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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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제9회 법원행정고등고시 합격, 현재 남양주시에서 법무사로 일하며 소설가로도 활동, 법률신문사 간 "법조 50년 야사" 집필, '월요 법창'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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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끝 그리고 시작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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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그리고시작17

     

    17

     

    되도록 남의 눈에 띄지 않아야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 주위의 모두가 감시자였고 적이었다. 인성은 낮 동안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꼭 이동이 필요할 때에는 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러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산을 올랐다. 고문 중 인두가 무릎 인대를 건드려 여러 부분이 손상된 상태였으나 천천히 움직였다.

    이동 도중 일단 눈앞에 얼른거리는 것은 놓치지 않았다. 훈련 중에는 구별이 어려워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는데 이곳에서는 감각이 동물적으로 변해 갔다. 말라빠진 칡넝쿨조차도 식량의 존재를 일러 주는 좋은 메신저였다. 쇠침으로 언 땅을 파 내려가다 생각보다 크고 굵은 칡뿌리를 찾아냈다. 돌로 처서 조각을 내어 햇볕에 말려 놓고 배가 고플 때마다 씹으며 허기를 달래는 좋은 군것질거리가 되었다.

    교화소 뒷산은 꽤 깊고 험했다. 그는 한밤중 계곡의 바위 같은 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오소리나 고라니 같은 야행성 동물도 잡았다. 그리고 여명의 새벽에는 동면을 하고 있는 뱀의 서식지를 찾아냈고 가끔 산토끼도 잡았다. 그렇게 확보한 식량은 연기에 그을린 후 낙엽에 싸서 땅에 깊이 묻어 두었다.

    관리소에서 별 간섭이 없는 것은 춘식을 잘 활용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처음 이곳에 실려 와 시체처리장에 버려졌을 때에는 감독관이 자주 감시를 했다. 춘식의 행동에서 그런 낌새가 확연히 보였다. 지시를 받고 왔을 때에는 얼굴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날 보고 대상을 말없이 유심히 바라보곤 했으므로 그에 맞춰서 답변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겨울을 넘기고도 시체처럼 누워서 겨우 숨만 쉬고 있다.

    그런 보고가 춘식을 통해 들어가자 점차 경계가 허술해지는 느낌이 왔다. 실제 확인차 나온 여러 감독관에게도 인성은 그런 모습을 보였다. 그 목숨 꽤 질기군. 혀를 끌끌 차며 돌아간 뒤부터 춘식은 그냥 습관적으로 나다니는 듯했다.

    춘식은 경비대 군인들에 대한 완충 역할도 했다. 그들은 대체로 20살 안팎의 청소년들이었다. 교화소 측으로부터 얼마나 세뇌를 당했는지 그들은 수감자들을 개돼지처럼 취급했다. 공화국의 웬수, 반동분자 새끼들. 여기 있는 놈들은 모두 그래. 감독관들은 청년들의 의식에 그런 증오감과 혐오감을 주입시켰다. 춘식은 교화소 내부를 자유롭게 나다니면서 경비대 군인들의 사동 역할을 했다. 만일 춘식이 아니었으면 그들로부터 많은 행패를 당했을 것이다.

    춘식도 다른 수용인들처럼 가족이 함께 끌려왔는데 부모는 입소 2년 만에 사망했다고 한다. 듣건대 이런 곳에서 자행되는 중노동을 견디기는 쉽지 않을 듯했다. 대개 입소 2년쯤 지나면 죽든지 폐인이 되었고 그 과정을 견딘 사람의 명은 꽤 길게 이어간다고 했다. 인성에게 풀죽을 몇 차례 갖다 주었으나 정작 자신은 지독한 영양실조로 비틀거렸다.

