪽 기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기자 : 솔직히 말씀드려야겠죠? 들어올 때는 취재 비자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어렵사리 상용 비자를 얻었고 면회 신청은 약간의 뇌물을 주고 외교관 행세를 했었지요.
    인세인은 영국 식민지 시절부터 거대한 감옥이 있는 곳으로 유명했더군요. 영국인들이 세운 이 감옥이 말입니다.
    양곤 순환열차를 타고 인세인 역에서 내렸습니다. 저는 지금 인야 호수 근처의 오래된 인야 레이크 호텔에 묵고 있습니다. 그때도 우리 기자들이 묵었던 호텔이지요. 호수 주변에는 우리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 양곤대학교가 있더군요.

    마테 : 세월이 그렇게 흘렀는데 나를 만날 필요가 있을까? 너무 늦지 않았는가?

    기자 : 한 때 남한 당국에 강영철이 자폐증으로 고생하다가 폐인이 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지요.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거지요. 물론 진짜 그런 건지 반신반의 했다고 합니다만……

    마테 : 그 무렵 나에게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위기가 있었다네. 그때 단단히 죽을 결심을 했으니까.

    기자 : 그런데 그걸 견뎌내셨군요?

    마테 : 그렇다네. 목숨은 끈질기니까. 사회주의 조국이니 강성대국의 건설 같은 허황된 구호에 진절머리가 나더군. 그 조국이 나를 버렸지 않은가. 나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매일매일 비참한 상황을 살아야 했으니까.
    그걸 알게나. 테러리스트도 한 때는 전도유망한 청년이었고 인간적인 꿈들이 있었다네.

    기자 : 시간이 없어서 본론 쪽으로……
    그 사건이 1983년에 일어났는데 지금이 2006년이니까 벌써 23년이 훌쩍 지나갔네요. 저는 그 아웅산 사건 당시 초등학생에 불과했지요. 그랬으니 그 사건에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이 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만나서 취재를 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은퇴한 선배 기자님들과 정부 관계자들, 그때 함께 간 생존한 경제인들을 많이 만나 인터뷰를 했고 옛날 신문기사와 정부기관의 공식 보고서를 열심히 읽어서 사건 내용을 파악했지요.
    이 감옥에서 20년이 넘었는데 이제는 지낼 만한가요?

    마테 : 그렇디. 잘 먹고 지내디. 오래 살다 보니까 버마 음식이 내 입에 잘 맞지 않겠어. 미얀마의 전통 커리 라든가, 채소 볶음, 길거리 음식인 람베아샤아샤, 미얀마의 열대과일을 먹을 수 있거든.
    이곳은 인세인 감옥 내에서도 주로 정치범과 외국인 등 특별한 죄수들이 갇혀 있는 곳이지. 이 특별 감옥은 별채이고 실외에서 활동할 수 있는 정원도 있다네. 그래서 일반 죄수들보다는 여유도 있고 식품 공급도 훨씬 나은 편이지.

    기자 : 제가 알기로는 버마 말을 아주 잘한다고 그러던데요?

    마테 : 이 감옥에 있으면서 많은 죄수들을 만났디. 그들은 거의 전부가 버마 사람들 아닌가. 버마군 탈영범 출신으로 이 감옥에서 5년 동안이나 사역병으로 일했던 죄수로부터 버마 말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었다네. 이제는 버마 말을 아주 자유롭게 쓸 수 있지.
    그러나 여전히 조선말이 그립지. 너무 그립다고. 한 때는 너무 외롭고…… 조선말이 너무 그리워서…… 실어증에 걸린 일이 있었다네.

    기자 :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아가서 북한에 있을 때 어떻게 해서 특수부대 장교로 뽑히게 되었는가요?

    마테 : 나는 날라리였지. 그러니까 잘생기고 잘 놀고 공부도 모두 잘했지. 그래서 군대에 가서 특수부대로 뽑혔고 특수부대의 장교가 되어 상당히 특별대우를 받게 되었지. 당 세포에서 간부급으로 올라가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닌 거야. 그들이 강제로 선발한 것이라네.

    기자 : 강원도 통천이 고향이지요? 가족사항은 어떤가요?

    마테 : 통천은 바닷가이면서 교통의 요지이고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지. 부친은 내가 군에 입대할 무렵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지금도 고향에 살고 계실거야. 그리고 내가 떠날 때 시집가지 않은 누이동생이 하나 있었지.
    버마로 떠나오기 직전 특별 배려로 집에 다녀오라는 허락을 받아 아주 오랜만에 가족들과 함께 며칠을 지낼 수 있었다네. 그것이 가족들과의 마지막 만남이었지.

    기자 : 그때 가족들이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어보지 않았던가요?

    마테 : 가족들에게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등의 이야기는 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기자 : 어머니가 뭐라고 말씀하셨는가요?

    마테 : 정말, 어머니는 그립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달라진 제 모습을 보고 ‘네가 정말 많이 컸구나.’ 하며 대견해 했지.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 아주 중요한 임무이긴 하지만 편하고 즐거운 일이라는 인상을 주려고 무척 노력했지.
    그러나 어머니가 왜 모르겠어? 어머니인데. 어머니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을 거야. 그래서 떠나올 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쓰더군. 그리고 ‘네가 어디에 가더라도…… 네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내가 너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하나님이 너를 보살필 것이다.’ 라고 말했지.
    하나님이 지금까지 정말 잘 보살펴주신 것이지. 혼자서 살아남았으니까……

    기자 : 북한에 있을 때 혹시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가까웠던 여자 친구가 있었던가요?

    마테 : 잠시나마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가 있기는 있었다네. 그러나 육체적인 접촉은 없었지. 그러니까 지금까지 성적인 경험이 전혀 없는 숫총각이란 말이지.

    기자 : 북한에서는 특수 공작원이 떠날 때 특별한 환송연을 해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때는 어땠는가요?

    마테 : 초가을이었어. 무척 뜨거웠던 여름이 한물갔었지. 우리가 떠날 때도 당연히 부대 안에서 환송연을 해주었다네. 식탁에는 닭고기와 돼지고기, 소련제 보드카와 북조선의 인삼주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고…… 우리는 인사불성이 되게 마시고 다 때려 부쉈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꼭 죽으러 가는 것만 같았거든. 인간의 예감이란 게 무서운 거야. 그렇다니까. 안 그런가?

    기자 : 지금 북한과 버마 간에 국교가 재개되려고 교섭이 한창 진행 중에 있지요.

    마테 : 그런가?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들었네만……. 내가 무슨 걸림돌이 될까?

    기자 : 북한은 그 사건과 자신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했으니까 잊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버마 주재 남한 외교관들이나 국가 기관원들이 가끔 찾아오지 않았던가요?

    마테 : 내가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어. 몸이 몹시 아팠는데 이곳 형무소의 약은 쓸모가 없었지. 그러니까 의약품과 소액의 영치금을 교도관을 통해서 보내주었지.
    그리고 사람들이 왔다 갔는데 그들이 외교관인지 기관원인지는 나는 알 수가 없어.
    그저 형식적인 만남이었지. 그들은 뭔가 눈치를 살피려고 온 것처럼 보였어요. 내가 간곡히 말하면 건성으로 듣고…… 계속적으로 정부 탓만 했어.

    기자 : 그때…… 그 완벽한 순간에 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인가요? 무슨 이유가 있었던 가요?

    마테 : 이런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겠지.
    그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늘에서 결정한 것이다. 다른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고 실패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사람들이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도 결국 모든 것을 정하는 힘은 따로 있는 것이다.

    기자 : 그는 여태 아무 거리낌 없이 잘 먹고 잘살고 있지요. 아주 건강해요.

    마테 : 누구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데…… 세상은 참으로 불공평하지.

    기자 : 자신이 살인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것도 무고한 사람을 말입니다.

    마테 : 내가 살인자라고? 내가 누굴 죽였는데? 아니야, 아니라고.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나는 그들을 알지 못해. 얼굴도 모른다고.
    우리 민족을 위한 위대한 행동이었어.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했어. 단지 실패했을 뿐이야.

