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윤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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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제국 (20) 은밀한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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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롯데호텔 34층 파비우스클럽은 저녁시간인데도 한산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은 멤버십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전면의 통유리 창은 초겨울로 접어든 서울의 야경과 함께 저 멀리 서울타워의 불빛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재정부 금융정책국장 서창민은 오늘 모임의 의미를 생각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안내된 방으로 들어섰다. 약속시간인 저녁 7시가 아직 10분이나 남았는데 방안에는 이미 오늘 모이기로 한 멤버가 모두 와 있었다.

    장미은행장인 홍기표, 금융감독원 부원장 경대석, 주한미대사관의 재무관인 프랭클린, 그리고 서창민이 처음 보는 미국인 두 명이 있었다.

    서창민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는 악수만 하고 그날 처음 본 미국인 두 명에게는 명함을 건넸다. 키가 크고 인상 좋은 사람은 미국로펌인 다비드 앤 솔로몬의 알렉스 변호사라고 했고, 어깨가 딱 벌어지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얼굴이 유난히 흰 사람은 퍼시픽 ․ 파이낸스의 대표이사인 랭스라고 했다. 퍼시픽 ․ 파이낸스는 미국의 아메리카 은행이 주간사가 되어 주로 영․미계 사모펀드들이 공동 투자하여 이번 장미은행을 인수하기 위해 설립된 홍콩 국적의 특수목적회사였다.

    웨이터가 들어와 얼음같이 찬 냉수를 따라주고 잠시 후 또 다른 웨이터가 와인 리스트를 들고 들어왔다. 사전에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오늘의 호스트여서 그랬는지 웨이터는 와인 리스트를 프랭클린에게 가져가 보였다. 프랭클린은 와인 리스트를 들여다보며 웨이터에게 뭐라고 몇 마디 하더니 주문을 할 와인을 결정했다.

    일행은 한국의 초겨울 날씨와 얼마 전에 있었던 태풍에 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었다.

    “서국장님은 큰 아드님이 뉴욕대학에서 파이낸스를 공부하고 있다지요?”

    서창민의 옆자리에 앉은 프랭클린이 물었다. 그는 유난히 파란 눈에 은발인데다가 어깨가 약간 구부정해 대학교수 같은 인상을 주었다. 하긴 미국에서도 명문으로 손꼽히는 프린스턴대학을 나온 수재라고 했다.

    “아..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전공까지 알고 계십니까. 놀랍습니다.”

    사실 놀라운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별로 친하지도 않고 업무상 공식석상에 한두 번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 미 대사관 재무관이 어떻게 자신의 아들 일까지 상세히 알고 있단 말인가? 서창민의 기분이 묘해졌다.

    “하하하.. 서국장님의 아들이 대단한 수재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솔직히 나 개인적으로도 서국장님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점잖은 학자풍의 외모와는 달리 프랭클린은 서 국장에 대한 관심을 노골적으로 나타내 보였다. 서창민은 이들의 적극성이 때로는 두렵기까지 했다. 이들은 일단 먹이를 발견했다 싶으면 자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재능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웨이터가 흰 무명천에 싼 와인을 비스듬히 바쳐 들고 들어왔다. 와인을 들고 온 웨이터는 한명이 아니라 모두 세 명이었다. 웨이터는 곧장 프랭클린에게 다가가 차례로 와인을 보여준 뒤 프랭클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 중 한 웨이터가 먼저 와인 한 병의 코르크마개를 뽑았다. 화이트 와인이었다. 아마도 전채요리에 곁들이기 위해 준비한 것 같았다. 웨이터는 프랭클린의 잔에 바닥에 조금 고일만큼만 와인을 따랐다. 프랭클린은 익숙한 솜씨로 잔을 기울이며 와인의 향기를 음미한 뒤 한 모금을 머금고 천천히 맛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웨이터는 제일 먼저 금감원 부장인 경대석, 서창민, 홍기표의 순서로 와인을 따랐다. 웨이터는 자신이 와인을 따라야 할 순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순서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것 역시 오늘의 호스트인 프랭클린의 치밀함의 결과임에 틀림없었다.

    서창민은 웨이터가 놓고 간 와인의 라벨을 확인해 보았다.

    “오푸스 원 샤르도네 나파밸리 2002”

    “서 국장님, 미스터 프랭클린은 와인 전문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귀한 분을 모셨기 때문에 아마 최고의 와인을 준비했을 겁니다.”

