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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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제9회 법원행정고등고시 합격, 현재 남양주시에서 법무사로 일하며 소설가로도 활동, 법률신문사 간 "법조 50년 야사" 집필, '월요 법창'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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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끝 그리고 시작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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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그리고시작19

     

    19

     

    사흘에 한 번꼴로 찾아오던 춘식이 발을 끊은 지 보름이 지났다. 무슨 일일까. 인성은공연히 불안했다. 관리소 측은 왼쪽 다리도 쓰지 못하고 허연 장발과 수염에 뒤덮인, 보잘것없는 폐인에게 아직도 경계를 풀지 않는 것일까.

    춘식의 아버지는 함북 청진의 노동당 고위 간부였는데 김일성 사망 후 반 김정일 파에 동조를 했다가 반당종파분자로 분류되어 온 집안이 함께 교화소로 끌려왔다고 한다. 춘식은 인민학교 2학년 때 이곳에 들어와 올해로 8년째라고 했다. 아이가 처음 인성을 찾아왔던 일에 대하여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지만 그 문제만 들먹이면 대답을 피하곤 했다.

    춘식의 모습이 사라지자 교화소 측에서는 가끔 경비병을 통해 인성의 동태를 살폈다. 그렇다고 특별한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한시도 마음을 놓지 않고 누구에게든 왼쪽 다리를 사용하지 못하는 불구자로 보이려고 애를 썼다.

    철조망 밖 폐가에는 평균적으로 네댓 명 내외의 사람이 죽음을 안고 얼쩡거렸다. 중병으로 노동력이 상실된 사람을 미리 쫓아내는 것이지만 그들에게도 시체를 매장하는 일을 시켰다. 죽을 때까지 일을 하라는 말이었다. 생지옥이라는 교화소에서도 쓸모가 없게 된 그들은 대체로 내친 지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평소 앓던 병으로 죽어갔다. 거의 먹지도 못했다. 그러나 인성은 그들을 구제할 수도 없을뿐더러 아예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나물이나 약초로는 그들을 살릴 수 없을뿐더러 만일 그런 말이 상부에 전해지기라도 하면 바로 제재가 따를 것이다. 그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그래서 인성은 그들이 숨을 거두는 즉시 경비병을 통해 감독관에게 보고를 한 뒤 즉시 땅을 파서 묻어 주는 게 고작이었다.

    뻐꾸기가 울고 간 계곡에 밤이면 어김없이 소쩍새가 울었다. 기온이 떨어진다 싶으면 철조망 위로 기러기 떼가 집단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지겹도록 퍼붓는 눈 속에서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다 보면 또 어느새 봄이 왔다.

    인성은 어느 날 약초를 캐다가 남한에서 풍선에 실려 보낸 생활 용품 한 뭉치를 주웠다. 내용물을 확인해서도 안 되고 무조건 감독관에게 신고해야 할 물품이었다. 그러나 고향 냄새를 물씬 풍기는 그것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일단 땅속에 파묻어 놓고 조금씩 사용했다. 1킬로그램짜리 설탕은 오래지 않아 바닥이 났으나 같은 포장의 소금은 조금씩 덜어놓고 죽 끓일 때나 고기를 먹을 때 함께 먹었다. 라디오는 이미 건전지가 닳아 사용할 수가 없었다. 풍선에 물품을 매달았던 나일론 줄과 몇 장의 비닐봉지는 식량 보존용으로 사용했다.

    또 한 번 계절이 순환했다. 왼쪽 다리의 인대가 거의 회복되어 이젠 달릴 수도 있게 됐다. 인성은 탈출만 생각하면 가슴이 뜨겁게 끓어올랐다. 감시는 철조망 안에서만 엄격했지만 일단 이곳을 벗어난다면 가능한 한 멀리 달아나야 한다. 낮에 채취해 온 취나물을 다듬는 도중에도 오로지 탈출 경로를 머릿속에 그렸다. 대를 씹어 하얀 액체가 나와 상큼한 향이 온 입 안에 진동해도 맛을 음미하지는 못했다. 이즈음 E38이 마지막 지원품을 보냈다.

