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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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제9회 법원행정고등고시 합격, 현재 남양주시에서 법무사로 일하며 소설가로도 활동, 법률신문사 간 "법조 50년 야사" 집필, '월요 법창'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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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끝 그리고 시작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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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그리고시작20

     

    20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에는 40킬로그램 이상의 배낭을 짊어지고 시속 6킬로미터의 속도로 산길을 강행군하는 것은 보통이었다. 비록 지난 5년간 억류되어 체력은 바닥이 난데다 맨발이긴 하지만 걷는 데 도가 텄던 인성이었다. 또한 그동안 탈출을 위해 꾸준히 몸을 만들었다. 인성은 낮에는 나침판의 바늘이 움직이는 대로, 밤에는 별의 위치와 움직임도 참고하면서 서북쪽을 향해 걸었다. 목표는 E38의 권고대로 의주 부근으로 정했다. 간혹 멀리 인가가 보일 때에는 되도록 산 능선과 계곡을 이어 가며 이동했다.

    나무가 별로 없고 개활지가 많아 자주 몸이 노출되는 것이 불안했으나 군 시설 외에 산행을 방해할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물론 인민군과 만난다면 그날로 탈출은 실패로 돌아가고 죽을 각오를 해야 했다. 그러나 군인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프로젝트 ‘TRAP’의 작전 계획서를 보면 신의주에서 평양까지는 경비 부대가 주요 시설의 외곽을 경계하나 이 지역에는 군 주둔 시설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군부대가 있든 없든 탈출 과정 내내 끊임없이 경계하고 긴장하는 것만이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자 수단이었다.

    민간인들이라고 맘을 놓아서도 안 된다. 신고 체계가 발달한 곳이어서 멀리서 관찰만 되어도 위험해진다. 평지를 통과할 때에는 반드시 밤을 이용했고 8부 능선 이상의 바위틈이 아니고는 엔간해선 불을 피우지 않았다. 지대가 낮은 곳은 풀이 식용으로 사용되어 자랄 겨를이 없기 때문인지 꿩이나 산토끼들도 거의 7~8부 능선에서 서식했다. 지금까지는 고기 말린 것을 씹으며 기본 체력만을 유지해 왔으나 앞으로는 체력 유지를 위한 필수적인 보양식이 된다. 잡는 숫자에 비례해서 달릴 수 있는 거리가 결정될 것이다. 대체로 한 마리를 통째로 구워 놓으면 2~3일 정도의 식량이 됐다.

    ‘생존코스’ 수행 중에는 절대 성냥이나 라이터를 사용하지 않았다. 마찰을 이용하여 불씨를 만드는 방법은 원시시대의 점화법이지만 생존 훈련의 기본이었다. 그 힘든 과정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교화소 시체 처리장에 버려졌을 때 그 방법으로 얼어서 죽어가던 육신이 가까스로 회생됐다. 이젠 E38이 제공한 일회용 라이터 덕분에 힘든 그 짓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늦봄부터 여름철에 걸친 이동이어서 비교적 먹을 것은 많았다. 고산지대에는 오디와 산딸기 같은 것이 종종 보였다. 그리고 독사와도 가끔 맞닥뜨렸다. 놈의 처리는 싸릿대 하나만 있으면 쉬웠다. 몸집이 큰 독사는 궁지에 몰리면 상체를 곧추세우고 덤빈다. 그때 싸릿대로 곧추세운 부위를 내리치면 대번에 머리가 꺾인다. 꺾인 곳을 두 손으로 잡고 몸통 쪽으로 힘을 주면 뿌연 알몸이 꿈틀거리며 껍질과 뼈로부터 분리된다. 지금은 혀가 잘려 미각을 모두 잃었지만 그것을 입에 넣고 씹으면 맛이 굉장히 진했다. 일주일에 한두 마리만 먹어도 체력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섬유질은 주로 더덕과 당귀, 참취 같은 것으로 보충했다.