    서창민의 와인에 대한 호기심을 눈치 챈 듯 옆에 앉은 랭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여러분.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위해서….”

    오늘의 호스트격인 프랭클린이 잔을 들어 인사하자 모두들 가볍게 잔을 부딪치며 건배했다.

    “홍 행장님도 와인 애호가라고 들었습니다. 와인에 대한 조예도 전문가 이상이라면서요?”

    프랭클린은 역시 오늘 참석한 멤버들에 대한 사전조사가 철저한 것 같았다.

    “하하 뭘요. 저야 미스터 프랭클린에 비하면 아마추어지요. 그런데 화이트 와인도 세계 최고는 프랑스산이 아니라 캘리포니아 산이라면서요?”

    홍기표는 프랭클린의 추겨 세움에 적이 만족스러운 듯 와인에 대해 아는 체를 했다.

    “그럼요. 와인업계 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깜짝 놀랄 사건이 미국독립 200주년이 되는 1976년에 일어났지요. 우리는 그것을 ‘파리의 심판’이라고 하지요”

    랭스는 와인을 한 모금 넘기며 왼손을 과장되게 앞으로 뻗으며 말했다.

    “아. 파리의 심판? 나도 어느 잡지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프랑스에서 급성장하는 캘리포니아 와인의 기를 죽이기 위해 프랑스 와인과 미국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하여 최고급 와인을 가리는 이벤트였지요. 당시 심사위원은 모두 프랑스의 와인전문가들로 구성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이 세계최고로 선정 되어 와인업계가 발칵 뒤집혔다지요?”

    그동안 말없이 와인을 마시고 있던 경대석이 물을 만난 듯 신나게 떠들었다. 그는 두꺼운 안경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것이 관료라기보다는 연구원 같은 인상이었다.

    “네. 맞습니다. 경원장님이 아주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군요. 파리의 심판 이후에도 프랑스 와인업계에서는 자존심 회복을 위해 여러 차례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시도해 봤지만 번번이 세계최고의 와인은 캘리포니아 와인임을 재확인 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오늘 모임의 주제가 마치 와인이라도 되는 듯 계속 와인 얘기를 이어나갔다. 그 사이 웨이터들은 부지런히 새로운 접시를 내오고 빈 접시를 가져갔다. 웨이터들이 메인 요리를 내왔을 때였다.

    “홍 행장님. 이 와인을 한번 드셔 보십시오.”

    프랭클린은 웨이터에게 아까 준비했던 와인 중 레드 와인을 따르도록 했다.

    “이 와인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와인인가요?”

    서창민과 홍기표가 잔을 기울며 향을 맡아보고 한 모금 마셔 보는 사이 경대석은 와인의 라벨을 확인해 보았다.

    “샤토 무통 라쉴드 1986”

    “아! 이 와인?”

    경대석은 가볍게 탄성을 질렀다.

    “역시 경 원장님은 알아보시는군요.”

    프랭클린은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경대석을 바라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제 기억이 맞다면 이 와인은 세계적인 와인 전문가인 로버트 파커가 더 이상의 와인은 없다면서 100점 만점을 준 그 와인 아닙니까?”

    경대석은 약간 흥분하며 말했다.

    “와우! 경 원장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네 맞습니다. 바로 그 와인입니다.”

    경대석과 프랭클린의 말에 따라 모두들 최고의 와인을 맛본다는 자부심으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와인을 마셨다. 서창민도 평생 맛보기 어려운 최고의 와인을 마신다는 기분에 다소 들뜨기도 했지만 이들이 언제 본론을 꺼내려는지 몰라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웨이터는 프랭클린의 지시에 따라 또 다른 와인을 준비해 일행에게 따랐다.

    이번에는 서창민이 웨이터가 놓고 간 와인의 라벨을 확인해 보았다.

