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노영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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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변호사가 ‘갑(GAP)’ 청바지만 입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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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펌에 근무하는 어느 후배 변호사는 청바지를 항상 갭(GAP) 상표만 입는다고 한다. 그 이유가 걸작이다. 평생 변호사를 하면서 ‘갑(甲)’이 아닌 ‘을(乙)’로 살다 보니 하도 한이 맺혀서 자기도 한 번 ‘갑’이 되고 싶은 마음에 갑(GAP) 청바지만 입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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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라면 상무’ ‘빵 회장’ ‘욕설우유’ 등의 신조어까지 등장하면서 이른바 ‘갑을(甲乙) 문화’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개인의 신상 털기 차원을 넘어 해당 기업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져 당사자는 해임됐고, 제빵회사는 폐업했으며, 우유 제조회사는 경영진이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갑’ ‘을’이란 계약서에서 당사자의 명칭을 반복 기재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사용하던 용어였다. 그런데 이제 ‘갑을 관계’란 경제적 강자가 계약 과정에서 자신의 지위를 남용해 약자에게 부당하게 피해를 주고 있는 현상을 의미하게 됐고,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것이 논의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부당 거래 행위가 그간 계속되어 왔고, 그것이 별로 개선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계약 체결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강자의 횡포를 방지해야 함은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잘못된 관행이나 기업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에 잘못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갑을 관계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선 경제구조가 복잡해지면서 누구든 일면 ‘갑’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을’이 된다는 점은 상식이다. 라면 상무도 감독 행정청에 가면 동생뻘 되는 사무관의 처분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월급쟁이에 불과하다. 폐업한 제빵회사는 재벌기업으로부터 납품처를 지켜야 하는 중소기업일 것이다. 또 욕설 우유 사건의 주인공 역시 밀어내기를 해서라도 실적을 올려야만 살아남는 고달픈 영업사원이었을 터다.

    GAP 청바지만 입는 변호사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남들이야 전관예우 운운하면서 손쉽게 돈을 버는 특권층인 것처럼 말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른 로펌들과 치열한 사건 유치 경쟁을 벌여야 한다. 이렇다 보니 관공서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 담당자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상전이다. 격무로 새벽 퇴근하는 경우가 많고 주말 근무를 밥 먹듯 해야 한다. 대형 로펌 소속 변호사라고 하면 최고급 호텔 식당에서 값비싼 와인을 즐기는 줄 알지만 시간에 쫓겨 컵라면이나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다반사다.

    그러니 최근의 갑을 논란을 보면서 좀 더 구체적인 사실관계가 궁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과연 항공사는 모든 고객들에게 요금에 따른 ‘공정 형평한 서비스’를 제공해 왔는지, 왜 항상 특급 호텔의 정문 바로 앞에 주차하는 차량의 소유주는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인지, 우유의 생산 및 판매 과정이 어떻길래 제조회사와 대리점의 관계가 이토록 악화됐는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별로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따라서 갑을 논란은 너무나 사건을 단순화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게 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불문곡직 한쪽을 거악으로 매도하고, 다른 쪽은 한없이 불쌍하고 무조건 보호돼야 하는 존재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러한 시각은 사실도 아니려니와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근래 언론들이 모두 한목소리로 갑의 횡포를 성토하는 것은 사회 다수의 목소리에 무책임하게 동조, 영합하는 비겁함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느 분야에서건 개혁이란 현실의 정확한 분석 위에 추진돼야 한다. 명분에만 집착한 섣부른 개혁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무고한 희생만을 강요한다. 그동안의 너무나 많은 개혁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어찌 그뿐이랴. ‘갑(甲)’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을(乙)’인 존재도 많다. 며칠 전 그날따라 오후 회의가 길어져 저녁도 거른 채 학교에서 야간 강의를 마치고 귀가하게 되었다. 마누라에게 모처럼 라면 한 그릇 끓여 달라고 했더니 금세 바가지가 시작된다. “지금 이 늦은 시간까지 밥상 차리고 설거지해야 하는 나는 평생 퇴근시간 없는 을 중의 을 ‘수퍼 을’이야.(?)”

    “여보야. 수퍼 을이란 그런 게 아니고, 형식적으로는 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갑보다 우월적 지위를 누리는 사람을 의미할 거야. 당신이 수퍼 을이지. 나는 갑이고.”

    수퍼 을 사모님 모시고 사는 이 땅의 수많은 갑 가장들을 위해 건배.

     

    * 이 글은 중앙선데이 오피니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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