    수감자들은 하루 300그램의 옥수수를 배급 받아 겨우 목숨을 유지하며 날마다 배당되는 노동량을 감당했고 모두 이웃에게 관심을 둘 만큼 심적, 시간적 여유들은 전혀 없다고 했다. 춘식에 의하면 사상범들은 생산 요원에 끼지도 못하고 옥수수 알갱이 몇 개로 연명하며 하루 종일 벽돌을 찍는 데 동원된다고 했다. 옥수수 몇 알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인성은 자신의 신체를 면밀히 살펴 나갔다. 마이신 덕분에 인두와 채찍 자국은 거의 아물었다. 아무런 정보를 캐내지 못하자 심은 분을 참지 못하고 인성의 성기를 인두로 지졌다. 상처가 거의 아문 지금도 오줌 줄기가 몇 가닥으로 퍼져 나와 선 채 소변을 보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때의 고문이 거의 기능적인 면이나 외관에 치중했기 때문에 뼈를 상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심을 걷어찬 후 몽둥이로 심하게 얻어맞았지만 거의 타박상 수준이었다. 결국 고문은 고통의 강도에 치중되어 치명상을 입히지 않은 것 같았다.

    일단 피부의 화상 자국이 아물고 나자 온 산천에 진동하는 봄기운을 받아 가며 몸은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문제는 무릎의 인대였다. 왼쪽다리는 걸음을 걸을 때마다 심하게 아팠다. 날이 저문 뒤 막사 안에서 한 시간 정도 요가와 단전호흡을 했다. 운동이 끝나면 캄캄한 능선과 계곡을 헤매고 다니다가 질경이 뿌리나 명아주 잎과 줄기, 그리고 쑥을 뜯었다.

    춘식이가 풀죽을 담아 갖고 왔던 찌그러진 냄비를 이용해 칡죽을 끓여두고 허기를 채웠다. 불씨를 흙 속에 묻어 놓고 매일매일 이어 나갔다. 습기 찬 날이 아니면 가스라이터를 아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하루 한 끼니 이상은 먹지 않았다. 최소한의 열량만 섭취하면 죽지는 않을 것이다. 언제 식량자급이 불가능해질지 모른다.

    봄이 무르익자 산 중턱까지 올라가 취나물과 십 년 이상 묵은 듯 보이는 도라지와 더덕, 당귀 따위를 캤다. 모두 생존 훈련 시 익혔던 것들이었다. 약초를 접하자 문득 사람들이 그리웠다. 아내가 보고 싶었고 생사를 함께했던 동료들의 얼굴이 눈에 선했다. 반드시 살아남는다. 나는 죽지 않는다. 견디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의도적으로 다짐했다. 취와 약초는 손에 닿는 대로 따서 말린 후 땅에 묻었다. 교화소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였으나 시체처리장 뒷산은 서향이어서 특히 약초들이 많았다.

    어느 땐 이동 중인 대열에서 낙오한 청둥오리를 잡아 고기를 구워 먹었고 털은 모두 잠자리에 깔았다. 청둥오리는 꿩처럼 처음 출발할 때의 동작이 매우 느렸다. 보통 인성이 동물을 사냥할 때에는 자신과 목표물 간의 거리와 이동속도를 고려하여 쇠침을 던진다. 이동 표적에 대해 사격할 때와 비슷했다. 그런데 꿩이나 청둥오리는 이동속도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가을철엔 비축 식량이 쌓이면 가끔 춘식을 데리고 가서 고기를 먹였다. 교화소 철조망에서 멀리 떨어진 동굴 같은 곳에 찾아들어 불을 피우고 구워 먹었다. 이게 무슨 고김까. 무슨 고기가 이렇게 맛있음까. 놀란 표정이었지만 아이는 맛있게 먹었다.

    제일 아쉬운 것은 옷이었다. 고문을 당하면서 흘린 핏자국이 난 부분은 쉽게 삭았다. 빨지 않은 탓에 흙먼지와 함께 부패가 더 심했던 모양이었다. 이곳에 처음 왔던 날, 그의 옷을 벗겨서 입었던 그 사람은 죽어가면서도 피 냄새 때문에 얼마나 답답했을까. 기진 상태에서 엉덩이 피부를 벗겨 먹고 기력을 차렸던 만큼 가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듬해 봄, 인성은 그의 시신을 따로 잘 묻어 주었다.