    교화소를 떠난 지 일주일째 되는 날 청천강과 구룡강 하류를 건넜고 그 사흘 후에는 평양 희천 간 고속도로를 지났다.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꼬박꼬박 날짜를 셌지만 어느 결에 혼란이 왔다. 거의 보름쯤 걷고 나니 철길이 나왔다. 지도상 명칭은 팔원선이었다. 이 철길의 종착역은 수풍발전소였다. 철길을 따라 뻗은 비포장도로의 방향은 서북쪽이었다. 인성은 철도와 도로를 버리고 약간 오른쪽으로 비껴서 방향을 잡았다. 철길과 도로 주위에는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법이다. 그만큼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기차를 탈 수만 있다면 힘들이지 않고 압록강에 닿을 수 있겠지만 그건 바로 자살 행위였다.

    북한 주민 단 한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이 탈출은 성공할 수 없다고 다짐을 했다. 철저히, 무조건 피해야 한다. 특히 깊은 산속이 아니면 주로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 이동했다. 그런데 어디에도 장애물은 있게 마련이었다. 인적이 없으리라고 속단했던 해발 1천 미터 이상 되는 고산에도 약초 채취팀이 10명이나 20명 단위로 몰려다녔다. 그들을 피하기 위해서 활동 시간에는 은밀한 곳을 찾아 잠을 자는 수밖에 없었다.

    산행이 한 달을 훨씬 넘었을 무렵, 시가지가 길고 복잡한 구성시를 지나가려다가 철길을 건널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래서 적유령 산맥을 넘는 과정에서 우회를 했는데 그때부터 지형이 정북으로 뻗어 있어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청용산과 은창산 등 해발 900미터가 넘는 험한 산들도 마찬가지였다. 더 큰 문제는 팔영령을 넘으면서 인성은 정확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지도와 일치시킬 주변 지형지물을 찾지 못해서였다.

    장마가 시작됐다. 산세가 점차 가파르고 험난한 것을 보니 아직 적유령산맥을 지나고 있는 듯했다. 압록강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산맥 말고도 다시 강남산맥을 하나 더 넘어야 한다. 지도상으로는 부근에 금광이나 탄광이 많이 산재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비 때문에 잠자리가 제일 불편했다.

    어떤 날은 피난처를 찾지 못해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장마 이후로 꿩이나 뱀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간혹 해가 반짝할 때 몸을 말리러 나온 구렁이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너무 동작이 빨라 잡을 도리가 없었다. 만만한 게 토끼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옷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가죽에 습기가 스며들자 이음매 부분이 찢겨 나갔고 비에 젖은 가죽 옷은 무거워서 기동력이 둔해졌다. 비록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바위와 나뭇가지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벌거벗은 채 활동할 수도 없었다. 자주 두통이 왔다. 지독한 통증이었다. 교화소를 떠난 후 늘 몸을 감고 있던 긴장이 풀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물었던 상처 자국이 갑자기 반란을 일으키는 듯했다. 고열이 시작되면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혼미해졌다. 발걸음에 맞춰 쿵쿵 골이 울렸다. 그런 땐 칡뿌리와 천마를 썰어 넣어 물을 끓여 마셨고 주위에서 쇠똥풀 여남은 잎을 뜯어다가 꼭꼭 씹어 먹었다. 이런 식물은 모두 해열과 진통 효과가 있어 작전 중에 구급약으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춘식이가 죽을 담아 왔던 찌그러진 식기는 산행에서도 쓸모가 많았다.

    저녁 무렵부터 폭우가 쏟아졌다. 감당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비를 피하면서 몸을 좀 덥혀야 할 것 같았다. 바위가 겹쳐 굴이 형성된 곳을 찾아들어 가 불을 피웠다. 모든 게 젖은 탓에 토끼의 뼈를 돌로 찍어 불쏘시개로 사용했다. 잔가지에, 그리고 굵은 삭정이에 옮아 붙기 시작하자 몸을 휩쌌던 습기는 조금 걷혔다. 인성은 마른 토끼 고기와 뱀을 꺼내 불에 구웠다. 전혀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고 입속의 침이 말라붙었지만 억지로 고기를 뜯어 먹었다.

