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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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제9회 법원행정고등고시 합격, 현재 남양주시에서 법무사로 일하며 소설가로도 활동, 법률신문사 간 "법조 50년 야사" 집필, '월요 법창'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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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끝 그리고 시작(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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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그리고시작16

     

    16

     

    전신에 얼음이 박힌 듯 춥고 아팠다. 아직 철이 이른데…….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마비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위쪽이 허하지 않은 것을 보면 덮개가 있는 장소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실내일 텐데 왜 이렇게 추울까. 한기와 함께 계속되는 통증으로 인해 전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어느 한 부위가 아니었다. 쑤시고 살을 에는 아픔이었다.

    인성은 간신히 눈을 떴다. 약간 침침한 건물 안이었다. 듬성듬성 기둥이 서 있고 부분적으로 휑하게 뚫린 벽 사이로 드러난 검은 숲과 바닥에 하얗게 깔려 있는 눈빛이 시력을 자극했다. 어느 산자락이었다.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팔을 쭉 뻗어 보았더니 의외로 가벼웠다. 맨살이었다. 고개를 숙여 몸을 살펴보니 벌거벗은 채였다.

    어느 정도 실내에 익숙해지자 그는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꽤 넓은 공간이었다. 바닥은 나무로 된 마루인데 손이 닿는 곳마다 가루가 되어 퍼석거렸다. 지붕은 여러 군데 숭숭 구멍이 뚫려 나뭇가지 사이로 별빛이 기웃댔다. 이빨이 따닥따닥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고 온몸이 떨려왔다. 인성은 이를 악문 채 몸을 굴려 안쪽 좀 더 침침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곳은 바람벽과 천장이 좀 더 조밀한 듯 약간 훈기가 느껴졌다.

    바닥에 와 닿는 몸의 부위마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이를 악문 채 달팽이 걸음으로 몸을 굴렀다. 이윽고 손끝에 뭔가가 닿았다. 기다란 물체가 서로 엉긴 듯하여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역한 냄새가 났다. 사람이었다. 하나, 둘, 셋, 모두 3명이었다. 흔들어 보았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중 둘은 돌을 만지는 듯 차고 딱딱했으나 다른 하나는 아직 미지근했다. 인성은 온기가 남아 있는 사람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 보았다. 맥박은 뛰지 않았다. 모두 죽었구나. 누운 채로 정신을 집중하여 기를 모았다. 그리곤 그의 옷을 천천히 벗겨 냈다. 하나, 둘, 셋. 세 벌이었다. 인성은 벗겨 낸 옷을 하나씩 껴입었다. 그런데 손에 닿는 감각으로 보건대 맨 바깥쪽의 것은 인성의 옷인 듯했다. 이 치가 옷 도둑이었군. 아무리 인사불성으로 버려졌다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을 발가벗기다니…….

    그런데 옷을 입고 나니 움직일 때마다 상처부위가 쓸려 더욱 쿡쿡 쑤셨다. 한동안 바닥에 엎드려 정신을 가다듬었다. 갑자기 극심한 시장기가 몰려왔다. 도대체 얼마나 굶었을까. 혀를 자른 뒤 병상에서 링거만 맞았고 심문을 받을 때에는 의도적으로 곡기를 끊었다. 놈들은 고문을 하면서도 억지로 음식물을 입에다 퍼 넣었고 인성은 한사코 그것을 뱉어냈다. 그런데 이게 웬 허기란 말인가.