    E38이 침낭 속에 넣어 준 바늘과 실은 참 유용하게 사용했으나 이젠 옷이 워낙 낡아 상하의 모두 기울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인성은 춘식에게 옷 공장에서 쓰고 남은 조각보를 좀 구해 오도록 부탁했다. 물자가 귀한 이곳에서도 조각보만큼은 쓰레기로 처리된다고 했다. 도무지 쓸모가 없어 대부분 땔감으로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흙을 파먹다가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고 하니 쓸모없는 조각보라도 말썽의 소지를 만들지 모른다.

    인성은 춘식이 눈치껏 집어 온 조각보를 이어서 원단을 만들었다. 입던 옷의 이음새를 모두 뜯어내 그것을 본으로 하여 맞춰 기웠다. 육사 생도 시절 배운 이래 아내와 떨어져 살 때에는 자주 바느질을 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도 손끝 기능은 없어지지 않았다. 어깨와 가랑이 부분만 유의하면 옷 만드는 것도 쉬웠다. 이음새를 모두 밖으로 내면 거치적대지 않았다.

    3년 차 되는 해부터 손상되었던 인대 부분이 점차 회복되는 느낌이 왔다. 이제 교화소의 관리실은 인성에게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작업장에서 실려 나오는 시체의 매장 작업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겨우내 쌓였던 시체를 말끔히 묻고 나면 여름부터 계절적으로 유행성 질환이 극성을 부리면서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 나왔다. 북한에는 화장 제도가 없고 관에다 시신을 넣어 매장한다. 그렇지만 관은 수감자들에게 차례가 돌아가지 않는다. 그때그때 집단 매장이 있을 뿐이었다.

    감독관들은 시체 만지는 것은 질색을 했다. 수감자들도 될 수 있는 대로 그 일만은 피하려 했다. 인성은 그 점을 노렸다. 모든 게 마음먹기에 달린 일이다. 시체가 아니라 일반 사물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교화소 사람들은 비록 신체가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런 각오로 일하는 자세를 인정하는 듯했다. 한편으론 지팡이를 짚은 채 다리 하나만으로 몸을 움직이니 육체는 더 단련되었다. 또한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 슬픈 영혼들을 위로하면서 마음의 위안도 되었다. 무엇이든 죽기로 달려들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었다.

    하루 종일 시체에 매달리고 있다가 해만 지면 산을 올랐다. 보이지는 않아도 냄새를 통해 쉬어서 못 먹게 된 냉이, 얼레지, 두릅, 죽대, 각종 취, 곤드레 같은 산나물을 뜯어 왔다. 강한 향으로 위치를 쉽게 찾을 수 있는 더덕, 당귀 외에도 잔대, 칡 같은 구근 식물들은 눈에 띄는 대로 캐내어 말렸다. 높은 곳은 아직 교화소 사람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 북한 전역의 산이 무분별한 남벌로 황폐화되었다지만 이 지역은 아직 숲이 남았다. 그런 만큼 산 짐승들이 서식하는 곳이었다. 춘식의 말로는 간혹 수감자들이 올무를 놓아 멧돼지 같은 짐승을 잡는다고 했다. 덩치가 큰 산돼지를 잡아 놓고도 감독관에게 빼앗기고 살점 하나 얻어먹지 못했을 그들의 눈빛이 자주 연상되었다.