    아내가 해 주는 밥을 먹은 것이 언제인가. 아내를 생각하니 갑자기 가슴이 뭉클했다. 보고 싶었다. 그리움은 젖은 옷에 비친 불꽃처럼 은근히 파고들다가 고열과 함께 전신에 사무쳤다. 인자한 미소로 언제나 마음을 포근하고 따뜻하게 해 주던 여자.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나 불화는 전혀 없었다. 언제나 그림자처럼 조용히 곁을 지켜 준 아내였다.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을까. 기다리다 지쳤을까. 아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육사 4학년이던 여름, 모두 집으로 휴가를 떠난 뒤 인성은 부대 주변의 초등학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보이스카우트 출정식 구경을 갔다가 아내를 처음 만났다. 가족이 없었던 그는 방학이면 기숙사를 떠나지 못해 종종 그런 무료한 때를 맞곤 했다. 당시 아내는 교육대학생으로 그 학교에서 교생실습 중이었다.

    인성은 사변 전해에 고향인 사천에서 태어났는데 전쟁통에 해산 욕으로 어머니가 죽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그는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재혼도 하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인성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가족력은 성장기의 어려움만큼 사랑의 결실을 보는 데도 큰 장애가 되었다. 아내의 식구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는 데 꼬박 3년이 걸렸다. 이북에서 남하한 아내의 식구들은 대가족 자손을 배우자로 선택하도록 강요했고 인성과 같은 외톨이를 가족으로 선뜻 받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 4학년 때 시작된 사랑이 중위로 진급을 하고서야 결실을 보았다. 베트남전 참전에서 돌아온 후에도 경력 관리와 자립을 위해서 몇 년 더 전방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동안 아내는 서울에서 혼자 현을 낳아 길렀고 소령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시작되었다.

    아내에게 아들 현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남편인 인성은 필요조건 또는 충분조건이었지만, 아들은 필요충분조건이 아니었던가 싶었다. 아, 여기서 살아 나간들 아내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아들을 생각하니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늘 희망과 기쁨이었던 아들이 이젠 한없는 절망과 고통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뭣을 씹었는지 입에는 별 감각이 남아 있지 않았고 포만감도 없었다. 환각 상태에서 아내의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쇠똥풀과 약재 덕분인지 두통은 좀 가라앉았다. 그러나 열은 좀체 내리지 않았다. 열기를 받아 김을 뿜어내고 서 있는 나뭇단을 조롱이라도 하듯 불꽃은 바람에 나부끼며 타닥타닥 비명을 질러 댔다. 안개처럼 인성의 몸을 감아 휘돌던 연기는 풍향을 따라 휘몰리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비를 너무 많이 맞은 듯해서 모닥불을 향해 몸을 돌려 보았으나 이번에는 반대편이 이내 흠뻑 젖어 버렸다. 꾸벅꾸벅 졸리기 시작했다. 인성은 손바닥으로 어깨와 몸을 비비면서 젊고 청초했던 아내의 모습을 그려 보았고 전신에 휙휙 가죽 채찍을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던 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윤과 표정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채찍을 휘둘러 대던 이 군관이 현의 모습을 지워 버렸다. 심과 그 보조 군관의 잔악한 몸짓도 기억해 냈다. 네놈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잠은 악마의 혓바닥처럼 그의 의식을 핥으며 달려들었다. 잠들지 않으려고 배낭에서 꺼내 든 쇠침으로 허벅지와 엉덩이를 찔러 보았다. 감각이 별로 없었다. 인성은 자꾸만 까무러치며 죽음의 잠 속으로 빠져 들었다. 번개가 번쩍이더니 계곡 어딘가에 벼락이 떨어졌다. 뇌성은 은은한 메아리가 되어 자장가처럼 그의 의식 속을 파고들었다. 점차 빗줄기가 거세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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