    구르고 기면서 계속 방 안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먹을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뚫린 벽 사이에 상체를 걸쳐 놓고 바깥에 쌓인 눈을 걷어 먹었다. 혀를 잃은 입안은 아무 맛도 분별하지 못했으나 목구멍은 얼얼하고 시원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배를 채운 뒤 돌아와 누웠지만 허기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단 위장이 수분을 흡수하고 나자 속에 도사리고 있던 수많은 아귀가 목구멍으로 넘어오는 듯했다. 눈에서 반사된 희붐한 빛이 깜깜한 곳을 싸안고 실루엣이 되었다. 의식은 잿빛 벽으로 가로막혀 답답하기만 했다. 먹을 생각에 사로잡히다 보니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다. 도저히 공복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인성은 다시 시체 쪽으로 기어갔다. 굳어 뻣뻣해진 시체를 감싸고 있는 겉껍데기를 더듬어 그들의 호주머니를 뒤져 보았다. 숟가락이 하나씩 나왔다. 그것을 품속에 찔러 넣었다.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여기가 어딜까. 인성은 어둠에 묻혀 있는 물체를 찾아내기라도 할 듯 주위를 휘둘러보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병상에서 뱉어 버린 음식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숟가락을 꺼내 바닥에 문질러 보았다. 잠시 따뜻한 기운이 손바닥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참, 불을 피워 보자. 그는 눈밭을 기어 다니며 삭정이와 눈 밑에 깔려있는 솔가지와 활엽들을 긁어모았다.

    키 높이만큼 땔감이 쌓이자 여린 솔잎을 손바닥으로 비벼서 부드럽게 만든 뒤 밑에 깔았다. 손가락 굵기의 나뭇가지를 하나 잘라 와 끝을 갈아 두루뭉술하게 만든 뒤 손바닥 사이에 꼈다. 비록 고문으로 인해 신체가 뒤틀려 버렸지만 이미 밥 먹는 것만큼 손에 익은 동작이었다. 그는 완급을 조절하며 나뭇가지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마에 땀이 맺힐 때쯤 연기가 났고 얼마 후 후후 불어넣은 입김에 불씨가 튀더니 솔잎에 불이 옮겨 붙었다. 그는 조심스레 솔가리 한 줌을 그 위에 얹어 불씨를 키운 뒤 삭정이를 가로 세로로 걸쳤다. 얼마나 집중했던지 온몸에 땀이 배어 흥건했다.

    점차 세력을 넓힌 불은 저주처럼 뒤덮인 어둠을 걷어내며 금세 활활 타올랐다. 빛은 위안이었고 환각이었다. 죽음처럼 가망 없던 그의 의식에 가녀린 기대를 살그머니 풀어놓더니 이내 그 불꽃은 걸신의 혓바닥처럼 나부대며 인성의 혼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입속이 바싹 말랐다. 그는 다시 시체 곁으로 다가갔다.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한 번 더 몸을 더듬어 보았다. 역시 먹을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갑자기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기분이었다. 어딜까, 여기가.

    허기가 훑고 간 자리에 다시 절망이 똬리를 틀었고 견딜 수 없는 갈급함이 틈새를 비집고 나와 회오리처럼 전신을 휩쌌다. 마디마디를 끊어 내고 있는 육신의 통증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차라리 숨이 멎어 버렸으면…….

    인성은 시신에서 노획했던 숟가락을 꺼내 돌에다 갈기 시작했다. 주둥이 끝을 빙 둘러 칼처럼 날카롭게 만들었다. 아까 윗목에 밀어 두었던 옷을 찢어서 숟가락총에 겹겹으로 감았다. 날카롭게 갈린 주둥이 끝에 잠시 불빛이 반사됐다. 인성은 자루를 잡고 주둥이를 불 속에 집어넣었다. 오래지 않아 끝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의 옷을 입고 있던 시신을 불 곁으로 끌고 왔다. 숟가락의 열기를 조금 식힌 뒤 날카로운 부분을 엉덩이에 갖다 댔다. 살점이 거의 없이 뼈만 앙상한 그곳에서 껍질이 한 점 벗겨졌다. 푸르륵 하며 끓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것을 재빨리 다른 숟가락으로 옮겨 두어 번 불어 식힌 후 입에 넣었다. 씹을 겨를도 없이 그냥 삼켜 버렸다. 몇 번이나 반복을 했는지 모른다. 냄새도 맛도 느끼지 못한 채 그냥 허겁지겁 영겁의 허기를 채워 갔다. 쌓아 두었던 나무 한 짐을 거의 태운 뒤에야 인성은 숟가락을 놓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왜 죽이지 않았을까. 전신에 흉악한 화상 자국을 만들었고 왼쪽 무릎의 인대와 음경까지 지져 놓았으면서 살려 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고문으로도 입을 열지 않음은 실제 아는 게 없다고 인정한 것일까. 황인성과 황윤식의 관련성을 찾지 못한 게지. 어쩌면 ‘TRAP’은 더 이상 북에 위협이 될 수 없다고 판단을 했는지도 모른다. 분명 아직 가치가 있어서 이렇게 살려 두지는 않았으리라. 가책 때문에 더 이상 해코지를 하지 않았을까. 무고한 사람을 죽게 했고 또 장애자로 만들었으니 양심에 찔렸던 게지. 양심이라니…, 그런 인간들에게도 양심이란 게 있을까. 죽음의 코스라는 탄광으로 보내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하나.

