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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제국 (15) 심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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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않는제국15

     

    “야, 웬일이냐? 배변 같은 짠돌이가 점심을 다 사고?”

    늘씬한 키에 디지털 퍼머로 웨이브를 준 풍성한 머리가 잘 어울리는 심해정이 방으로 들어섰다. 요즈음은 워낙 노처녀들이 많아서 그런지 외모만 보아서는 처녀인지 애 엄마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차림이었다.

    자리에 앉으며 심해정은 배금호를 한껏 놀린다.

    “어서 오십시오, 심 선배님. 자주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선배님께서 항상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을 주시는데 제가 부족해서…”

    배금호는 쑥스러워하며 말을 더듬었다.

    “얼씨구, 지랄하네. 그렇게 고마우면 말로 하지 말고 행동으로 해봐. 아니며 물질로 하든지 아님 배변이 나를 누님으로 생각하는지, 개떡으로 생각하는지 어떻게 알겠어?”

    심해정은 여전히 거침이 없었다. 배금호는 절친한 친구의 동생이었다. 착하고 성실한 것이 마음에 들어 아끼는 후배를 소개해 줬는데 진도가 지지부진한 것 같았다.

    “야, 배변. 근데 정말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거하게 쏘시나? 뭔 일 있어? 아니면 송인지 버섯인지 말을 잘 안 들어?”

    정송이는 심해정이 배금호에게 소개시켜 준 후배로 대한변협신문에 근무하는 기자였다. 사실 배금호가 오늘 심해정에게 점심을 사는 이유는 바로 정송이 때문이었다.

    “아이, 그런 거 아닙니다. 같은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식사도 같이 한번 하기가 어렵고 해서…, 참 유나는 잘 있죠?”

    유나는 유치원 다니는 심해정의 딸이다. 심해정은 3년 전에 이혼하고 하나 있는 딸을 자신이 키우고 있었다. 이혼 사유가 무엇인지는 당사자가 말하지 않아 정확치는 않지만 남편이 경제관념이 없고 낭비가 심했다는 소문이다.

    “그럼, 걘 아주 씩씩해. 날 닮아서. 그래 송이하곤 잘 되고 있는 거야? 벌써 한 1년 됐지?”

    “예, 그렇게 됐어요.”

    “야, 배변. 이런 것 좀 먹어. 잘 먹어야 남자가 힘도 쓰지 않겠어? 그래야 송이를 휘어잡을 수 있지.”

    심해정은 종업원이 차례로 날라 오는 갈비찜과 생선전 등 요리를 맛나게 먹으며 여전히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배금호는 입맛이 없는지 샐러드에만 손이 가고 있었다.

    “참, 선배님두.”

    배금호는 심해정의 거침없는 말투가 싫지만은 않았다. 속마음을 다 얘기하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금호도 심해정을 친 누나같이 생각하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움을 청하곤 했던 것이다.

    “사실은 선배님한테 상의하고 싶은게 있어요.”

    “그럼 그렇지, 짠돌이 배변이 공짜로 점심을 사겠어? 속 시원하게 말해봐. 송이 문제 맞지?”

    “네, 그런데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지랄, 특별히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왜 그렇게 소태 씹는 얼굴이야? 얘기 돌리지 말고 핵심을 말해봐. 공부는 그렇게 잘하면서 여자 문제는 영 꽝인가부지? 야, 배변. 혹시 1년이 넘도록 아직 한 번도 자빠뜨려 보지 못 한 거 아냐? 응? 그렇지? 내말 맞지?”

    심해정은 짓궂은 표정으로 배금호를 다그쳤다.

    배금호의 얼굴이 빨개졌다. 심해정은 그런 배금호가 재미있다는 듯 홍어와 삼겹살을 묵은 김치에 싸서 입에 넣었다.

    “심 선배님, 우리가 무슨 그런 사이인줄 아세요?”

    “아이구, 지랄하고 자빠졌네. 그런 사이가 아님? 그럼 니들이 무슨 애들이냐, 아니면 플라토닉 러브인가 지랄인가 하는 거니?”

    “참, 선배님두. 좀 작게 얘기 하세요. 옆방에 다 들리겠어요. 정말 그렇지 않아도 쪽 팔리는데…”

    “그래, 잘한다. 1년 됐으면 나 같으면 자빠뜨려도 수십 번은 자빠뜨리고도 남았겠다. 배변 그러지 말고 좀 박력 있게 밀어붙여. 송이가 원래 똑똑하고 개성이 강해서 뜨뜻미지근하게 하면 잡기 어렵거든.”

