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구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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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등의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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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스로 생각하기에 독서량이 적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읽었던 책은 95% 이상이 전공서적이었다. 가끔 처세술, 돈, 성공에 관한 베스트셀러를 읽은 적이 있다. 문학작품이라면 아주 가끔 재미있는 소설 정도를 읽었을 뿐이다. 시라는 것과는 정말 오랜 시간 동떨어져 지내왔다. 시집이란 것을 사서 천천히 음미하며 시를 읽은 것이 언제이던가. 아마도 대학생 때 읽었던 류시화 시인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이라는 시집이 마지막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런데 최근 우연히 시를 읽게 되었다. 건강검진을 위해 종합병원에 들렸다가 화장실에서 벽에 붙어있는 시를 읽게 되었다. 정호승 시인의 ‘내 등의 짐’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었다. 가슴 깊은 공명을 느꼈고, 문학소년처럼 그 구절을 단박에 외워두고 싶었다. 그러나 알콜의 영향으로 힘을 잃은 내 기억력의 한계를 알고 있기에 스마트폰으로 찍어 두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여기 신문의 한 귀퉁이에 이렇게 시의 한 구절을 써놓는다고 하여도 그 감흥은 매우 떨어질 것이다. 첫째, 읽는 사람의 마음상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기분 좋고, 자신감이 충만한 날의 아침에 이 글을 읽는다면 그리 감동이 없을 것이다. 둘째, 법조인들의 대부분이 정보를 얻기 위해 허겁지겁 속독으로 이 신문을 읽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를 시처럼 써놓지 않고 판결문처럼 쭉 이어서 써놓았으니 감흥을 얻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셋째, 필자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는 그 누군가가 아름다운 시의 한 구절을 읽어줄 때와는 감흥이 다를 수밖에…. 가끔 필자도 신문을 읽다가 누군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의 한 구절을 써놓으면 이를 건성건성 읽곤 한다. 그 글을 쓴 사람은 아마도 깊은 감동을 받았기에 그에 대한 글을 썼겠지만 그 글을 다시 읽는 사람은 느낌이 다른 것이다. 재전문증거가 증명력이 약한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뭔가 삶의 큰 무게를 느낄 수밖에 없는 병원에서, 잠시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는 화장실에서, 전혀 선입견 없이 천천히 음미하며 읽게 된 시 한 구절은 나에게 정말 큰 위안과 깨달음을 주었다. 시란 것이 이런 힘이 있구나…. 문학소년도 사라진 이 때, 문학에 소질도 없던 필자에게 중학생 시절 읽었던 ‘소나기’만큼이나 큰 감동을 주는 작품을 접하는 느낌이었다.

     

    ◇이 글은 2015년 3월26일자 법률신문 15면 <법조프리즘>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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