    아마 숨이 멎었다면 바로 땅에 묻었을 것이다. 그렇게 버려진 이후 윤과 심은 물론 어떤 심문관이나 고문 담당 군관도 더 이상 인성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날이 최대 위기였던 모양이다. 인성은 시체를 다시는 건드리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천천히 죽음을 음미해 보라고 그렇게 시체 더미에 던져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놀라운 배려였다. 그래 한 번 견뎌 보자. 아직 저들이 단 한 톨도, 한 조각도 건드리지 못한 게 있다. 바로 한계를 극복해 내는 의지력과 체력에 내재한 복원력이었다. 비록 몸은 움직이기 힘들었지만 이미 체질화된 요가와 마인드컨트롤의 원리가 신체의 방어 기능을 작동시켜 나갔다.

    그 무렵 한 사내아이가 그에게 접근해 왔다. 아이는 무척 수줍어했다.

    “관리실에서 알문 큰일 남다.”

    큰일 날 일이 뭣인지 구체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연방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눈이 크고 몸에 살점이 별로 없는 그 아이는 자기 이름이 춘식이라고 했다. 감독관들이 보내서 왔는데 죽었는지 확인만 하고 절대 가까이 가지 말라고 했단다. 한나절이 지나서 아이는 죽 한 그릇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사람들이 이쪽에만 보문서리 쑥닥거림다.”

    아이는 제 몫을 가져왔다면서 어서 먹으라고 재촉을 했다. 난생처음 보는 죽이었다. 근기가 거의 없었다. 아하, 이게 바로 풀죽이로구나. 춘식은 말린 산나물이나 풀잎 등을 옥수수 가루에 버무려 끓인 거라고 했다. 애처롭게 짓고 있는 미소와 그 친절이 고마워서 인성은 그것을 금방 먹어 치웠다. 아이는 그가 죽 그릇을 바닥에 놓을 때까지 아예 밖에 서서 망을 봤다. 방 안의 시체를 꺼리면서도 입은 연방 나불댔다.

    여기는 개천시 인근에 있는 1호 교화소의 시체 처리장이고, 인성이 실려 온 날부터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빠른 말투로 일러 주었다. 교화소? 그렇다면 인민보안성에서 통제하는 그 악명 높은 수용소가 아닌가. 맞아, 개천에는 교화소 외에 남쪽으로 인간재생창이라는 관리소가 또 하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교화소에 수용될 가치조차도 없어서 매장을 기다리는 시체로 분류된 모양이군. 인성은 바깥에 얼어붙은 채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을 바라다보았다. 그러니까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실내에 눕혀 두는 것 같았다. 아이가 시체처리장이라고 했으나 저토록 시신을 팽개쳐 놓은 것을 보니 노상 묘지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어 터진 시체는 겨우내 저렇게 방치될 모양이었다.

    개천.

    개마고원까지 이어지는 그 유명한 묘향산맥의 발원지였다. 그리고 프로젝트 ‘TRAP’의 목표물 중에 하나인 영변과 가까운 곳이었다. 인성은 이 부근의 산과 지형들을 재빨리 머릿속에 그려 보다가 나뭇가지를 들고 바닥에다 글을 읽을 줄 아느냐고 썼다. 춘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죽을 가져왔니? 혼나지 않겠어?

    잘리고 남은 혀에서 말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어어 하는 소리만 났다.

    “이래도 저래도 죽을 판인데요 뭐. 살 만큼 살았슴다.”

    이제 겨우 18살이라는, 아니 외관상으로는 열서넛 정도로 보이는 아이의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가 아니었다.

