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윤상일
  • 변호사
  • 서울종합법무법인
연락처 : 02-581-0566
이메일 : siyoon@chol.com
홈페이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대로 302 (교대역인앤인오피스빌딩 제2층)
소개 :

이 포스트는 0명이 in+했습니다.

    목록이 없습니다.

    [장편소설] 보이지 않는 제국 (6) 볼트만

    0

    보이지않는제국_6

    신라호텔 스위트룸으로 올라가는 알렉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알렉스는 고속으로 상승하는 엘리베이터의 움직임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예상되는 볼트만의 질책에 대해 답변해야 할 말들을 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이윽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짙은 황금색의 페르시아 융단이 깔린 복도가 나타났다.

    알렉스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스위트룸의 벨을 눌렀다. “컴인” 안으로부터 굵고 낮은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언제나처럼 스위트룸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하긴 맨 꼭대기 층에 있는 이 스위트룸에 올라올 수 있는 사람은 특별히 허가 받은 사람이 아니면 올라오질 못하니 문이 잠겨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웰 컴 알렉스”

    룸 안으로 들어서는 알렉스를 보자마자 그리 크지는 않지만 떡 벌어진 체격의 대머리 사내가 다가와 알렉스를 덥석 껴안고 양쪽 볼에 키스를 한다.하지만 볼트만의 이 같은 환대는 그들이 하는 통상적인 의식일 뿐 알렉스에 대해 특별한 호감의 표시가 아니란 건 알렉스도 익히 아는 터였다. 알렉스도 객지에서 형제라도 만난 듯 볼트만을 포옹하고 같은 의식을 치렀다.

    이제 형식적인 절차는 끝난 셈이다. 볼트만이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로 시간 끄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렉스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짙은 밤색의 이탈리아산 소파에 앉았다. 물론 주빈 석에는 볼트만이 앉고 그의 오른쪽에 알렉스가 선생 앞에 불려 온 학생처럼 두 손을 모으고 앉았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볼트만 이었다.

    “알렉스, 도대체 뭐가 문제기에 그렇게 질질 끌고 있는 거요? 그까짓 로펌 하나 합병하는게 그렇게 어렵소? 우리가 인수자금을 아주 넉넉하게 대준다고 하지 않았소?”

    이미 예상하기는 했지만 막상 처음부터 핵심을 찌르고 나오니 알렉스로서는 여간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다.

    “디렉터 볼트만, 사실 로펌의 합병문제는 일반기업의 합병과는 다릅니다. 로펌의 멤버들은 나름대로 한국 법조계에서 상당한 비중이 있는 인물이라 외국로펌과의 합병에 대해 상당히 신중합니다. 특히 실질적인 오너라고 할 수 있는 최 변호사가 아주 완강하게 버티는 바람에 다른 변호사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알렉스 역시 말을 돌리거나 변명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오? 최 변호사가 끝내 합병에 반대한다면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할 것 아니겠소!”

    “최 변호사는 최강로펌의 창립자의 아들로 현재 시니어파트너일 뿐만 아니라 로펌의 지분도 상당합니다. 또 최 변호사를 따르는 젊은 변호사들도 적지 않고 해서 최 변호사를 배제하고서 최강로펌을 인수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만약 최 변호사를 배제하고 무리하게 인수한다면 결국 최강로펌은 둘로 찢어져 반쪽만 인수하는 꼴이 될 텐데 그건 우리 계획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알렉스는 나름대로의 실무적인 어려움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볼트만이 자신을 한국의 작은 로펌하나 인수 못하는 무능한 변호사로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끔직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 상황에서 다른 좋은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지 알렉스의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오.”

    알렉스는 등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스위트룸의 실내 온도가 다소 더운 것 같기도 하다.

    “현재 최 변호사의 코넬대학 동기생들을 동원해서 최 변호사를 설득하는 중입니다. 최 변호사가 합병에 찬성만 해 준다면 합병로펌의 파트너 자리도 제의하고 있습니다. 또 현실적으로 최강로펌의 재정상태가 취약한 상황이기 때문에 여러 사이드에서 최강로펌의 자금줄을 압박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최 변호사가 명분과 의리를 가지고 버텼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알렉스의 생각으로는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더 필요하겠소?”

