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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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제9회 법원행정고등고시 합격, 현재 남양주시에서 법무사로 일하며 소설가로도 활동, 법률신문사 간 "법조 50년 야사" 집필, '월요 법창'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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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끝 그리고 시작(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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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그리고시작12,13

     

    12

     

    저 방정맞은 손가락. 누군가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랬다. 침을 발라 가며 돈을 세듯 사람의 수를 세어 가는 그들의 몸짓이 참 경망스러웠다.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운동장에 불려 나갔고 그때마다 안전원들은 마치 하나라도 틀리면 큰일이 날 듯 사람 수를 셌다. 그들의 호령이 잦아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가슴에는 짜증 대신 두려움이 켜켜이 쌓여 갔다. 그렇게 이틀 밤이 지나고 사흘째 되는 날 새벽, 운동장에 버스가 들이닥쳤다. 35인승으로 흰 바탕에 연녹색 띠를 두른 4대의 버스였다. 유심히 보니 그중 하나는 이틀 전 승무원들을 싣고 갔던 차량이었다. 군용 트럭이 아니라 버스가 온 것을 보니 이번에는 행선지가 좀 먼 곳이 아닐까 싶었다.

    소지품을 모두 빼앗긴 뒤 승객들의 표정에 공포심이 완연했고 언행도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납북 다음 날부터 북한 당국은 첫날 아침을 제외하고 그동안 계속 옥수수 가루가 반 이상 섞인 밥과 멀건 된장국을 제공했다. 몇 년 전부터 시작된 식량난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던데 그나마 밥이 제공된 것은 남쪽 승객에 대한 예우인 듯했다. 그렇지만 그동안 식판에 손도 대지 않는 승객들이 꽤 많았다.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혈당이 높아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도 몇이 더 나왔다. 식사를 관장하며 남은 밥을 재빨리 수거해 가던 북측 여인들의 표정에 의아한 빛이 역력했다.

    차에 오르자 아들이 인성의 옆 자리로 와서 앉았다. 떨어져 있는 동안 현은 안색이 핼쑥해졌고 눈빛 가득 불안한 기미가 서렸다. 매사에 침착하던 현이었지만 피랍이라는 극단적인 현실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떻게 될까요?”

    현의 속삭임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인성은 아들의 손을 잡았다.

    “승객들은 바로 송환될 게다. 1969년에도 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승무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돌려보냈어. 지금은 그때보다 더 국제사회의 눈치를 봐야 할 입장이거든. 북한 내부의 경제 문제 때문에 더욱 그럴 거야. 그냥 조용히 참고 기다려 보자.”

    인성은 자신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아들을 다독였다. 1969년 KNA 납북사건 때도 북측은 승무원과 기체만 억류했었다. 그 무렵에 만들어진 항공기 탈취 방지 조약인 ‘헤이그 조약’에 아직 북한은 가입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비관적이지 않은 것은 북한 당국이 극심한 식량난으로 국제사회를 향해 여기저기 손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억지와 과장 연출에 익숙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민간 항공기 납치가 자칫 ‘뜨거운 감자’로 작용할지 모른다. 분명히 주변 환경은 승객들을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부 역시 지금쯤 어떤 형식으로든 협상을 시작했을 것이다. 대선에서 승리하여 작년 초 집권한 새 정부가 성립 초기부터 북에 접근을 시도한 흔적이 그의 정보망에도 여러 차례 포착되었다.

    우중충한 건물이 띄엄띄엄 늘어선 원산시의 변두리를 빠져나온 버스는 오전 내내 서쪽을 향해 달렸다. 간간이 포장되지 않은 도로가 나왔고 그때마다 차량은 뿌연 먼지를 뒤집어쓴 채 덜컹거렸다. 인성은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하여 자동차의 진행 방향을 지켜보면서 간혹 보이는 이정표와 마을 표지석 등을 유심히 살폈다. 이곳의 모든 지형과 현황들은 생생한 정보였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맑았지만 늦가을의 민둥산들은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황량했다. 낫 자국을 인 채 포기만 남아 있는 바싹 마른 풀들, 누렇게 탈색한 들판의 갈대나 한여름 무성했을 계곡 쪽 덩굴의 흔적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산림의 남벌이 심하다더니 듣던 것보다 상태가 더욱 심각했다. 깊은 산에는 그런대로 나무가 더러 있는 듯했으나 이런 형편이라면 ‘TRAP’의 ‘생존 코스’는 보완해야 할 것 같았다. 산악 이동을 할 때 병력의 노출은 바로 위험과 직결된다. 계절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주간에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 같았다. 특히 침투를 위한 낙하지점은 현장의 정보를 좀 더 수집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혹시 아버지의 신분이 노출되면…….”

