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윤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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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제국 (14) 두 번째 준비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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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지않는제국14_top

     

    9월 29일 오후 두시, 서울중앙지방법원 제 318호실에서 열린 장미은행 사건의 두 번째 준비기일 역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장미은행 사건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박두현은 그동안 준비한 자료를 가지고 송판국과 함께 법정에 출두했다. 김앤송의 차영철 변호사와 이앤 파트너의 황진 변호사는 이미 출석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황진 변호사는 지난번과는 달리 처음 보는 젊은 변호사 한 사람을 대동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정영숙 부장은 두시 정각에 들어왔다. 어찌 보면 미소를 띠고 있는 것 같은데도 도무지 빈틈이 없어 보였다.

    “2008가합19305 손해배상 원고 한경수 외 51 피고 장미은행 외 8, 모두 출석하셨네요. 황 변호사님 옆에 새로 나오신 분 같은데, 어느 쪽 대리인인가요?”

    정영숙 부장은 이미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짚고 넘어갔다.

    “아, 네. 저하고 같이 피고를 대리하는 최일환 변호사입니다.”

    황진 변호사가 소개하자 최일환은 일어서서 정영숙 부장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먼저 지난번 박 변호사님이 알베르트 앤 구스타브 회계법인에 신청한 사실조회에 대하여는 회신이 도착한 것 같은데 다 보셨습니까?”

    “네, 확인했습니다. 사실조회 결과 그 투자분석보고서는 알베르트 앤 구스타브 회계법인에서 작성한 것이 맞고, 또 이 투자분석보고서를 장미은행에 제출한 사실도 확인되었습니다.”

    박두현은 자신감이 실린 목소리로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이에 대해 피고 측 의견은 어떻습니까?”

    정영숙 부장은 황진 변호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피고 측에서 확인해 본 결과 그 투자분석보고서가 장미은행으로 우편을 통해 접수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피고은행은 평소에 알베르트 앤 구스타브 회계법인으로부터 회계에 관한 자문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사건 바르비종 펀드에 대한 투자건에 대해 정식으로 투자분석을 의뢰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래서 피고로서는 회계법인에서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와 같은 투자분석보고서를 작성하여 공식적인 문서수발경로가 아닌 일반우편을 통해 피고 측에 보냈는지 그 경위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고은행에서는 알베르트 앤 구스타브 회계법인의 투자분석보고서를 정식으로 접수한 것이 아니고 일반 우편으로 접수하였다는 뜻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투자분석보고서는 총무부에서 참고 문서로 접수했을 뿐 이사회와 감사실로 정식으로 올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재판장님, 피고은행에서 거액을 투자한 바르비종 펀드에 대해 세계적인 회계법인에서 투자분석한 중요한 보고서인데, 이를 이사회에도 올리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더구나 그 회계법인은 평소에 피고은행의 회계에 대해 자문역할을 하던 회계법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회계법인에서 미쳤다고 아무런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그 많은 시간과 인력을 투입하여 이런 보고서를 작성했겠습니까? 우리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장미은행에서도 바르비종 펀드의 투자손실을 알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비밀리에 거액의 수수료를 주고 알베르트 앤 구스타브 회계법인에 투자분석을 의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두현이 뭐라고 반박하기 전에 옆에 있던 송판국이 나서서 거친 말투로 일사천리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정영숙 부장도 순간적으로 미간을 살짝 찡그리긴 했지만 굳이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송판국은 법원에서도 이미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간 본전도 못 찾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황진 변호사도 송판국의 거친 기세에 어이가 없는 듯 잠시 바라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황 변호사님, 정말 피고 측에서는 회계법인에 투자분석을 의뢰한 사실이 없는데 이 투자분석보고서가 왔다는 말인가요?”

    정영숙 부장도 황진 변호사에게 추궁하듯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피고은행에서는 의뢰한 사실이 없습니다.”

    “그건 최근 피고은행과 회계법인 사이에 오고 간 수수료 내역만 조사하면 금방 다 나옵니다. 피고 측이 정 그렇게 부인한다면 계좌를 추적해서라도 사실을 밝히겠습니다.”

    이번에도 송판국이었다. 이젠 아예 박두현을 제치고 자신이 팀장인 것처럼 앞에 나서고 있었다. 박두현은 이런 송판국이 못마땅한 것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하기 어려운 원색적이고 공격적인 말투와 상대를 압도하는 듯 한 굵은 목소리가 때로는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효과적이기도 했다.