    “샤토 라쉴드 라피트 1988”

    와인에 대해 별다른 전문지식이 없는 서창민이지만 이 와인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 해는 대한국민으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서울 올림픽의 해가 아닌가. 그해 프랑스 보르도 지방의 여름 날씨는 포도농사에 최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해 수확한 까베르네 소비뇽(포도품종)의 맛과 향은 최근 들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샤토 라쉴드 라피트 빈티지 1988’은 바로 그 해에 만든 보르도가 자랑하는 최고급 와인이었던 것이다. 이제 20년 이상 숙성되었으니 마시기에는 최적일 터였다. 서창민은 가격이 얼마나 하는지 궁금했지만 그것을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급와인을 내놓은 것일까? 아니면 1986, 1988, 2002년이란 해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와인은 맛있었다. 한 모금 넘겼는데 오랫동안 향이 입안에 남았다. 와인에 대해 잘 모르고 자주 마실 기회도 없었으니 달리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서 국장님, 1988년은 정말 대단했지요.”

    맞은편에 앉은 랭스가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서 국장에게 말을 걸었다.

    “네, 저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1988년을 그레이트 빈티지라고 한다면서요?”

    서창민은 랭스가 말한 1988의 의미를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딴청을 부렸다.

    “하하하. 서 국장님, 와인 말고 저는 서울올림픽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랭스는 서창민의 내숭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쾌하게 의미를 정정해 주었다.

    “아 예, 서울올림픽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땐 정말 우리 스스로도 대견할 만큼 전 국민이 한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은 그때 새롭게 태어났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세계의 변방 작은 나라에서 세계사의 중심 국가의 하나로 말입니다.”

    프랭클린은 오늘 뭔가 작정을 하고 나온 것 같았다. ‘오푸스 원 나파벨리 2002, 샤토 무통 라쉴드 1986, 샤토 라쉴드 라피트 1988’모두 프랭클린이 신경 써서 특별히 고른 와인임이 틀림없었다.

    서창민은 순간 ‘아’하고 탄성을 질렀다. 프랭클린이 고른 와인의 의미를 깨달았다. 1986년은 한국이 처음으로 아시안 게임을 유치한 해였고 2002년은 월드컵을 유치한 해가 아니었던가. 세계사의 중심국가의 하나라고 추켜세운 랭스의 말이 귀에서 맴돌고 있었다.

    잠시 후 웨이터가 후식을 날라 왔다.

    “이렇게 귀한 분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이제 터놓고 여러분과 의견을 나눠봤으면 합니다.”

    프랭클린이 오늘의 호스트답게 좌중의 분위기를 이끌고 있었다.

    포크로 후식을 먹던 홍기표와 경대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프랭클린이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번 장미은행 사태에 대해 좋은 결과를 예상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긴 주가는 폭락하고 은행의 신용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그럼 제가 지금까지의 실무진들이 협의해 온 결과를 토대로 간략하게 요점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알렉스 변호사가 미리 준비한 서류를 꺼내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 장미은행의 주가는 2만 원 이하로 폭락했고 은행의 신용도는 C급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재 실무진들이 파악한 BIS(국제결제은행) 비율은 7을 겨우 넘는 수준입니다. 따라서 현재 상태로는 자력으로 지금의 상황을 극복하고 생존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됩니다. 물론, 과거에는 이런 경우 정부에서 국가 경제와 다수의 예금자를 보호하기 위해 공적자금을 투입해 회생시키기도 했지만 현재의 WTO체제 하에서는 공적자금 투입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방법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새로운 투자자를 찾는 방법이고, 둘째는 국민경제에 부담이 되더라도 청산절차를 밟는 것입니다.”

    “청산은 어떤 경우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장미은행장인 홍기표는 침통한 어조로 분명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청산은 우리도 전혀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경대석 부원장도 거들고 나섰다.

    서창민은 아마도 이들이 이미 어느 정도 프랭클린이나 랭스에게 설득당한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을 떨쳐 버리기 어려웠다.

    “그러면 새로운 투자자를 찾는 방법밖에 없는데, 국내의 다른 은행이나 재벌은 자금상의 여유는 있지만 법규상 걸리는 것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장미은행의 장래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투자를 꺼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반면 해외 투자자 중에는 한국의 금융시장 진출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투자자들이 몇 있습니다만 그 중에서 퍼시픽 ․ 파이낸스가 제시하는 조건이 가장 유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퍼시픽 ․ 파이낸스는 이미 시중에서 장미은행의 지분을 15% 정도 획득했고 정부지분과 대주주 지분 40%를 매입하는데 10억불 정도를 투자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퍼시픽 ․ 파이낸스는 은행을 경영해 본 경험이 전혀 없고 장미은행 인수를 위해 설립한 SPC(특수목적회사)에 불과하잖습니까? 그런 회사에 국내 은행을 매각하는 것은 법적으로도 어렵지만 국민여론도 문제고 국회에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서창민은 재경부내의 매각불가론자들의 의견을 대변했다.