    “다섯 번이나 왔댔는데 꼼짝도 않고……, 겁나서 죽는 줄 알았슴다.”

    관리소의 지시로 계속 인성을 감시했노라면서 춘식은 주위에 대한 설명을 조금씩 곁들였다. 요령부득으로 늘어놓는 춘식의 말을 정리해 보면 이 교화소에 수감된 사람이 족히 오륙천 명은 되며 주위 4미터 담장은 모두 전기가 통하는 철조망이고 각 모퉁이마다 경비대원들이 지키고 있다고 한다. 또한 교화소 안에는 신발과 옷을 만드는 공장이 있고 수감자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일을 하는데, 도중에 몸을 다치거나 병에 걸려 회복이 안 되면 이곳에 내버린다는 내용이었다.

    아마 회복이 불가능하여 죽음 직전에 있는 사람을 쓰레기 버리듯 던져 버리는 모양이었다. 인성 역시 죽음이 임박한 산송장이었다. 인두로 짓눌린 그의 몸을 훑어본 사람이라면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다고 느꼈을 것이다. 놈들은 제 몸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살상 행위를 더 계속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잠시 유예된 죽음이라면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어떤 난관이 닥쳐와도 정면으로 맞서며 살아온 삶이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현실에 충실하고 싶었다. 움직일 때마다 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 아팠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춘식이 가져온 풀죽을 먹은 뒤부터 시체가 있는 쪽은 쳐다보기도 싫었다. 이젠 정말 굶어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허기가 시작되면 하얗게 내려 덮인 눈을 퍼먹었고 몇 잎씩 남은 솔잎을 따서 씹어 먹었다.

    춘식은 몰래 가끔 풀죽과 함께 간부들이 뜯어먹고 버린 옥수수 속대도 모아 왔다. 인성은 그것을 꼭지까지 남기지 않고 꼭꼭 씹어 먹었다. 먹을 것은 또 있었다. 바로 철조망 안팎을 들락거리는 쥐였다. 경비 초소를 중심으로 집단 서식을 하는 모양으로 먹이가 궁할 때에는 얼어붙은 시체에도 달라붙곤 했다. 처음에는 돌멩이를 이용했다. 팔에 힘이 없어 자주 잡지는 못했지만 점차 팔매질에 익숙해졌다. 첫날은 멋모르고 불을 피워 위기를 모면했고 무사히 넘어갔었다. 하긴 그 상황보다 더 악화될 리는 없을 테지만 서슬 퍼런 경비병들의 존재를 모르고 감히 그런 짓을 한 것임을 뒤늦게 알았다.

    겁 없는 짓은 그것 한 번만으로 족했다. 돌 끝을 날카롭게 갈아 잡은 쥐의 껍질을 벗기고 내장을 도려낸 뒤 햇볕에 말려 놓으면 고단백 식품이 되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뭐든 먹어야 했다. 다행히 납북되기 전에 맞은 종합 예방접종의 덕을 단단히 보는 듯했다. 파상풍, 디프테리아, 장티푸스, 콜레라 등 야전에서 흔히 감염될 수 있는 전염병의 면역을 위해서 몇 년 단위로 맞았던 주사였다. 그러나 겨울임에도 깊이 곪고 썩어 들어가는 채찍 자국과 화상 자국은 속수무책이었다.

    인성이 그곳에 버려진 지 한 달쯤 지났을까. 전혀 생각지도 않던 구원의 손길이 미쳤다. 혹한의 어느 밤이었다. 눈 속에 묻힌 활엽을 걷어다가 깔고 덮었으나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교화소의 취침 사이렌이 울린 지도 꽤 오래된 시간이었는데 숙소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혹시 해치러 오는 것은 아닐까 싶어 잔뜩 경계를 하고 있는데 발소리가 멈추더니 얼마 후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이 났다.