    ―탈출하는 것이 좋겠음. 목표는 의주. 마지막임. 건투 빕니다.

    동봉한 것은 나침판과 지도, 그리고 쇠침 3개였다. 개천에서 의주까지 이동 코스를 빨간 색연필로 표시한 지도는 25만분의 1 축적으로써 학습용이었다. 납북되기 바로 전 해, 인성은 단 본부 요원 1명과 압록강 부근을 살펴보면서 평안도 지역 요원들에게 장비를 보냈다. 그중에는 E38의 몫도 포함됐는데 그때 그가 북한 내 배분에 참여했었다. 그 때문에 탈출 장소를 의주로 지명했을 것이다.

    마지막 지원품을 받은 지 보름쯤 지난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석양이 산자락에 그림자를 한 뼘씩 늘이고 있던 시간이었는데 갑자기 후문 쪽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났다. 함께 생활하던 환자들은 모두 죽고 일시적으로 텅 빈 막사에서 나물을 걷어 땅속에 저장하던 인성은 일손을 멈추고 밖으로 나갔다. 보위원 복장을 한 두 명이 수감자 몇 명을 이끌고 막 문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다. 통상 이 일을 담당하던 관리대원이 아니었다. 젊은이 넷이 들것 2개를 들었고 삽을 든 사람은 그 뒤를 따랐다. 들것에 실린 것은 시체였다. 보통 관리대원은 후문 부근에서 인성에게 사체를 인계한 뒤 들어가 버리곤 했는데 오늘은 전혀 분위기가 달랐다.

    인성은 그들을 따라 매장지로 향했다. 그곳은 바위와 돌이 적어 농사를 지을 만한 공간이었지만 서향이었다. 봉분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매장을 할 때마다 인성은 하나씩 표시를 해 두었다. 시체가 들어 있는 곳을 다시 파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얼마 전 마지막으로 묻었던 매장처 바로 옆에서 발을 멈췄다.

    “빨리 서둘러.”

    어스름이 내려앉기 시작했으므로 인솔자가 재촉을 했다. 삽을 든 사람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리 준비해 둔 구덩이를 찾지 않았다. 물론 인성의 존재도 모르는 듯했다. 시신은 죄수 복장이었으나 다른 수감자들과는 체격이나 몸 상태가 전혀 달랐다. 입소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능선 전체에 아카시아 향이 질펀했다. 이제 막 봉오리를 연 꽃의 향기가 너무 짙어 폐를 혼곤히 적셨다. 깊이 팔 시간도 없었다. 허리 깊이로 땅을 판 뒤 거적을 걷고 구덩이 안으로 시체를 밀어 넣었다. 얼굴에 비닐을 덮어쓴 2구의 시신이었다. 별로 반항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온몸을 묶은 상태에서 처형을 한 듯했다. 초조해하는 보위원들과는 달리 시체 위에다 흙을 덮는 수감자들은 전혀 표정이 없었다. 대충 흙을 고른 뒤 그들은 서둘러 철수했다. 어느새 주위가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인성이 이곳에 온 뒤로도 열몇 차례에 걸쳐 탈주 사건이 발생했다. 대부분 입소 2년 내의 사람들이었다. 관리대원의 말에 의하면 단 한 번도 성공한 일이 없다고 했다. 일제강점기 군 형무소가 들어 있던 거대한 산협에다 시설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경계에 쳐 놓은 철조망은 녹이 많이 슬었으나 엄청나게 높았고 늘 전기가 흘렀다. 그들의 장담처럼 그야말로 개 한 마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경계망이었다. 그럼에도 탈주는 계속됐다. 탈주자들이 선호하는 통로는 주로 바위가 많은 동향이었다.