    식량난은 날로 악화됐고 일반 인민들에게도 열흘에 한 번꼴로 식량 배급이 되고 있다는 말이 들려왔다. 굶어 부황 든 시체들이 점차 쌓였다. 춘식의 말로는 옷과 신발 공장 작업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매일 5천 장의 벽돌을 찍어 낸다고 한다. 철조망을 통해 본 그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살점이 없고 앙상하게 뼈만 남아 걸어 다니는 시체였다. 그런 사람들이 할당된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해 배급 받은 음식물 중 반을 바닥에 떨어뜨려 밟으며 증산을 다짐한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다 먹어도 시원찮은 생명과 같은 식물을 짓밟으며 하는 자아 반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런 중에서도 감독관들에게 아양을 떠는 사람은 가끔 밀가루를 배급 받아 풀죽이나 풀 범벅을 만들어 겨우 목숨은 부지하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못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벽돌의 원료인 황토를 뒤져 쫀대를 캐어 먹었고 솔잎과 풀뿌리를 끓여 먹는다고 했다. 급기야 수감자 중에서 감독관의 허락을 얻어 뒷산을 뒤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약초 부대의 출현이었다.

    많은 사람이 산야를 헤매고 다니게 되자 갈수록 인성의 몫이 줄어들었고 점차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인성은 철조망 부근에서 녹슨 못이나 쇠붙이 등을 주워 와 녹여서 약초 채취용 갈퀴를 만들었다. 거푸집은 진흙을 사용했다. 도구가 없어서 전에는 캐지 못했던 대형 칡을 캐내 자잘하게 썰어 말렸다. 그런데 무슨 제보가 들어갔는지 어느 날 감독관이 경비대 군인들을 데리고 나와서 인성의 숙소를 죄다 뒤졌다. 그날 인성은 숙소 부근에 2년간 말려 보관했던 식량을 모두 빼앗기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얻어맞았다. 그 여파로 일주일 동안 꼼짝도 못하고 누워서 지냈다. 다행히 따로 깊숙이 보관했던 침낭과 쇠침은 빼앗기지 않았고 더 다행한 것은 제재가 그것으로 그쳤다는 점이었다.

     

     

    18

     

    세 번째 겨울이 지나고 늦은 봄 무렵이었다. 3구의 시체와 함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중년 남자 한 명이 버려졌다. 그들을 들것에 싣고 온 경비대 군인들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녕감, 오늘 중으로 묻어. 알간?”

    멋모르고 다가갔다가 몇 차례 발길질을 당한 뒤로는 항상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 지난 3년여 간 혹한과 굶주림에 시달린 나머지 부쩍 늙어 버린 모양이었다. 영감이란 호칭은 올봄부터 붙었으나 거울을 보지 못해 자신의 늙은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수염이 덥수룩한 데다 머리카락이 한 뼘 길이로 자라 희끗희끗 쇠기 시작하였다. 여지없는 노인의 모습일 거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영감이든 노파든 무슨 일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두 번째 여름부터 시작한 시체 매장이 3년 차부터 어느새 자신의 공식적인 일로 굳어버린 게 어쩌면 다행인지 몰랐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감독관이나 경비대 군인은 물론이고 수감자들도 여전히 시체 만지는 일만은 꺼렸다.

    작년 가을에는 시간만 나면 구덩이를 파 놓았다. 전에는 땅이 얼어서 겨울 매장을 하지 못하고 야산에 시체를 버려두었다. 인성이 처음 이곳에 오던 해에도 매장을 하지 못한 시체가 여기저기 버려졌다가 이듬해 봄에 매장을 했다. 그래서 언제든 매장이 가능하도록 해 놨는데 그게 좋은 인상을 준 듯했다. 다리 하나만 쓰는 불구자가 적대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일은 그리 흔치 않았다.

    군인들이 돌아간 뒤 바로 준비해 뒀던 활엽과 흙으로 3구에 대한 염을 마쳤다. 밀 것은 바닥 양쪽에 팔뚝 굵기의 나무를 매달아 끌기 쉽게 만들었다. 매장지가 있는 가파른 능선을 3번이나 밀고 끌고 넘으면서 서둘러 일을 마쳤다. 건성으로 내린 지시라도 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 가해지는 린치가 그에겐 심각한 손상이 되곤 했다.

