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명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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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 제9회 법원행정고등고시 합격, 현재 남양주시에서 법무사로 일하며 소설가로도 활동, 법률신문사 간 "법조 50년 야사" 집필, '월요 법창'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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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끝 그리고 시작(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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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그리고시작_8

     

    9

     

    새벽부터 100미터 앞도 잘 분간이 되지 않았던 겨울 황사가 해질 무렵부터 조금씩 동쪽으로 빠져나갔다. 그동안 봄에만 날아왔던 중국의 모래 먼지가 이젠 계절을 가리지 않고 한반도로 향하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고비사막의 건조화는 환경적으로도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새해를 맞은 지 한 달이 훌쩍 넘었음에도 다른 검사실은 밤늦도록 미제 사건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과 보조를 맞추느라고 퇴근도 미루고 기록 전체를 몇 번씩 거듭 읽고 검토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이제 사흘 후면 심은희 사건의 4차 공판이 시작된다.

    며칠 전 심은희의 현 거주지인 친정집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시기적으로도 많이 늦은 신청이었다. 알리바이를 깰 만한 증거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는데 허락이 나지 않았다. 범죄 혐의자의 거처는 증거의 보고인데도 사건 현장에 초점을 맞춰 심은희의 자백에만 의존한 탓이다. 정말 이대로라면 무죄 판결을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공판을 최대한 늦췄으면 싶었다. 황인성의 문제를 해결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다. 아직은 그의 존재를 드러낼 시기가 아니므로 다른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다. 자칫 상황이 전혀 엉뚱한 곳으로 몰릴 위험성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새벽 4시~5시 사이에 맞춰 놓은 피살자의 사망 시간에 이재훈과 심은희를 연결하지 못한다면 이 사건의 관심은 자연 황인성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문제를 마냥 관망하고 있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야 했다. 국방부 이경식 과장이 건네 준 명함의 주인공인 한영채와 연결이 된 것은 이런 상황에서 퍽 다행한 일이었다.

    노출을 꺼리는 사람은 비단 황인성뿐만이 아니었다. 한영채 역시 의도적으로 사람 만나기를 피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현재 황인성의 처지를 좀 과장해서 설명해 주었다. 자칫 최악의 경우로 몰릴 수도 있다는 점을 몇 번이나 강조하고서야 그는 태도를 바꿨고 자진해서 사무실로 나오겠다는 약속을 했다.

    만일 황인성이 허준기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면 두 사람은 친밀한 관계일 수도 있다. 그들에게는 국가 안보라는 업무의 공통점도 있었으므로 이 사건 살인과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파악하고 있는 것은 언제 찍혔는지도 모르는 지문 하나뿐이다. 또한 그것이 꼭 사건 당일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주변 상황을 종합하여 판단해야 한다. 어떤 증거라도 선입견을 품거나 가치를 묵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이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이다. 과연 황인성의 존재로 심은희 사건의 흠결을 보충할 수는 있을까.

    한영채는 약속 시간을 단 1분도 어기지 않고 7시 정각에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우람한 체구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전형적인 무인골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짙은 눈썹과 꽉 다문 입 때문인지 성격이 무척 강인해 보였다. 방에 들어서자 그는 왼손에 들고 있던 흰색 대봉투를 양손으로 안았다. 나는 그를 신문실이 딸려 있는 접견실로 안내했다. 비위 관련 고위직이나 유명 인사를 신문하는 방이었다.

    “뭣 때문에 황인성 씨를 조사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말해 주시겠습니까?”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압박하는 낮고 굵은 음성이었다. 뚜렷한 인상을 더욱 강인하게 받쳐 주는 듯했다. 나는 허준기와 이재훈 사건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한 뒤 리모컨에 찍혀 있는 지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 아직 그 사건이 종결되지 않은 모양이군요. 범인이 바로잡힌 줄 알았는데요?”

    이렇게 상대방의 눈을 바로 바라보고 말을 하는 사람은 분위기를 압도한다는 것을 나는 오랜 수사 경험으로 알고 있다.

    “법정에서 범행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 증거를 보강하고 있습니다.”

    “아니 순순히 자백을 해 놓고 그런 법이 있답니까?”

    표정이나 태도로 봐서 그는 허준기 사건에 상당한 관심이 있는 듯했다.

    “황인성 씨가 왜 그 집에 갔을까요?”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이런 사람에게는 다그치는 것이 효과적일 것 같았다. 가만히 내 얼굴을 바라보며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던 그가 대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A4용지를 엮어 만든 책자였다.

    “전제를 달아 봐야 소용이 없겠지요. 검사님의 양식을 믿고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출을 하진 않았지만 이것은 단장님이 귀환하신 후 대통령에게 탄원하기 위해 직접 손으로 쓰신 진술서입니다. 가능하다면 사건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정도로만 사용하셨으면 좋겠습니다.”

    300매 정도는 실히 됨 직한 두꺼운 책자였다. 마치 비밀 문건을 공개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것을 내 앞으로 밀어 놓으며 한영채는 말을 계속했다. 정색을 한 표정은 더 강한 위압감을 주었다.

    “A320기가 납북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지요. 한민족일보에 폭로성 기사 하나가 실렸습니다.”

    한민족일보? 바로 이재훈의 얼굴과 연결이 되었다. 사진 속의 그는 귀티가 날 만큼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납북된 단장님, 즉 황윤식 씨가 전시 대북 작전을 지휘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기사로 인하여 당시 국방부나 우리 단 본부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었습니다. 결코 노출되어서는 안 될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조직은 유사시를 대비하여 구성된 비밀단체였습니다. 정체를 숨긴 채 매일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실력을 양성하고 있던 우리들의 실체가 그렇게 어이없이 폭로될 줄은 전혀 예기치 못했거든요. 당시 황윤식 단장의 피랍은 대통령 유고에 준하는 위기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항공기가 납북된 지 사흘째 되는 날 항공기의 기장과 부기장 1명, 그리고 승무원 3명이 북한의 중앙방송에 출연하여 자기들은 자진해서 월북했노라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회견은 나도 시청했었다. 그것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물론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항공기가 납치된 것이 아니라 의거 입북이었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자리에서조차 단장님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었습니다. 만일 단장님의 자백이나 신분 노출이 있었다면 북측은 최고 지도자의 신변과 관련된 이 문제를 간첩 사건으로 비화하여 트집을 잡았을 것입니다. 분명히 이때까지는 단장님도 일반 승객과 함께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신문기사가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납북되어 궁지에 몰린 사람의 신분을 그렇게 공개하는 놈들이……. 게다가 그 며칠 뒤에는 우리 단을 사설 단체로 왜곡했습니다. 내가 말주변이 없는 탓에 검사님을 이해시켜 드릴 수 없을 것 같아서 이걸 가지고 왔습니다. 우선 읽은 뒤 다시 말씀을 나누도록 하시지요.”

    그는 식사하고 오겠다면서 일어섰다. 군더더기가 없고 거취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엘리베이터까지 안내한 뒤 창가에 놓인 소파에 앉아 표지를 열었다. 볼펜으로 직접 쓴 수기 형식의 진술서였다. 동산 쪽 창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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