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윤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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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제국 (21) 반전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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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미 은행 매각 반대”

     

    “헐값 매각 결사 반대”

     

    “투기 자본 물러 가라”

     

    신문을 보고 있던 알렉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잘 나가던 장미은행의 인수합병 협상이 엉뚱한 곳에서 암초에 부딪친 것이다. 이제 은행 경영진은 물론이고 한국정부의 관계자들도 대부분 설득해 놓은 상태라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협상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니 예기치 못한 복병이 나타난 것이었다.

     

    장미은행 인수에 제일 먼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은 시민단체들이었다. 경제정의 실천연대, 정의실현 국민연대, 금융소비자연합, 바른생활연대 등 무슨 연대와 무슨 연합이 그렇게나 많은지 20여개가 넘는 시민단체와 금융노조 등 노동계가 장미은행 해외매각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알렉스로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투자를 잘못해 엄청난 손실을 입은 은행은 당연히 파산하거나 아니면 제3자에게 매각되는 것은 당연한데 도대체 왜들 이 난리지? 정말 한국이란 나라는 알렉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너무 많았다.

     

    이제 와서 장미은행을 매각하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건가? 은행의 신용도는 점점 추락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파산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국가 경제에 너무나 큰 부담이라 안 될 것이고, 그렇다면 제3자 매각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라도 해서 은행업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외자유치도 되고 선진국의 금융기업도 배울 수 있으니 일석삼조가 아닌가 말이다.

     

    시민단체들은 연합하여 연일 장미은행의 본점이 있는 종로와 광화문에서 반대시위를 하고 있었다. 더욱 웃기는 것은 언론이었다. 장미은행 매각에 대해 시민단체들은 그 내용을 정확하게 모를 수도 있으니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해도 언론은 좀 더 냉정하게 분석하고 판단할 수도 있을 텐데 언론이 오히려 시민단체들을 부추기고 있었다. 신문들은 연일 경쟁적으로 장미은행 매각에 관한 온갖 루머와 뒷얘기를 마구잡이로 보도하고 있었다.

     

    결국 급기야는 장미은행 매각 문제는 국회로까지 번져 국회위원들 마저 정부의 장미은행 매각 방침에 대해 족속매각이니 헐값매각 또는 밀실매각이라며 협상내용을 공개할 것을 촉구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재정부 실무책임자들과 장미은행 임원들도 매각협상에 적극성을 띠지 않아 사실상 협상이 중단되고 말았다. 알렉스는 보고를 받고 상하이에서 서울로 날라 온 볼트만을 퍼시픽 ․ 파이낸스의 대표 랭스와 함께 신라호텔 스위트룸에서 만났다.

     

    보고서를 꼼꼼히 다 읽고 난 볼트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의 앞에 좌우로 앉은 알렉스와 랭스는 벌을 받는 학생들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볼트만은 못마땅하다는 듯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현재로서는 협상이 중단된 상태라 별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이럴 때 무리하게 몰아붙이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시민단체들과 언론, 그리고 국회에서 잠잠해질 때까지 시간을 갖고 관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랭스가 비교적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알렉스보다 훨씬 늦었지만 M&A엔 전문가라 그런지 서두르는 기색은 없었다.

     

    “알렉스의 생각은 어떻소?”

     

    볼트만이 알렉스에게도 화살을 돌렸다.

     

    “저쪽 상황이 좋지 않아 협상이 중단된 상태라서 지금은 한국정부와 언론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체되더라도 기다려야겠습니다. 그러다보면 결국 장미은행은 다시 협상에 나설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길만이 파산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란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볼트만은 알렉스의 말을 듣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알듯말듯한 미소가 서렸다.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져 우리가 난처하게 된 것 같지만 사실은 한국쪽에서 자충수를 둔거요.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볼트만이 두 사람을 거만하게 둘러보았다. 두 사람은 볼트만의 말이 무슨 뜻인지 감을 잡지 못해 안절부절했다.

     

    “한국 언론이나 국회에서는 시민단체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장미은행 인수를 위해 제시한 우리의 인수가격이 헐값이라고 공격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생각이 있소.”

     

    볼트만이 알렉스의 보고를 받자마자 서울로 날아온 것은 아마도 이런 사태에 대한 대비책을 가지고 온 모양이었다.

     

    “우선, 한국과 한국인이 장미은행 매각을 반대한다면 우리도 굳이 장미은행을 무리하게 인수할 생각이 없다고 발표할 생각이요. 현재 상황에서 장미은행을 인수할 만한 업체는 흔치 않소. 그렇게 되면 장미은행의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고 결국 파산할 수밖에 없을 것이요.”

     

    “만약 장미은행의 상황이 호전되어 매각하지 않더라도 자력갱생이 가능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저쪽에서는 자력갱생 쪽으로 방향을 모색하는 것 같습니다.”

     

    알렉스가 걱정스러운 듯이 우려를 나타냈다.

     

    “하하하, 알렉스 걱정할 필요 없어요. 한국정부에서 장미은행에 공적자금을 투입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장미은행의 상황은 점점 악화 될거요. 국제적인 신용등급도 하락할 것이고, 두고 보면 알 것이요. 내가 왜 저쪽에서 자충수를 두었다고 했는지, 두 분은 이제 잠시 쉬면서 상황을 지켜보시오. 자, 이제 식사하러 갑시다. 내가 두 분을 위해 좋은 와인을 준비해뒀소.”

     

    볼트만의 표정은 처음과는 달리 활짝 펴져 있었다. 알렉스는 볼트만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랭스는 이미 다 짐작하고 있다는 듯이 의미 있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조간신문은 일제히 퍼시픽 ․ 파이낸스의 장미은행 인수방침 철회의사를 보도했다. 퍼시픽 ․ 파이낸스의 랭스 대표는 한국정부와 한국인의 의사에 반하여 장미은행을 인수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한다고 했다. 그러나 퍼시픽 ․ 파이낸스의 인수방침 철회가 발표되면서 장미은행의 주가는 또 다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장미은행의 해외펀드 투자에 추가로 큰 손실이 예상된다는 뉴욕발 기사도 실려 있었다. 무디스 앤 푸어스는 장미은행의 신용등급을 또 다시 한 단계 내렸다.

     

    이제 장미은행을 인수하겠다는 해외펀드나 기업체는 없었다. 다만 홍콩의 영국계 은행의 한 간부가 실질 인수가격이 5억 달러 정도라면 인수할 의향이 있음을 사견으로 내비쳤다는 기사가 실렸다. 인수가격 5억 달러는 퍼시픽 ․ 파이낸스가 제시한 인수가격의 절반밖에 안 되는 금액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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