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윤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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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제국 (19) 보이지 않는 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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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않는제국19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강동현의 마음은 착잡했다. 사무실의 재정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이미 예정되어 있는 파국을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번 달에도 클레임 제기 건수는 6건으로 늘었고 고문계약 해지 건수도 7건으로 늘었다.

    강동현은 서둘러 차를 몰고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로 향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씩 한국무역협회가 주관하는 조찬강연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서둘러 온 탓에 조찬모임 시작 시간인 아침 7시 반 전에 도착하긴 했으나 지하 3층까지는 주차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가까스로 지하 4층에서 빈 공간을 발견하고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같은 조찬강연회에 참석하러 오는 사람들인지 몇 사람이 뛰어와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아침 일찍 나올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에는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었다.

    조찬 강연회가 열리는 그랜드볼룸은 이미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강동현은 혹시 누구 잘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하고 찾아볼 생각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워낙 강연회장이 크고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강동현은 아는 사람 찾기는 일찌감치 포기하고 빈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같이 간단한 아침 식사도 하고, 또 강연도 같이 듣는 것은 참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분명 색다른 경험이었다.

    강동현은 먼저 일어나 동석한 사람들에게 명함을 돌리며 인사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인사하는 것은 변호사 개업한 후 새로 생긴 강동현의 버릇이었다. 사교성이 없는 강동현으로서는 꽤나 발전한 셈이었다.

    “이제 우리도 로스쿨이 생겼으니 변호사가 쏟아지겠지요. 그런데 변호사 수가 많아지면 비용이 확실히 내리는 겁니까?”

    앞에 앉은 무역회사 이사라는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강동현에게 물었다.

    “글쎄요. 변호사 수가 늘어나면 일시적으로 수수료가 낮아질수도 있겠지만 외국의 예에서처럼 변호사의 보수가 양극화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국가 전체로 보면 법무내용이 크게 늘어날 것 같습니다.”

    강동현은 민감한 문제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특히 사업하는 사람들 중에는 변호사들의 서비스 수준과 비용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의식한 탓이기도 했다.

    “어쨌든 지금은 수요에 비해 수가 너무 적은 것 같아요. 외국 바이어 하고 분쟁이 생겨 변호사한테 의뢰하려고 해도 비용도 비쌀 뿐만 아니라 영어를 제대로 하는 변호사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사실 무역 분야에선 영어를 못하면 살아남지 못하는 건 이미 오래전의 얘긴데, 법조계는 참 보수적인 것 같아요.”

    “예. 아무래도 법조계는 보수적일 수밖에 없지요.”

    역시 앞에 앉은 이 남자도 법조계에 대해 그리 좋은 느낌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누려온 법조인들의 특권의식의 잔재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강연의 주제는 ‘급변하는 환율동향과 국내경제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서울 시립대의 김기하 교수가 미리 준비한 도표를 가지고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강동현은 김 교수의 강의보다는 부지런히 좌우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넓은 그랜드볼룸에서 테이블에 앉아 있는 지인을 찾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강의하기 때문에 실내조명이 별로 밝지 않은 상황에서는 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찾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강동현은 다시 한 번 한 부분씩 조금 더 오래 응시하며 구분하는 방법으로 연단 좌측으로부터 우측으로 훑어갔다.

    한 곳을 응시하던 강동현은 드디어 낯익은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사람이 고개를 돌려 신원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강의가 끝나갈 무렵 그 사람은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강동현이 찾던 그 사람이 틀림없었다. 강동현은 서둘러 강의 자료를 챙겨 두었다. 강의가 끝나면 바로 그 사람에게 뛰어갈 참이었다.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까지 마친 김 교수의 강의가 드디어 끝났다. 강동현은 시선을 고정시킨 채 사람을 제치고 앞쪽으로 다가 갔다.

    “이 전무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강동현은 그랜드볼룸을 나가려는 남자를 붙잡았다. 그는 베어링 투자 자문사의 이응탁 전무였다.

    “아, 강 변호사님. 오늘도 참석하셨군요. 역시 열심이십니다.”

    “예, 전무님. 잘 지내셨습니까? 전무님, 바쁘신 줄 알지만 저한테 한 10분만 시간을 내 주십시오.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강동현은 다급한 목소리로 이응탁에게 사정했다.

    “그래요? 지금 출근 시간이라… 강 변호사님, 다음에 뵈면 알 될까요?”

    이응탁은 손목시계를 보며 난색을 표했다.

    “전무님, 제가 왜 시간을 내 달라고 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잠깐이면 됩니다. 1층 커피숍에 가서 차 한 잔만 하시지요.”

    강동현은 억지로 간청하다시피 이응탁을 붙잡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조찬 강연회에 참석한 목적이 바로 이응탁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응탁의 베어링 투자 자문사는 지난 달 별다른 이유 없이 최강과 고문계약을 해지한 회사 중 하나였다. 그동안 몇 번이나 자리를 마련하여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관계 회복가능성을 타진해 보려고 했지만 상대방에서 이런 저런 핑계로 응하지 않아 솔직한 얘기를 들어 보지 못했던 것이다.

    “전무님. 바쁜 시간이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베어링과 최강과의 관계는 베어링이 5년 전 서울에 사무실을 오픈할 때부터였고 그동안 참 좋은 파트너였잖습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인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아니면 저희 최강의 서비스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건가요?”

    강동현은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응탁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원래 은행에 근무하다가 5년 전 베어링 투자 자문사가 오픈하면서 스카우트된 사람이었는데 은행에 근무할 때에도 법무팀에 근무한 적이 있어 강동현과 안면이 있었다. 그런 만큼 최강과, 아니 강동현과는 업무상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던 것이다.
    “강 변호사님, 변호사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압니다. 저와 강 변호사님의 관계나 베어링과 최강과의 관계는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지 않습니까? 그동안 변호사님이나 최강에 대해 참 감사하게 생각하고 서비스에 대해서도 만족해 왔습니다. 이번 일은 정말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전무님, 저도 대강은 짐작 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거 한 가지만 말씀해 주십시오. 고문계약 해지건은 전무님이 결정하신 것은 아니지요?”

    “네, 물론이죠.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누가 그렇게 결정한 것입니까? 다른 로펌에서 치고 들어온 것 입니까? 아니면 사장님의 지시인가요?”

    “글쎄요. 참 입장이 곤란합니다. 사실은 어느 날 갑자기 이사회에서 사장님이 그렇게 지시 하신건데, 그 이유를 속 시원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중에 따로 사장님께 물어 봤더니 그냥 본사에서 지시가 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그 이상은 여쭈어 볼 수가 없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마음씨 좋은 이웃아저씨 같은 인상의 이응탁은 정말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강동현은 이런 이응탁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 같아 오히려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요? 본사에서 한국 내의 로펌과의 고문계약까지 터치한다는 얘긴 처음 듣습니다.”

    “예. 저로서도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그럼 다른 로펌하고 고문계약을 체결했습니까?”

    “아니오. 아직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래서 우리도 업무상 애로가 많습니다. 급한 건 그전부터 거래해 오던 다비드 앤 솔로몬에 의뢰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변호사님, 죄송합니다. 오늘 아침에 또 회의가 있어서 그만 가봐야 될 것 같습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전무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어서 죄송합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오늘 감사했습니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이응탁을 보내고 다시 자리에 앉은 강동현의 가슴은 아까보다 더 답답했다. 본사의 지시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상황이 점점 더 안개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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