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윤상일
  • 변호사
  • 서울종합법무법인
연락처 : 02-581-0566
이메일 : siyoon@chol.com
홈페이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대로 302 (교대역인앤인오피스빌딩 제2층)
소개 :

이 포스트는 0명이 in+했습니다.

    목록이 없습니다.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제국 (17) 정 기자 2

    0

    보이지않는제국17

     

    “강 변호사님, 꼭 좀 부탁드립니다. 우리 로펌을 홍보하는데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배금호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들어온 후 곧바로 강동현의 방으로 들어와 오늘 퇴근 후 시간을 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강동현은 요즈음 최강로펌에 관한 여러 가지 소문이 나고 있어 가급적이면 기자들을 피하고 싶은 심정이라 배금호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 변호사님, 요즈음 사무실 때문에 바쁘신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 기자는 여러 언론기관에 친구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어 제법 발이 넓습니다. 정 기자를 통해 기자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알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강동현은 배금호의 간청에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강동현의 침묵에 배금호는 몸이 달았다. 정송이에 대한 자기의 위신도 위신이지만 이번 일로 점수가 깎이면 한동안 그녀로부터 특별한 보상은 꿈도 못 꾸게 될 터였다.

    “강 변호사님, 사실은 정 기자는 제 여자친구입니다. 그러니 제 얼굴을 봐서라도 꼭 시간을 좀 내 주십시오.”

    배금호는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여자친구? 배 변호사하고 사귀는 사이다?”

    “예.”

    배금호는 쑥스럽다는 듯이 괜히 오른손으로 안경을 만졌다.

    “그래? 그럼 결혼할 사이다, 그런 말인가요?”

    “그럴 생각이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습니다.”

    “믿을 만해요?”

    “네?”

    배금호는 강동현의 말뜻을 정확히 알지 못해 순간 당황스러웠다.

    “만약 인터뷰를 하게 되면 아무래도 우리 사무실에 관한 여러 가지 상황이나 소문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 경우 사무실 정보가 밖으로 새나갈 수도 있잖습니까? 그 땐 배 변호사가 책임질 수 있겠어요?”

    배금호는 책임이라는 말에 움찔했다. 정말 그런 일이 생겨 사무실에 피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알았어요, 이따가 데려오세요.”

    “아. 예, 감사합니다. 강 변호사님”

    배금호는 속으로 야호소리를 지르며 강동현의 방을 나왔다. 심 선배의 말처럼 이젠 틈만 보이면 적극적으로 밀어붙여야 할 것 같다. 적어도 이번 건은 이번 주말 최소한 1박2일정도의 여행으로 보상받아야 할 것 같다. 어디로 갈까? 멀리 갈 거 있나. 요즈음 남이섬이 환상적이라던데 남이섬으로나 갈까? 남이섬 정도면 송이도 거절 못하겠지. 정말 이번 주말은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다. 배금호의 바쁘게 움직이는 머리만큼이나 그의 발도 빨라지고 있었다. 이번 주말 호텔예약을 하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샌드위치로 간단하게 저녁을 때우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배금호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강동현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8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아, 배 변호사 어서 와요. 그래 식사는 했어요?”

    “예, 변호사님은 어떻게?”

    “아, 나도 방금 먹었어요. 그래 정 기자는 왔어요?”

    “예, 지금 제 방에 있습니다. 변호사님이 괜찮으시다면 지금 데리고 와도 될까요?”

    “그래요. 지금이 좋겠어요.”

    조금 후 배금호는 날렵한 차림의 아가씨를 데리고 나타났다. 구제 그레이 진 바지에 까만 가디건 때문인지 속에 받쳐 입은 흰 블라우스가 유난히 빛나 보였다. 어깨아래까지 늘어뜨린 생머리가 풍성하고 시원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안녕하세요, 대한변협신문의 정송이 기자입니다. 배 변호사로부터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변호사가 마치 소개를 하기도 전에 그녀는 자신의 소개와 인사말까지 한달음에 다 해 버렸다.

    “어서 오세요. 정 기자, 반갑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정송이와 가볍게 악수를 나눈 뒤 강동현은 자리를 권했다. 정송이는 앉으며 배금호에게 눈짓을 했다. 이제 됐으니 나가라는 뜻인 모양이었다.

    “전 그럼 나가 보겠습니다.”