    인성은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래도 납치범을 사살했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다. 그러니 넌 철저하게 남이 되어야 한다. 알았지?”

    “어떻게 알겠어요. 저들이…….”

    비행기에서 신분증 폐기하는 것을 지켜본 현이었다. 아내와 마찬가지로 아들 역시 아버지가 무슨 일에 종사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군복을 벗었으나 아직 국방 관계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정도만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대비는 해 놔야지.”

    과장된 위기감은 자칫 화를 부를 수 있겠지만 경각심은 필요했다.

    “예.”

    현은 고개를 숙인 채 짧게 대답했다. 현은 육사 입교 전에 무술을 좀 더 단련하려고 겨울 동안 특별 수련을 받을 계획이었다. 태권도 4단에다 실전 경험을 쌓은 인성이지만 부자간에 대련하다 보면 종종 어이없는 일을 당하게 된다. 일단 첫 대련의 힘과 기에서 현은 인성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현은 순발력이 뛰어났다. 공격을 허용한 후 그 충격에 적응하고 회복하는 힘, 그리고 순간적으로 반격하는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대개 공격자는 자신의 공격이 성공하면 일시적으로 긴장을 누그러뜨린다. 현은 이 시점을 포착하는 데 아주 능했다. 선공을 중시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함양하는 이 특공 무술은 태권도와 유사한 권법을 종합하여 재편한 것이다. 창안자가 육사 동기였으므로 현이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그에게 보내 무술을 익히게 했다.

    서쪽으로 갈수록 고속도로의 포장 상태는 비교적 좋았다. 그러나 버스는 시속 60킬로미터 이상 속도를 내지 못했다. 외관은 그럴듯해 보였으나 안은 낡을 대로 낡은 차량이었다. 70~80년대 안내원이 입구에서 승객의 타고 내리는 것을 돕던 시절, 검은 매연을 내뿜고 길거리를 질주하던 남쪽의 중형 버스와 비슷한 차종이었다. 많은 사람이 멀미를 했다. 기름과 매연이 혼합된 매캐한 냄새는 사람들의 속을 죄다 뒤집었다.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 창문을 열어 놓을 수도 없었다.

    인성은 피랍 후 북에서 제공하는 식사를 꼬박 챙겨 먹었다. ‘생존 코스’에서 뱀과 개구리는 말할 것도 없고 지렁이도 날것으로 먹어치우던 식성이었다. 지난 30년간의 군과 특수단 생활을 하는 동안 신체는 어떤 위기에서도 금방 적응하도록 훈련되었다. 다만 멀미 때문에 고생하는 현이 안쓰러울 뿐이었다. 호흡 조절을 도와주면서 먼 산을 바라보도록 했다.

    길가의 주택들은 거의 회벽에 슬레이트로 지붕을 한 단층이었다. 전면에는 유리로 된 2개의 창이 달렸는데 모양새는 거의 비슷했다. 지난날 우리의 시골 초가집처럼 이곳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였다. 간혹 연립주택과 같은 대형 건물이 보였지만 주민들의 주거는 그런 식으로 통일된 듯 보였다.

    휴게소 역할을 하는 지역 초대소에서 주먹밥으로 된 점심을 먹었고 간간이 용변을 보기 위해 차를 세운 것 말고는 쉬지 않고 달렸다. 아마 해진 뒤에도 캄캄한 밤길을 서너 시간은 내달린 것 같았다. 차량의 불빛 외에는 주위가 전혀 분간되지 않을 무렵, 버스는 몇 채의 3층 건물이 모여 있는 마을에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안내원들의 말투와 건물에 적힌 선전 문구를 살펴보니 황해도 사리원인 듯했다. 온종일 동쪽 끝에서 출발하여 서쪽 끝까지 달려온 셈이었다. 평양 부근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승객들의 송환이 가까웠다는 증거였다. 해주와 함께 이곳에도 대남 공작 사업부가 있다고 들었다.

    안내원들은 사람들을 15명 단위로 방을 배정했다. 인성은 1동 2층의 백합실에 입실을 하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새벽이었다.

    “황윤식이 늬기요?”