    기자 : 그렇단 말이지요? 더 이상 물을 수가 없군요. 그런데…… 북쪽에서는 그걸 어떻게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마테 : 그가 죽지 않았으니까. 유일한 목표물이었거든.
    그쪽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지. 과정은 보지 않고 오직 결과만 가지고 따지니까. 내가 북조선으로 귀환한다고 하면 당연히 처벌하겠지. 그쪽은 내가 테러의 전모를 자백했다는 것보다는 결과적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 때문에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리고 체포되었을 때 자폭하지 않은 것도 문제 삼겠지. 그들은 테러 훈련을 할 때 입버릇처럼 말하지. ‘최후의 총알 한 발, 최후의 수류탄 한 개는 자신을 위하여 아껴두라. 적에게 사로잡혀 포로가 되는 것도 조국에 대한 배신이다. 배신 중의 배신이다.’
    그렇게 강조했거든…….

    기자 : 버마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발음하기 쉬워서인지 강민철 대신 ‘강민추’라고 하였고 또는 ‘김민추’라고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테러리스트들의 조장인 김진수도 그가 끝까지 말을 하지 않으니까 자기들 편의대로 ‘진모’라고 불렀고 그 때문에 공식기록에도 김진수는 진모라고 되어있어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형무소 사람들이 강민철을 마태로 불렀다고 하던데요?

    마테 : 버마는 압도적으로 불교국가지. 처음에는 불교에 귀의했지. 그러나 동료 죄수의 전도로 기독교인이 되었어. 기독교 교리도 배우고 성경도 받아서 읽었지. 사실 우리 어머니는 기독교도였고 집 안에는 남몰래 십자가와 성경 등을 숨겨놓고 어머니가 가끔 십자가를 꺼내서 기도했었지.
    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죄를 지었어도 회개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라도 용서해주신다. 그리고 회개하여 하느님에게서 죄의 사함을 받으면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는다.’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철저하게 믿게 되었다네.
    그래서 형무소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신부님은 없었지만 물 없이 세례를 받고 ‘마태’라는 기독교식 이름을 얻게 되었지. 그 이후 내 이름은 마태가 된 거야.
    성 마태는 그 당시 죄인이나 부랑자들과 다름없는 세리 출신이었지.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용서하고 제자로 받아들인 것 아닌가. 마태의 다른 이름은 레위인데…… 나는 마태라는 이름이 너무 좋다네……
    내가 만약 죽기 전에 살아서 감옥을 빠져나갈 수 있다면 목사가 되거나 전도사가 되어서 예수님의 복음을 널리 전파할 거라네.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하지…….

    기자 : 이곳에 신부님은 없겠지만 그래도 고해성사를 하나요?

    마테 : 감옥 안 벽에 이마를 대고 매일 하지. 그래야만 마음의 평화를 얻고 그 날 하루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으니까.
    자주 악몽을 꾼다네. 그때는 오로지 군인으로서…… 공화국 혁명전사로서…… 임무를 완수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어. 그렇게 특수 훈련을 받았으니까. 그렇다네…… 살인이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떠오르지 않았지.

    기자 : 자신을 달래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했겠네요. 이곳에서 술을 마실 수 있나요? 실제 마신 일이……?

    마테 : 외팔이 테러리스트도 연약한 인간이라네.
    내가 그때 왜 살고 싶다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는지……? 내가 왜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왜 살기로 결심했을까……? 수사관들이 나를 비인간적으로 대하고 자백을 받기 위해서 심하게 고문을 했더라면 나는 반항하면서 차라리 죽기를 바랐을 건데…….
    나의 정신적 고통은…… 그걸 어떻게 달랠 수 있었겠어? 술을 마실 수밖에 없었지. 공공연히 많은 과실주를 담아놓고 있었으니까. 경비들이 모른 체했어.
    술이란 그런 거야. 마시다 보면 많이 마시게 되는 거지. 가슴 속의 분노와 슬픔을 불태워버려야 하니까. 엄청나게 마셨지. 인사불성이 되도록…….

    기자 : 어떻든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저는 마태 님의 남한 송환을 강력히 주장할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용 가치도 충분한 것 아닙니까? 아주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증인으로 말입니다. 아웅산 사건의 자초지종을 테러리스트인 마태님이 직접 증언하면 북한의 잔혹성에 대해 아주 좋은 증거가 될 수 있거든요.
    그러나 남한 당국은 북한과의 미묘한 관계를 의식해서 아주 소극적입니다. 웬일인지, 그쪽에 자꾸 굽신거려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인간적으로 말입니다.
    정부 당국자는 마태님의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 동정심을 표시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가 비난할 수 있겠어요? 결국은 남과 북의 비극이고…… 분단의 비극인데…….

    마테 : 그렇군. 나는 북으로도 남으로도 갈 수가 없는 거군. 북조선보다 남조선에 더 희망을 걸었지. 그쪽에서는 나를 배반자로 생각하겠지만 남조선은 어쩌면 용서하고 받아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네.

    기자 : 북한은 자신들의 지시에 따라 자결하지 않은 것과 자백했기 때문에 사형을 당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매우 언짢아 할 것이다, 그래서 남겨진 가족이 처벌을 받았을 거라고, 남쪽에서는 그 당시 그렇게 생각했더라구요.
    그러나 북한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들은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잡아뗐기 때문에 남아 있는 가족을 어떻게 처리할 수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기쁜 소식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누이동생이 탈북하여 지금 남한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사진을 보시겠습니까? 누이동생이 맞지요?
    북한에서도 미혼이었고 남한에서도 아직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북한 당국이 오빠가 훈련 도중 사고로 사망했다고 통지했지만 누이동생은 이를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아웅산 사건을 알지는 못했지만 오빠가 특수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빠가 남파 간첩으로 내려갔다가 죽었거나 잡혔거나 그렇게 생각한 거지요. 그래서 오빠의 행방을 알아보기 위해 엄마가 돌아가신 후 탈북을 결심했다고 하였습니다.

    마테 : 아! 이 사진은! 옛날 일만 떠오르고! 이 사진은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어. 많이 변했군. 나는 지금 목이 메어 그 애 이름조차 부를 수가 없군.
    기자님의 말씀을 믿어도 되는 건가? 기가 막힌 이야기 아닌가? 동생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지. 그 애를 만나면 죽어도 한이 없겠네.
    그러면 말이야. 어떻게 해서 누이동생을 알게 되었는가? 무척 궁금하군? 약간 의심이 들기도 하고…….

    기자 : 제가 오랫동안 통일부와 국가정보원을 출입하는 기자였거든요. 그래서 그쪽에서 알게 된 겁니다. 동생이 탈북해서 온 게 작은 화젯거리가 되었거든요.

    마테 : 그러니까…… 더욱 남조선으로 가야할 이유가 생긴 거네. 그 애를 꼭 만나야만 하지.

    기자 : 다시 말씀드리지만, 돌아가면 마태님의 남한 송환을 강력히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쪽 사람들을 움직일 만한 힘은 없지요. 일개 기자의 말을 콧방귀나 뀌겠어요? 분명하게 말해서 그들은 마태님의 송환을 껄끄러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버마 당국도 그 태도가 아주 애매모호한 것 같습니다. 한국 정부가 나서서 석방을 교섭한다면 고려해볼 수 있겠지만 민간 측면에서 죄수의 신병을 인도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한 것이고 버마 당국으로서는 무기징역수로 이미 20년이 넘게 복역한 죄수를 더 이상 형무소에 가두어 놓을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한국 정부 요청만 있으면 석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한국 정부가 문제인 겁니다.

    마테 : 이곳 교도관들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지.
    ‘만약 너를 받아줄 만한 나라가 나선다면 언제든지 내보내줄 수가 있다. 그런데 너는 갈 곳이 없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지.

    기자 : 다시, 사건 당시의 원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때 체포될 당시 훈련 수칙대로 자폭을 하지 않고 왜 살아남게 되었나요? 북한에서는 붙잡혀서 사건의 전말을 자백한 것을 두고 배신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북한 공작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손에 무기가 없을 때 혹은 신체의 자유를 잃었을 때는 스스로 혀를 깨물고 죽어야 한다는 수칙까지 있지 않습니까? 그런 때는 혀를 이빨에 물고 자기 주먹으로 아래턱을 강하게 가격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결국 출혈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칼이나 총 같은 무기가 있을 때는 자살은 간단하겠지요.