    “계좌를 추적하겠다면 얼마든지 해보십시오. 절대 그런 일 없습니다.”

    점잖은 황진 변호사도 상기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자, 이제 그만 하시고, 송 변호사님, 피고 측에서 투자분석 의뢰 사실을 이렇게 완강하게 부인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재판장님, 피고은행이 투자분석을 비밀리에 의뢰했다는 것은 이 사건에서 은행 임원들의 투자과실 여부와 그 후에 일어난 회계부정 사실을 밝히는데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결코 그냥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원고 측에서는 이건 투자분석보고서 작성기일 전후로 각각 3개월 동안 피고은행과 알베르트 앤 구스타브 회계법인간의 수수료 지급내역과 투자분석보고서 접수일 이후 3개월 동안의 피고은행 이사회 회의록에 대한 문서제출 명령을 신청합니다.”

    “그건 이 사건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부당합니다.”

    황진 변호사는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원고 측에서 문서명과 입증취지 등을 구체적으로 기재하여 서면으로 신청해 주시면 그것을 보고 재판부에서 채택여부를 판단하겠습니다. 그 외 달리 주장할 사항이나 제출할 증거는 없습니까?”

    “재판장님, 피고 측에서는 참고로 이 책과 논문을 제출하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송판국과 황진의 공방을 지켜보고 있던 차영철이 입을 열었다. 그가 정영숙 부장에게 제출한 것은 두툼한 책과 역시 두툼한 논문이었다.

    “이것은 어떤 내용이지요? 전부 원본인가요, 영문으로 되어 있네요?”

    “네, 그렇습니다. 재판장님도 투자분석보고서를 이미 검토하셨으니 잘 아실겁니다. 그 투자분석보고서의 요지는 바르비종 펀드가 거액을 투자한 작품들이 대부분 위작일 가능성이 높고, 그것이 사실로 판명될 경우 큰 손실이 예상된다는 취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직 가능성일 뿐이지 그것이 가짜라고 판명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책은 UC 버클리의 미술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는 줄리안느 교수가 쓴 ‘로스차일드 가문의 광적인 예술품 수집’이라는 책이고, 이 논문은 예일대의 석좌 교수인 그로브스키 교수가 최근 미술계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이 사건 작품들에 대해 연구한 논문인데 오히려 상당수의 작품은 진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취지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본을 들고 나온 것은 우선 원본을 확인시켜드리고 시간은 걸리겠지만 다음 기일까지 전문에 대한 번역본을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차영철은 나름대로 상당히 준비하고 나온 듯 침착하게 사건의 핵심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래요? 그럼 이 책은 이번 사건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네, 줄리안느 교수의 책에는 투자분석보고서에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된 작품 중 상당수에 대해 상세한 설명이 있어서 역시 그 작품들이 진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입증해 줄 중요한 자료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기일까지 번역본을 제출해 주십시오. 사안이 사안인 만큼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진행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다음 기일은 6주 후인 11월 10일 오후 두시에 하겠습니다.”

    차영철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박두현과 송판국은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정말 진품일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만약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회계법인의 투자분석보고서를 믿고 위작이라고 주장하며 소를 제기한 최강의 입장이 곤혹스럽게 될 것은 뻔 한 일이었다.

    박두현은 차영철 변호사가 그런 자료를 들고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다. 솔직히 그런 책과 논문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역시 이것은 차영철 개인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이미 글로벌 로펌의 반열에 들어선 김앤송의 능력일 터였다.

    무거운 걸음으로 법정을 나오는 박두현과 송판국에게 어김없이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박 변호사님, 회계법인의 투자보고서가 사실로 확인되었다면서요?”

    “장미은행의 투자 손실액은 어느 정도입니까?”

    “송 변호사님, 승소는 자신 있습니까?”

    “판결은 언제쯤으로 예상하십니까?”

    박두현은 기자들에게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송판국을 잡아끌며 눈짓으로 입단속을 시켰다. 아직 아무것도 말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라며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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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이13호: 드디어 14회가 나왔네요~ 이것도 블로그에서 연재되는 소설의 묘미가아닐까 싶습니다. 언제글이 올라올지 기다리게되는것 말이죠…반가운마음에 댓글머져 달고 글읽어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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