    문 앞에서 굵고 탁한 목소리가 인성을 찾았다. 인민복에다 검은 안경을 쓴 뚱뚱한 사내였다. 새벽 요가를 끝내고 숨을 고르고 있던 인성은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여러 사람 중에서 유독 자신의 이름만 특정될 이유는 기내 행동, 즉 납치범 사살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혹시 내 소지품에서 문제가 생긴 것일까? 문득 키 작은 사내의 탐욕으로 번득이던 눈빛과 눈짓 한 번으로 상관의 생각을 읽어 내던 인민복 사내의 갸름한 얼굴이 떠올랐다. 문젯거리가 될 것이라면 끼고 있던 육사 졸업 반지나 금으로 된 열쇠고리 정도일 것이다.

    인성은 벌떡 일어나 사내에게 다가갔다. 머릿속은 온통 그동안 생각해 둔 변명거리로 꽉 찼다. 조금이라도 부자연스럽거나 의심이 가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입니까?”

    “동무요? 따라오시오.”

    비대해 보이는 몸매에 사각형 얼굴을 한 사내의 눈빛이 꽤 매서웠다. 째려보던 시선을 거두고 그는 성큼성큼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13

    영혼에 상처가 생기면 증상이 이럴까. 깊은 밤 갑자기 도진 위궤양처럼 뇌리를 후벼 파는 진통이었다. 진원지가 뚜렷하지 않은 통증은 파문처럼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벌써 몇 날이 지난 듯한데 음식이 들어온 횟수로 보면 그리 오래지 않았다. 햇살 한 번 받지 못하고 1평도 되지 않는 방 안에 갇혀 있으니 도통 시간관념이 없어져 버렸다. 처음에는 시멘트 벽의 매캐한 냄새가 계속 머리를 띵하게 만들더니 이젠 아예 후각이 마비된 듯했다. 담요 한 장 없이 텅 빈 방에 갇혔으나 춥지는 않았다. 난방이 되는 건물이었다. 에너지가 부족한 북한에서 11월에 난방을 할 정도라면 이곳은 분명히 힘 있는 사람들이 활동하는 곳이다.

    사람을 감금하여 이렇게 방치하는 것은 두려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예비 단계였다. 뻔히 알면서도 심리적인 위축을 극복하기 어려웠다. 준비했던 몇 가지 대비책은 이제 모두 뒤엉켜 버려 정리할 수가 없고 분간도 되지 않았다. 국가의 위기를 막겠다고 궁리하던 머리에서 자신을 구원할 방법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은 분명 난센스였다. 현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피랍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인민복을 입었던 그 사내의 얼굴도, 반지와 귀중품을 챙겨 넣던 양복 입은 키 작은 사내의 모습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아내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던가.

    통증이 몸속의 기를 모두 흡수해 버렸을까. 전신의 세포들은 외부의 변화와 충격에 대해 작용을 하거나 반작용하는 것을 포기해 버린 듯했다. 식욕도 감쪽같이, 정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요가로 생기를 좀 모으고 싶었으나 그냥 참기로 했다. 저들의 의도를 알아낼 때까지 신분 노출의 위험이 있는 행동은 삼가야만 한다. 인성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단 본부에서도 벌써 응급조치를 취했으리라. 통용되고 있는 이달의 암호를 변경하고 단 본부의 3역만 인지하고 있는 작전명령의 기본 틀을 모두 바꿨겠지. 그리고 단장 황윤식이라는 존재는 지금쯤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리라. 모두가 비상시의 기본 계획에 들어 있는 사항이었다.

    방 안에는 흐릿한 백열등 하나만 켜져 있을 뿐이었다. 편한 잠을 자지 못해선지 인성은 간혹 까무러치듯 졸음에 빠져들곤 했다. 완전히 진을 빼놓을 모양이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출입문이 열리더니 2명의 병사가 책상과 의자 두 개를 들여다 놓고 사라졌다. 좁은 방 안의 중앙을 차지한 책걸상을 피해 구석으로 내몰려 무릎을 싸안은 채 또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의 사내가 키가 크고 건장한 청년 한 명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여기는 국가보위부 사리원 초대소요.”

    약간 유치한 기분이 들었다. 엄숙한 표정도 그랬지만 건물의 명칭으로 기를 꺾으려는 것 같아서 우스꽝스러웠다. 자신이 통전부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할 때는 한껏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통전부란 평양 3호 청사가 총본산인 통일전선부의 약칭이었다. 대남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였다. 무슨 냄새를 맡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부서의 요원이 나설 리가 없었다. 전신을 죄는 압박감 때문에 생각조차 자유롭지 않았다. 속절없이 안에 갇힌 채 차츰 콘크리트 원액으로 채워지는 모형물 신세가 되어 갔다.

