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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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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대표)

    10여 년 전에 가 본 호암아트홀의 전시회에서 그림 하나가 눈에 띄었다. 화폭에는 소나무 네 그루가 집 한 채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상하게 가슴 시리도록 뻥 뚫린 구멍 모양의 창을 지닌 하얀 집. 다 비워냈다는 듯 그렇게 망연히 서서, 시선과 반대로 창을 낸 채 집은 이미 원근법을 잃어 뒤로 갈수록 커진다. 세한도(歲寒圖). 엄혹한 시절의 차갑고 차가운 겨울을 보내야 했던 이의 내면을 그려낸 풍경이었다. 날 추워져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신 공자님 말씀이 긴 화발() 속에 해서체로 담겨 있었다. 그 다음의 제영(題詠)은 청나라 사람들이 붙인 것이라고 했다.

    유안진의 시 ‘세한도 가는 길’은 그 무렵 추사의 일월을 이렇게 그린다. 서리 덮힌 기러기 죽지로/그믐밤을 떠돌던 방황도/오십령 고개부터는/추사체로 뻗친 길이다/천명이 일러주는 세한행 그 길이다/누구의 눈물로도 녹지 않는 얼음장길을/닳고 터진 알발로/뜨겁게 녹여 가라신다/매웁고도 아린 향기 자오록한 꽃진 흘려서/자욱자국 붉게붉게 뒤따르게 하라신다.

    시린 손 불어보지 못한 자들이 더운 밥 먹고 내는 포시라운 소리로는 그려내지 못할 적인(謫人). 그가 적소에서 세상 인심의 박절함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것은, 영락해도 그를 기억해 주었던 지인 덕이었을 것이다. 잘난 양반이 아닌, 중인 이상적이었다. 그가 보내준 책 한 질이 고마워서 추사는 세한도를 그려 보냈다.

    봉은사에는 ‘板殿’(판전)이라고 쓴 현판 하나가 달려 있다. 삐뚤빼뚤 동자체(童子體)다. 말년에 머물던 추사가 세상 버리기 며칠 전에 쓴 것이다. 실패해서 위대한, 위대하였으므로 실패한 그 인물은 결국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갔나 보다.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어린아이가 되어, 그렇게 실패하였고 그렇게 위대하였다.

    권문에서 떵떵거리고 세가에서 호령하다가도, 사람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그 세한의 날들을 견디게 해 주는 것은 변치 않는 마음들뿐이다. 가난한 마음으로, 나는 다짐한다. 변치 말자. 그런데…. 두렵다. 인간의 항상(恒常)함은 가장 어려운 일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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