    마테 : 그때 우리는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수류탄은 5초 신간이어서 던지는 것과 동시에 안전핀을 놓으면 5초 후에 폭발하는 것으로 그렇게 알고 있었지. 그런데 안전핀을 제거하자마자 내 손에서 바로 터지는 바람에 팔 하나를 잃어 버렸고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십자가가 달린 묵주도 함께 날아가 버렸지.
    다시 말하면…… 수류탄에서 안전핀을 뺐지만 안전장치는 쥐고 있었으므로 정상적인 상태라면 수류탄을 던지고 난 후에나 폭발했어야 하는데…… 그런데 핀을 뽑자마자 수류탄이 터진 거야. 그 순간 나도 놀라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던…….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죽도록 특수하게 수류탄을 제조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야. 나야 말로 북조선 당국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지. 그걸 알고는 자살할 생각이 싹 사라져 버렸어.

    기자 : 버마 당국은 그 당시 진모라고 알려진 김진수는 선고대로 사형을 집행했는데요?
    마테 : 나는 왜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냐고? 그게 궁금한 거구만. 내가 배신자고 자백했기 때문이라네. 그래서 봐준 거라네.

    기자 : 그렇군요. 남한 정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부가 많은 애를 썼어요.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체포되고 나서 처음에는 완강하게 버텼는데요. 앞뒤가 안 맞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면서…… 그렇지 않았습니까?

    마테 : 남조선 수사관들이 참여하여 심문할 때 대충 생각나는 대로 거짓말을 하였는데…… 한계를 느꼈지. 어쩔 수 없었어.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지. 살고 싶었다고…… 인간이 살고 싶다는 이유 이외에 무슨 명분이 필요했을까?
    처음에는 의심했어. 과연 살려줄까? 11월 3일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하기 시작했지.

    기자 : 북한 당국에 대한 배신감만으로 그런 극한적인 상황에서 살려는 의지가 생길 수 있겠습니까?
    마태님이 자살하지 않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을 때 북한 요원이 병원으로 잠입하여 살해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그 당시에 있었다고 하던데요.

    마테 : 나는 혁명성이 없어서 스스로 자폭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네.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이 있었지. 비록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치료를 받고 건강을 되찾는 과정에서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지.
    그때 병원에서 아름다운 여성 간호사가 나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 준거야. 버마에서 제일가는 미인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북한에 두고 온 여동생이 생각나더라고. 반드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먼. 기념품 가게에서 산 선물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지. 오랫동안 삶에의 집착을 잃지 않고……?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서 살아온 거라네……?
    그래 솔직하게 다시 이야기 하지. 어쩔 수 없었다고. 살고 싶었으니까. 그러면 충분한 설명이 되었을까?
    그때도 북조선 요원의 은근한 자살 강요가 있었다네. 오랫동안 감감했었는데 버마와 북조선 간에 국교 재개 교섭이 있어서인지 눈에 안 보이는 무언의 압력이 들어오고 있지. 그걸 인간의 예민한 감각에 의해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는 거야. 또 다시 심한 불안증 때문에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네.

    기자 : 지금 단계에서 북한의 의도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마테 : 북조선으로 데려가고 싶은 거겠지. 그게 사실상 납치이고 버마가 눈감아 주는 거야.

    기자 : 북한에 데려가서?

    마테 : 그걸 강요하겠지. 남조선의 자작극이었다고…… 나는 버마 주재 외교관이었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살이를 하였다고…… 기자 회견을 하는 거지.
    또는 조용히 데려가서 특수부대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총살을 하려고 하지 않겠어? 본보기로 말이지.

    기자 : 그렇게 까지?

    마테 : 그렇게 하고도 남지. 그쪽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다네.
    나는 지금 말할 수 없이 건강하지. 마음만 먹으면 오랫동안 살 수 있을 거라네. 그런데 내가 피치 못하게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면 결국 자살용 극약을 먹고 죽을 수밖에 없어.

    기자 :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겠지요.

    마테 : 그러니까 내가 석방 되어서 돌아가는 것은 절망적이군. 간절한 부탁이 있지. 언젠가 동생을 만나면 주려고 간직하고 있는 목걸이와 반지가 있다네. 그걸 전해주게나.
    그 얘가 심성은 착하지만 그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 되구먼. 자본주의 사회는 험악하다고 하니까 말이야.

    기자 :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이산가족이랍니다. 할아버지가 흥남 철수할 때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남겨둔 채 혼자서 내려 왔거든요. 우리 모두는 분단의 희생자인 거지요.
    지금도 남조선혁명과 조국 통일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마테 : 내가 어떻게 알겠나? 그런 희망을?

    기자 : 그렇군요…… 부디 건강하십시오.

    마테 : 트와메노 (안녕히가세요).

    인민사법회의
    버마 정부는 보통 4심제로 재판을 하는데 이 경우에는 국가적인 중대 사안이여서 지방 혹은 지역 차원의 하급심을 생략하고 3심에 해당하는 수도 양곤 지구 사법재판소에서 1심을 하는 특별재판을 했다. 특별재판에서 판결에 불복하는 경우, 선고 후 7일 이내에 인민사법회의에 항소할 수 있다.
    법정은 고등법원 건물에 있었다.
    판사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법대에서 내려다보면 왼쪽에 앉은 애꾸눈 진모는 하얀 반팔셔츠에 검은색 긴 바지를 입었고 운동화를 신고 있으며, 오른쪽에 앉은 왼팔이 잘려나간 강민철은 역시 하얀 반팔셔츠에 회색 긴바지를 입었고 샌달을 신고 있다. 그들 주위에는 미얀마 전통 복장으로 남자들이 입는 론지인 체크무늬 빠소를 두르고 상의를 받쳐 입었는데 파낫이라고 부르는 슬리퍼를 신은 교도관들이 앉아있다. 법정 밖에는 소련제 소총을 어깨에 멘 경찰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었다.
    재판부는 범인들을 살인죄, 살인미수죄, 불법무기소지죄로 기소하고 범인들에게 유죄 인정 여부에 대해 질문하였는바, 강민철은 범죄사실을 인정하였으나 진모는 묵비권을 행사하였다.
    재판장이 강민철에게 말했다.
    “you, Kang Minchul, are you guilty?”
    강민철은 머리를 아래위로 끄덕이며 유죄를 인정했다.
    진모는 “you, Zinmo, are you guilty?”라는 질문에 응답을 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재판장은 계속하여 질문하였다.
    “이름이 무엇인가?”
    “……”
    “어디에서 왔는가?”
    “……”
    “당신은 북한에서 파견된 북한군 장교라는데 사실인가?”
    “……”
    “당신과 대위 강민철, 신기철은 대통령과 그 일행을 암살키 위하여 파견되었다는데 사실인가?”
    “……”
    “수류탄과 폭발물을 북한에서 가져온 게 사실인가?”
    “……”
    “북한 선박에서 내렸을 때 북한 대사관원 2명의 안내에 따라 대사관 주택에 숨어 있었다는데 사실인가?”
    “……”
    “1983년 10월 9일, 그날 아침 당신이 직접 폭탄 원격조종장치 스위치를 눌렀다는데 사실인가?”
    “……”
    “그때 스위치를 누른 장소가 어디인가?”
    “……”
    “스위치를 누르고 나서 어디로 갔는가?”
    “……”
    “체포될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
    “더 할 말은 없는가?”
    “……”
    그러나 진모는 시종 입을 열지 않았다.
    재판장이 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부총리와 그가 이끄는 선발대가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5분 아웅산 묘역에 도착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을 영접하려고 자리를 잡았을 때 폭탄이 터진 것과 관련된 사건이다.
    폭발의 결과 대한민국 측에서는 대표자인 대한민국 부총리 등 17명의 귀빈과 버마 측에서는 4명이 사망하였으며, 14명의 한국 측 귀빈, 32명의 버마인이 부상당하여 총 21명이 사망하고 46명이 부상을 당했다. 첫 정보가 바한경찰서에 보고되었을 때는 16명의 귀빈과 3명의 버마인이 사망했다.
    조사 과정에서 그 한인은 자기의 이름은 강민철인데 나이는 28세이고 아버지는 강석준, 어머니는 김옥순이며 군번 9970번 북한군 대위라고 진술했다. 그의 일행에는 대위 신기철과 소좌 진모가 있었으며, 진모가 조장이었다. 그의 소속부대는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로서 그 기지는 북한의 개성시에 있다고 진술하면서 강민철 등 3명은 북한의 특수부대 사령관으로부터 대통령이 양곤에 있는 순교자 묘역에 도착할 때 폭탄을 폭파시키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진술했다.
    생존자들과 목격자들의 진술과 피고인들이 소지하고 있던 북한제 의약품, 배터리, 송·수신기, 수신기에 사용된 전자회로와 콘덴서 조각, 살상용 만년필, 금속탄알, 수류탄 안전핀과 손잡이 등 각종 증거물에 의해 범죄 사실은 확실하게 입증되었다.
    피고인 진모는 유죄로 인정되므로 사형에 처한다.
    피고인 강민철은 유죄로 인정되므로 사형에 처한다.