    인성은 약초 채취하면서 그곳까지 가 봤었다. 담장의 높이는 다른 곳과 비슷했으나 철망이 바닥과 닿은 면은 부실해 보였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걸쳐 있는 아래쪽 철조망은 엉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경계 초소와도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탈주자들이 그곳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은 철조망 안쪽만 살핀 결과였다. 그곳을 일단 벗어나면 갑자기 60~70도 이상 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나오는데 그곳부터는 밧줄 같은 산행 도구가 없으면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요행히 그 지역을 벗어나더라도 극심한 체력 소모를 피할 수 없는 지형이었다. 대부분 하루를 견디지 못하고 기진맥진한 채 잡혀 오게 마련이었다. 일부러 그 부분의 경계를 느슨하게 해 놓았을지도 모른다. 가끔 탈주자를 잡아 공개 처형을 함으로써 수감자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듯했다.

    인성은 철조망과는 거의 2킬로미터나 떨어진 산 정상을 넘어 동북향의 맞은편 산을 넘을 예정이었다. 재작년부터 인성은 탈출에 대비하여 고기를 발라낸 뒤 껍질을 벗겨 말려 놓은 산토끼나 고라니의 가죽으로 산행에 필요한 옷도 지어 놓았다.

    교화소 안은 늘 잠들기 전에 점호를 취하고 이튿날 작업을 실시하기 전에 또 인원 점검을 한다. 그러나 춘식이 사라진 뒤부터 이곳은 사흘 만에 한 차례 경비병이 순찰을 돌 뿐이다. 이곳에 버려진 수감자들은 대체로 일주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으므로 그 상황을 점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경비병을 수행해야 하는 인성이 제자리에 없으면 바로 발각이 된다. 교화소 측은 탈주자를 추적할 때 사냥개를 이용하기 때문에 금방 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까 비닐을 쓴 채 죽어 있는 시체를 보면서 인성은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아직 완전하지 못한 다리로 험한 산행을 감당하려면 아무래도 속도가 느리다. 이에 대한 대책은 단 한 가지뿐이다. 한중 국경에 도착할 때까지 추격을 당하지 않는 것이다. 마침 그믐밤이었고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수용소 안도 이미 깊은 적막에 빠져들었다. 사위가 완벽한 어둠에 묻혔을 무렵, 인성은 도구 보관함으로 가서 삽 한 자루를 꺼내 들었다.

    자칫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경비병의 표적이 된다. 경험 상 이렇게 조용한 산자락에서는 10리 밖의 소리까지 들린다. 그래서 특수 요원들은 한밤중 산길 보행을 할 때에는 기도비닉으로 이동하는 훈련을 받는다. 야간 전투에서 매복하는 적에게 움직임이 포착되면 바로 전멸을 당하고 만다. 그러므로 속도와 정숙 모두 소홀히 할 수 없다. 즉 한쪽 발이 땅에 채 닫기도 전에 다른 쪽 발을 옮겨 흡사 물 위를 걷듯 걸으면 진행 속도도 빠르고 발소리는 최소화하게 된다. 물론 돌부리나 패인 곳을 잘 구분해야 한다.

    인성은 오후의 매장 장소로 가서 조심스럽게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아마 이곳에서는 걸핏하면 영양실조나 각종 질병으로 목숨을 잃기 때문에 시신 만지는 일을 꺼리는지도 모른다. 만일 인성이 시체 매장하는 일을 붙들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지금처럼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주검을 만진 결과 생명을 얻은 셈이다. 시체에 대한 두려움이나 거리낌 따위는 사치였다. 어떻게 하든 살아서 돌아가고 싶었다.