    “선생이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주면, 그리고 우리 일에 협조해 주면 우린 선생을 영웅으로 대접할 것이오.”

    엄포성 회유랄까, 또박또박 서울말을 사용하는 사내는 자신을 윤이라고 소개했다. 눈이 작고 길며 인중이 좁아 첫인상이 무척 사나워 보였다. 그는 탁자 위에다 뭔가를 탁 하고 꺼내 놓았다. 며칠 전 원산에서 빼앗겼던 지갑이었다.

    “우리는 황인성이라는 인물을 알고 있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오?”

    어?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습이었다.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국내에서도 황윤식과 황인성이라는 이름이 한 곳에서 거론될 수 없었다. 프로젝트 ‘TRAP’을 시작할 때 호적과 주민등록에서 사망으로 처리된 이름이기 때문이다. 국방부의 결재 라인에 있는 수뇌부와 역시 가명을 사용하고 있는 단의 참모들 사이에서도 대외비였다.

    단 본부에서 단장과 참모들의 가명과 실명이 함께 알려지는 일이란 없었다. 요원들의 인적 사항은 작전 계획인 ‘TRAP’과 함께 일급 비밀이었다. 그 프로젝트는 기획하고 실행하는 요원들의 안전이 전제되지 않으면 성공을 거둘 수가 없다. 요원들을 위해서라기보다 그 계획의 성공을 위한 조치였다. 그런 이름을 이들이 어떻게 알아냈을까.

    “황……, 황인성이 누군가요?”

    침착하려고 했지만 자연히 목소리가 떨렸다.

    “모른다는 거요?”

    인성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윤의 입술에 가벼운 경련이 일었다.

    “우리도 알 만큼은 알고 있소. 어물쩍 넘어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심문관의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은 그들의 표정과 행동이 수시로 변하고, 심문을 받는 사람의 시각이 위축되고 불안정하기 때문이리라. 그가 언제 본색을 드러내고 과격하게 날뛸지 모를 일이었다.

    “도대체 뭘 갖고 그러는지요? 나는 그냥 장사꾼일 뿐인데…….”

    “장사꾼이라?”

    윤은 그냥 비웃는 것이 아니었다. 흡사 칼끝으로 의식을 툭툭 건드리는 듯한 조소였다. 평생을 특수 훈련으로 영육이 단련된 인성은 어떤 환경에서건 누구에게든 당당히 맞섰다. 그런데 왜 이렇게 위축되고 자신이 없을까. 민간 정부가 들어선 뒤 정치 사찰을 방지한다면서 정보기관을 공개했고 수장을 비정보통으로 임명했었다. 자연히 보호 대상의 한계를 애매하게 만들어 국가 기밀이 공공연히 누설되는 실정이었다. 무엇보다 지하에서 암약하던 간첩들이 활개를 친다는 한탄도 들렸다. 납북된 지 불과 며칠 만에 피랍자의 감춰진 신원까지 밝혀내는 이들의 정보망이, 무엇보다 인성 같은 특수 요원의 주변을 집어낼 만큼 치밀하다는 사실은 놀라움에 앞서 두려울 정도였다.

    “뭣 때문에 나를 조사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주식회사 수정의 대표이사입니다.”

    어쨌든 그들이 유도하는 대로 가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경우에 대비한 것은 아니지만 회사는 조달청을 통하지 않고 수의계약으로 국방부에 납품하는 몇 안 되는 업체로 등록돼 있다. 그뿐 아니라 직원들의 보수와 운영비도 국가 예산에서 그냥 지급하지 않고 다른 단계를 거쳐 돈세탁한 후 일반회계로 집행해 왔다.

    “그래요?”

    윤은 등을 보이며 돌아선 채 빠르게 말했다.

    “국방부가 왜 선생 회사에 그런 특혜를 베풀고 있지요?”

    역시 회사의 대외적 역할도 노출된 것 같았다.

    “아, 나는 평생을 군에서 보냈고 육군 대령으로 전역했으니 국가가 노후를 보장해 줄 의무가 있는 것이지요.”

    인성은 자신도 모르게 톤을 조금 높였다.

    “능청 떨지 마시오. 우린 그 회사에 정보원을 가지고 있어요.”

    “…….”

    “우리 감정 돋우지 말고 솔직히 하자우요. 선생도 빨리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야지.”

    윤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참, 모두 어떻게 되었을까. 현은 어떻게 하고 있을까. 도대체 이곳에 들어온 지 며칠이나 됐을까. 의문은 꼬리를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은….”