    미얀마 최고 재판소는 1984년 2월 그들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고 형은 확정되었다.

    1983년 10월 8일 대통령은 서남아, 대양주 6개국 순방길에 올랐다.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출국인사를 하였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본인은 오늘 버마, 인도, 스리랑카 등 서남아시아 3개국과 대양주의 뉴질랜드 등 아시아, 태평양 지역 5개국 및 브루나이 왕국에 대한 순방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인도양과 태평양을 종단하는 본인의 이번 순방은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우리 국력의 국제화를 지향하는 국민 여러분의 여망에 따라 본인이 추진해온 개방외교의 네 번째 결실로서, 세계사의 중심에 우리 스스로를 성큼 다가서게 하는 전진의 초석이 될 것을 기대하는 바입니다.……
    버마에 도착한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도착성명을 발표했다.
    본인은 오늘 우산유 대통령각하의 초청을 받고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황금빛 사원의 나라로 알려진 버마 연방사회주의공화국을 방문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본인은 본인의 서남아시아 및 대양주 6개국 순방의 첫 방문국으로서 귀국에 도착한 것을 더욱 뜻 깊게 생각하면서, 버마 국민에게 보내는 대한민국 국민의 따뜻한 우정을 전하는 바입니다.……

    쉐다곤 파야 shadagon paya
    쉐다곤은 미얀마어로 황금의 언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양곤 중심부에서 조금 떨어진 상구타라라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쉐다곤은 불심이 깊은 미얀마인들의 정신적인 지주이고 죽기 전에 꼭 한 번 참배해야 하는 성지이다. 불탑은 온통 황금으로 덮여있고 불탑의 꼭대기는 5,448개의 다이아몬드와 2,317개의 루비, 사파이어 등 값으로는 도저히 계산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찬란한 보석들로 치장되어 있다. 찬란한 황금 불탑. 그러니 양곤 어디에서도 황금빛을 찬란하게 쏟아 붓고 있는 쉐다곤 탑을 볼 수 있다.
    이 거대한 불탑 사원은 세계 6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고 자랑할 만도 하다. 그래서 미얀마를 찾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찾아보아야 할 필수적인 방문지 같은 곳이다. 쉐다곤은 미얀마의 상징이고 미얀마인들의 자부심의 표상이다.
    세계의 수많은 시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이 신비스럽고 웅장한 탑을 노래했다.
    구름과 안개 속에 흐릿했던 아침, 내가 쉐다곤을 처음 보았을 때 쉐다곤은 불로 된 혓바닥 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찌르듯 가리키고 있었다. 맑게 갠 날 정오의 그 모습은 평화롭고 장엄하였다. 그리고 달빛이 비치는 밤에 드러내는 자태는 정말 신비스럽기만 했다. 쉐다곤은 어느 곳에서도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그 분위기는 인간이 풍기는 듯한 분위기다.
    그리고 그 위엄과 아름다움, 그 순결함은 쉐다곤을 인간이 추구해온 가장 고상한 것들의 상징으로 만든다. 나는 그동안 황혼과 폭풍우, 빙하, 공원, 꽃 그리고 사람의 얼굴 등 나를 감동시켰던 많은 것들을 보아왔다.
    그러나 인간이 그의 손으로 창조한 모든 것들 중에서 내가 아는 한 쉐다곤이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쉐다곤을 처음 보았을 때 내 마음은 뛰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내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나의 뇌리에 되살아나곤 한다.