    시체는 그리 깊이 묻혀 있지 않았다. 인성은 아까 눈여겨봤던 대로 여전히 머리에 비닐이 씌워져 있는 남자의 시신 하나를 꺼냈다. 그 시체는 숨이 끊어졌던 당시의 모습대로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였다. 아직 완전히 굳지는 않은 듯했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그 사내만 꺼낸 뒤 조심스럽게 공간을 다시 흙으로 채웠다. 손바닥으로 어림하여 주변 높이와 같도록 땅을 골랐다. 조금이라도 표가 나면 모든 게 헛일이 되고 만다.

    좌초된 삶을 복구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어깨와, 그리고 짊어진 주검 위에 적요와 어둠의 미립자가 쉬지 않고 내리고 쌓였다. 몸은 오싹오싹 한기가 드는데도 이마와 등에는 땀이 흘러 흥건했다. 팔다리가 굳기 시작하는 것 같았으나 생각보다 가벼웠다. 베트남에서는 적을 먼저 발견하고 제압하여 목숨을 유지했지만 이곳에서는 각 조건을 최대로 활용해야 살아남는다. 바로 ‘TRAP’의 기본 정신이었다. 작전을 감행하는 특수 요원 활동의 가장 기본인 ‘생존 코스’는 곧 사업의 목적만큼이나 비중이 컸다. 정말 그 프로젝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남쪽의 걱정도 잠시였고 바로 현실로 되돌아왔다.

    시신을 숙소 한쪽 구석에 눕혀 놓고 먼저 온몸에 흐른 땀을 닦았다. 그리고 삽을 원 위치에 갖다 놓고 돌아오니 비로소 하늘이 희붐하게 열렸다. 마음이 바빠졌다. 해가 꽤 길어진 셈이었다. 진달래와 철쭉이 지고 난 계곡에 아카시아 향이 질펀한 5월 하순, 아니 이곳은 계절이 늦은 편이니 6월 초순쯤은 된 것 같았다.

    전날 눈여겨본 대로 시체의 키나 골격이 인성과 비슷했다. 다른 수감인과는 달리 비교적 건강한 체격이었다. 이곳으로 끌려온 지 채 두 달도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두 달을 견디면 이태를 살 수 있고, 이태를 넘기면 20년을 간다는 이곳의 불문율은 바로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일지 모른다. 머리에 씌웠던 비닐을 걷어 내고 보니 피부가 약간 팽창된 듯했다. 만들기 나름이었다. 관리대의 감독관이나 보위원들은 수감인들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부려 먹지 못해 혈안이지만 일단 내다버린 시신에 대하여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인성은 낮 동안 철조망 부근에서 경비병들의 눈을 의식하며 쓰레기 매장용 구덩이를 팠다. 이 일은 경비병들 담당이었는데 재작년부터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인성이 대신해 왔다. 그 일을 할 동안에는 어떤 병사는 가끔 먹을 것을 갖다 주기도 했다. 해가 진 뒤 인성은 숙소로 돌아와 탈출 준비를 시작했다.

    그동안 만들어서 땅에 묻어 둔 참나무 숯을 꺼내 불을 피운 뒤 약초 채취용 곡괭이를 달궜다. 처음 인사불성의 상태로 이 교화소에 버려졌을 때 감독관과 보위원들이 인성의 몸 상태를 살폈다고 들었다. 춘식의 말에 의하면 화상 자국 사이로 기어 다니던 흰 벌레를 본 뒤 먹은 것을 토해 낸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 자국이 처참했던 만큼 금방 다른 사람의 신체와 구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죽은 세포에 대한 인두질은 지독한 냄새를 제외하고는 별 문제가 없었다. 지금 계절적으로 남풍이 불고 있으므로 냄새는 모두 북쪽 산 능선을 타고 빠져나갈 것이다. 인성은 달궈진 곡괭이를 이용하여 시체에다 자신의 몸 상태와 비슷하게 자국을 만들어갔다. 왼쪽 발목과 생식기는 자신의 모습과 꼭 같이 지졌다. 북에도 섹스 기능을 잃은 남자는 경멸의 대상인가, 생식기를 지질 때 심이 그랬다.