    인성은 3구를 모두 매장한 뒤 부근에 숨겨 뒀던 고기와 약초를 조금 꺼냈다. 지난번 말려 두었던 식량들을 죄다 빼앗긴 이후 새로 마련한 것은 숙사에서 멀찍한 곳에다 나누어 보관했다. 일을 심하게 한 날은 마른고기라도 씹어서 체력 보충을 해야 했다. 인성은 지팡이를 짚고 일부러 심하게 절뚝거리며 아직 잔광이 남아 있는 산길을 내려왔다.

    “먹을 것이 있으면 조금만 주세요.”

    막 숙사로 들어와 잠자리를 보고 있던 인성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너무 신기하고 이상했다. 서울 말씨였다. 얼마 만에 들어 보는 남쪽 말씬가. 기력이 쇠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던 사람이 먹을 것을 찾다니……. 사체 매장에 열중하느라 아직 살아 있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못했다. 다가간 인성에게 그는 억지로 웃어 보였다. 이가 하나도 없었다. 움직임이 거의 미미했고 숨소리도 고르지 않았다. 게다가 안면 근육이 떨려서 눈을 잘 뜨지도 못했다. 얼굴빛이 검은 데다 눈 흰자위가 잘 보이지 않고 누리끼리한 것으로 덮여 있는 것을 보면 치명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듯했다. 인성은 갖고 온 고기와 약초를 돌로 찧어서 죽을 끓였다. 아직 주위가 밝아서 연기를 피우지 않으려고 말려 둔 숯을 사용했다.

    인성은 예비용으로 보관하고 있던 숟가락을 꺼내 조금씩 죽을 떠서 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삼킬 때마다 고통스럽게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그는 죽 한 그릇을 모두 다 받아먹었다. 조금 휴식을 취한 뒤 인성은 그의 손바닥을 펴서 그 안에다 글을 썼다. 살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뼈만 앙상했다.

    ―어디서 오셨소?

    천천히 그가 알아챌 때까지 연거푸 손바닥에 썼다.

    “서울에서 왔어요. 4년 전에.”

    4년 전에?

    “항공기가 납치되어 강제로 끌려왔었지요.”

    인성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이 되었다.

    ―한국항공 A320기?

    “그렇습니다. 어떻게 아십니까? 혹시 당신도?”

    천장을 향하고 있던 시선을 돌려 인성을 바라다보았다.

    ―맞아요. 나도 그때 왔어요.

    “아, 이런…….”

    그는 잠시 숨을 골랐다.

    “나는 그 항공기의 보안 요원이었어요.”

    그렇다면 인성이 쇠침으로 납치범을 사살할 때 곁에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닌가. 그때 보안 요원 3명 중 다른 2명은 납치범들의 총격을 받고 이미 사망했었다. 인성은 잠시 혼란스러웠다. 겨우 서른서넛 정도로 보였는데.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던 젊은이였다. 그런 그가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늙고 병들었다니, 혹시 날 감시하러 온 첩자는 아닐 테지. 그의 안색을 살피며 당시의 상황을 천천히 썼다.

    “아아, 아니, 그럼 선생님이? 세상에.”

    그는 신음을 섞어 가며 울먹였다. 숨이 가쁜지 한참을 헐떡거렸다.

    “모두 다 얼이 빠져 있었지요.”

    숨을 몰아쉬며 꺼이꺼이 울기도 하고, 먹은 죽을 소화시키지 못해 토하기도 하면서 그는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다. 북에서의 생활을……. 남아 있는 생기를 모두 소진해 버릴 듯 하나하나 풀어놓기 시작했다.

    원산 덕원인민학교 교정에서 버스를 탄 승무원들은 다음 날 새벽에 평양의 만경대 초대소에 도착했다. 기장을 비롯하여 여 승무원, 기술 요원 등 모두 21명이었다. 기장과 부기장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3명씩 조를 이뤄 방이 배정됐다. 안내원들은 북한 내에서 알아주는 고급 숙소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승무원들은 모두 공포에 질렸으나 북측은 친절했고 환대하는 분위기였다.