    이젠 육신이 자유로우니 죽을 때 죽더라도 절대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잔뜩 경계를 하고 있는데 퍽하고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인성은 숨을 죽이고 그의 다음 동작을 기다렸지만 발소리는 다시 같은 속도로 점차 멀어져 갔다. 인성은 소리 난 쪽을 향해 몸을 움직이며 손을 더듬었다. 오래잖아 뭔가가 잡혔다. 이미 경계심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한 아름이나 되는 물건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무엇일까 이게. 던져 놓고 간 그 사람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보다 내용물에 촉각을 더 집중했다. 물체를 싼 것은 큰 보자기였다. 매듭을 풀고 내용물을 꺼냈다. 손바닥에 폭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아, 군용 침낭이었다. 더듬어 가며 지퍼를 열었더니 그 안에는 과자 봉지 같은 것이 5개, 쇠붙이가 2개 들어 있었다. 인성은 그중 봉지 하나를 뜯었다. 건빵이었다. 한 알 한 알 꼭꼭 씹어 한 봉지를 먹었다. 이미 얼음처럼 굳어 버린 눈을 걷어 입가심을 한 뒤 침낭 안으로 들어갔다. 전신을 엄습했던 한기가 조금씩 풀리면서 금방 잠이 몰려왔다.

    희붐한 새벽에 기대감으로 잠이 깼다. 침낭 안을 다시 살펴보았다. 쇠붙이는 쇠침이었고 흰 봉투 안에 든 것은 캡슐로 된 마이신 같은 약품이었다. 인성은 침낭 안을 뒤적이다 암호로 된 편지 한 장을 찾아냈다.

    ―침낭은 숨겨 놓고 사용할 것. 알약은 매일 2알씩 복용. E38.

    E38. 연락책인 요원이었다. 인성은 즉각 그 쪽지를 입에 넣고 씹어서 삼켰다. 북에서 활동하는 우리 요원들은 단순한 체제 불만자들이 아니라 최고의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었다.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된 후 방향을 잃고 고민하던 사람들 중에서 선별했었다. 인성은 주로 해외 거주자들을 통해 그곳을 거쳐 간 북한의 외교관들이나 유학생들을 확보했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1년에 몇 차례 의사소통을 했다. E38은 그중 한 명이었다.

    모두 생존에 필수적인 물품이었다. 그중에서 침낭은 혹한을 견디기 위해 가장 절실했던 장비였다. 낙엽을 겹겹으로 깔았지만 도저히 그대로 겨울을 날 자신이 없어서 자꾸 땅만 깊이 파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집터 부근에 구덩이를 파고 침낭을 그 안에 넣은 뒤 낙엽과 눈으로 위장했다. 이젠 밤마다 이빨을 부딪쳐 가며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된다.

    쇠침은 피랍 항공기 내에서도 사용했던 것이다. 대원들에게 사용법을 훈련시켰고 북의 요원들에게도 공급해 주었다. 간단하면서도 실용적인 이 도구는 북 요원들의 호감을 꽤 얻었다.

    건빵은 오랜 굶주림으로 무기력해진 내장에 활력을 주었고 바늘과 실, 일회용 가스라이터는 두고두고 큰 도움이 되었다. 또 하나, 지금 인성에게 가장 필요한 마이신은 모두 60알로 한 달 동안 복용할 양이었다. 평소 인성은 약을 잘 먹지 않았다. 감기가 들어도 목욕과 휴식으로 치유를 했고 아직 병원에도 한번 가 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 야전 생활에서 흔히 발생하는 부상과 질병에 대비하여 맞았던 여러 면역 주사 외 불요불급한 주사는 거의 피했다. 그래선지 약효가 상당히 빨랐다. 약이 떨어져 갈 때쯤 안으로 썩어 들어가던 상처에 거의 딱지가 앉았다. 약품이 귀한 이곳에서 이런 걸 어떻게 구했을까.

    북의 요원들 서로는 개인적으로 만나지 못한다. 한국의 단 본부에서 보내 주는 무선 정보로 간간이 의사소통을 할 뿐이었다. 이를테면 점 조직이었다. 한 사람의 변절이나 노출이 전체의 위기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E38이 인성의 위치와 동향을 알아낸 것은 연락책이라는 역할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호품의 내용을 봐서도 그는 단장인 인성의 동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죽음을 무릅쓰고 기밀을 지켜 낸 보답으로 이런 위험을 감수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이런 물품을 보내 준 것이 인성에겐 절대적인 도움이 되지만 굉장한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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