    배금호가 나간 뒤 강동현은 앞에 앉은 정송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변호사님, 왜 웃으세요? 혹시 배 변호사가 저에 대해 뭐라고 얘기했나요?”

    그녀는 강동현이 자신을 보자마자 웃는 것이 혹시 배금호가 자신에 대해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은근히 걱정도 되어 직선적으로 물었다.

    “아, 아니에요. 미안해요 웃어서. 정 기자를 보니 문득 오래된 노래가사가 떠올라서요.”

    “네? 노래가사요? 어떤 노래인데요?”

    정송이는 강 변호사의 웃음이 싫지 않은 듯 호기심을 빛내며 물었다.

    “오래된 가요라 정 기자는 잘 모를 거예요. 왜 그,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여자’ 뭐 그런 노래가 있었죠. 아주 오래 전에요. 제목이 희망사항이든가?”

    “아, 그 노래요? 알죠. 암튼 고맙습니다. 잘 봐 주셔서.”

    정송이는 기자라서 그런지 성격이 활달한 것 같았다. 초면인 강동현 앞에서 전혀 어려워하거나 어색한 구석이 없었다. 강동현도 정송이에게서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배 변호사가 이런 미인을 여자친구로 두었으니 복이 많네요.”

    “어머! 정말이세요? 고맙습니다. 칭찬으로 알겠습니다.”

    그녀도 싫지 않은 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웃는 모습이 참 천진난만하게 보였다. 이러니 마음 좋은 배금호가 휘둘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강동현이 웃은 것은 그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 정 기자가 취재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지요?”

    강동현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한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변호사님. 요즈음 법조계에서는 최강로펌이 영·미계 로펌인 다비드 앤 솔로몬과 곧 합병할 거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또 그 건과 관련하여 최강로펌이 최근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관해 변호사님으로부터 구체적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배 변호사가 소개했다고 해서 내가 사무실에 관한 얘기를 시시콜콜 다 얘기해 줄 수는 없어요. 경우에 따라서는 보안을 지켜야 할 것도 있고”

    강동현은 일부러 표정을 굳히고 딱딱하게 말했다. 그녀는 굳어진 강동현의 모습에 조금 전과는 달리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변호사님이 보도를 원치 않는 부분이 있으면 절대로 제 임의로 기사를 쓰지는 않겠습니다.”

    “하하하.. 그래요? 정말로 그 말을 믿어도 되나요? 원래 기자들은 믿을 수 없다고 그러던데?”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온 강 변호사의 얼굴을 보고 그녀는 조금 전의 굳은 표정이 과장이었음을 눈치 채고 한껏 애교를 부렸다.

    “아이. 변호사님 정말 믿으셔도 됩니다. 기사 나가기 전에 반드시 변호사님께 보여드릴게요. 변호사님이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아예 삭제할 수도 있습니다.”

    정송이는 두세 번 자신을 믿어 달라고 다짐을 했다. 그 표정이 하도 진지하여 강동현은 속으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좋아요, 그럼 믿어보지요. 그러면 이제부터 궁금한 것부터 먼저 물어보세요.”

    강동현의 여유 있는 태도에 정송이도 긴장을 풀고 준비한 메모수첩을 꺼내 들었다.

    “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다비드 앤 솔로몬에서 합병제의가 들어온 것은 사실인가요?”

    “다른 로펌하고 합병얘기는 늘 있을 수 있죠. 특히 요즈음에는 외국계 로펌하고 합병얘기가 많습니다. 다비드 앤 솔로몬과의 합병얘기도 그런 것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면 실제로 구체적인 제의는 없었나요?”

    그녀의 표정은 진지했다. 이젠 기자 본연의 자세로 돌아온 것이다.

    “예, 공식적인 제의는 없었지요. 다만 그런 얘기가 나온 것은 다비드 앤 솔로몬이 한국로펌 중 합병할 상대를 물색하면서 비공식적으로 최강로펌에도 합병의사를 전해 온 적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럼 비공식적인 합병제의는 있었다는 말이지요?”

    “뭐 그것도 제의라면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합병에 대해 최강로펌의 입장은 어떤가요?”

    “우리 최강로펌으로서는 외국계 로펌하고의 합병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로펌 내에도 이미 능력 있는 외국변호사가 상당수 있기 때문에 굳이 외국계 로펌과 합병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몇몇 대형 로펌과는 이미 업무제휴관계를 맺고 있는 상태이니까요.”