    테러리스트들은 대통령이 미얀마에 도착한 10월 8일에는 순교자 묘역 (일명 아웅산 묘소) 근처인 쉐다곤 사원 부근 숲속에서 노숙했으며, 사건 당일인 10월 9일 아침에는 사전 정찰해두었던 묘역에서 약 400미터 떨어진 한 자동차 정비공장으로 접근했다. 버마의 주요 교통수단인 모터바이크 택시, 사이클 택시, 사이카, 픽업 트럭, 미니버스 등을 수리하는 공장으로 사방이 훤히 터져있는 직사각형 목재건물인 공장 건물 앞 공터에는 수리를 기다리거나 폐차 처분된 수십 대의 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그런데 그 곳에서는 묘역의 전면과 묘역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한 눈에 잘 보였기 때문에 원격조종 폭파 스위치를 누르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비공장으로 들어가려 할 때 서로 간에 손짓, 발짓으로 하는 어설픈 대화가 오갔다. 정비공장 사람들은 버마어로 말하고 그들은 한국어로 대꾸해야 했으니 말이 통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진모는 160센티미터 정도로 키가 작은 편이었고 몸집은 뚱뚱한 편이다. 진모가 들어왔을 때 한 종업원이 어떤 이상한 사람이 버마어도 모르고, 행동이 약간 수상하다고 하면서 주인에게 직접 한 번 만나보라고 말했다. 주인이 나가보니 진모는 다른 종업원과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인이 여기에 무슨 볼일이 있느냐고 물었는데도 그는 “차이나, 차이나”하고 되풀이할 뿐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다른 손에 25짜트 짜리 미얀마 지폐를 들고 있었는데 아마도 진모는 이 돈을 줄 테니 여기에 있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서로가 계속 손짓 발짓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해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진모는 계속 “차이나, 차이나”라는 말만 또 다시 되풀이했는데 그는 자신들이 중국인 여행자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버마인들은 이 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몹시 짜증이 난 주인이 진모의 저고리 앞주머니에 꽂혀 있는 만년필을 뽑으면서 글을 써보라는 시늉을 하자 그는 기겁을 하며 만년필을 빼앗아 황급히 공장 밖으로 달아났다. 이 만년필은 공작원들이 흔히 가지고 다니는 휴대용 살상용 무기였기 때문이다.
    진모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2명과 합류해 자동차 정비공장을 포기하고 그 묘역으로 이어지는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군중들 틈에 섞였다. 마침내 쉐다곤 파야의 북쪽 계단 쪽 도로와 연결되어 있고 묘지에서 약 1킬로미터 떨어진 마하 위자야 파야 거리의 영화관 앞에 자리를 잡고 대통령 일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때가 묘소참배 시각이 거의 다 된 10시 24분경.
    그들의 시야에 미얀마 경찰의 모터사이클을 선두로 검은 리무진 차량 행렬과 태극기를 단 벤츠 차량이 뒤따르는 모습이 들어왔다. 구경나온 양곤의 시민들이 태극기를 단 차 속에 대통령이 있다고 생각하여 손에 든 태극기와 미얀마기를 힘껏 좌우로, 위아래로 흔들면서 환영하였다.
    그들은 그 순간 그 차량 행렬이 묘소에 도착하는 시간과 헌화하는 시간 등을 계산했고 원격조종 장치의 버튼을 누를 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서 언제 어디에서 폭발을 일으킬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에 대해 의견충돌이 생겼다. 조장이었던 진모 소좌는 구경꾼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폭파 리모컨을 작동시킬 생각이었지만 강민철은 생각이 달랐다. 구경꾼들 틈에 섞여 있으면 차량 행렬을 볼 수 있어도 순교자 묘역 내에서 일어나는 실제 상황은 볼 수 없기 때문에, 말하자면 주공격 목표인 대통령이 폭탄의 살상 유효 공격 범위 내에 있는지 혹은 그 밖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대통령이 폭탄의 치명적인 살상 거리 밖으로 이탈해 있을 때 폭발물이 터지면 공작은 당연히 실패한다. 그는 순교자 묘역 내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쉐다곤 사원 북쪽 입구에 있는 나웅도지 파야의 맨 위층 계단에서 마지막 행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모는 조장으로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사원 주변에 있는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최후의 마지막 행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쉐다곤 사원은 관광객이 많아서 작전에 차질이 빚을 수도 있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 신변이 노출될 위험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장을 탈출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려서 곤란한 상황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강민철의 의견을 무시했다. 그와 강민철은 이 문제 외에도 사사건건 의견충돌과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이 있어왔다.
    어쨌거나 리모콘은 그때 진모의 바지 호주머니 속에 있었다.
    그런데 만약 강민철의 주장대로 나웅도지 탑에서 리모콘을 눌렀었더라면 결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작전은 완전한 성공이 되었을 것이다.
    대통령은 그 시각 아직도 영빈관에 있었다. 대통령이 아니라 대사 일행이 탄 차량 행렬은 1분 후인 10시 25분 묘역 기념관에 도착했다. 이때가 폭탄이 터지기 3분 전이었다. 일행이 줄을 정돈하고 있을 때 갑자기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렸다. 짧은 나팔소리였다.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이 나팔소리가 결정적인 신호였다. 나팔소리까지 들은 다음에 더 이상 폭발을 미룰 수는 없었다. 리모콘을 쥐고 있던 진모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이 도착해서 행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얀마에 도착해서 생긴 땀띠 때문에 사타구니에 발진이 돋았는데 또 다시 미친듯이 가렵다. 진모는 나팔소리가 울리고 난 후 잠시 사이를 두고 원격 폭파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사실 눌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안 눌렀을 수도 있다. 그때 너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교자 묘역에 폭음과 함께 번갯불 같은 섬광이 번쩍이면서 맹렬한 폭풍이 일었고 일순 모든 것이 폭풍에 휘말렸다. 묘지는 캄캄한 암흑에 휩싸이고 파편과 함께, 사람의 몸에서 찢겨진 살과 뼈 등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짧은 순간 태곳적 정적이 찾아왔다. 그러나 현장은 바로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불에 탄 목조 건물이 무너져 내렸다.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은 날아가 버렸다. 그 잔해 밑에 대통령을 기다리며 도열해 있던 인사들의 찢긴 신체가 널려 있었다. 부상자들 중에는 서까래나 다른 구조물 밑에 깔려 살려 달라고 부르짖는 사람들도 있었다.
    테러의 최종 목표인 대통령은 그렇게 화를 면했다. 일정의 차질, 행사 시작 전에 울린 나팔소리 등 예상치 못한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이 겹쳤다.
    영빈관에서 순교자 묘역까지는 불과 4.5킬로미터였다. 폭발이 일어난 시각이 10시 28분이었고 대통령을 태운 차량은 그로부터 4분 전에 영빈관을 출발해 테러의 순간에 묘역을 1.5킬로미터 정도 남겨놓고 있었다. 공식행사는 2분 후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테러리스트들이 나팔소리가 들린 후 폭파장치를 작동시키지 않고 잠시만 더 기다렸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순교자 묘역
    순교자 묘역 martyrs` mausoleum은 약간 언덕진 구릉에 위치해있고 버마의 상징인 쉐다곤 파야를 바로 올려다 볼 수 있다. 현지어로는 ‘아자니베이만’이라고 부른다. 이 묘역의 바로 옆에는 ‘무명 용사의 비’가 서있는 묘역이 붙어있다.
    버마 전통 목조 양식으로 지어진 기념관은 약 200평 가량의 기다란 직사각형 기와집 모양이었다. 안에는 직사각형의 아웅산 장군 석관이 있고 그 좌우에 조금 작은 석관이 4개씩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묻힌 사람들의 사진이 황금빛 액자로 단장되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1947년 자치 정부의 수반이었던 아웅산 장군은 휘하 각료들과 함께 회의 도중 정적이 보낸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8명의 각료들과 함께 암살을 당했었다.
    묘지 사방은 벽이 없이 틔어 있었고 티크 목재로 된 기둥이 빙 둘러서 지붕을 받치고 있었다. 높이 약 5미터의 천정은 목재 타일로 되어 있고 바닥은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 주위에는 목책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목책에 따라 붉은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이 묘역은 폭발 사건 이후 한 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그 후 소련 양식의 철근 콘크리트로 완전히 새로운 모양으로 신축되었기 때문에 옛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2주일 동안 북한 공관원의 집에 은신하던 그들 3인은 10월 6일 공관원의 안내로 순교자 묘역 주위를 맴돌면서 범행 장소를 사전 정찰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 후, 10월 7일 새벽 2시에 폭발물을 휴대하고 묘역에 잠입하였다. 그리고 대통령 일행이 참배할 묘소 바로 위쪽 천정에 폭발물을 설치하였다. 테러리스트들이 설치한 폭발물은 모두 3개이다. 그 중 2개는 대통령이 헌화할 아웅산 장군의 묘 바로 위쪽 천정에 설치된 고성능 살상용 폭탄이었고 나머지 한 개는 폭발과 동시에 불이 일어나게 하는 소이탄이었다.
    순교자 묘역에 설치된 폭탄은 북한이 테러용으로 특별히 제작한 고성능 폭발물로서 폭발 시 파편과 함께 폭탄 속에 내장되어 있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는 아이언 볼이 사방으로 튀어나와 많은 사람을 살상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1킬로미터 이내의 거리에서 원격조정 폭파가 가능하며 유효살상 거리는 직경 약 80미터 정도로 아주 강력한 폭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살상용 두 개의 폭탄 중 한 개는 폭발되지 않았다. 만약 이 폭탄마저 폭발했더라면 더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거사를 하기 3일 전인 10월 6일, 그들은 은신처인 공관원의 관저를 나왔다. 진모와 강민철은 버마 현지인들의 옷을 입었다. 아래는 론지 longi 라고 부르는 치마 같은 옷인데, 옷이라기보다는 둥글게 이어진 옷감을 몸에 감고 위에서 매듭을 만들어 허리춤에 찔러 고정하는 옷이다. 별 장치가 없는데도 흘러내리지 않는 것이 그저 신기하다. 버마인들이 남녀 구분 없이 입는 전통적인 복장이다. 평소 일상적으로 늘 입는 복장이라는 점에서 한복과는 다른 것이고 얼핏 보기에 통치마 같은 이 옷은 직장인들의 근무복이기도 하고, 외교 행사 때나 국가적 기념식 때는 국가 원수나 외교관들이 착용하는 의례복이기도 하다. 신기철만 검은 바지에 흰 셔츠 차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모두 엄지와 둘째 발가락에만 줄을 끼워 사용하는 슬리퍼를 신었고 길거리 음식인 밀가루와 콩을 갈아 튀긴 스낵인 ‘뼈쪄’를 들고 씹어 먹었다.
    공관원의 집을 나와서 테러 현장인 순교자 묘역이 있는 지역인 쉐다곤 사원과 칸도지 인공 호수, 양곤국립박물관, 양곤동물원 일대를 정찰했다. 그리고 드넓은 실내 시장인 보족 아웅산 시장에서 버마식 슬리퍼와 론지, 기념품 등을 샀고, 시장 내 식당에서 버마 전통요리인 닭고기 커리와 채소 볶음으로 식사를 하고 나서 전통 담배를 피우며 사탕수수 주스인 ‘짠예’를 마셨다.
    그들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국빈 행사가 있을 예정인 장소에 침투해 폭탄을 설치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밤중에 묘소 관리인의 집을 방문해, 자신들은 남쪽의 보안요원이고 현장을 방문해야 한다며 관리인의 양해를 얻었으며 그 과정에서 관리인에게 최고액권 화폐인 10,000 짯 짜리 지폐를 주었고 그에게서 폭탄 설치에 사용할 사다리를 빌렸다.
    3명의 테러리스트들은 날이 저물어도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부근의 숲속에서 극성스러운 모기떼의 공격을 참아내면서 노숙을 했다. 그것도 수칙에 따라 1명씩 교대로 불침번을 서고 나머지 2명만 잠을 잤다. 그 다음날 10월 7일 새벽 2시, 그들은 순교자 묘역에 잠입했다. 동료 2명이 밑에서 기다리는 동안 신기철이 묘소 기념관의 지붕 위로 올라갔고 진모가 아래에서 폭탄들을 올려주자 이것들을 지붕 아래 장치하였다. 그 중 두 개는 원거리 작동 폭탄이었고 그리고 나머지 한 개는 화재를 일으켜 증거를 인멸할 목적으로 숨긴 소이탄이었다.