    볼트만은 빨리 결론을 맺고 싶어 했다. 아마도 또 다른 사람과 저녁약속이라도 잡아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2-3개월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알렉스는 최대한 짧게 잡아 얘기했다. 물론 최 변호사를 설득하는데 2-3개월 가지고는 어림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2-3개월? 오! 알렉스! 우린 그렇게 한가롭지 않아요.”

    볼트만은 두 팔을 과장되게 벌리며 알렉스를 가엾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장미꽃 문양이 새겨진 시가보관함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어 시가 커터로 끝을 자른 뒤 불을 붙였다.

    도미니카산 시가의 진한 향이 순식간에 방안 가득 퍼졌다. 볼트만은 언제나 도미니카의 다비도프사의 시가만을 피웠다. 도미니카산 시가가 특별히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는 볼트만이 젊은 시절 도미니카를 여행할 때 처음 다비도프사의 시가를 맛보았고 또 바로 그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던 인연 때문이었다. 그 때부터 볼트만은 도미니카산 다비도프사의 시가를 행운의 상징으로 여겼고, 시가의 제왕이라는 하바나의 시가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알렉스, 만약 최강로펌 합병이 여의치 않으면 굳이 최강만을 고집하지 말고 비슷한 규모의 다른 로펌에 대해서도 알아보시오. 한국의 로펌이 다 고만고만한 수준이지 뭐 특별한 거 있겠소? 우리야 한국로펌과 합병해서 한국에 교두보만 확보하면 되는 거니까. 어느 로펌이든지 상관없잖소?”

    볼트만은 시가 연기를 공중으로 천천히 내뿜으며 아까와는 달리 달래는 듯 한 목소리로 알렉스에게 말했다. 합병 대상으로 최강로펌을 점찍고 적극적 추진할 것을 주장한 것은 알렉스였던 것이다.

    “디렉터 볼트만, 제가 최강로펌을 선택한 것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한국의 로펌들은 아직 규모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외형이 비슷하다고 해서 그 실력이나 브랜드 이미지도 그렇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최강은 기업으로 치면 주가보다는 실질적인 기업가치가 높은 로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강은 우리가 합병하기에 적합한 로펌입니다.”

    알렉스는 볼트만이 합병상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하자마자 최강이 합병목적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래요? 알렉스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지금 상하이에서는 한 달 안에 모든 일이 마무리 될 거요. 서울의 상황도 그때까지는 맞춰야 할 거요. 알렉스, 내말 잘 들으시오. 한 달 안에 모든 걸 끝내시오. 만약 그렇게 할 수 없으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시오. 내가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겠소. 아시겠소?”

    볼트만의 상대를 무시하는 듯 한 고압적인 태도에 알렉스는 적이 불쾌해지기 시작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세계적 로펌인 다비드 앤 솔로몬의 한국사무소의 책임자이지만 사실상 그의 운명은 볼트만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볼트만이 말하는 다른 방법이 어떤 것인지 묻지 않았다. 아니 물어볼 수가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다른 방법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은 가지만 그렇다고 캐물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볼트만과의 면담은 20여분 만에 끝났다. 볼트만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다시 한 번 포옹을 나눈 뒤 알렉스는 스위트룸을 나왔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5월의 서울 야경은 환상적이었다. 답답하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부담스러웠던 볼트만과의 면담이 끝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알렉스의 기분은 훨씬 나아져 있었다. 신라호텔 꼭대기 층에서 바라다보는 서울의 야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의 속성에 슬픔 같은 것이 있는 것인가. 야경을 바라보는 알렉스의 가슴에 한 가닥 서늘한 바람 같은 것이 일어난다.


    Comment

    You must be logged in to post a comment.

  • 조로메44호 : 또 새로운 인물등장이네요. 스크롤바가 내려가는게 빠른만큼 다음 내용이 더 기대됩니다^^

  • 그냥9호 : 이렇게 다양한 인물들이 앞으로 어떻게 엮이게 될지… 읽는 속도가 빨라지게 만듭니다.

  •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