    “오, 아들이 걱정되는 모양이군요. 현이던가?”

    윤이 휙 돌아서며 인성을 정면으로 쏘아봤다. 순간 인성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 이치들은 정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구나 싶었다. 사실 탑승자 명단에 같은 성씨로 좌석 번호도 연번이었으니 누가 보더라도 일단 부자간으로 볼 수는 있겠지. 그러나 호적과 주민등록상 두 사람은 전혀 남이었다. 갈 데까지 가 보자. 지레 인정을 해 버리면 안 된다.

    “모두 집으로 돌아갔소. 선생 부자만 빼놓고 말이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아, 정말 현인 안 돼. 아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숨이 턱에 닿았고 가슴이 답답했다.

    “왜 이러는 겁니까? 도대체.”

    “선생이 더 잘 알 텐데 뭘 그래요. 항공기 안에서 선생이 사살한 우리 전사를 위해서라도 잘 한번 생각해 보기요.”

    능청스럽지만 날카로운 송곳처럼 툭툭 심장을 건드렸다. 이런 낭패가……. 우려하던 것이 모두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하나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 말을 내뱉은 뒤 윤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기내에서의 행동이 너무 후회스러웠다. 남들처럼, 그냥 모른 척 앉아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겹겹이 위기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분명히 그 행동은 큰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보안 요원과 여자 승무원들을 다그쳤다면 그때의 상황이 자세하게 전해졌으리라. 그것은 거의 본능적인 동작이었다. 공중 하이재킹은 가능한 한 초기에 제압해야 한다는 원칙을 생각했고 그에 따른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그렇지만 결과만 놓고 본다면 항공기의 공중폭발만큼 자신에게 불리한 행동이었다.

    그들은 점차 심리적으로 압박을 가했다. 운만 띄워 놓고 초조하게, 불안하게 분위기를 만들 작정이었다. 다섯 번의 식사가 더 제공되었지만 인성은 역시 단 한 번도 음식에 손을 대지 못했다. 사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촉수 낮은 백열등이 있는 좁은 방 안 한 구석에 앉아 느끼는 고립감이라든지 밀려오는 공포감과 좌절감 따위는 얼마든지, 아니 그 보다 더한 것도 좋다. 그러나 아들 현을 생각하면 자꾸 마음이 흔들렸다. 물론 저들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견뎌 내려고 억지로 숟가락을 들었으나 전혀 식욕이 나지 않았다. 어떤 처지에서도 속을 비운 일이 없던 그였다. 먹은 것이 없어선지 이 방 안에 들어온 뒤 대변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구석에 배설용 깡통이 하나 놓여 있지만 두어 차례 소변만 봤을 뿐이었다.

    올가미에 걸렸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인성은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했다. 사관생도 때부터 극한 상황 속에서도 평심을 유지하기 위해 요가와 함께 배우기 시작하여 벌써 30년 가까이 계속해 온 심적 수련 방법이었다. 단식으로 이것을 보완하여 영육이 일치되면 인지력이 시멘트벽도 관통할 수 있지만 체력이 바닥난 지금은 무리였다. 인성은 안간힘을 썼다. 무너져서는 안 된다.

    사관학교에서 생도들은 단체 행동을 통한 공동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죽이는 방법을 배운다. 그렇게 시작된 개념이 초급 장교 시절부터 생활 속에서 숙성되어 마침내 하나의 신념으로 형성된다. 군인으로서 지닐 최고의 선과 덕목은 자신보다 조국과 국민의 안위였다. 그는 한때 결혼도 하지 않고 군 복무에만 열중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숨을 쉬고 밥을 먹는 행위조차 국가를 위해서라고 다짐을 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자신이 태어난 이 땅은 숙명적으로 자신의 몸과 일체였다. 이 땅과 소속원인 국민을 안전하게 지켜 내는 일은 바로 자신의 운명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인식은 신념으로 변했고 마침내 이론적 체계로까지 정립되었다. 이를테면 대한민국은 그에게 신앙이었다. 국가의 질서가 어지럽고 안위가 침해되었을 때 몸을 던져서라도 나라를 수호하고 원상회복을 꾀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시각은 주적 개념에서 더욱 분명했다. 인민을 착취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북의 지도층이나 그 체제는 분명한 적이었다. 또한 부패하고 무능한 국내 지도자 중에도 그의 적은 없지 않았다. 그가 ‘TRAP’의 운영 책임자로 거론되었을 때 서슴없이 모자를 벗었던 것도 그러한 가치관 때문이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면 어디에 소속이 되었든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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