    10시경, 1명씩 면담이 시작됐다. 현수영은 거의 마지막 차례에 불려갔다.

    “어서 오라요. 현 선생.”

    면담관은 2명이었는데 신사복 차림의 마흔 남짓한 사내들이었다. 자신들은 국가안전보위부 소속이라고 소개를 했다.

    “편안하게 앉으라요. 당은 의거 귀순 과정에서 보여 준 선생의 공로를 잘 알고 있어요.”

    면담관은 활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무슨 말인가? 현수영은 그들의 웃음조차 경계를 하며 눈치를 살폈다.

    “반동 안전원 둘이서 우리 동지에게 대항하려다 사살 당했디요. 한데 선생은 한탕 크게 했더구만요.”

    겁이 나서 대항하지 못한 것을 이들은 그렇게 치켜세웠다.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현수영은 그냥 삼켰다. 이 판국에 맞으면 어떻고 틀리면 어떠랴 싶었다.

    “당은 선생이 공화국에서 영웅답게 살도록 온갖 편의를 제공할 것입네다. 모쪼록 많은 협조를 당부합네다.”

    ―나는 지난여름에 결혼했습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아내가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고 언제 돌아가게 되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러나 현수영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한마디만 했다가는 저 웃는 얼굴이 금방 돌변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말 어디론가 끌려간다면 큰일이었다. 당분간 듣기만 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첫 면담은 그렇게 끝났다.

    숙소로 돌아오니 동료들의 표정이 어두웠다. 특히 여자 승무원들은 잔뜩 겁에 질려 서로 눈치만 살폈다. 기장과 부기장, 그리고 여 승무원 대표는 어디론가 불려 간 뒤 이틀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 초대소 측에서는 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평양 관광을 시켜 주었다. 첫날은 김일성 생가를 보여 준 뒤 혁명사적관을 거쳐 만경대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대동문을 통해 민속·역사·미술박물관을 차례로 관람했다.

    다음 날은 김일성 동상과 혁명박물관을 관람하고 모란봉공원으로 가서 을밀대에서 대동강을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그리고 능라도를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교정을 구경한 뒤 저녁에는 옥류관에서 식사했다. 외국인을 위한 가무단인지 악기를 든 정장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저녁을 먹는 내도록 공연을 했다. 그들의 마지막 레퍼토리는 ‘눈물 젖은 두만강’이었다.

    그날 밤이었다. 첫날 면담을 했던 사람들이 현수영을 찾았다.

    “구경 잘 했습네까? 어드레요. 평양두 살 만하디요?”

    그들은 담배를 권하며 전날보다 더욱 살갑게 굴었다.

    “선생은 참 말이 없구만요. 우린 선생같이 듬직한 사람을 좋아합네다. 말 많은 사람은 후라이꾼이 많디요.”

    이런 처지에서 불려 다니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현수영은 점점 불안했다.

    “집에 가고프디요? 이제 며칠 있으면 승객들은 남조선으로 돌아갑네다. 그러나 승무원들은 각자 하기 따라 달라집네다. 선생은 어드러케 할래요? 우리에게 협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갈래요? 아니면 여기 남아서 대접 받고 살래요?”

    “도, 돌아가겠습니다.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현수영은 대뜸 큰 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음. 협조를 하겠다 그 말이디요?”

    그저께부터 주로 나이 많은 사람이 질문을 했고 젊은 사람은 듣기만 했다.

    “기당과 대표자 분들이 하기 나름이디만 선생도 그분들과 잘 협도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둬 주며는 집에 보내 주디요.”

    “무슨……, 일을 하면 되나요?”

    “우선 가서 푹 쉬라요. 내일 봅세다.”