    심해정이 자꾸 배금호의 자존심을 건드리자 배금호의 기분도 영 편치가 않았다. 속으로는 그렇게 남녀관계에 대해 잘 알면서 남자 하나 제대로 고르지 못해 이혼했냐고 쏘아붙이고 싶은데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배금호로서는 지금 심해정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송이하고 만난지도 1년 정도 됐고, 제 나이도 있고 해서 결혼 얘기를 슬쩍 비췄거든요. 그런데 송이는 결혼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선배님,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죠?”

    “흠, 글쎄. 여자가 아직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건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뜻이고, 마음에 준비가 안 됐다는 건 두 가지로 볼 수 있겠지.”

    “두 가지요? 그게 뭔데요?”

    “하나는 말 그대로 배변이 싫지는 않지만 아직 결혼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배변이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뜻일 수도 있고.”

    배금호는 심해정의 말에 괜히 불안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어린 학생처럼 심해정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얌전히 듣고 있었다.

    “선배님.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선배님이 좀 도와주세요.”

    “지랄, 밥상 차려 줬으면 됐지. 밥까지 떠 먹여 달라고?”

    “누님…”

    배금호가 급한지 급기야 선배님에서 누님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심해정은 남동생이 없어서 그런지 누님으로 불러주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아, 그래 알았어. 내가 내 짝은 잘 못 찾아도 남의 짝 찾아주는데는 선수니까. 내 필로는 송이가 배변을 아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건 아니고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서 그럴거야. 걔가 원래 욕심이 많은 애거든. 그러니까 배변, 이제부터라도 쪼잔하게 굴지 말고 좀 과감하게 대시해. 알았지? 그러면 내가 옆에서 바람을 잡아 줄 테니까.”

    배금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심해정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면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참 배변, 그거 알아? 요새 우리 사무실에 좀 이상한 소문이 있던데.”

    “이상한 소문이요? 무슨 소리에요?”

    배금호는 속으로 뜨끔하면서 모른 척 되물었다.

    “확실한 건 잘 모르겠는데 요즈음 우리 사무실 클라이언트들이 많이 떠났다며? 그래서 사무실 재정이 엉망이라고 하던데, 사실이야?”

    “에이, 선배님. 그거 다 헛소문이에요. 몇몇 클라이언트들이 클레임 제기한 걸 가지고 누가 뻥튀기 한 거예요. 사무실 끄떡없어요. 최강마피아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에요?”

    배금호는 말을 마치고 목이 타는 듯 물잔을 들었다.

    “그래? 그럼 어떻게 그런 소문이 났지? 그래서 다비드 앤 솔로몬하고 합병할거란 소문이 있던데.”

    “참, 선배님두. 무슨 그런 소문에 신경 쓰고 그러세요? 아, 그리고 막말로 합병하게 되면 합병할 수도 있지 뭐 어때요? 우리가 주도권을 잡으면 되잖아요.”

    “그렇겠지. 참! 그 소문 송이한테 좀 알아보지 그래. 명색이 대한변협신문 기자인데 그런 소문은 우리보다 낫지 않겠어? 걔가 그래 뵈도 언론 쪽에 친구가 많아 발이 넓거든. 그리고 배변이 지금 하고 있는 장미은행건 있잖아? 그게 무슨 서양화에 투자했다 쪽박 찬 거라며? 도움 될지는 모르겠는데 송이 걔가 학교 다닐 때부터 회화쪽에 관심이 많아서 그 방면에도 아는 것이 많으니까 혹시 필요하면 송이한테 도와달라고 해봐.”

    “그래요? 장미은행 건이 꼭 그런 소송은 아닌데.”

    배금호는 심해정이 자기에 비해 정송이를 엄청 대단하게 여기는 것 같아 은근히 불쾌해졌다.

    “배변, 여자는 말이야 자기가 뭔가 상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때 상대에게 더 끌리는거야. 모성본능이라는거 알아, 몰라?”

    배금호는 심해정의 말에 뭔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배금호는 자신이 정송이의 마음을 잡기 위해 너무 좋은 면만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 생각했다. 심선배의 말을 들으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참 여자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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