    “잘 생각해 보라우. 사내가 기능을 잃고 어찌 살 텐가, 뭘 위해서 그렇게 뻗대는가?”

    피부가 타들어가면서 뿜어내는 역겨운 냄새와 연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남쪽에 위치한 교화소 쪽으로 냄새가 날아가지 않아 참 다행이었다. 계절적으로도 적기였다. 대역의 모습이 자신과 비슷할수록 더욱 안전이 확보된다. 공들여 치장하고 꾸민 만큼 그들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것이다.

    몸만들기를 끝내자 인성은 자신의 옷을 벗어 시신에게 입혔다. 갑자기 온몸이 떨려왔다. 신록이 우거지는 계절이라지만 깊은 산 계곡은 아직 추웠다. 짐승 가죽으로 만들어 두었던 새 옷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도구들을 죄다 치운 뒤 진흙으로 싸서 땅에 묻어 두었던 산토끼의 고기를 꺼내 한쪽에서 구웠다. 지난겨울 포획해서 말려 두었던 것이었다. 날이 새기 전에 되도록 멀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 쉬지 않고 걸어야 하므로 음식이 부실하면 안 된다. 시신의 몫으로 얼마를 떼어 놓고 열심히 고기를 씹었다.

    옷을 만들 때 함께 장만해 두었던 가죽 배낭에다 2~3일 정도의 식량과 도구, 쇠침 등을 챙겨 넣고 토끼와 고라니 가죽은 가져갈 수 있을 만큼 배낭에 매달았다. 침낭은 버리기로 했다. 노숙이 가능한 계절일뿐더러 너무 낡고 무거워 짐이 될 것 같았다. 어차피 겨울이 되도록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남쪽에서 날아온 행낭을 주운 이후 식량 창고 역할을 하던 비닐봉지에는 그동안 구운 뱀을 갈아서 만든 가루로 꽉 채웠고 그날 주운 뒤로 한 번도 사용해 보지 못했던 라디오도 챙겨 넣었다. 이 배낭은 나일론 줄을 풀어서 겹으로 시쳐 가며 기웠기 때문에 굉장히 실했다. 도중에 잡힐 경우를 대비해서 지도와 나침판은 소매 사이에다 감췄다.

    배낭이 완성되고, 인성은 시체를 끌어다 아궁이 앞에 무릎을 꿇린 자세로 앉힌 후 몸을 앞으로 엎었다. 쇠를 녹이던 강한 참나무 숯불이 머리를 태우기 시작했다. 얼굴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울 때까지 곁을 지켰다.

    이제 남조선 사람 피랍자 황윤석은 여기서 죽었다.

    순찰을 돌기 위해 나온 경비병은 즉각 머리 부분이 모두 불에 탄 흉측하고 참혹한 황윤석의 형상을 보위부에 보고할 것이다.

    고라니 가죽을 덧붙여 신고 다니던 구두는 바닥이 닳아 더 이상 신을 수가 없어 지난봄에 버렸다. 그 후로 헝겊 조각으로 발싸개를 하고 다녔던 겨울을 제외하고는 거의 발을 벗고 살았다. 이미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여 그동안 산행을 하는 데 그리 지장은 없었다. 이곳 사람 중에 관리대원이나 보위원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였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압록강을 건너야 한다. 스스로 다짐하며 인성은 그동안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쉴 틈도 없이 오르내렸던 산의 정상을 향해 달렸다. 절룩거림 자체가 이젠 몸짓의 일부였다. 숙소를 나선 뒤 몸이 흠뻑 젖은 채 정상에 다다른 인성은 오른쪽으로 연이어진 능선을 진로로 잡았다. 되도록 이 교화소에서 멀리 달아나야 한다. 그동안 많은 도움을 받았던 춘식의 얼굴을 한 번 더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참 미안했다. 신분 때문에 군에 입대하지도 못했을 텐데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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