    다음 날, 그들은 현수영을 조선중앙방송국으로 데려 갔다. 방송대기실에서 사흘 동안 볼 수 없었던 기장 일행을 만났다. 말쑥하게 머리를 하고 제복도 다려 입었으나 모두 초췌한 모습이었다. 불안한 기색이 여실히 보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탑승객들이 남조선으로 무사히 귀환을 하고 못 하고는 선생들의 태도에 달렸습니다. 지금 녹화하는 장면은 오늘 저녁 8시에 방영이 됩니다. 그렇지만 선생들의 협조가 시원찮으면 방영은 연기가 될 것이고 승객 소환도 미뤄질 것입니다.”

    과정을 설명하는 여자는 아나운서인지 말을 썩 잘했다. 방송을 한다고? 기장 일행은 이 문제 때문에 격리되었던 듯 아무도 이의를 하지 않았다. 안내하던 여자는 각자에게 시나리오가 인쇄된 팸플릿을 하나씩 나눠 주었다. 받자마자 내용을 훑어본 현수영은 깜짝 놀랐다. 의거 입북, 지도자 동지의 은혜, 공화국의 배려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그 글은 의거 귀순 성명 방송에 관한 대본이었다.

    “나, 나는 아닌데요. 아니라고요.”

    현수영은 울상이 되어 소리쳤다. 말도 되지 않았다. 자신이 다른 안전 요원 2명을 사살했다니……. 면담관이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현 선생. 내가 말했디 않소. 내용은 둥요하지 않아요. 선생의 태도에 따라서 승객들과 함께 남으로 갈 수 있다는 덤을 명심하기요.”

    흡사 형이 동생을 타이르듯 다정한 음성이었다.

    “아무리 그렇지만 내가 선배님들을 죽였다니요? 나는 못 합니다.”

    “내 긴말하디 않갔소. 남조선에서 기다리는 현 선생의 부인을 생각해 보기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협도하기로 약속을 했습네다.”

    그렇게 못을 박은 뒤 현수영을 제자리로 데리고 갔다. 정말 괜찮을까? 그렇게 허위 자인을 해도 괜찮을까. 그런 거짓말은 남에서도 단박 알 수 있겠지. 협박과 회유로 어쩔 수 없이 그랬다는 것을 인정하겠지. 남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는 스스로 마음을 달랬다. 애태우고 있을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며 우선 그들의 요구에 응하기로 했다. 오래지 않아 몇 번의 엔지(NG)가 나면서 녹화가 진행됐다.

    ―평소 남한 정부의 처사와 항공사 측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품은 기장과 승무원 몇 명은 운항 중 월북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행동 요원 3명을 포섭하였다. 다른 승무원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는데 안전 요원 2명이 방해를 하는 바람에 현수영이 그들을 사살하였고 그 과정에서 행동 요원 1명이 순직을 했다. 우리들은 모두 평소 북을 동경하며 지도자 동지의 은혜를 사모하고 있었으므로 이 기회에 공화국에서 터를 잡고 살면서 공화국과 지도자 동지에게 충성을 다하기로 맹세하였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녹화 도중, 승무원들이 평양을 관광하는 모습을 삽화로 넣어 정말 그럴듯한 30분짜리 귀순 성명 방송 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프로그램이 실제 방송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날 이후 승무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현수영은 일행과 떨어져 1년여 끊임없는 학습과 세뇌를 받은 끝에 북측에서 정해 주는 여자와 강제 혼인을 했다. 신혼집은 신부의 고향인 평안북도 곽산에 마련되었고 비록 채널이 고정되긴 했지만 북에서는 드문 컬러텔레비전과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이 비치된 아담한 집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은 부근 초대소의 사격 교관으로 배치됐다. 실제 상황에서는 제대로 활약을 못했지만 그는 군복무 시와 안전 요원 교육 시 특등 사수였다.