    동건 애국호
    9월 9일 그들은 비밀리에 ‘동건 애국호’를 타고 황해남도 옹진항을 떠났다. 이 배는 총 5,379톤, 속력 15.5노트의 튼튼한 화물 운송선이었다. 이 정도의 배라면 어떤 악천후에도 걱정하지 않고 세계 어디라도 항해할 수 있다. 전형적인 화물선으로 외견상으로도 화물선이고 실제 화물 운송도 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 기항하더라도 그 나라 항구의 무선전신국을 경유하지 않고 자국 본부와 직접 교신할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있어서 특수공작에 가끔 이용하는 배이다.
    진모, 강민철, 신기철은 출발하던 날 아침 배에서 다시 만났다. 그리고 일단 승선을 하고 출항한 후에야 자기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해 구체적인 브리핑을 받았다. 세 공작원들은 항해 도중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거의 선실 내에서만 생활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생활이었겠지만 온갖 힘든 극한의 훈련을 통해 단련된 그들에게는 이정도 어려움이야 차라리 좋은 휴식거리였다.
    그러나 항해 이틀 후 공해상으로 나오면서 서태평양 대만 해역 근처를 지날 때 계절적인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배가 심하게 요동치고 삐걱거리며 엄청난 포말과 소음을 일으켰다. 그들은 심하게 배 멀미를 했으며 오장육부에 들어있던 마지막까지 토해내야 했다. 그때는 아무리 단련된 그들도 배 멀미만은 당해낼 수 없었다. 배는 아주 천천히 지그재그로 나아갔다. 마침내 폭풍우가 잦아들었다. 배는 어느덧 남중국해로 접어들었고 말라카 해협을 빠져나와 안다만 해역으로 계속 북상하였다.
    6일간의 항해 끝에 동건 애국호는 마침내 9월 15일 새벽에 양곤강 입구에 도착했다. 그보다 열흘 전에 이미 미얀마 항만청에 입항허가 신청이 되어 있었고, 미얀마에 도착한 그 다음날인 16일에 건자재 수송 목적으로 입항허가를 받았다. 이틀 후인 9월 17일 오후에 이 배는 양곤 항의 술레제티 부두에 접안해서 화물하역 작업을 하도록 승인받았다. 9월 18일부터 하역 작업이 시작되어 21일 새벽에 작업이 종료되었다. 21일에 동건 애국호는 출항허가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선장은 갑자기 선박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으로 항해해야 하기 때문에 긴급하게 고장 난 엔진을 수리해야 한다고 하면서 며칠간 부두에 더 머무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미얀마 항만청은 처음에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선장이 긴급한 사정이 있다면서 3일만 시간을 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고 항만청 담당 공무원이 선박에 올라와서 엔진을 검사하고 문제를 확인한 후 허락했다. 이제 동건 애국호는 양곤강 입구에서 정박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배는 21일에 양곤 부두를 떠나서 3일 후인 24일에는 미얀마를 떠나라는 통고를 받았다.
    그 다음날인 22일 북한인으로 보이는 사람 두 명이 채소와 파파야, 구아바, 귤, 망고, 바나나 등 미얀마 열대 과일을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서 동력이 부착된 삼판을 타고 와서 배에 승선했다. 그러나 그들이 떠날 때에는 3명의 북한 사람들과 함께 떠나면서 바퀴가 달린 무거운 가죽 가방을 2개 싣고 갔다. 얼마 후에 동건 애국호는 바로 출항했는데 함께 떠났던 3명은 그때까지 배로 돌아오지 않았다. 3명의 선원은 아무런 입국 검사나 절차도 없이 미얀마 안으로 사라진 것이다. 당시 배에 승선해 화물과 인원의 이동을 감시했던 경찰관과 세관원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당시 배가 정박해 있던 곳은 수도 양곤의 항구이지만 부두에는 입출국을 통제하는 절차나 혹은 이를 관장하는 관청 등의 체계가 미비한 상태여서 테러리스트들이 미얀마에 잠입하는 데는 어려움도 없었던 것이다.
    테러를 위해 파견된 특수공작원들은 모두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양곤에 무사히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상륙 직후 그들은 공관원의 안내로 관저로 인도되었다. 이 집은 양곤 시내 남쪽으로 양곤 강과 접해 있는 알론 구역 트리엑타 2번가 미얀마 외무부 뒤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집이 있던 곳이 ‘외교단지’라고 불렸던 구역이었고 바로 옆집이 북한 대사관이었다. 이 집에 살고 있는 북한대사관 참사관이 그들의 연락책이며 현지 지도원이었다. 그의 공식 직함은 북한대사관 참사관이었고 공식적인 업무는 총무 담당이었지만, 실제는 북한 정보부의 해외공작 책임자 중에 미얀마 담당 총책이었다. 3명이 북한대사관의 관저에 거처를 잡은 지 이틀 후에 이틀이 사용할 폭발물이 외교 행량 편으로 도착했다.
    그 후 그들은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고 공관원의 집 2층에 숨어 지내면서 현지사정과 거사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대통령 일행의 도착을 기다렸다. 특히 대통령 일행의 순회 방문 일정과 미얀마에서의 행사 일정 등에 대해서는 본국으로부터 시시각각 자세한 정보를 받았다.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의 사령관은 진모 등을 소환하여 앞으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준비를 지시했다. 함께 공작을 수행할 다른 두 명에게도 같은 지시가 내려졌다.
    특수부대 요원은 키가 너무 커도 안 되고 너무 작아도 안 된다. 그리고 눈이 작아도 안 되고 너무 커도 안 된다. 너무 쉽게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외모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그런 면에서 특수부대 요원에 알맞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들은 자기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가 대통령을 암살하는 엄청난 것인지 몰랐다. 단지 이 임무가 매우 중차대한 것이고 최고위층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는 정도만 전달되었다. 테러리스트는 모두 한 부대 소속이 아니었고 특수임무를 부여받기 전까지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공작원들은 처음에는 각기 고립된 가옥에서 지도원의 지시에 따라 자기가 맡은 임무에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그런 후에 합동훈련을 하였다. 특수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곳은 비무장지대 바로 위에 위치한 개성이었다.
    특수임무를 부여받은 3명은 김진수 소좌 1명과 김치오와 강영철, 두 대위였다. 버마에서는 진모라고 알려진 김진수는 심한 부상을 입고 체포된 후 심문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강민철의 본명도 강영철인 것으로 나중에서야 밝혀졌다. 이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인 1998년 그를 인세인 형무소에서 면담한 미얀마 주재 외교관에게 밝힌 것이다. 신기철로 알려진 인물은 미얀마 경찰과 교전 중 사망해서 인적사항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의 본명도 그때서야 김치오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이 버마로 떠나올 때 사령관이 말했다.
    “혁명의 영재이시며 조선 인민의 태양이시고 우리의 어버이이시고 경애하는 수령이신 김일성 동지와 어둡던 이 강산에 떠오르는 태양이신 김정일 동지와 조선노동당의 따뜻한 사랑 속에 자라 온 동무들은 오늘 당과 수령님이 내려주신 최대의 영광된 임무를 부여받고 버마로 떠나게 되었소. 동무들의 장도를 진심으로 축하하오. 동무들은 주어진 임무를 잘 수행하고 돌아오시오.
    수령님은 동무들에게 2계급 특진과 영웅 칭호를 수여할 것이고…… 또 마음껏 쉴 수 있도록 휴가도 줄 것이고…… 예쁜 아가씨를 고르고 골라서 결혼도 시켜줄 것이오.
    동무들! 동무들! 동무들은 위대한 혁명 전사요! 우리에게 부과된 이 엄청난 과업의 성공을 위해 축배를 듭시다!”
    그들은 다 같이 건배를 외쳤다.
    “위대하신 수령 동지와 당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강민철은 그때 생각했다.
    우리가 서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진즉 깨달았다. 우리 세 사람은 너무 비슷했으면서도 완전히 너무 달랐다. 그래서 서로 대화가 쉽지 않았다. 서로 간에 뻔했기 때문에 속일 수 는 없다.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는 의견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그 순간이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나는 결코 그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닌가. 우리 역사 속에서 내가 맡게 된 배역의 무게를 느낄 수 있다.
    테러리스트들은 상황을 오판해서 원격조종 장치를 잘못 작동시킨 것이 아니었다. 나팔소리를 행사 시작으로 착각한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대통령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빈관에 배치된 또다른 북한 요원으로부터 대통령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전달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테러리스트들은 대통령의 일정과 동선을 미리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영빈관에서 출발이 늦어진다는 것도 현재 그의 차량 행렬이 어디까지 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때 진혼곡의 나팔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소리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대통령 차량이 오는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예기치 않은 폭발이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그들이 더 놀랐고 당황했다. 최종 목표를 타격할 순간을 바로 목전에 두고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강민철은 한탄했다.
    북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계급적 원쑤를 청산하자.
    우리는 원쑤에 대한 적개심으로 타끓는다.
    돌탕을 쳐 죽이자.”
    대통령은 광주항쟁 당시 대학살의 주범이었다. 그는 남조선 민중의 적이고 조선 민족 전체의 적이었다. 미제국주의의 앞잡이였다. 그는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할 만고불변의 역적이었는데……
    그런데 그를 놓치고 만 것이다.
    아! 이럴 수가!
    그들은 우선 현장을 빠져나와 탈출에 성공해야 했다. 실패의 원인은 그들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가능한 추측은 현장에서 많은 전파의 움직임이 있었을 것이고, 그 중 하나가 원격조종장치를 작동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기술적인 실패를 추정할 만한 확실한 예가 또 있다. 설치한 폭탄 하나는 불발이었다. 원래 테러리스트들이 설치한 것은 대인지뢰 2개와 소이탄 1개, 모두 3개였는데 그 중 대인지뢰 1개와 소이탄만 폭발하고 1개는 불발로 남아 미얀마 수사 당국에 회수된 것이다.
    그들이 기획했던 정치적 효과 면에서 본다면 테러는 완전한 실패였다. 정부의 주요 인사를 다수 살상했지만 가장 중요한 대통령을 암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그들이 노린 남한 정국의 불안정이나 혼란 그리고 저항운동의 확산 등은 전혀 없었다.
    이때 진모는 3명이 함께 행동하면 눈에 쉽게 띄기 때문에 각자 탈출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두 동료들에게 절대로 대사관 숙소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만 남기고 서둘러 현장을 떠났다. 그들은 안전하게 탈출할 방안이나 비상사태를 위한 대비책도 없었다. 그들은 결국 탈출하는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을 입고 잡혀서 모든 진상이 백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테러리스트를 위한 배려는 아무것도 없었다.