    “물론 서 국장님의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퍼시픽 ․ 파이낸스의 대표인 랭스가 나섰다.

    “하지만 은행이 다른 금융기관과 합병하거나 인수할 때 은행경영의 경험이 있고 없고는 전혀 제약요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법적인 문제는 이미 전례가 있어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약 장미은행을 인수하면 우리는 최고의 전문가로 하여금 장미은행의 경영을 맡게 할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만큼 거액의 투자를 할 때에는 다 나름대로의 플랜이 이미 서 있습니다. 우리는 장미은행의 경영 상태를 최단 시일 내에 정상궤도로 올려놓을 자신이 있습니다. 물론 현재의 고용상태도 모두 승계하고 결코 직원들을 구조 조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따라서 은행 노조에 대한 대책도 이미 마련해 놓았습니다.”

    알렉스가 말하는 전례라는 것은 과거 외국계 사모펀드의 한미은행과 외환은행의 인수사례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부지분이 가장 큰 만큼 은행의 합병은 재정부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잘 아시겠지만 더 윗선에서의 재가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대석 부원장은 자신의 의중은 나타내지 않은 채 책임과 권한을 윗선으로 돌렸다.

    프랭클린이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나섰다.

    “국장님, 재정부내에서 국장님의 의견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들었습니다. 국장님만 도와주신다면 청와대쪽에는 우리 허드슨 대사께서 힘써 주실 겁니다. 또한 법무부와 산자부 등 관계부와의 의견조율도 대사관과 미상공회의소 쪽에서 측면지원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또 조만간 세계은행 부총재와 IMF 총재도 한국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서창민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이들의 전방위 공격은 가히 융단폭격이라고 할 만 했다. 세계은행과 IMF까지 움직일 수 있다니 그저 이들의 자본과 힘이 부럽고 두려울 뿐이었다.

    “국장님도 미국 코넬대학에서 파이낸스를 공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장님도 잘 아시겠지만 미국에서 만약 장미은행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면 벌써 합병이나 인수절차가 끝났을 것입니다.”

    알렉스 변호사가 다시 미국의 경우를 언급했다. 사실 서창민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자력으로 생존하지 못하는 기업은 그것이 은행이건 제조업체이든 다른 기업에 합병되거나 인수되는 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력으로 생존하지 못하는 기업이 도태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은행이라는 기업은 단순한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기업이 아닙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 은행은 거의 국민기업이고 공기업과 같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시장경쟁원리로만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국장님, 이제 한국은 더 이상 세계의 변방이 아닙니다. 한국은 이미 세계사의 중심이고 이미 세계자본시장 흐름에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오히려 한국이 더 적극적으로 세계적인 금융자본을 유치함으로서 세계 금융질서에 편입되는 것이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입니다. 이번에 퍼시픽 ․ 파이낸스가 장미은행을 인수하게 되면 이는 서로에게 윈·윈 게임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에도 좋은 영향을 주게 될 것입니다.”

    서창민은 퍼시픽 ‧ 파이낸스의 장미은행 인수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메리카 은행이 주도하여 설립하였다고 하지만 퍼시픽 ‧ 파이낸스는 사모펀드이지 결코 금융기관이라고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서창민은 퍼시픽 ․ 파이낸스의 장미은행 인수에 대하여 이를 거부할 수 있는 명분이 점점 없어짐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퍼시픽 ․ 파이낸스의 제의를 거절한다면 장미은행의 회생은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많은 직원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아니 그보다 그 엄청난 수의 고객들은 어떻게 될 것인지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었다. 하지만 퍼시픽 ․ 파이낸스가 장미은행 인수를 위해 실질적으로 투자한 것은 고작 10억불이었다. 어떻게 고작 10억불에 국내 굴지의 은행을 외국자본에 넘길 수가 있는지 서창민은 이럴 때면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지나온 30여년의 공직생활이 그저 원망스러웠다. 왜 하필 자신이 금융정책국장을 맡고 있을 때 이런 문제가 발생했는지 참 관운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미은행 매각문제는 정말 잘 해야 본전이고 앞길에 득 될 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저 모든 걸 훨훨 털어버리고 낯선 곳으로 떠나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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