    “그런데 변호사님, 정말 여쭤보기가 어려운 질문이긴 한데요. 요즈음 최강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합병 얘기가 더 설득력 있을 거라는 소문이 있거든요. 그 점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시지요.”

    정송이는 내친김에 작심한 듯 민감한 문제까지 건드렸다. 강동현의 반응이 어떨지 여간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최강이 요즈음 어렵다는 얘기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최근 최강뿐만 아니라 국내의 유수로펌들이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무리하게 몸집을 불린 것도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로펌들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게다가 최강은 최근 신뢰관계에 흠이 생긴 몇몇 클라이언트와 고문계약을 해지했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어려움이 가중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은 정말 일시적인 현상이고 최강의 경쟁력은 국내로펌 중 상위권이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그 미래가 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동현은 재정적 어려움을 부인하지 않고 담담하게 설명해 나갔다. 하지만 정송이가 기대한 만큼의 솔직한 대답은 물론 아니었다.

    “그런데 변호사님, 사실 제 친구들 중에는 다른 언론사에 근무하는 친구들이 꽤 많습니다. 그 친구들 얘기는 최강이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변호사님, 이건 기자로서 취재라는 차원이 아니고요. 변호사님과 최강을 조금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변호사님이 저를 믿으신다면 저에게 상황을 좀 더 솔직히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러면 저도 제가 동원할 수 있는 것들을 다 동원해서 변호사님께 유용한 정보를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예를 들면 다비드 앤 솔로몬의 실제 의도가 어떤 것인지…”

    정송이의 표정은 진지했다. 강동현은 처음 봤을 때의 개성이 강하고 제멋대로인 것 같은 모습에서 이렇게 진지한 모습으로 바뀐 정송이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강동현은 잠시 생각에 잠기며 그녀의 표정을 다시 한 번 민망할 정도로 찬찬히 살펴봤다. 그녀 역시 그런 강동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았다. 참 눈빛이 선하다고 생각했다. 강동현은 눈빛이 선한 사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동현은 얘기를 돌리지 않고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정 기자, 정 기자를 믿고 싶군요. 사실 지금 최강의 형편은 많이 어렵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오랫동안 우리와 같이 일해 온 클라이언트들이 하나둘씩 고문계약을 해지하고 우리와 거래를 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판단하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전혀 없거든요. 이러한 고문계약 해지 사태는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어요.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클라이언트들을 직접 만나 설득해 보기도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어요. 아마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정말 감당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비드 앤 솔로몬은 적극적으로 합병하자고 나오고 있어요. 또 그 합병조건이라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후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많은 변호사들이 흔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내가 정 기자에게 이런 얘기까지 하는 건 정 기자를 믿기 때문이고 또 한 가지는 정 기자가 언론기관에 있는 친구들을 통해서라도 혹시 우리 클라이언트들이 고문계약을 해지하는 것과 다비드 앤 솔로몬이 합병을 밀고 들어오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혹시 어떤 배후세력이 있는 것인지를 알아볼 수 있는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바램 때문입니다. 배후가 어딘지, 목적이 뭔지를 알아야 우리도 정확하게 대처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잘 아시겠지만 지금 내가 한 얘기는 정 기자가 보안을 유지해 주었으면 해요. 어차피 나중에는 다 알게 되겠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요.”

    강동현은 결국 젊은 여기자 앞에서 속에 있는 말을 모두 하고 말았다. 그녀가 배금호의 여자 친구라서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강동현은 그녀의 눈빛에서 진심으로 돕고 싶다는 마음을 보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강동현이 사람을 잘 못 본 것이면 모든 책임은 강동현이 져야 하겠지만.

    “변호사님, 저를 믿고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단 최강에 관한 기사는 지금 말씀하신 부분을 보류하고 작성하겠습니다. 변호사님이 말씀하신 건 제가 힘닿는 데까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오, 내가 오히려 감사합니다.”

    “그럼, 변호사님. 오늘은 이만 돌아가고,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지요?”

    그녀는 재빨리 수첩과 볼펜을 작은 가방에 챙겼다.

    “그럼요, 언제든지 연락하세요.”

    그녀는 들어올 때 살짝 보였던 미소를 다시 지어보이며 방을 나갔다.

    강동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정말 청바지가 저렇게 잘 어울리는 여자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