    양곤 강.
    원래는 쾌속정이 양곤 강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강 입구의 태그우드핀 마을까지 데려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 후 모선으로 안내할 요원과 접선한 다음 강 하구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동국 애국호에 승선해 귀환하는 것이 그들의 탈출 시나리오였다. 배는 하구에서 10월 12일까지 그들을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허겁지겁 양곤 강 부두에 도착해 아무리 찾아보아도 쾌속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건 애국호는 테러리스트들이 애타게 탈출을 기도하고 있을 때 인도에서 비료를 선적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배가 미얀마에 입항할 수 없었고 양곤 강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쾌속정도 없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 각본대로 각자 양곤강 하구를 향해 탈출을 시도했다.
    진모는 있지도 않은 쾌속정을 찾다가 실패하자, 강가에서 낮 동안 시간을 보내다가 날이 저물고 밤이 되자 강물에 뛰어들어 하류로 수영을 하여 내려가기 시작했다.
    2월에서 5월까지 성난 태양은 하늘에서 이글거린다. 그러다가 갑자기 열대 몬순 기후가 스콜을 몰고 온다. 우기인 6~10월에는 거의 매일 5시간 정도 비가 쏟아져 내린다. 그때는 우기가 계속 되고 있었기 때문에 강물이 많이 불어났고 물살도 거칠었다. 강가 진흙 언덕에는 열대 관목들이 무성한 덤불을 이루고 있다. 몇 마리 물소들이 선 채로 느긋하게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강둑 너머에는 저지대 벼가 심어진 푸른 논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아득히 저 멀리 지평선 끝에는 낮은 검은 산맥이 줄지어 솟아있다.
    흙탕물이 많이 불어난 거대한 양곤 강은 신비롭고 심오하였다. 그 강은 버마인들을 전율케 하는 꿈과 환상과 망상을 실어 날랐다. 그러나 달이 빛났고 강은 달빛을 받았지만 어둠에 싸여있다. 공기는 매우 후덥지근했다. 늪지에 사는 밤의 가수인 개구리와 두꺼비의 울음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그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그 두려움은 계속 커져서 마침내 공포감이 밀려왔다. 왜? 아니겠는가.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끊임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눈을 크게 뜨고 귀를 쫑긋 세웠다. 그는 강으로 뛰어들었다.
    진모는 자신의 뛰어난 수영 실력을 믿고 혼자 힘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강민철과 신기철은 걸어서, 진모는 수영을 해서 약속된 장소로 가려고 했다. 걸어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현지인의 신고로 죽거나 부상을 입고 체포된 신기철과 강민철과는 달리 진모의 선택이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밤 9시경 강변의 한 정박소에 모여 미얀마 길거리 음식인 ‘람베아샤아샤’를 즐기고 있던 주민들은 웬 남자가 혼자 하류를 향해 헤엄치는 것을 발견하고 매우 수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경찰서에 신고하는 한편 그에게 강가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그런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수영을 하면서 나아갔다. 횃불을 든 주민들과 보안요원들이 그를 쫓아 강변을 따라가고 신고를 받은 경찰관들은 배를 타고 그의 뒤를 쫓았다. 진모는 접안시설로 쓰는 니아웅단 제티 플랫폼 부근까지 수영하다가 강폭이 좁고 맹그로브 숲이 길게 펼쳐져있는 꼬불꼬불한 강의 지류로 빠져나가 일어섰는데 그곳의 깊이는 허리가 물에 잠기는 정도였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자 허리에 차고 있던 가방에서 수류탄을 꺼내들고 위협했다. 그러고는 바로 폭발이 일어났다. 그는 한동안 물길을 따라 흘러가다가 강에 있던 말뚝에 걸려 멈추었다. 경찰관 한 명이 강물에 들어가서 그를 붙잡고 있는 사이 다른 경찰관이 그의 양손을 묶고 강변으로 끌어냈는데 몸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진모는 그렇게 붙잡혔다. 그러나 잡히기 전에 수류탄 폭발이 있었고, 이때 가까이 있던 미얀마인 3명, 선원 1명과 어부 1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가 겨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눈을 떴을 때 달은 이울고 하늘에 다시 검은 구름이 가득하였다. 우기의 억수 같은 비가 또 다시 쏟아질 모양이다. 강물이 찰랑거리고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진모가 급히 현장을 이탈한 후 뒤에 남겨진 강민철과 신기철도 역시 양곤 강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아도 쾌속정은 없었다. 그들은 쾌속정은 포기하고 길을 걸어서 계속 하류 쪽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강변에 있는 채소 시장으로 가서 미얀마식 긴 나무 보트를 한 척 빌려 강을 건넜다. 그러고 나서 강변을 따라 하구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흰 백로들이 목을 구부린 채로 꼼짝도 하지 않고 길가 풀섶에 외다리로 서있다.
    그들은 탈출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 불안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밤이 되면서 몹시 피곤에 지치고 배가 고팠고 우선 너무 어두워서 길을 제대로 찾을 수가 없었다. 얼굴에는 비지땀이 흘러 내렸다. 눈이 아득해지곤 했다.
    무엇보다 이상한 외국 사람들이 밤길을 걸어가면 현지인들이 수상하게 여길 가능성이 컸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 마침 강가에 모기들만이 살고 있는 빈 오두막 하나를 발견해서 그곳에서 꿀맛 같은 단 잠을 잤다. 몇 시간 동안 눈을 붙였지만 먹을거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새벽이 되자 날이 희미하게 밝아왔다. 녹색비둘기 떼들이 벌써 나뭇가지 위에 모여 앉아 구구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시 하구를 향해 걸었다. 공동묘지를 지나갔다. 멀리서 소가 끄는 달구지 바퀴가 천천히 돌아가면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어렵사리 작은 어선에 편승해서 하구로 내려갔다.
    그러나 어부들은 처음부터 그들을 수상하게 여겼기에 기회를 보아 경찰서에 신고할 속셈이었다. 이미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면 즉시 신고해야 한다는 통보가 있었다. 어선이 약속된 장소인 태그우드핀 마을에 가까워지자, 어부 중 1명이 배가 아파서 약을 사야 한다며 배에서 내려 육지로 올라갔다. 그 어부는 바로 경찰과 마을 인민위원회에 신고했다.
    그들이 짊어지고 있는 가방 검사를 요구했는데, 그들은 모두 “머니, 머니”라고만 되풀이해서 말했다. 실랑이 끝에 강민철이 주저앉아 갖고 있던 가방 하나를 열었는데 그 안에는 정말 외국 돈이 많이 들어 있었다. 경찰관은 그들을 경찰서 지소로 연행했다. 그곳에서도 경찰관은 그들이 소지하고 있는 다른 가방들을 검사하려 했지만 이를 계속 거부했다. 경찰관은 그들에게 결국 총을 겨누면서 가방을 뺏으려 했다. 신기철은 강제로 가방을 뺏으려는 경찰관과 옥신각신하다 가방에 있던 총을 꺼내들어 경찰관들을 향해 먼저 발포했다.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불꽃이 튀었다. 아찔했던 순간들이 지나간다. 분명히 어딘가 치명적으로 맞은 것 같았다. 짧은 총격전 끝에 신기철은 수발의 총알이 가슴을 꿰뚫고 지나가면서 바로 사망했다.
    미얀마 경찰관 2명도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 소동 중에 강민철은 지소 밖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신기철의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얬는데 온몸에 여러 군데 총상의 흔적들이 끔찍했다. 신기철은 처음 총격을 당하고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대응 사격을 했던 것이다. 시체에 불과했지만 신기철의 모습을 보는 순간 바로 그가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소에서 총격전이 있고 테러범 중의 한 명이 탈출한 후에 그 마을에는 즉시 경계령이 떨어졌고 경찰과 함께 군부대가 파견되었다.