    아내가 된 여자는 그보다 3살 아래로 약간 대가 세긴 했지만 신혼 가정에 대한 자부심과 애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녀는 당의 지도와 간섭을 완화시키고 남편의 북한 적응을 위해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성이 극진할수록 남에 두고 온 아내를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현수영은 이듬해 가을 무렵, 무작정 집을 나와 기차를 타고 의주까지 갔다가 붙잡혔다.

    쌍놈의 새끼.

    어떤 이는 자기들 아끼던 누이를 버려놨다면서 때렸다.

    반동 놈의 자식.

    또 어떤 이는 당이 베푼 호의를 배반했다면서 발길질을 했다. 그렇게 그는 사흘 동안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두들겨 맞았다. 결국 복역 10년 선고를 받고 처음 배치를 받은 곳은 개천 제14호 관리소 내의 탄광이었다. 북의 여자가 한 번 찾아왔었다. 얼굴이 부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절망하고 있던 현수영은 반가운 나머지 그녀에게 구원을 청했다. 그러나 말없이 돌아가 버린 그녀는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관리소 안에는 각종 가축을 사육하고 주로 옥수수를 경작하는 농장도 있었지만 수감자 대부분은 탄광의 석탄 채굴 작업장에 끌려갔다. 막장에 배치된 현수영은 새벽 6시부터 밤 8시까지 꼬박 14시간 동안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계속 석탄을 파내야 했다. 동료 수인들은 먹는 것이 부실해서 뼈만 앙상했고 목욕 시설도 제대로 없어 콧구멍은 물론 손톱이나 머릿밑, 갈라진 손바닥과 손끝은 거칠었고 때가 끼어 온통 새카맸다.

    그들에게 배급되는 식사라곤 하루 종일 옥수수 낟알 30개와 배춧잎 몇 조각이 둥둥 떠 있는 소금국이 전부였다. 어떤 사람은 갱도에서 쥐를 잡아 구워 먹다가 발각되어 맞아 죽었고 관리인 숙소에서 키우는 개의 배설물에 섞여 있는 콩을 집어 먹다가 옆구리를 걷어차여 죽기도 했다. 그런 험악한 사고는 거의 일을 끝내고 숙사로 돌아오는 시간인 오후 8시부터 단 몇 분 사이에 벌어졌다. 모두 길가에 자라는 풀이나 나물을 뜯어 먹느라고 정신을 못 차렸다.

    숙사에 돌아온 후로도 수인들은 생활 총화 시간을 갖고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을 해야 했다. 이 시간에는 그날 생산량의 점검과 질책을 통해 다음 날의 증산을 촉구했다. 끊임없이 정신개조 교육을 받으면서 보통 12시가 넘은 뒤 잠을 잤다

    “한번은 막장 인부 몇 명이 탈출을 모의하는 데 저도 참여했습니다. 이미 탈출에 실패하여 죽음과 같은 나락에 떨어진 일이 있었지만 죽더라도 남으로 가다가 죽고 싶었지요. 그런데 구체적인 탈출 일정이 잡힌 어느 날의 생활 총화 시간에 나는 엉뚱하게도 그들을 공개 고발하고 말았지요.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지금도 나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공개 처형되었고 나는 이곳 교화소로 옮겨 왔지요.”

    그는 어둠 속에서 마치 무슨 증언을 하듯 가쁜 숨을 몰아쉬어 가며 말을 계속했다.

    “이곳은 그래도 음식 배급 상태가 관리소보다는 나은 편이더군요. 작업량도 훨씬 적어서 개인적으로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요. 그렇지만 나는 이미 진폐증으로 폐가 다 썩었습니다. 여기저기 다른 작업장으로 쫓겨 다니다가 결국 이곳에 버려졌지요. 지금도 내가 고발하여 처형 당한 사람들만 생각하면…….”

    현주영은 가슴속에 담았던 말을 밤새 모두 토해 낸 뒤 다음 날 해 뜰 무렵 숨을 거뒀다. 인성은 그를 양지바른 곳에다 묻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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