    초가지붕을 한 작은 오두막집 수십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은 물론 주변지역에서도 물샐 틈 없는 수색이 시작되었다. 다음날인 10월 12일 아침, 똥개들이 나지막하게 짖어대면서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마을에 사는 배가 볼록하게 튀어나오고 벌거벗은 한 아이가 수상한 외국인이 강변 갈대밭에 숨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신고했다. 경찰관, 군인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그 지역을 포위했는데 강민철은 태그우드핀과 크웨인 웨잉 두 마을 사이 강변 구석 푸른 꽃들이 피어있는 늪지에 숨어 있었다. 그때까지 그는 있지도 않은 모선으로 탈출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장교는 강민철에게 말했다.
    “한국인 일어나라.”
    “……”
    “빨리 일어나라! 쏘겠다! 쏘겠다!”
    강민철은 머리를 두 번 흔들고는 쓰러졌다. 죽음이 목전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는 악몽 속을 헤매고 있었다. 장교가 다시 일어나라고 재촉했다. 그가 왼팔을 들어 보였는데 팔뚝 아래 손이 잘려져 나가고 없었다. 장교가 그를 똑바로 쳐다보자 그는 당황스러웠다. 강민철은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남방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숨 막히게 더웠고 강가에서 풀잎 냄새가 강하게 풍겨왔다. 한 떼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웅성거리는 마을 사람들과 점점 많이 모여드는 똥개들이 시끄럽게 짖어대며 따라왔다.
    부상을 심하게 당한 미얀마 군인들은 헬리콥터로 이송 도중 사망했고, 강민철은 중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았다.
    결국 멀고 먼 이국땅까지 온 세 명의 테러리스트 중에서 한 명은 죽고 다른 두 명은 온몸에 부상을 입고 미얀마 당국에 잡혔다.
    그가 병원에 실려왔을 때는 의식이 오락가락했었다. 얼굴과 양쪽 다리 등에 심한 부상을 입었고 복부에도 중상을 입어서 개복수술을 했다. 왼쪽 팔은 더 이상 치료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팔꿈치 부근에서 절단했다. 그는 미얀마의 의사들이 치료에 최선을 다하고 잘 돌보아주는 것을 고맙게 여겼다.
    진모가 병원에 이송되어 왔을 때 수류탄이 자기 손에서 미리 터져서 왼팔과 오른쪽 손가락 4개가 절단되었고, 복부는 창자, 방광 등이 터져 나와 있었다. 왼쪽 가슴에도 내부 출혈이 심했다. 수술은 2시간쯤 걸렸는데, 사지의 일부가 절단되고 눈도 실명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청력은 정상이었고 영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수술 며칠 후 부터 조금씩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빨랐다. 처음 음식을 주었을 때, 영어로 빵과 밥 중 어느 것을 원하는지 묻자 바로 ‘브레드’라고 대답했다. 간호원과 의사들이 그를 친절하게 치료해주자 그는 자주 ‘생큐!’라고 말했다.
    강민철도 간단한 영어회화를 할 수 있었다. 군의관들이 영어로 “건강상태가 좋은가” 하고 물으면 ‘예스’라고 대답하고 ‘음식이 맛있는가?’하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들이 치료를 끝내고 나갈 때는 ‘생큐’라고 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자기 몸에서 수류탄이 폭발했다면 바로 사망했을 것이다. 또 웬만큼 건강한 사람이라도 그 정도의 상처를 입으면 고통스럽고 복잡한 치료 과정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진모는 의식이 없는 상태였고 강민철은 의식이 오락가락했다. 두 사람 모두 한쪽 팔이 절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강민철의 부상은 진모보다는 조금 가벼웠던 것 같다. 그도 역시 한쪽 팔을 절단해야 했고 얼굴과 양쪽 다리, 허벅지 등 복부와 내장에도 부상이 심했다. 그는 왼팔이 절단되는 부상 외에 온몸에 상처가 심했지만 진모처럼 실명이 되지는 않았다. 기이한 것은 두 사람 모두 한쪽 팔이 잘렸고 교전 중에 상대방의 공격이 아니라 자신들이 소지하고 있던 수류탄으로 부상을 당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후일 강민철이 범행의 전모를 자백하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는데 한 요인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진모와 강민철이 건강을 회복하자마자 미얀마 정부는 외부의 간섭을 완전히 차단한 채 그들을 심문했는데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전혀 조사에 응하지 않고 침묵으로 대응했다.
    강민철은 그때 절망적이었고 자주 죽음을 생각했다.
    당초 버마에서는 한국 내부의 불만 세력 혹은 반정부 세력이 저지른 짓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고, 한국 내에서도 모든 것이 대통령의 자작극이라는 허무맹랑한 루머가 돌기도 했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물증들이 나왔다.
    한국 수사관들이 심문에 참여해서 그들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파편 때문에 한 쪽 눈의 시력을 잃고 완전히 자포자기한 진모는 모든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강민철은 엉뚱한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28세로 남한 출신이고 영등포에서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육군에서 제대한 후 현재 서울대학교에 다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은 초등학교만 나오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다니지 않았다고 답변 했고 영등포 역 부근에서 살고 있으며 그 곳에 어머니가 여전히 있다고 했다.
    물론 모두가 허위 진술이었다.
    한국 수사관들이 질문 했다.
    “너무 거짓말이 심하다. 우리가 모든 걸 다 조사했다. 그럴 것까지 없지 않은가?”
    “……”
    “버마까지 언제 어떻게 왔는가?”
    강민철은 그 당시 심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고 큰 목소리로 도전적으로 대답했다.
    “우리들이 버마에 온 것은 육로를 통해서 왔다. 다시 말하자면 중국 윈난성에서 라오스로, 라오스에서 메콩강을 건너서 태국 북부를 거쳐 국경을 넘을 수도 있고, 중국 윈난성에서 곧바로 버마 쪽으로 국경을 넘을 수도 있다.
    아니면 빙빙 돌아서 인도나 방글라데시에서 국경을 넘을 수도 있다. 육지에서는 장거리 시외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알아서 생각해라.”
    “버마 당국이 버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 다 조사해 봤지만 그쪽으로 온 게 아니야.”
    “다 조사해 봤다면 왜 이렇게 물어보는가?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배를 타고 왔는데 이를 믿지 않는다면 비행기를 타고 양곤 국제공항을 통해서 들어왔다고 해두자.”
    “아까운 목숨 버릴 필요가 있겠는가? 어떻게 해서든지 우선 살아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다.”
    “도움은 필요 없다. 무슨 도움?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공화국을 위해서 이 한 목숨을 바칠 것이다.”

    1989년 6월 18일 버마에서 미얀마로 국호가 변경되었다.
    2007년 4월 버마와 북한은 국교를 재개했고 2008년 5월 18일 강민철은 죽었다. 버마 당국은 강민철이 간암으로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버마 정보부의 고위 간부와 인세인 형무소 교도관이 병원의 사망 진단서를 확인하고 죽은 시신을 살펴보았다.
    강민철은 교도소 내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변했고 그제서야 그의 고독한 영혼은 바다를 건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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